제4편 나의 초등학교
사 학년인가 삼 학년인가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모든 학급친구들에게 하나의 미션을 제안하셨다. 다른 학년을 맡으셨던 담임 선생님은 이름을 잊었어도 지금도 그분의 존함을 기억한다. ‘조중선 담임 선생님’ 얼굴이 참 예쁘고 성격이 차분하셨던 여자 선생님이셨다. 정확한 연유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뜬금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이성 친구 이름을 쪽지에 적어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어린 마음이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누구를 적지...’
내가 사는 마을은 里 단위에 속한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이 들판 저 들판 다 합쳐서 7개 부락으로 각각의 동네마다 제 이름이 있었지만 이장님은 구분하기 좋게 1반부터 7반까지 번호를 부여하고 동네마다 ‘반장’이란 직함으로 한 사람씩 지정해 마을의 대소사를 이끌어 가셨다. 그중에서 우리 집은 6반이며 열두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열두 가구 중에서 같은 반 동급생이 다섯 명이나 되었다. 여자 셋 남자 둘인데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함께 모여 노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어린 초등학생이라 해도 집이라고 돌아오면 부모님 일손을 돕고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니 특별한 날 아니면 한 동네에 살면서도 얼굴 한 번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그중 남자 동급생은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 친군 성격이 나완 정 반대다 활달하고 대범했다. 좁은 동네에서 놀기보단 동급생들이 많은 이웃 마을로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에 비해 난 내성적이며 섬세하여 밖으로 나다니는 걸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완 어려서부터 별로 친하질 않았다. 대신 그 친구의 남동생과는 아주 각별하게 지냈다.
당시만 해도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유교적 가풍이 희미하게나마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터라 한 동네에서 뛰어놀면서도 남녀가 따로 무리 지어 놀았다. 여자애들은 주로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 또는 소꿉놀이를 하였다. 이런 놀인 큰 공간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놀 수 있는 것들이라 남의 집 처마 밑이나 뉘 집 작은 마당에서 놀았다. 반면에 남자애들은 온 동네를 다 들쑤시고 다녀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다못해 가을걷이가 끝나면 텅 빈 논바닥에서 축구를 하거나 자치기를 하고 놀았을 정도다. 어디 그뿐이랴 뒷동산에 올라가 전쟁놀이를 일삼았고 남의 집 봉분이 반질반질 닳도록 깃발 꼽기 놀이를 하곤 하였다. 그래도 동네 어르신들이 뭐라고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원래 그러려니 하였던 것 같다.
집에서라면 여자애들도 그들 나름 바쁘게 지냈다. 빨래와 집안청소는 기본이고 들일 나갔다 늦게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위해 때맞춰 밥 짓고 상차림까지 담당했다. 거기다가 철없는 어린 동생이라도 있으면 업고 안고 달래줘야 했다. 초등학교 삼사학년에 불과한 어린애지만 남녀 없이 말귀 알아들으면 어른들이 하던 일을 나누어져야 했다. 새내들은 날마다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 땔감을 가져오거나 들판이나 개천가로 가서 소꼴을 베어 와야 했다. 그러니 어디 어리광 같은 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래도 어린아이라서 가끔씩 억지스러운 떼를 써 보지만 돌아오는 건 부지깽이로 등짝을 두들겨 맞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부모님들은 왜 그렇게 자식들에 대한 애정 표현에 서툴렀는지 모르겠다. 물론 속으로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건 잘 안다. 허지만 겨우 열 살 안팎의 어린아이가 부모 마음까지 알아채지는 못하였다. 어쩌면 유교적 체면문화가 자식들을 향한 애정표현까지 하나의 남사스러운 일로 여기진 않았나 싶다. 게다가 집집마다 낳은 자식들이 어디 한둘인가 많게는 일곱여덟 명씩을 낳아 기르던 시대였다. 종일 일에 찌들어 살면서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고 보니 그 많은 자식새끼들을 향해 일일이 자상한 마음을 갖고 돌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 하지 않던가. 살기가 어려울수록 부모 자식 간에 사랑보단 연민이 더 크게 작동하는 법이다. 어른이 되어 돌이켜 보면 그때 부모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푸근한 마음으로 보듬어주진 못할망정 걸핏하면 거친 매질을 하거나 집에서 쫓아내기 일쑤였다. 그게 다 자식들을 엄하게 가르쳐야 말 잘 듣고 바른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해도 철도 들기 전에 어린 자식들의 가슴속엔 크고 작은 상처들로 멍들어갔다.
“니 아부지 안 와서 술독이 마르질 않아 요즘 뭐가 그리 바쁘시다냐” 신작로에 있는 유일한 구멍가게를 지날 때면 주인집 아저씨가 날 쳐다보며 하시는 말씀이다. 얼마나 창피하던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사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의 아버진 술을 한 번 입에 댔다 하면 몇 날 며칠이고 당신 몸이 쓰러져야 멈추었다. 그럼에도 동네 주막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드셔도 집으론 꼬박꼬박 돌아오셨다. 그러나 제 몸 하나 가눌 기력도 없는 양반이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종종 사고를 치는 게 문제였다.
어느 엄동설한에 하도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오시질 않자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주막으로 질러가는 논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저만치 앞 허연 눈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걸 보고 엄마는 이 밤중에 무슨 산 짐승이라도 내려온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건 사람이 분명했다. 그때 엄만 그 사람이 아버지란 걸 직감하시고 달려갔다. 경사진 논은 높고 낮은 논두렁으로 이루어진다. 쌓인 눈이 바람에 실려 가다가 높은 논둑에 부딪혀 쌓이게 마련이다. 아버지께서 하필 높은 논두렁 구석으로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제 몸 하나 가눌 길 없는 양반이 좁은 길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뎌 빠진 게 분명했다. 손에 잡히는 건 푹푹 빠지는 하얀 눈뿐인지라 잡고 지탱할 곳이 없으니 그저 버둥거릴 뿐이었다. 때마침 엄마와 내가 그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힘을 다해 눈구덩이에서 아버질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아버진 눈 속에서 숨이 막혀 비명횡사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도 어지간히 당황하셨는지 얼굴이 벌개가지곤 두 눈을 꿈적거리며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셨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자 엄마의 폭풍 질타가 이어졌다. 평상시엔 상상도 못 할 질펀한 욕을 아버지를 향해 무한 반복으로 쏟아붓고 계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진 가던 길 가야 한다며 비틀걸음으로 집을 향해 가셨다. 이런 우리 아버지와 아주 죽이 찰떡처럼 맞는 분이 같은 동네에 사셨다. 하필 그분의 딸이 나와 같은 반 동급생이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그 애는 반에서 늘 일 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난 겨우 중간을 모면한 성적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런 애를 가까이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언제부턴가 그 애를 멀리서 보기라도 하면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게다가 한 가지 우스운 일은 술 좋아하는 그 애의 아버지가 우리 집을 하루가 멀다 하고 아침마다 들리셨다. 그러면 아버진 해장술을 차려오라 일렀고 두 분은 작은 겸상을 사이에 두고 주거니 받거니 술을 드셨다. 그 애의 아버진 술잔을 기울이시다가 나를 보면 항상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이고 우리 사윗감 왔네” 하시며 빨간 코를 연신 어루만지며 헤벌쭉 웃으셨다. 난 그 소리가 너무 창피하였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진 않았다. 어쩌다 우리 아버지가 그분의 딸을 만나면 “아이고 우리 며느리” 하셨다. 우리 둘 사인 어른들의 짓궂은 장난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미래의 부부가 될 사이였다.
그 애 집은 우리 집에서 한 삼사백 미터 거리로 빤히 보이지만 그 사이는 좁은 협곡이 가로막혀 있다. 같은 동네에 살지만 그 집엘 가려면 협곡을 빙 돌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평상시에도 그 애와 난 서로 얼굴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집은 우리 집 보다 높은 지형에 자리 잡아서 그 애가 자는 방을 보려면 얼굴을 위로 살짝 젖히고 바라봐야 했다. 그 애의 방은 늘 밤이 늦도록 밀감 빛 백열등이 켜져 있었다. 어쩌다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마당에 서서 볼일을 볼 때면 난 의례히 그 애의 불 켜진 방을 올려다봤다. 그러면서 속으로 ‘저 기집 애는 잠도 없나’ 하였다.
선생님의 미션에 학급 친구들이 일순간 소리를 질러댔다. 하나 같이 창피하게 왜 그런 걸 하냐는 식이었다. 난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그저 돌아가는 동태를 지켜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쪽지 한 장씩을 나누어 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 친구 이름을 적어 내라고 독촉을 하셨다. 아이들도 처음엔 달갑지 않게 생각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술 좋아하시는 그분의 딸 이름 석 자를 쓰곤 쪽지를 다시 접었다. 잠시 후 선생님은 뒤에서부터 앞으로 쪽지를 전달하라고 하였다. 아이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남이 제출한 쪽지를 들춰 보려고 안달이 났다. 어찌어찌해 쪽지는 선생님의 교탁에 모두 도착하였다. 여기까진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짓궂게도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쪽지를 펼쳐 보이면서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공개적으로 쪽지의 비밀스러운 이름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아무개는 누구 아무개는 누구... 그러자 아이들이 함성을 질러댔다. “우우우우”, “우하하하” 그러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정일권은 아무개”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애들은 또“우하하하”하고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애 차례가 되었다. “아무개는 정일권” “와하하하” 발표 과정에서 서로 생각하는 상대가 같은 이름인 경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우린 서로가 생각하는 이름이 같았다. 이 사건 뒤로 애들은 우릴 향해 놀려대기 시작했다. “일권이는 누구하고 연애한데요 연애한데요 얼라이껄라리 얼라이껄라리 연애한데요 연애한데요” 처음엔 창피하고 민망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며칠 지나자 언제 그런 일 있었느냐는 식으로 조용해졌다. 그러나 내 마음속은 그 뒤로 그녀에 대한 생각이 더욱 짙어져만 갔다.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그 애를 멀리서라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그 애가 나를 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자 입은 옷을 추스르고 더러워진 발을 얼른 물에 씻곤 하였다. 그 애가 군청 소재지가 있는 여자 중학교로 그것도 기숙사로 들어가 버리자 일 년에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워졌다. 나의 상상 놀음도 점점 시들해져 버렸다. 처음 며칠은 그 애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한 동안 심란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그러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그 애를 생각하는 마음은 점점 사그라져서 나중엔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