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문화원 향토역사
고산서당, 퇴계·우복 그리고 동고 선생
송은석(수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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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재→고산서원→고산서당
수성구 성동 산 22번지에 고산서당이 있다. 뒤는 고산이요, 앞은 너른 들판을 사이에 두고 남천과 금호강이 흐르고, 멀리로는 초례산이 한 눈에 조망되는 명당이다.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이 자리는 명당을 찾는 풍수가들이 눈독을 들였던 땅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인 1500년대 중·후반. 당시 경산현령이었던 윤희렴이 이 자리에 ‘고산서재’를 처음 세워졌다. 윤희렴은 퇴계 선생에게 서재 이름을 부탁했고, 퇴계는 ‘고산(孤山)’이란 서재 이름과 ‘구도(求道)’라는 문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시 퇴계가 친히 써서 내려준 ‘구도’ 두 글자는 편액으로 제작해 서재 문에 걸었다. 하지만 이 편액은 임란 때 서재와 함께 소실됐고, 지금은 퇴계 글씨를 모각한 또 다른 ‘구도’ 편액이 서당 대청에 걸려 있다. 1605년(선조 38) 서재를 중건했고, 1690년(숙종 16) 서재를 ‘고산서원’으로 승격시켜 퇴계와 우복[정경세] 두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하지만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다시 훼철되고 두 선생의 위패는 사당이 있던 자리에 묻혔다.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879년(고종 16), 지역 사림이 중심이 되어 옛 터에 다시 건물 한 동을 짓고 ‘고산서당’이라 이름 했다. 1901년 ‘고산서당계’가 결성됐고, 1984년 고산서당은 대구시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됐다. 이후 2020년 7월 사당 숭현사를 복원하고 선현의 위패를 다시 봉안했다. 그런데 이때 봉안한 위패는 기존 퇴계·우복 두 선생이 아닌 세 선생이었다. 한 분이 더 추가된 것이다.
조선중기 경산현 큰 스승, 동고 서사선
고산서당 숭현사에 추가로 위패가 봉안된 인물은 서사선(徐思選·1579-1651)이다. 그의 본관은 달성, 자는 정보(精甫), 호는 동고(東皐)다. 조선시대 달성서씨 본거지인 대구부 남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26세 때 처가가 있는 경산현 동산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동고라는 호는 그가 거처했던 동산 아래 동고정사(東皐精舍)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는 조선중기 대구 큰 선비였던 낙재 서사원의 사촌동생이자 제자였다. 서사원보다 29세 아래였던 그는 7세부터 서사원이 세상을 떠난 37세까지 서사원에게 수학했다. 이후에는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모당 손처눌 등을 종유하며 그들의 뒤를 잇는 걸출한 선비가 됐다. 특히 그는 조선중기 경산현의 유풍(儒風)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그가 활동한 강학공간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고산서재다. 그는 고산서재 교칙에 해당하는 학규를 제정했고, 우복 정경세 이후 오랫동안 고산서재 강학을 주도했다.
과거 고산서원에 퇴계와 우복 두 선생의 위패를 모신 것은 두 선생이 한 때 고산서재에서 강학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복원된 숭현사에 두 선생과 함께 동고 서사선을 추향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과거 고산서재 강학을 통해 경산현의 유풍을 일으킨 선생의 공을 지역 유림들이 인정한 것. 어쨌든 선생의 위패가 퇴계와 우복 두 선생 위패 곁에 놓이는 데는 369년이란 세월이 걸렸다.[현재 고산서당은 서원 승격을 추진 중이며, 조만간 인근에 ‘고산서당 유교교육관’이 건립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