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진양정씨(晋陽鄭氏) 어사공파(御史公派)의 내력
우리나라에서 본관(本貫,貫鄕)이 제도화된 것은 고려초기였는데 이 때 진양(晋陽)을 본관으로 하는 정씨가 처음 생겨난 후로 고려조에는 세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고려말?조선초를 지나면서 그 계보가 혼란해져 진양팔정(晋陽八鄭)이란 말이 생겼고 그래서 대동보(大同譜)를 형성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진양정씨 상주종친(尙州宗親)은 어사공파(御史公派)라 하고 따로 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어사공의 이름은 택(澤)이다. 그는 상주목사(判尙州牧事)를 지내고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하였다고만 알고 있을 뿐 생존연대와 묘소를 실전하여 그 밖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분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그 후손이 상주 종친을 이루고 있다.1)
1) 어사공파 족보가 처음 만들어지기 22년 전인 1866년에 제작된 가첩에 의하면 고려말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휘;櫶)을 시작으로 아들 팔형제(碩???頊?顥???????額)가 뒤를 이었고, 그 중 장자(長子 휘;碩)의 뒤를 이은 형제분이 우곡공(隅谷公 휘;溫)과 어사공(御史公 휘;澤)이라는 설이 전해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상주에서 어사공파가 처음 정착하게 된 것은 어사공(澤)이 상주에서 판관으로 재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상주에는 상산김씨(商山金氏)가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김득배(金得培)는 고려의 문관으로 과거를 거쳐 관직에 나가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2품)에 이르렀는데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서경(평양)을 탈환하는데 큰 무공을 세우기도 한 큰 학자였고, 그의 아우 김득제(金得齊)는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대장군으로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왕궁수복에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우왕 때는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하여 상산군(商山君)으로 봉군되었다. 또 아우 김선치(金先治)는 왜구를 물리친 공로로 1등 공신이 되었는데 이러한 형제들의 공로로 그의 아버지 록(祿)은 상성군(商城君)에, 그 조부 일(鎰)은 상락군(上洛君)에 봉군되었다. 상산김씨는 고려 말 이런 명문거족(名門巨族)이었다.
어사공은 상산김씨 김득제와 사돈이 되어 둘째 아들(諱 의생;義生)이 상주 처가에서 살게 됨으로써 지금의 상주시 공성면 초전에 처음 자리 잡게 되었다. 옛날에는 결혼하면 처가에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으므로 상주가 어사공파의 새로운 터전이 되었는데 어사공의 맏아들(諱 인생;仁生)은 요절하였으므로 후손이 없고 어사공의 후손은 상주에 기반을 잡은 자손들뿐이므로 진양정씨 어사공파는 상주파(尙州派)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 후 공성면 초전에서 4대를 지나고 우복선생의 5대조(諱 번;蕃) 때 청리면 율리로 이사하였다. 율리에서 어사공의 9대손에 중흥조 우복선생(愚伏先生 諱;經世)이 탄생함으로써 조선중기 이후 자랑스러운 문벌을 형성하게 되었고, 또 우복 6대손인 대학자 입재선생(立齋先生 諱;宗魯)이 크게 문명을 떨침에 따라 더욱 가문이 융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말?선초에 상주에 세거하게 된 진양 정씨 어사공파는 우복선생에 의하여 중흥이 이루어진 후 가학(家學)2)으로 학문이 이어져 왔다. 따라서 우산(愚山)을 본거지로 하는 진양정씨 문중을 이해하는 데는 우선 불천위(不遷位)인 우복선생과 입재선생(별묘에 봉향)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기본이 된다. 어사공파에서 우복선생이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로 과거급제자는 많아도 벼슬이나 학문이 우복선생에 비견할만한 후손은 없지만 우복 6대손인 입재선생이 도학(道學)으로 불천위에 별묘 봉향되고 있기 때문이다.
1) 家學이란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家門내에서 학자들이 배출되어 학맥을 이어자는 것을 말함.
어사공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어사공파가 시작되는 고려왕조 말기부터 조선왕조 말기까지 500여년을 내려오는 동안, 22대까지 종손의 혈맥이 잘 이어져 종손에는 양자가 한 번도 없었고 반대로 종가에서 지손으로 양자 나가는 일이 여러 번 있어 족보에 나타나는 촌수에 비하여 혈맥으로 촌수가 당겨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종가의 혈맥 보존은 잘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만큼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종친세력(宗親勢力)이 강성해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수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9대 종손인 우복선생부터 과거제도가 시행되던 21대 종손까지 13대를 내려오는 동안 열세 분 종손 가운데 문과(文科=大科) 급제를 통하여 관직에 나간 종손이 4명이고 유일로 천거되어 시강원(侍講院) 자의(諮議), 공조좌랑으로 등용되거나 현감의 관직을 지낸 종손 2명, 도학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된 5명 등 11명이고 아무런 첩지를 받지 않은 학생(學生)은 1명뿐이라는 점인데 이로써 우복선생 이후 문벌의 형세가 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진주 8정 : 충장공파 시조 정예(고려초), 공대공파 시조 정장(고려말),은열공파 시조 정자우, 첨정공파 시조 정중공.
우곡공파 시조 정온(정헌계통), 어사공파 시조 정택(정헌계통),지후공파 시조 정신, 내부사공파 시조 정안교.
* 동성동본이면서 세계(世系)를 달리함.
진주정씨 지후공파 족보 5권 최초 발행 18ㅇㅇ년대 족보 5권을 칼라 파일로 만들어 놨으니 지후공파 후손분중 관심을 가진 분은 연락을 주시면 메일로 파일을 전송해 드리겟읍니다. 진주정씨 충장공파 33세 정용길 입니다. 010-3643-7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