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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조 임금과 하목정
프롤로그
‘인조 임금과 하목정’
하목정을 한 번이라도 다녀간 적이 있다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하목정 관련한 수많은 키워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싶다. 서울과는 수 백 수 천리 떨어진 영남 땅, 그것도 경북 성주와 대구 달성을 경계 짓는 대구 서쪽 끝자락 낙동강변에 자리한 하목정. 도대체 이 시골 강가에 자리한 하목정이 인조 임금과 무슨 인연이 있단 말인가? 설마 조선왕조 제16대 임금 인조가 이곳 하목정을 다녀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놀라지 마시라. 인조 임금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 하목정을 다녀갔다.
능양군 시절 하목정을 다녀간 인조
현재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각종 자료와 하빈을 연고로 하는 전의이씨 문중에서 구전되는 ‘인조와 하목정의 인연’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인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인 능양군綾陽君 시절. 능양군은 전국의 경승지를 유람하곤 했다. 하루는 달성과 성주를 경계 짓는 낙동강 하산 나루에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정자 하목정을 만났다. 능양군은 하목정에 들러 하목정 주인 낙포 이종문과 그의 아들 수월당 이지영, 다포 이지화와 인사를 나누고 며칠을 하목정에 보내고 다시 길을 떠났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1613년(광해군 5) 하목정에 경사가 났다. 이종문의 첫째 아들 이지영, 둘째 아들 이지화, 사위 윤좌벽이 증광문과에 나란히 동방급제를 해 관직에 나아간 것이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난 1623년(인조 1) 하목정에 또 한 번 경사가 났다. 이번에는 십 수 년 전 하목정에서 인연을 맺은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통해 조선의 임금이 된 것이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경연經筵[고려·조선 때,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일]이 열리던 어느 날이었다. 인조는 경연관으로 자신 앞에 서 있던 한 신하를 알아봤다. 그 신하는 다름 아닌 하목정 주인 이종문의 장남 이지영이었다. “그대는 나를 알아보겠는가? 예전에 내가 그대 집 하목당에 며칠 거한 적이 있었는데···” 이지영은 알고 있다고 답을 했다. 인조는 다시 물었다 “그대 집 하목당은 참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지어진 정자더군. 그런데 왜 부연附椽[겹처마]을 달지 않았는고?” 이지영은 국법에 의해 사가私家에는 부연을 달 수 없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인조는 “정자와 일반 집은 다르지 않느냐? 내탕금[內帑金·왕실 재산]으로 은 200냥을 줄 터이니 그 돈으로 부연을 달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지영은 지엄하신 임금의 명인만큼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고, 부연 설치 이후에는 하목당 출입을 금하고 사사로이 거처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인조는 “거처하는 것까지 폐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한 때 머물렀다는 증표만 남겨두면 되지 않겠느냐”며 ‘霞鶩堂’ 당호 세 글자를 써서 내려 주었다.
하목정 관련 스토리 중 가장 드라마틱한 것이 위에서 살펴본 ‘하목정과 인조의 인연’ 스토리다. 그런데 이 스토리는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주요 문헌자료 등에서는 잘 찾아 볼 수 없고, 하빈 전의이씨 문중에서 엮은 전성세고全城世稿1)에 나타난다. 전성세고는 전의이씨 예산공파 선대先代 7인의 문집을 한데 묶은 것이다. 이중 낙포집洛浦集에 ‘하목정창수전말霞鶩亭刱修顚末’이란 기록이 있다. 낙포집은 하목정을 창건한 낙포 이종문의 문집이며, ‘하목정창수전말’은 하목정 창건과 중수 내력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 하목정과 인조의 인연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목정창수전말’을 가감 없이 번역하면 이렇다.
삼가 살펴 보건데 하목정은 낙포공이 창건했다. 인조 대왕이 잠저潛邸[왕위에 오르기 전 시절] 시에 일찍이 미행微行하여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 후 낙포공의 장자 이지영이 산관散官으로 입시入侍 했는데, 상이 그를 알아보고 앞으로 나아오기를 명했다. 상이 이르기를 “너의 집 하목정은 강산이 수려한 곳에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데 정자에 부연을 달지 않았던데 어찌된 것이냐?”고 말했다. 이지영은 답하기를 “사서인이 거처하는 집에는 감히 부연을 달 수 없습니다”고 했다. 이에 상은 “정자와 관觀은 일반 사가와는 다른 법이니, 모름지기 수리해서 부연을 다는 것이 옳다”며 내탕금內帑金으로 은 200냥을 내려 부연을 설치하라고 명했다. 이지영은 상의 명에 “전하의 명이 이러하시니 부연을 설치한 뒤로는 삼가 출입을 금하고 감히 사사로이 거처하지 않겠습니다”고 답했다. 상은 “거처하기를 폐할 것까지는 없고 내가 다녀간 흔적만 표시하면 될 것이다”며 하목당 큰 글자 석 자를 써서 내려주어 하목정 처마에 걸게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존 세상에 알려진 내용과 ‘하목정창수전말’은 내용에 큰 차이가 없다. 인조가 능양군 시절 하목정에 들렀고, 임금이 된 후에 이지영을 만나 내탕금으로 은 200냥을 하사해 하목정에 부연을 달도록 했으며, 하목당 세 글자를 친필로 써서 내려주었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임금이 경연자리에 참석한 신참 신하를 한 눈에 알아봤고, 게다가 내탕금을 하사하면서 정자 처마에 부연을 달라고 명했다. 이쯤 되면 조선왕조실록에 뭐라도 한 줄쯤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나?”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하목정과 인조의 인연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문중에서 지어낸 거짓(?) 이야기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한 번 생각을 해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천하의 조선왕조실록이라 해도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다 실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혹은 지금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슨 속사정이 있지는 않았을까?
1) 『전성세고』는 1897년(광무 1)에 이근중李根重[27世]·이종기李種杞[27世]·이현승李玄升[26世]이 편저했으며, 총 9권 6책이다. 권1은 「추선록追先錄」, 권 2는 이종문의 「낙포집落浦集」, 권3은 이종문의 아들 이지영의 「수월당집水月堂集」, 권4는 이지화의 「다포집茶圃集」, 권 5는 이종문의 동생인 이종택李宗澤의 아들 이지형李之馨의 「적성공집積城公集」, 권 6은 이지영의 아들 이구李球의 「은와집隱窩集」, 권7은 이지화의 손자 이시격李時格의 「강고집江皐集」, 권8∼9는 이시격의 아들 이익필李益馝의 「하옹집霞翁集」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머리에 김도화金道和의 서문이 있고, 책 끝에 김흥락金興洛과 이종기李鍾杞의 발문이 있다.
팩트에서 출발하는 문중 구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구전口傳. 구전을 이해할 때는 주의 할 점이 있다.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행간에 숨어 있는 ‘상징’을 읽어야 한다는 것. 이는 신화나 전설에 접근하는 방법과도 일맥상통한다. 신화나 전설은 제우스신이니 구미호니 하는 괴력난신이 등장하고 스토리 또한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신화와 전설의 매력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알쏭달쏭한 그 무언가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수없이 많은 가문·종중·문중이 있다. 그 중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문중 구전 한 두 개 쯤 없는 문중은 없다. 대구지역 문중과 재실을 연구하고 있는 필자는 문중 구전에 대해 나름의 접근방식을 가지고 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일 없다고, 문중 구전은 대부분 팩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팩트는 변한다. 시속時俗의 유불리를 따져가며 지속적인 변형이 일어나는 것. 이 과정에서 문중에 불리하거나 근거가 희박하거나 경쟁력이 없는 레퍼터리는 자연 도태되거나 아니면 극히 일부 문중원들 사이에서만 전해지는 은밀(?)한 구전이 된다. 반면 문중에 유리하거나 근거가 확실하거나 경쟁력이 있는 레퍼터리는 구전과 동시에 문집이나 여타 기록에 남아 후대에 전해진다.
이쯤에서 ‘하목정과 인조의 인연’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는 네 가지다. 능양군의 하목정 방문, 인조와 이지영의 만남, 내탕금 은 200냥과 부연, 하목당 편액이다. 지금부터 달성 하목정 대표 스토리라 할 수 있는 ‘하목정과 인조의 인연’에 나타나는 네 가지 소재를 순서대로 하나씩 팩트 체크 해보기로 하자.
정말 능양군이 하목정을 다녀갔을까?
능양군은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의 아들이자 후에 원종으로 추존된 정원군 이부李琈의 장남이다. 능양군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5년 왕자들의 피란지였던 황해도 해주 관사에서 태어났다. 인조실록 첫 기사인 1623년 3월 13일 즉위일 첫 기록에는 인조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은 선조 대왕의 손자이며 원종대왕元宗大王의[정원군定遠君으로 휘는 이부李琈인데, 추존되어 원종이 되었다]장자이다. 모후는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로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다. 추존되어 왕후가 되었다.] 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만력 을미년[1595] 11월 7일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탄생하였으니, 당시 왜변이 계속되어 왕자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 선묘宣廟[선조]께서는 이것이 한 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하면서 크게 애중하여 궁중에서 길렀고, 친히 소자小字와 휘諱를 명하고 깊이 정을 붙였으므로 광해가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너그럽고 굳건하여 큰 도량이 있었다. 여러 번 자급이 올라가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져서는 더욱 겸양하면서 덕을 길렀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3월 13일 계묘]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아주 특별난 사람은 그 출생부터가 남다르다. 대표적으로 중국 상고시대 제왕이나 위인들은 하나 같이 특이한 경험을 통해 출생했다. 북두칠성이나 용이 산모를 휘감았다거나, 알을 삼키거나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난 뒤에 잉태했다는 식이다. 우리나라도 마차가지다. 곰에서 여인으로 바뀐 웅녀와 하늘의 아들 환웅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김알지·수로왕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류의 탄생 스토리를 초자연적 교감에 의한 출생이란 뜻에서 ‘감생제설感生帝說·감천탄생설感天誕生說’이라 한다.
위 인조실록 기록을 보면 인조 역시 기이한 이적과 함께 태어난 특별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할아버지인 선조는 손자인 인조의 오른쪽 넓적다리에 있는 많은 점을 보고, 한 고조 유방과 같은 상이니 절대 외부에 발설치 말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선조의 말은 누설됐고,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에 왕기王氣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에 왕기가 서렸다’는 등의 소문이 퍼졌다. 이로 인해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능양군을 경계했다. 결국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은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이 일로 능양군의 아버지 정원군마저 화병을 얻어 죽었다. 이때부터 능양군은 아버지 빈소에서 곡을 하며 집안을 풍비박산 낸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이때의 상황을 인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처음 광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선묘[선조]께서 바꾸려는 의사를 두었었는데, 결국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를 원수처럼 보아 그 시기와 의심이 날로 쌓였다. 적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또 그의 악행을 종용하여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을 해도海島에 안치하여 죽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왕대비의 아버지]을 멸족하는 등 여러 차례 대옥大獄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상의 막내 아우인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도 무고를 입고 죽으니, 원종대왕이 화병으로 돌아갔다.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대비의 존호를 삭제하는 등 그 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이 죽은 것은 1615년(광해군 7), 아버지 정원군이 죽은 것은 1619년(광해군 11)으로 능양군 나이 25세 때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623년 3월 13일. 능양군은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에 올랐다.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과 아버지 정원군이 죽은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반정을 도모했다. 반정 측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고, 특히 집권세력인 북인계의 대척점에 서 있던 서인과 남인계 인사들을 많이 만났다. 바로 이때 인조는 남인계 인사들을 만나기 위해, 혹은 권력핵심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영남 땅을 유람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당시 권력핵심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파락호破落戶로 위장해 영남 땅을 다녀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추측일 뿐 그가 정확히 언제, 무슨 목적으로 하목정을 다녀갔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인조와 이지영, 두 번의 만남은 사실일까?
조정에서 인조와 해후邂逅했다는 수월당 이지영.[그를 비롯한 하목정을 중심으로 하는 전의이씨 인물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그는 하목정 창건주인 낙포 이종문의 네 아들 중 장남이다. 그는 29세 되는 1613년(광해군 5) 바로 아래 동생 다포 이지화와 함께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36세 되던 1620년(광해군 12)까지 7년간 성균관 전적, 예조 좌랑, 성균관 직강, 성절사 서장관, 호조 좌랑 등을 지냈다. 하지만 37세 때인 1621년(광해군 13) 국사가 너무 혼탁해지자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하목정으로 낙향했다. 이때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동생 이지화도 벼슬을 내려놓고 형과 함께 낙향했다. 당시 서울을 떠나며 이들 형제가 각각 한 수씩 읊었던 ‘휴수동귀携手同歸’ 시가 지금도 전한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이지영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북청절도판관을 시작으로 47세 때인 1631년(인조 9) 울진현령, 53세 때인 1637년(인조 15) 울진현령 겸 춘추관 기주관을 지내고, 이듬해인 1638년(인조 16) 54세로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지영은 광해군과 인조 두 임금을 모시며 모두 두 차례 벼슬살이를 했다. 1차 벼슬살이는 광해군 때로 29세 증광문과 급제 후, 37세로 낙향하기까지 10년으로 주로 중앙관직에 있었던 시기다. 2차 벼슬살이는 인조 때로 40세 직후부터 54세까지 약 15년으로 대부분 지방 수령으로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과거에도 중앙직이 아닌 지방 수령으로 나가 있으면 임금을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임지로 나가기 전 임금에게 신고하는 ‘사조辭朝’ 자리를 빼면 임금을 대면할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지영은 언제 어떤 자리에서 인조를 만난 것일까?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씩이나.
첫 번째 만남은 29세 나이로 증광문과에 급제해 1차 벼슬살이를 나가기 전, 혹은 1차 벼슬살이를 마치고 낙향한 1621년(광해군 13)부터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인조 1) 사이일 가능성이 있다. 앞서 인조실록 기록대로라면 할아버지 선조의 총애를 입은 인조는 광해군의 경계대상이었다. 결국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아버지와 동생을 잃자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실천했다. 반정 도모 세력과 비밀리에 만나고, 서인·남인계 인사들과 남몰래 교류했던 것. 이때 인조는 권력자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수시로 서울을 떠나 지방을 유람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와중에 남인 세력의 본거지 중 한 곳인 대구 달성 하목정에서 인조는 이지영과 첫 조우를 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만남은 이지영의 2차 벼슬살이 시기 시작이었던 북청절도판관에 제수된 시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기 전에 임금에게 발령신고(?)를 하는 절차가 있었다. 이를 사조辭朝·배사拜辭·고사告辭라 한다. 이때 경우에 따라서는 임금이 부임을 앞둔 지방관을 일일이 독대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그 지방은 풍속이 이러저러하니 참고하라”든지, “너는 성정이 조급하고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단점이 있으니 고을민을 다스릴 때는 더욱 조심하라”든지, “너의 아비가 조정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 쌓은 명성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식이었다.
중국 역사에서는 왕망의 신나라를 없애고 후한을 다시 일으켜 세운 광무제 유수가 사조 자리에서 격려와 당부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평화로운 시절이 아닌 앞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시작하는 왕조일수록 지방 민심을 다독이고 어루만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지방관만큼은 능력과 함께 임금이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인물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뽑은 지방관들을 임지로 보내는 신고식 자리. 지방관은 물론 임금에게도 정말 중요한 자리였다.
모르긴 해도 인조도 그랬을 것 같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조정 내 여론동향만큼이나 지방 백성들의 민심을 다잡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대구 달성 하빈 지역 벌족閥族의 후손, 문과 출신 전직 관료, 게다가 광해군 조에서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해, 고향에서 지역 오피니언 리더로서 활동하던 이지영을 인조가 가만 두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인조는 그를 발탁했고, 그를 임지로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특별 이벤트를 열었을 수 있다. 자신이 한 때 머물렀던 하목정과의 인연도 언급하고, 내탕금으로 은 200냥도 하사하면서 말이다.
내탕금 은 200냥과 부연
이것도 참 궁금하다. 인조가 내탕금으로 은 200냥을 내려주면서 하목정에 부연을 달라고 명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내탕금內帑金은 과거 왕조국가시절 왕실 개인 금고인 내탕고內帑庫에 들어 있던 돈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내탕고는 신라시대 때부터 대한제국시대까지 줄곧 존재했다. 이중 조선왕조 내탕고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개인재산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성계는 고려 말 지금의 함경도 지역 대호족 출신이다.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워 공신에 책봉됐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조선 개국 후 조정에서는 이성계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국유로 할 것인지 아니면 사유로 할 것인지. 이때 정도전은 이성계의 재산을 국유재산에 귀속시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자, 이성계의 재산은 별 문제없이 사유재산이 되어 왕실에서 별도 관리하게 됐다. 이것이 조선시대 내탕금의 출발이었다.
내탕금은 매우 은밀하게 관리되어 총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왕실은 이러한 내탕금 관리를 위해 내수사內需司란 별도기구를 두었다. 특이한 것은 정5품 전수부터 종9품 전화까지 모든 내수사 관원이 전원 내시內侍였다는 점이다. 내탕금 관리라는 은밀한 일을 수행하는 데는 아무래도 성리학으로 무장된 문신보다는 왕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내시가 적합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내탕고와 내탕금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내탕금 사용처에 대한 기록 중에는 주로 왕실용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자연재해 때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예가 많이 나타난다. 고종실록[1865년 고종 2년 10월 18일]에는 당시 자연재해로 전국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자 대왕대비[신정왕후]의 명으로 내탕고에서 거금 10만 냥을 꺼내 전국에 나눠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의 입장에서는 하목정 출신 이지영에게 내탕금을 하사할 분명한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 과거 능양군 시절 하목정에서의 인연에다, 남인의 본거지인 대구 달성 하빈지역 유력 가문인 전의이씨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지영·이지화 형제는 증광문과에 동방급제 해 나란히 관직에 나왔다가, 광해군 정치에 실망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인물들이 아니었던가. 인조는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만큼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낙향해 있던 이지영을 불러 관직을 주고, 확실한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내탕금을 하사한 것은 아닐까? 은 200냥이 지금의 가치로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 예와 비교해보면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조가 내탕금으로 은 200냥을 하사하면서까지 달라고 했던 하목정 부연. 부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며느리 처마 ‘부연’
전통 기와집 처마는 서까래로 기초를 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는다. 이때 건물 기둥 바깥쪽으로 빠져나온 서까래 부분을 처마라고 한다. 처마는 햇볕이나 비바람을 막기 위한 장치로 크게 두 가지 양식이 있다. 하나는 단면이 원형인 서까래 위에 바로 지붕을 얹는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원형 서까래 위에 단면이 사각형인 또 다른 서까래를 겹쳐 얹는 양식이다. 전자는 처마가 하나라고 해서 ‘홑처마’, 후자는 처마가 2층이라 ‘겹처마’라 한다. 겹처마는 홑처마에 비해 처마 길이가 더 길고 더 깊다. 위 서까래가 아래 서까래보다 건물 바깥쪽으로 좀 더 빠져 나와 있기 때문이다. 처마가 길어진 만큼 지붕은 커지고 건물 외형은 더 웅장해진다. 이것이 겹처마를 설치하는 이유다.
겹처마 위쪽 서까래를 ‘부연’이라 한다. 아래쪽 서까래 위에 덧붙였다하여 ‘붙일 부附’, ‘서까래 연椽’을 써서 ‘附椽’.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부연을 찾아보면 ‘附椽’ 외에 ‘婦椽’이라는 또 다른 한자 이름이 있다. ‘婦椽’은 ‘며느리 부’, ‘서까래 연’이다.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스토리가 숨어 있다.
옛날 옛적에 손재주 좋은 목수가 있었다. 한 번은 나랏님의 부탁으로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짓게 됐다. 목수는 평소처럼 서까래로 쓸 나무들을 미리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서까래를 올리기로 한 날. 참을 챙겨 작업장으로 들어서던 목수의 며느리는 땅에 주저앉아 실성한 사람처럼 울고 있는 시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며늘아가! 큰일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미리 다듬어 놓은 서까래가 하나같이 다 짧구나. 서까래로 쓸 수가 없어.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에 며느리는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아버님의 손재주는 나라 안이 다 알고 있습니다. 서까래가 짧으면 다른 서까래를 덧대어 길게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옳거니!”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며느리 서까래’, 곧 ‘婦椽’이다. 조선시대엔 ‘가사제한령’이란 일종의 건축법이 있었다. 이는 신분에 따라 가옥규모와 건축양식에 일정 제한을 두는 제도였다. 세종 조에 시작된 ‘가사제한령’은 조선말까지 존속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세종과 성종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가사제한령’을 수정하면서까지 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유는 모범을 보여야 할 왕자·공주·옹주 등 왕족들이 먼저 규정을 어겼고, 뒤이어 사대부 양반가들도 규정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교묘하게 규정을 피하는 식으로 가사제한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서울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러한 풍조는 결국 단속의 손길이 미치기 힘든 지방까지 퍼져나갔다.
조선시대 가사제한령은 건물규모에 대한 제한이라 할 수 있는 칸수 제한과 건물장식에 해당하는 주춧돌·공포·진채·단청 등에 대한 제한이 주된 사항이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살림집에는 부연과 원기둥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도 가사제한령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신라시대에도 가사제한령이 있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에 대한 집의 규모와 건축장식에 대한 제한규정이 소개되어 있다. 이 중에는 특별히 부연에 대한 규정도 있는데, 4·5·6두품은 물론 심지어 진골에 대해서도 부연 설치를 금한다는 내용이 있다.
진골은 방 길이와 폭이 24자를 넘지 못한다. 당기와를 덮지 못하며, 부연을 달지 못하며, 조각한 현어를 달지 못하며, 금·은·황동과 오채색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삼국사기』 권33, 잡지2, 가옥]
에필로그
달성 하목정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인조 임금과 부연이다. 인조가 능양군 시절 달성 하목정에 들렀다는 것도 그렇고, 인조가 하사한 내탕금으로 하목정 부연을 설치했다는 것 또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이 스토리는 낙포 이종문 선생 문집인 낙포집에 실린 ‘하목정창수전말’과 전의이씨 예산공 종중에서 전해오는 문중 구전에 근거한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문중 구전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문중 구전은 눈에 불을 켜고 사실여부를 따지기보다는 행간에 숨어 있는 상징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문중 구전에는 문중의 자랑스런 역사와 함께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도 어떤 식으로든 담겨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전설에 접근할 때 상징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접근해야하는 것처럼 문중 구전도 ‘상징’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하느님인 환인과 아들 환웅, 곰과 호랑이, 마늘과 쑥, 웅녀와 환웅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 우리 민족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의 주요 소재들이다. 우리 국민들 중에는 단군신화를 사실 그대로 믿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단군신화를 배우고, 후손에게 가르치고 있다. 문중 구전도 어찌 보면 단군신화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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