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액전, 덴무(天武)에 덴지(天地) 축출 사주
먼저 액전의 시에 담긴 암호를 풀기 위해 작가는 연개소문의 이름풀이를 한다.
연개소문의 성은 연(淵)이요, 이름은 개소문(蓋蘇文)인데, 그 이름의 뜻은 <샘 가의 무쇠>라는 순수한 우리 옛말을 한자로 나타낸 이두 표기라고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이리카수미(伊梨柯須彌)’라고 표기했는데 이 또한 우리말이 일본어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두 표기일뿐, 그 뜻이 <샘가의 무쇠>이긴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 연개소문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덴무천왕(天武天王)의 즉위 전 이름은 대해인(大海人)인데, 액전왕은 이 <대해인>과 <막리지대상>이라는 문자를 시의 앞 구절에 숨겨, 덴지천왕(天地天王)을 상징하는 이름을 내세워 <덴지(天地) 왕을 눌러 앉히십시오>라는 암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갖가지 암호를 이중삼중으로 숨겨서 퍼즐처럼 노래를 지은 액전왕’에게 감탄한다.
또한 1972년, 일본의 7세기 도읍지 아스카에서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이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가 고구려 고분의 벽화와 아주 흡사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학자들은 7세기 말 일본에는 고분벽화가 없었다고 주장해 왔는데 총천연색 고분벽화가 나타난 것이다.
고송총(高松塚)이라고 불리는 이 고분 벽에는 영락없는 고구려 여인 복색의 여인들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일본의 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덴무천왕(天武天王)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스카 중심지에는 덴무천왕(天武天王)의 무덤으로 공식화된 능이 있는데 왕후와 합장된 그 능이 도굴되었을 때 왕후의 유해와 부장품은 있었으나 왕의 관은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즉 애시당초 덴무천왕(天武天王)은 이 능에 묻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송총에 있던 유해는 목이 잘린 채 묻혀있었다고 한다.
고바야시씨는 덴무천왕(天武天王)의 아들이 그 암살자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백제 유민과 당나라 측이 아버지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아들을 선동해 살해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덴무천왕(天武天王)역시 연개소문처럼 당나라에 맞섰던 인물이다.
작가는 액전왕의 또 다른 노래를 통해 이 <아버지 암살>을 통탄했다고 하며 1200년 전 비밀을 그녀의 노래가 생생히 전해준다고 밝히고 있다.
30년 전쯤에
그러고 보니 연재 면의 뒷면은 <방송마당>과 연재소설 <거품시대>가 고정란이었나 보다.
- 왕년의 스타들 브라운관 누빈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뒤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사진들이지만, 기억의 편린을 자극하는 사진을 보며 우리 부부의 젊은 날의 앨범을 보는 느낌이다.
기사에서 ‘스포츠 스타 출신들이 타고난 끼를 방송에서 십분 발휘, 현역선수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한다.
강호동이 23세에 개그맨으로 데뷔해 <이경규의 코미디 동서남북>에서 활동하며 벌써 유행어를 만들어 내었고,
183cm에 115kg의 몸으로 브라운관을 꽉 채우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천하장사의 이미지를 흐리는 일이라며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2m가 넘는 이봉걸이 <홈런 노래방>에서 출연자들을 벌주는 피에로 역할을 하고 있고,
방송인으로 가장 성공한 장재근 선수가 에어로빅 강사로 주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더니 각 방송국의 진행자로 주가를 높이고 있다고 전한다.
그 밖에 탁구선수 정현숙, 자오즈민의 출연과 더불어 불멸의 스타 고 최동원과 홍수환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