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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와 화산; 균열과 폭발
나는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22계열, 도자기와 화산(Forcelaine et volcan)”이란 제목을 붙인 것 대해서 의아해 했다. 철학사에서 주목하지 않은 용어의 등장이다. 물론 들뢰즈는 사실들(faits 만들어진 것들)에 관한 현상 또는 재현의 철학적 사고의 시대가 지나가고, 상태들(etats) 또는 흐름과 과정들로서 사건(evenement)을 철학적 삶앎함의 대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이 책이 무의미(농상스)에서 상스(의미)를 구해 내는 것이 아닌가? 샛별과 개밥바라기를 이야기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 한답시고 사랑의 여신이 생산의 여신이고 하면서 비너스(금성)를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미학적 문학가들도 있다. 또한 무인도에서 지낸 로빈슨 크로스의 하인 프라이데이(금요일)를 이야기하는데 비해, 미셀 투르니에는 하인처럼 일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 매일 놀아야 한다면서 디망쉬(일요일)바꾸어 자기 소설의 고교생을 위한 요약본을 썼다. 우리 이야기로는 샛별 일터로 나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있고, 개밥바리가 하루 종일 일해도 가족들의 저녁밥 해결하기 어려우며, 겨우 자기 입에 풀칠하는 농상스도 있다. 왜 농상스냐고. 지금도 이런 말을 한다: 요즘 끼니 걱정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일하기 싫어서 이지. 산업사회이래로 노동하는 인구가 줄어들고, 규소시대에는 더욱더 줄어든다. 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산업사회를 개조하면서,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산업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바꾸려는 의도에서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라는 구호를 내걸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맑스도 나중에 이를 인용했으며, 이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선 도자기에 관해서....
그리스 문화에서 과거의 장면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도자기의 파편들을 이어붙여놓은 역사적 재료들을 뺄 수가 없다. 물론 도자기만큼이나 중요한 건축물들과 조각상들도 있고 벽화들도 있다. 그러나 도자기에는 그리스인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어쩌면 고착적 조각과 건축과 달리 생동감 있는 활동의 모습에서 움직임을 포착하여 옮겨 놓아, 마치 살아 움직이는 한 순간인 것과 같다.
도자기의 많은 그림들이 그리스 산화에서 온 소재라고 하지만 그림들에서 도구와 식물들, 그리고 옷차림과 삶의 양식들 등에서, 그리고 그들이 다루었던 동물들과 가구들은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파편들에서 남겨진 문자들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형태의 기호들에 관하여 여러 이야기를 추정할 수 있고, 전승된 이야기와 더불어 대입하기도 한다. 이 도자기의 파편들이 어쩌면 문자로 남아있는 파피루스의 단어와 문장들 보다 적지 않은 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승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유물과 유적의 작은 한 부분도 단어의 용어 이상으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구체적 삶과의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고, 어떤 방식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어 갔으며 또한 전수했던가? 문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길 수 있다. 예술사에서나 고고학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도자기 파편 이상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조금만 그리스 문화의 전승의 문자들을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스 문화 속에서 흩어져 발견된 도자기가 그리스 문화의 전체는 아니라도, 적어도 역사의 서술이나 철학적 추론의 경우와 달리,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준다. 그 삶의 과정을 도자기들의 작품연대와 이야기를 추정하면, 문자와 문장화된 이야기보다 더 분명한 그 시대의 삶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집트의 왕가의 무덤벽화에서 역사를 보아왔지만, 마치 아날학파가 한 것처럼, 왕실 주변의 관료들의 무덤과 평민들의 무덤에서 나온 벽화와 파피루스에서는 보다 많은 정보의 양을 넘어서, 말로 할 수 없는 삶의 세세한 이야기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경우가 있듯이, 그리스 조각은 인간의 자연(진솔한 면)을 드러내주고 있다. 왜냐하면 건축과 조각상이 국가적 정체와 제도적 사실들이라면, 이 도자기는 평민과 노예들의 삶, 즉 구체적 인간들의 삶을 보여주기 사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에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주위의 조각상들을 올림픽이든 어떤 경기에 우승한 자들의 것이라고 하고, 제작자들의 이름들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조각가들이(소크라테스도 석수장이이다) 시간이 걸려서도 대리석을 조각했다. 그런데 도자기로 만든 것은 실생활 용품이기도 하지만 장식품의 일부분으로도 쓰였던 것이다. 가정의 장식은 파르테논의 장식과 다른 이야기를 무수히 많이 간직하고 있다. 신라의 남산에 있는 수많은 민불(民佛)이 신라인의 전설을 전하고, 전국 산간에 곳곳의 작은 부조들이 삶의 양식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정용 도자기가 만이 아니라 묘비 도자기도 있다. 아테네가 멸망하고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원정에서 죽고 난 뒤에, 북아프리카의 통치자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었다. 그가 파라오가 되면서 통치를 위한 조언자들의 3부류가 있었다. 마치 3정승처럼 말이다. 하나는 스토아학파의 제논의 후예들이고, 다른 하나는 소요학파(아리스토텔레스와 히포크라테스학파)의 생물 의학 계통을 이어받은 테오프라테스 제자 계열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이집트전통의 신관들이라고 한다. 그리스인 파라오(참주)는 이집트 신관에게는 나일강의 범람에 관한 책력(천문학)과 측정학(기하학)의 문제를 상의했을 것이고, 인간사와 자연사에서 삶의 제반학문은 소요학파의 계열과 의학에 의존했을 것이고, 그리고 소위 말하는 철학적 생성과 변화에 관한 한, 우주와 인간의 문제는 스토아를 참조했다고 한다. 초기에서 스토아학파가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의 총애들 받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테네에 살고 있었던 제논이 세상을 떴다.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는 아테네에게 사절을 보내어 제논을 장례를 융숭하게 치르라고 전했다. 그런데 설에 의하면서 아테네인들은, 알렉산드리아 왕조의 간섭도 싫지만 이방인 출신인 제논에 대해 성대한 제례를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를 돕던 스토아학자들의 청원이 강하여,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참주)는 아테네에게 제논의 무덤을 잘 예우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이방인(키티움 출신)을 예우하라는 것에 대해, 아테네인들은 떫지만, 속국인 주제에 어쩔 수 없이 좋게 무덤을 만들어야 했다. 그 무덤의 비석을 대리석으로 하지 않고, 세라믹(도자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설에 의하면, 도자기 비석은 우선 보기 좋고 화려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균열이 나고, 깨어져서 흩어질 것이라고 여기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구도 깊이 들여다보면 이중적이라 한다. 찬양하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술어가 들어있다고 한다. 아네테인과 제논 사이에 철학적 또는 인종적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사물들에서 균열이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깨어부수어야 깨지는 대리석이 아니라 세월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도자기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테네인들이 마케도니아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역사상으로 이 당시에는 아테네가 플라톤이래로 학문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들뢰즈가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균열을 이야기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가 균열을 이야기하는 측면은, 우선은 도덕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언어와 판단이 중욧하다기보다, 사건의 단순 “찰나”와 이어지는 “순간”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찰나와 순간의 구별은 벩송이 추억들과 기억을 공간화와 달리 이야기하기 위해서 등장하였다.
도자기의 균열은 역사 속에서 과거의 사실들이 쪼개지고 많은 부분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도 하고, 그 부분들을 모은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당대의 현존)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이점에서 들뢰즈와 벩송이 같은데, 과거의 추억들을 끌어 모아 조합한다고 해서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원자론자 비판, 관념연합론 비판) – 도자기의 균열이, 현실에서 현존의 사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들뢰즈는 말하고 싶어한다. 그 균열에서, 조각들을 맞추는 것이 역사가라고? 그 사이의 빈틈을 끼어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소설(새소식, 단편)이라고? 인식에서 이 사이라는 빈틈은 하늘과 땅만치 간격이 있기도 하고, 천지가 붙어있기도 하다? 이 이중성을 들뢰즈가 드러내며, 철학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단편소설(la nouvelle)도 철학의 한 서술, 또는 문장들의 집합이다. 철학자의 문장만이 철학이 아니고, 서술도, 그리고 시인과 작가들의 발언도 철학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한 화폭이라고 보았던(그림이론) 비트겐슈타인은 도자기 그림 정도의 짜맞추기 서술을 이야기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균열을 왜 생겼으며, 그 조각과 조각 사이에(동양화의 빈 공간처럼)에는 이야기들이 없었을까? 그 사건과 사건 사이에(윤석열과 김건희 사이에) 이어진 연결의 경계선보다 그 선상에서 무한히 많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그리고 그 깊이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한 것은 소설가 보르헤스였다. 왜 그가 보르헤스를 끌어들였겠는가?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가 찰나로서 있었다는 것인데, 그 찰나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감출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는데, 사람들은 그 많은 찰나들의 이야기를 조각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부끄럽고 참담한 찰나를 없애고 아름답고 우아한 이야기를 하는 미학자들의 소설이야기를 철학이라고 하기에는 삶은 너무나 다양하고, 인생의 과정이란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금이가고 깨어지는 과정에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금이가고 깨어지는 과정에 관하여, “의미의 논리” 22장에서 균열의 이야기에는 피츠제럴를 예로 들고 있다. 오랜 기간의 삶은 도자기처럼 깨어지기 쉬운 상태이라는 것을 단편으로 나타냈다고 한다. 부서지기 쉬운, 즉 삶의 균열이 나기 쉬운 삶의 상태를 피츠제럴드는 단편소설에 잘 드러냈다는 것이다. 삶이 균열이 있었고 있으며, 더 나아가 누구나 심각한 균열로서 세상을 뜬다. 누구나 세상을 뜬다. 필연이다.
들뢰즈는 이 균열의 찰나에서 타인들이 관여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균열 그것은 파열과 같고 또는 화산 폭발과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 않을까? 왜 그는 균열의 상징과 화산의 폭발을 붙여 놓았을까?
화산에 관하여
화산 폭발, 이것은 홍수 설화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기록된 문헌이나 이야기상으로 홍수 설화만큼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했다. 활화산으로 계속되는 지중해의 몰타 섬의 이야기는 문명사든 문화사든 거의 중요하게 전승되지 않고, 문학적 소재로서 악의 소굴, 지옥을 설명하는 도구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도시를 삼키고, 전지구적으로 피해를 입힌 화산은 전혀 다른 상상을 남겼다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윤회와 순환은 구체적 실증자료는 홍수가 아니었을 것이고, 어째거나 지구의 대파국으로 그 경험의 전승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보태어 지진활동의 전승이 있을 것이다. 지진활동의 이야기는 전승되어 세상사에 오르내리기 부족했다.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파멸은 지진이라고 하지만 그 기록은 불문명하고, 유적들이 바다 속에 있다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기록의 불완정은 AI가 보존해도 거의 불완전하다.
균열은 그나마 이어볼 노력이라고 하지만, 파멸은 앞과 뒤가 이어지지도 않고 이어질 수도 없다. 이 파멸에서 지나간 것에 대해 전승의 문자로 남아있으면 좋겠는데, 화산재로 싸그리 덮어져 버렸다. 그러면 어떻게 전승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그 이야기는 아무리 잘 서술한다고 해도, 그저 ‘끝이야’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 파멸은 악이다. 모든 것을 무로 또는 아무 것도 살아있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특별하고 우연의 찰나를 더 이상 말하기도 떠올리기도 싫지만, 엄연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그 지역밖에 사는 살아남은 자가 선일까? 이와는 전혀 다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런 사건이 터졌다고 말하면서, 우리도 조심하자고 비극작품을 쓰면서 상기시키는 일로, 그러니까 유일신을 믿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도덕적으로 인민에게 선하게 살도록 교육의 효과였을까?
파멸은 균열과 다르다. 그럼에도 (종교적으로) 한방에 가는 수 있다는 겁주기(위협과 공포)의 조장의 기술일까? 또는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자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에 돕고 살자고 이야기할까? 많은 세월을 경과하면서 파멸에 대비해서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파멸이 나에게 또는 지금 여기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삶에서 사적 소유의 조장자들은 겁주기 하는 자들이지, 상부상조하는 자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세월 지나나 보니 여전히 마찬가지야라고 한다. 파멸은 없다. 그런데 파멸은 전쟁에서야 라고 한다.
자연의 파멸, 화산폭발, 지진, 해일, (요즘에는 전지구 기후변화) 등은 세월에 비해 거의 일어나지 않거나 어떤 부분에서 이다. 그럼에도 과거에는 삶의 터전에서 일어났고, 회복할 수 없는 터전으로 남았다. 크레타 문명의 멸망이라는 그 섬의 지진(화산), 이집트의 테베의 화산(전1600년), 베스비오스 화산 등은 문명의 멸망에서 지역의 멸망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다른 문명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이집트 테베의 화산의 현상은 전지구적이었고, 중국도 하늘에 태양이 열 개였다고 전설에 전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파국은 오랜 시간이 지나 도덕적으로 타락했을 때 오는 것을 여긴다.
세상사는 균열도 있고 파국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뢰즈는 하고 싶었다. 이런 균열과 파멸이 도덕에 영향을 끼쳤던가?
균열은 도덕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파국은 도덕에 관계가 아니라 종교에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균열이든 파국이든 이런 외적 사건(사실)들에 의해서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것인가? 들뢰즈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우선 자연에 대한 지식이 없을 경우에 자연을 숭배로 삼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리스시대 쯤에 와서 자연의 변화를 안다고 해서 삶의 태도를 바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연의 변화는 전반적 규칙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역과 시간에 따는 변화는 인간이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균열과 파국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대처하는 문제, 즉 사건의 문제에 대한 용어로 등장하게, 즉 주변의 일들의 급변과 마루(변곡점)의 효과로서 등장하게 된다. 급변이 파국을 맞이하게 하는가하면, 변곡점은 관련있는 자들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다음을 측정하여 목표를 정하고, 다시 말하면 다음의 규준(새코드화)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국은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다가오고, 사람들은 새로운 순환으로 이어지는 한 국면으로 여긴다. 이 새로운 순환은 과거의 삶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성에 대한 이질적 반복(혁명도 마찬가지), 또는 개인에게서 정체성의 이전이다(학습은 나날이 새롭게 한다). 이런 이질적 반복과 이전은 사건과 상태를 바꾸고 터전의 재조성을 한다. 이점에서 탈영토화라고 할 수 있다. 파국은 갑자기 온다. 마치 기적처럼 또는 정복자처럼.
화산의 활동에 대해 인간의 극한적 노동(노력)의 의미가 있어왔다. 여러 전승에 의하면, 제련이나 화학적 정제 방식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용암이 분출하는 곳에 얻을 수 있는 유황과 금속들이 있었고, 돌들로서 수정과 옥의 원재료들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엠페도클레스 자연에서 최초의 형성물을 연구하는 방식에서 망치를 들고 용암이 분출한 에트나 화산 주위를 배회했을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그는 갑자기 솟은 용암에 휩쓸려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신관들은, 탐구심 강한 철학자를 신이 되기 위해 에트나 화산에 투신했으나 신발이 남아 있어서 신이 될 수 없었다고 설화를 남겼다. 이 자들은 자연 탐구에 대한 관점에 또는 자연의 자기 생성을 부정하는 자들로서, 신에 의탁하는 여닐곱 꼬마들과 같은 망상에 젖은 자들이다. 들뢰즈가 왜 엠페도클레스 망치의 철학자는 표현을 썼을까? - 니체를 끌어들일 수단은 아니었을 것이고, 게다가 붉은 기들에게 망치를 미화하기 위한 것도 아닐 것이다. - 우리들과 같이 노동하면서 살아가는 탐구자의 모습에서, 진솔한 삶과 앎의 연결하는 함(행위)이 등장하며, 여기서 망치를 든 철학자 모습의 이야기(농상스)가 의미(상스) 깊은 이야기로 등장한 것이다. 신앙자들이 그를 농상스로 만든 것을, 들뢰즈는 그를 상스로 만든 것이다. 독사에 대한 파라독스를 넘어서.
인간이 자연에서 지구전체의 순환의 방식을 몰랐던 시절에, 화산은 순환의 한방식으로 여겼을 수 있다. 이런 파국과 같은 파멸과 소멸은 있을 것 같은 개연성이지만, 한 순간이 삶이 사라지고(벼락도 있다), 삶의 한계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파국이라는 것이, 세상을 뜬다는 것이 주변에서 볼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전쟁에서 죽음보다 더 다반사일 수도 있다. 기적과 같은 소멸 또는 파괴, 그것은 자연의 아자르(우발성)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이 현재이며 지속하는 순간, 깨지기 쉬운 순간이다. 이 현재-순간이 기적(또는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과 종잇장 차이로서 소멸(죽음)과 붕괴는, 한 사건의 양면성, 즉 이중화 작업과 같다. 은총이니 기적이니 하는 용어로써 신 또는 자연으로 말할 수 도 있으나, 잘 생각해보면 하늘과 땅의 이중성이 아니라 현재의 이중성이라고 본 것이 퀴니코스-스토아의 시간관이다. 공간처럼 시간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공간은 시각에 의해 사물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지만, 시간은 시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시간은, 현재의 흐름에서 찰나로서 바꿀 수 없는 것이 영원(아이온)이고, 자연이든 자아든 자기를 바꿔가면서도 순간들을 이어가는 것이 시간(크로노스)이다. 이리 생각하였기에 퀴니코스-스토아는 플라톤을 전복할 수 있었다. 전복은 언어문제를 넘어서 형이상학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전복이 있다. 하늘의 이데아가 아니라 땅의 찰나이며, 땅의 질료라기보다 움직이고 변하고 있는 자연(인간의 자연, 본성이 아니다)이 순간이며 시간이 된다. 그래서 시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느끼고, 지각하면서 종합되는 것이다. 아마도 플로티노스가 플라톤의 시간의 단위를 신에이데스라고 보았다면, 퀴니코스 스토아의 시간은 신아이스테시스라고 했을 것이고, 벩송은 이런 이야기를 강의록에 남겼다. 이 강의록을 읽지 않은 들뢰즈가 영원과 시간의 구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방식(플라톤과 스토아)을 제기하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파국, 파멸. 신앙자들이 말하는 최후의 심판이후 새로운 창조가 무엇인가에 대해, 여전히 신이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고 하는 어린애 놀이처럼, 흩어놓았다가 다시 만드는 작업처럼 여길 수도 있다. 이런 사고 얼마나 편한가! 마치 원자들을 흩어 놓았다가 다시 레고 놀이하듯이 끼워 맟추면 된다는 발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화산의 폭발은 전혀 다른 파국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느껴 보았을 것이고, 전승의 이야기로 파국 다음은 무엇이었던가? 삶의 터전과 앎의 전승에서 함의 방식을 달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키니코스-스토아가 말하고 싶은 것은 파국을 맞이해서 다시 하자고 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다시 다른 방법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다. 지배 없는 평등, 코스모폴리탄(국가없는 세계 시민)과 자유를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하자는 것이다.
퀴니코스-스토아의 견해를 비하시키고, 비신앙으로, 무신앙으로 악마화하고, 무의미하고 무지로 허무주의로 만들고, 게다가 빨갱이로 몰았던 것이 신앙자들의 술책이고 치졸한 탐만치였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자가 들뢰즈이다. 그는 균열과 파국(최후의 심판)이란 용어 대신에 “도자기와 화산”이라는 화두를 끌어낸 것이다. 선문답의 이야기는 철학사 구비 구비에서 중국의 선승들의 이야기보다 더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런데 신앙자들, 네오스콜라주의까지도 그 무궁무진 이야기를 농상스로 몰아서 비하시키고 무화시키고 악마화하기에 바빴다. 20세기 후반에 이런 방식의 겁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농상스가 이중화의 상스를 생산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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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과 폭발 – 삶에서 현실태로서 살아가는 과정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 인지 모른다. 저항과 혁명도 마찬가지이다. 균열을 언제나 가까이 있지만 소위 말하는 봉합으로 살아간다. 폭발은 언제나 여기 내부에 있으면서 현상에서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자연의 필연에서 노력과 내공에 의해, 초기 스토아의 용어 오랜 노력(포노스, πόνος)과 내공(토노스 τόνος)에 의해, 삶의 함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재적 실재성의 솟아남, 분출, 발현, 생성 즉 폭발과 같은 순간일 것이다. 이 순간은 찰나가 아니다. 순간은 짧지만 지속하고는 것이며, 기억의 과정에서 수렴의 작동(l’acte)이며, 권능의 발현이다. 지속하는 삶은 찰나들의 앎들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순간의 함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진솔한 장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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