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波が高くなって居ます」 博多(하카타)항이 가까워지면서 비틀호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57년만에 다시 이 길을 가는 아버지의 심정처럼 세차게 바람이 불면서 파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喜壽를 넘긴 노인의 가슴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1944년 8월 열 하루, 추석을 나흘 앞둔 날 21살의 청년이 關釜연락선에 실려 처음 이 길을 갔을 것이다. 하카타항에 내리니 비가 내렸다. 세찬 바람에 아버지는 모자를 벗어 들었다. 백발의 적은 머리 숯 때문에 머리가 시린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자기를 久野壽善(히사노히사요시)라고 소개했다. 저번에 통화를 한 적이 있으나 만나기는 처음이다. 히사요시의 차를 타고 그가 살고 있다는 北九州(키타큐슈)로 갔다. 동네의 수퍼마켓에서 壽司(스시:생선초밥)와 반찬들을 잔뜩 사더니 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집에 들어서니 매우 썰렁했다.
집은 그런 대로 아담한 이층집이었지만 집안에 온기가 전혀 없었다. 음식을 꺼내 놓고 먹으면서 얘기를 들으니 이 집은 자기의 동생 집이며 자기는 여기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자기들 형제간이 4남매인데 남자 3형제가 같이 일을 하고 있으며 셋 모두가 독신이라고 했다. 집이 썰렁한 이유를 알 듯했다. 3형제가 하는 일은 민물 게를 잡아서 한국으로 수출을 하고, 한국에서 나는 생선들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어업과 수산물 무역 및 판매를 겸하고 있는 셈이었다. 수출하려고 잡아 두었던 게를 소금물에 삶아서 내왔는데, 속이 아주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 때 있었던 집 바로 뒤가 큰 강이었는데, 그 강에서 이런 게가 많이 잡혔으며, 지금 이 형제들의 부친과 그 강에서 그물로 게를 잡기도 했다는 것이다. 저녁에 나가서 그물을 설치해 놓고 아침에 그물을 걷어서 게를 잡고는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같이 게를 삶아 먹고 하면서 서로는 친밀감을 느껴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근로보국대란 이름으로 끌려와 강제노역을 하던 탄광에서 탈출하여 떠돌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의지한 곳이 지금 이 형제들의 조부인 久野善七(히사노젠지츠)씨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의 장남인 久野壽壯(히사노쥬소)씨가 이 형제들의 부친이 되며, 아버지와는 들에 나가서 같이 일도 하고 씨름도 많이 했다는데, 우리와 소식이 닿고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으면서 만나고 싶어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뇌출혈로 20일전에 돌아가셨다니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삼촌이 久野公男(히사노키미오)씨인데 그 때 그 곳 唐熊(카라쿠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튿날 이들 형제 중 막내인 久野三(히사노미타루)씨가 차를 몰고 나서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했다.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나자 계산은 기어이 미타루씨가 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냥 고맙다고 하는 수 밖에 없었다. 형제들이 사는 곳에서 20여분 가니 작은 묘지가 나타났는데 묘비 중 하나에 「久野累代之墓」라고 씌어 있었다. 이 사람들의 선조들을 모셔 둔 묘지였고, 개인 묘는 따로 없다고 했다. 잠깐 참배하고 公男씨를 만나기 위해서 자리를 떴다.
잠시 후 遠賀江(옹가가와)라고 표지판이 붙은 강이 나타나고,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그 모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炫貞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전날 밤 자기 전에 변비치료제 두 알을 먹은 것이 이제 효과가 나타나나 보았다. 家族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여행이라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데리고 나섰는데, 긴장한 탓인지 떠나기 며칠 전부터 변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잠깐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고, 앞쪽에 흰 색 지붕의 창고 비슷한 건물을 가리키면서 그 곳이 바로 그 곳 즉 옛날에 조부인 善七씨의 농가주택이 있던 자리라고 했다. 그 앞에 가서 차를 세우고 그 옆에 새로 지은 주택으로 현정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제야 아버지는 바로 이 곳이 틀림없다고 했다. 길에서 50센티정도 높은 마당 가장자리에 헛간 같은 곳이 있었다고 했다. 그 때 1944년 가을의 어느 날 아침 탄광에서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아버지와 동료 한 사람은 무조건 북쪽을 보고 하루종일을 걸어 이곳까지 왔고, 날이 저물자 여기 있던 헛간 짚더미 속에서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起きれ! 起きれ!」 하고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깬 두 사람은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강제노역에서 탈출한 사람이 되잡혀 와서 죽도록 얻어맞는 광경을 탄광에서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었다.
집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벌벌 떨고 있는 두 사람에게 주인은 의외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우선 먹을 것을 내 주고는 여기서 농사일을 해 주고 있겠느냐고 물었고, 일이 다급했던 두 사람은 그리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 집은 상당히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마침 가을걷이를 하는 철이라 일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며칠 같이 일을 하다가 동료 한 사람은 주인 영감의 처갓집으로 보내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동료는 거기서 그 집주인의 돈을 훔쳐서 도망을 가고 말았다고 했다. 그 후 그의 소식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고향인 성들에서 떠도는 이야기로는 오사카에 있는 형을 찾아갔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지금 이 집은 젠지츠씨의 손녀 즉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미타루의 누님인 千代美(치요미)씨가 살고 있다. 목수인 그녀의 남편이 작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집 옆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고 텃밭과 집 사이를 지나 둑이 있는데 그 둑을 올라서니 바로 강이었다. 이 강에서 바로 아버지와 壽壯(쥬소)씨는 게잡이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강을 건너서 멀리 화산이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화산은 없었다. 미타루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에 화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화산활동이 정지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 곳에 대한 이야기할 때면 늘 <遠賀郡>,<唐熊>이라는 지명과 <久野善七>이라는 이름, 그리고 서쪽으로 화산이 보였다는 것을 떠올리곤 했다. 아버지는 여기서 그 해의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열심히 일을 해 주게 되고, 이를 신임한 주인 영감은 아버지를 읍내의 조그만 간장공장으로 보내서 일하도록 해 주게 된다.
여기서 몇 십미터를 가니 <久野工務所>라는 곳이 보였는데, 바로 미타루의 삼촌인 公男(키미오)씨의 아들이 운영하는 목공소라고 했다. 다시 몇 십미터를 더 가니 조금 큰 창고 같은 건물이 나타났는데 이 집이 바로 公男씨가 건축일을 하던 장소 겸 집이라고 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키미오씨 부부가 있었다. 아버지는 바로 키미오씨를 알아보았으나 키미오씨는 아버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57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그 때 키미오씨는 학생이었으며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했더니 차츰 기억이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현재 나이는 72세라고 하니 만 77세인 아버지와는 다섯 살 차이였다. 기억이 살아나니 매우 친하게 대해 주었다. 부친과 형님에 대한 이야기며, 당시에 같이 놀았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한국에서 가져간 인삼차를 선물했다. 그리고 꼭 한 번 한국에 놀러 오라는 말을 하고, 간장공장을 가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미타루가 다른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아까까지의 차는 너무 작아 불편할 것 같아서 자기 생질의 차와 바꿔 왔다는 것이다. 미타루는 만 나이로는 나와 같은 47살이라고 했지만 1952년 생이었다. 兄貴(형님)이라고 하자 겸연쩍어 했다.
십 분이 못되는 곳에 「眞名子醬油(마나코쇼유)釀造元」이라는 간판을 찾았다. 사무실과 주택을 겸하고 있는 듯한 곳의 초인종을 누르고 물어 보았으나, 주인도 바뀌었고, 과거를 알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여, 그대로 남아 있는 집 모습만 바라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이 곳에서 아버지는 두어 달 일을 했으나 신분상의 불안을 감춰준다는 것 때문에 밥만 얻어먹고 월급은 받지 못한 채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을 터였다. 아무튼 반 백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이름 그대로 모습도 규모도 그대로 간장을 만들고 있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민족의 아픔이요 개인의 슬픔의 기억을 더듬으러 田川郡(타가와군)絲田町(이토타마치)의 眞岡鑛業所(신오카코교쇼)를 찾아보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면서 미타루씨는 말했다. 자기는 전후세대라 잘은 모르지만 전쟁 중 동원된 한국인 强制勞動者(쿄세이로도샤)들의 참혹상은 들어서 짐작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장소를 꼭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어 물어 지도상에 보이는 眞岡團地라는 곳을 찾아갔다. 어느 집의 대문을 두드려 이 부근에 예전에 광산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조금 위 언덕 위에 노인이 사는데 거기 가서 물어보라고 일러주었다.
그 집을 찾아가니 그 노인이 있었는데, 혼자 사는 듯했다. 신오카광업소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왔느냐고 되물었다. 사실은 한국에서 왔으며 당시 아버지가 그 광산에서 일했으며, 죽기 전에 그 장소라도 한 번 보고싶어해서 찾으러 왔노라고 했더니 그 노인은 바로 그 광산에서 사무원으로 일을 한 적이 있노라면서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노인은 자못 흥분된 모습으로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본어가 짧아 그 노인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대강 알아들은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러했다.
자기의 나이는 현재 86세이며, 이름은 <藤浦一十(후지우라이치쥬)> 라고 종이에 또박또박 적어 보여주면서, 그 광산의 사무실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거기 있은 것이 언제냐고 물어서 종전되기 1년전이라고 말하자 그러면 그 때 같이 거기 있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 자신은 종전되기 몇 년 전에 그 탄광에 근무하다가 군대를 갔고, 태평양제도와 만주까지 가서 참전했다가 종전 후 일본으로 돌아왔으니 만난 적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군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했으며 病院船에 근무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일본에 돌아와서 그 탄광에 다시 근무하려고 했으나, 거기 있던 어느 과장과 싸우는 바람에 재취직을 하지 못하고 후쿠오카에 있는 연탄공장에 취직해서 근무했다고도 했다.
그 때 그 장소를 아느냐고 했더니 바로 여기가 그 때의 직원들의 숙소들이 있던 자리라고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수용소 있던 자리도 아느냐고 묻자 물론 잘 안다고 하면서, 벽장에서 낡은 노트 한 권을 꺼내어서 보여주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그 당시의 수용소는 물론이고 일본인 직원들의 사택배치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고 각 건물마다 입주자의 이름까지 씌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그 때의 수용소 건물을 가리켜 「타코비야」라고 불렀다고 하자, 노파는 다시 종이에다 한자를 쓰고 「たこべや(타코베야)」라고 읽는다고 하면서, 문어발방이라는 뜻이며 한마디로 자유가 없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그는 노트의 한 쪽에 허옇게 글자의 색이 바랜 곳을 가리키면서 이 곳이 바로 타코베야라고 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연필로 그렸었기 때문에 글자의 색이 바랬다고 하면서 그 타코베야에 한국사람들이 오면, 한 번에 오십 명 정도씩 들어왔는데 한달 정도 지나면 반도 남지 않고 도망갔다고 했다. 그냥 도망가다 잡혀 오기도 하고, 사무실이나 경비원을 매수하려고 賄賂(와이로)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수용소가 있던 자리를 가리켜 달라고 하자 직접 안내해 주겠다고 따라 나섰다. 집밖으로 나오자 조금씩 내리던 눈이 함박눈으로 바뀌어 십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부어 댔다. 그래도 노인은 차에 올랐다. 그리고 바로 옆에 보이는 집도 그 때 직원의 사택이었으며, 한 집 건너 집이 사장의 집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골목길을 몇 구비 돌아서 한 상점 앞을 지나면서 그 상점이 그 때 있었던 매점자리이며, 또 맞은 편 조금 위의 상점은 그 때 배급소였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서 차를 세우게 하고 그 자리가 바로 타코베야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지금은 모두 일반 주택이 들어서 있어서 그 때의 살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갱이 있던 곳까지 가 보려고 했으나, 너무 많이 눈이 내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돌아섰다. 여기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곳의 탄광들이 폐광된 후 산림복구와 조림을 완벽하게 해 놓아 그 곳들이 탄광자리였다는 것이 도저히 분간되지 않게 되어 있었다.
1944년 추석 바로 전 아버지는 고향인 군위의 장정들과 함께 이 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도착해 보니 한 달 정도 먼저 왔다는 청송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 곳이 얼마나 힘든 곳인가를 직감하였다고 한다. 한 달만에 사람 수는 반 이상 줄었고 남아 있는 사람은 피골이 상접하고, 병들고 지친 모습들에서 여기는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구나 하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잠시 한국사람들의 강제동원에 대한 역사를 보면 이렇다.
일본은 침략전쟁의 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공업설비를 갖추고 조선인을 노동력으로 동원하였다. 1930년대 초에는 직업소개소를 통하여 값싼 조선인 노동자를 확보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중국침략이 본격화하게 되자 일제는 노동력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된 이후 많은 노동 관계의 칙령들이 잇따라 발령되었고, 이들은 동시에 조선에도 적용 실시되었다. 그러나 1939년 7월에 공포된 국민징용령은 조선에서는 민족적인 저항을 우려하여 형태를 바꾸어 실시하였다. 모집의 형식을 빈 노무동원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 일제는 1942년 3월부터 전보다 더 대규모의 국민동원계획을 세우고 강제력이 더욱 강화된 관알선(官斡旋) 방식을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을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였다. 1943년 3월에는 조선에 징병령이 공포되고, 11월에는 카이로선언이 선포되었다. 1944년 8월부터는 관알선을 존속시키면서 국민징용령을 조선에 적용하였고, 여자 정신근로령이 공포되어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로 동원하게 되었다.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고, 8월 히로시마(廣島)에 이어 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이 투하되고,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노동력강제동원도 막을 내렸다.
이 탄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배고픔이었다고 한다. 일도 물론 힘들었으나 식사에 쌀은 아예 구경할 수도 없고, 보리밥 한 주먹이나 밀가루죽 한 공기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고, 탈출하다 잡혀 와서 죽도록 얻어맞고는 그 끝에 죽고, 병들어 죽고 해서 달포만에 인원이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타코베야에는 출입문이 중앙에 하나 밖에 없고 경비가 삼엄했으며, 수용자들은 일을 마치고 들어가면 아침까지 아예 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한 달 여를 여기서 견딘 아버지는 어느 날 아침 타코베야에서 탄광으로 갈 때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고향의 건너 마을에서 같이 온 동료 하나가 따라 나섰다. 뒷산을 넘어 무조건 북쪽으로 향했다. 강을 낀 신작로가 나왔고 그 길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루 종일 굶은 채 걷다가 황혼 무렵 다다른 곳이 바로 唐熊(카라쿠마)였고, 그 집 헛간의 짚더미에 쭈그리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카라쿠마의 짚더미에서 잠이 든 다음 날 아침 그 집의 주인인 久野善七씨에게 발견되어 그 집에서 농사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집에서의 가을걷이가 끝나고 간장공장에서 두어 달 일을 했으나 거기서도 신분상의 불안이 없지 않아서 久野씨는 친척벌 되는 사람이 운영하는 나가사키현 사세보에 있는 사설탄광으로 아버지를 보내면서, 거기 가서 잘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번의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北九州市 折尾(오리오)경찰서의 片岡照征씨이다. 작년 3월 말경 생맥주 업소 시찰차 후쿠오카에 왔을 때, 하카타역 내에 있는 경찰 파견대에 들러서 여차 저차 말을 하고 久野善七이란 사람 또는 그 자손이라도 찾을 수 없겠느냐고 물어본 즉 거기서 이리저리 연락을 하더니 오리오경찰서의 카타오카경찰관이 한 번 찾아 보겠노라 했다면서 주소를 남겨 달라고 했다. 반신반의하면서 주소를 적어 두고 귀국했는데, 6월달이 되어서 일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가타오카씨의 편지였고, 조사 경과의 설명과 그 사람의 아들인 久野壽壯씨가 얼굴을 보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는 말과 함께 사진을 찍어 동봉해 보내왔다. 그 사진을 보고 아버지는 단 번에 얼굴을 기억해 냈었다. 바로 지금 우리를 안내해 주고 있는 미타루의 부친이다. 그런데 이 만남을 20여일 앞두고 돌아가셨다니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가타오카가 살고 있는 宗像(무나가타)로 가서 전화를 했더니 약속한 식당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흔쾌히 나와 주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그는 커피를 마셨다.
옛날 아버지의 고생에 대한 위로의 말과 장수를 빌었다. 현정이는 지금 무엇을 잘 하는지와 장래 희망도 물어보고 가다가 먹으라고 과자도 한 봉지 사 주었다. 미타루가 식사 값을 내겠다는 걸 만류하고 이번엔 기어이 우리가 지불을 했다.
미타루와 가타오카씨가 福間(후쿠마)역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고 개찰구에서 전송해 주었다. 하카타역까지 가서 자고, 내일부터는 우리끼리 사세보로 움직일 작정이다. 하카타역은 큐슈의 관문이자 모든 큐슈여행의 출발점이라 할 만큼 여러지역으로 기차가 출발한다. 이름은 하카타역이지만 후쿠오카시의 중심역이다. 과거 후쿠오카와 하카타가 합쳐져서 후쿠오카시로 되었지만 하카타란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시설도 많다고 한다. 일본은 물론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지만 큐슈만 떼어놓더라도 GDP가 한국이나 호주, 인도 등을 능가하여 세계 10위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러니 후쿠오카로 말하면 세계 10위 경제대국의 수도와 같은 곳이라고 이 곳 사람들은 말한다.
하카타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博多 GREEN HOTEL 이란 호텔이 있는데, 전에 한 번 묵은 적도 있고 해서, 이 곳의 트리플 룸 하나를 11,400엔(세포함)에 얻어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은 전형적인 비즈니스 호텔로서 1000여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으며, 싱글룸 하룻밤 숙박에는 6,500엔(세포함)정도 한다. 일반호텔은 최소한 이보다 2배정도의 비용이 든다. 숙박료가 이렇게 비싼 점을 감안하면 일본에서 하룻밤 재워 주고 먹여 주는 것은 정말 대단한 호의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젯 밤 히사노 형제가 집에서 우리를 재워 줄 때 고맙다고 말하자, 할아버지의 친구이니 당연하다고 했었다. 형제들이 가정은 온존하지 않은 것 같아도 매우 인정은 있었다.
1월 15일 아침 하카타역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사세보로 향했다. 열차와 역의 모습은 달라졌겠지만 아버지는 57년 전에도 여기 어디에서 기차를 타고 이 길을 갔을 것이다. 감회가 없을 수 없으리라. 그 때 그래도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갔고, 가족을 재회했고, 자손도 생산하여 일가의 역사가 이어져 왔으니 말이다. 하마터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아들, 그리고 또 그의 아들인 손자와 함께 이 길을 다시 가게 될 줄을 그 때야 알았으랴. 만감이 교차하는 듯, 아버지는 눈 내리는 철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세보도 눈이 많이 내렸다. 역전의 파견소에 들러서 사정이야기를 했다. 하카타역의 파견소에서 미리 전화를 해 두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차리고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옛날에 사세보시 인근에 야마스미라는 탄광이 있었는데 찾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젊은 경찰관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지도를 꺼내어 표시를 해 주면서 거기 가서 파출소를 찾아 물어보라고 했다. 택시를 타고 오륙분 만에 그 곳에 닿았다. 그러나 그 곳은 아버지의 기억과는 전혀 지형이 다르다고 했고, 파출소에서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거기의 경찰관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57년여 전의 일이며, 여기 있는 아버지가 사세보시에서 약 4-5킬로 떨어진 탄광에서 일을 하였는데, 그 탄광의 이름이 「山住炭鑛(야마스미탄코)」였으며, 탄광의 바로 앞에는 강이 흘렀고 그 강의 상류에 댐이 있었는데, 탄광으로부터 그 댐의 콘크리트 둑이 보였다 는 등의 이야기를 죽 하였다. 그리고 그 터라도 있는지 또는 그 뒷산의 모습이라도 보고싶어 이렇게 한국에서 왔노라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심드렁하던 중년의 경찰관이 의자를 권하면서 바짝 다가앉아 두꺼운 지도책을 꺼내 뒤지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그러더니 거기서는 꽤 떨어진 거리에 「山住」라고 쓰며 「야마즈미」라고 읽는 지명이 있으며, 과거에 탄광이 있었다고 하며, 그 윗쪽에 댐도 있다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그리로 향했다. 택시기사에게 설명을 하자 댐이 있는 곳을 안다고 했다. 일단 댐이 보이는 곳까지 가자고 하고 한참을 가니 조그만 강이 나타났다. 강을 끼고 있는 도로를 따라 가노라니 아버지가 그 때 그 강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동네가 나오고 신호등에서 우회전을 해서 강을 따라 산비탈길로 접어드니 눈이 억수같이 내렸다. 그래도 운전수는 우리 이야기를 듣고 신이 나는지 눈길을 올라서 드디어 댐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잠시 내려서 둘러본 아버지가 이 댐이 틀림없는 것 같다고 했다.
다시 차를 돌려 오던 길을 좀 내려와서 조그만 가게에 들어갔다. 주인인 듯한 할머니가 나와서 야마즈미탄광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조금 아래쪽에 탄광이 있었다고 했고, 자기는 76세이며 그 당시 요 아래 마을에 있던 학교에 다녔고, 그 학교 아이들의 부모가 그 탄광에 많이 근무했다고 했다. 이야기를 시작하니 묻지도 않은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기의 동기생 중에 김씨가 한 사람 있었는데 매우 공부를 잘했는데, 종전이 되자 어디론가 가고는 소식을 알 수 없다고도 했다. 아무튼 이 노파는 그 때의 많은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곳이 그 때의 그 탄광지역이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택시를 대기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만하고 나와서 조금 더 비탈을 내려오다 아버지가 차를 세우게 했다. 내려서 강 건너 산을 바라보더니 바로 저기가 그 탄광 그 자리라고 했다. 역시 나무를 새로 심어 탄광의 흔적은 없었지만 지형을 보니 틀림없다고 했다. 입구가 약간 좁은 곳을 지난 자리에 조금 넓은 곳이 보였는데 그 곳이 사무실과 사택이 있던 자리가 틀림없다고 했다. 상기된 얼굴로 그 산을 등지고 서서 처음으로 스스로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한 참을 바라보다 대기하고 있는 택시의 요금에 생각이 미쳤음인지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돌아가는 택시 요금을 좀 깎아 보라고 하였지만 그냥 두었다.
이 곳에서 아버지는 비교적 편하게 생활을 했다. 워낙에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사장이 흡족해 하면서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었다고 한다. 한 번은 일본 순사가 찾아 와서 혹시 이상한 사람이 없는 지를 살폈는데 다행히 발각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버지를 합숙소가 아닌 사장 자신의 사택에 머무르게까지 해 주었고, 해방이 될 때까지 거기 있으며 월급도 받아서 고향에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때 그렇게 돈을 보냈다는데 집에 있던 어머니는 돈을 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한 지 일년쯤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었다. 아마도 술을 좋아한 조부님이 돈을 받아서 혼자 써 버린 게 틀림없을 터이다.
좀 전의 그 노파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50이 못된 김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고장에서 한국사람은 그 사람뿐이었고 아버지는 그 집에 더러 놀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상점의 노파가 말한 공부 잘 했다는 학생은 그 김씨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고맙게 대해준 사장도 그 김씨도 찾아보았으면 좋으련만 시간과 여건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전쟁이 끝나고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사장은 말했다고 한다. 지금 한국에 돌아가도 아직 사회질서가 잡히지 않고 어지러울 터이니 한 두 해 여기서 더 일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고.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해방이 된 감격과,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불안감 때문에 마음은 한 시가 급했을 터이다. 여기서 잠시 종전과 재일한국인 문제에 대한 경위를 살펴보면 이렇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당시 일본 국내에는 200만 이상의 재일한국인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으로의 조기 귀국을 희망하여, 하카타(博多)나 시모노세키(下關)와 같은 남부의 항구에 모여들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하루히코(東久邇宮稔彦) 내각(1945.8.17-1945.10.5)은 해방된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라는 환상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재일한국인에 대한 신속한 귀국과 구제라는 전후 처리에는 무관심하였다. 뒤를 이은 시데하라 키주로(幣原喜重郞) 내각(1945.10.9-1946.4.22)은 점령 당국과 협력하면서 치안을 유지하는 일에는 분주하였지만,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대우 개선 문제 등에는 무관심하였던 관계로, 재일한국인의 일본정부에 대한 불신은 깊어져 갔다.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는 한국인 노동자를 시급히 귀국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1845년 11월부터 직접 재일한국인의 귀국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재일한국인의 귀국자 수는 1946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반도는 신탁통치 문제로 혼란스러웠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귀국을 결정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GHQ가 귀국시의 지참금을 1천엔 이하로 제한한 것도 귀국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1945년 8월부터 1946년 12월까지의 1년 반 정도되는 기간 중에 귀국한 재일한국인은 기록에 의하면 102만 여명에 달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50만 여명의 재일한국인이 스스로 배를 마련하여 귀국 길에 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단기간에 150만 여명의 재일한국인이 귀국길에 올랐다는 사실은 전전의 재일한국인 형성의 역사가 자연스러운 노동력의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따른 부자연스러운 인구 이동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일본정부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싶어했으나, 이들의 법적 지위가 불명확한 관계로 확고한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GHQ조차도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지 못하자, 일본정부는 1946년 2월에 이르러, 일본에 남기를 희망하는 재일한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방침을 확립하였다. GHQ의 외교국도 1946년 5월, 재일한국인을 한국에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일본 국민으로 취급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외교국이 해방 민족으로서의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를 포기하고 일본 국민(=敵國民)으로 취급하기로 한 것은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권한을 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결정은 1946년 11월에 공식화되었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1946.5.22-1947.5.20)은 재일한국인에 대한 관리를 체계화하고 밀입국자 등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기 위해 외국인 등록에 관한 법안 작성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 5월 2일에 GHQ와의 협의를 거쳐 외국인 등록령을 공포하고, 2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7월 1일부터 등록을 개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를 재일한국인에게도 적용시켰다. 이러한 태도는 지금까지 재일한국인을 일본국민으로 취급해 온 방침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GHQ는 이러한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였고 재일한국인 단체는 끝내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본정부는 외국인 등록령의 경우와는 반대로, 재일한국인의 교육에 대해서는 일본 국민으로서의 교육을 강요하였다. GHQ는 이러한 일본정부의 정책을 지지하였다. 1947년 3월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이 공포되어 일본의 새로운 교육제도가 시행되면서, 일본의 지방행정기관은 재일한국인의 민족 학교에 대해서 등록을 요구하였다. 그 후 1948년에 들어와 조련(=재일조선인연맹) 계통의 학교를 중심으로 일본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재일한국인학교에 대한 폐쇄명령을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재일한국인은 일본법을 강제로 적용시키려는 지방행정기관과 일본경찰에 집단운동으로 대항하였으며, 특히 재일한국인 거주자가 많았던 오사카와 고베 지역의 재일한국인은 4월에 민족학교를 지키기 위한 맹렬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한신교육투쟁(阪神敎育鬪爭)이었다. 이에 대해 미군점령당국은 4월 25일 오사카와 고베 지역에 한해 일본점령군 최초의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무력으로 재일한국인의 운동을 저지하였다. 결국 재일한국인 단체는 5월에 이르러 일본정부와 일본의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을 준수할 것을 약속하는 각서를 체결하기에 이른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대일 강화조약 및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조인된 직후인 1951년 10월 4일 일본의 출입국관리령이 공포되었고, 이는 1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1852년 4월 28일에는 외국인 등록법이 공포, 시행되었다. 외국인 등록법이 종래의 외국인 등록령과 크게 다른 점은 14조에 재일외국인은 외국인 등록시 관계 서류에 지문 날인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외국인 등록법의 적용을 받는 재일한국인도 지문 날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 규정은 GHQ가 재일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밀입국자 등에 대한 관리 수단으로서 그 필요성을 제기하여 성립된 것이기도 하다. 지문 날인 제도가 철폐된 것은 1991년에 한일교환각서가 체결되고 나서의 일이다.
숨가쁘게 회한의 역사를 돌아보고 나니 서서히 피로가 몰려왔다. 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라는 벳부로 향했다. 긴장과 피로가 겹쳐서인지 현정이 자다가 코피를 쏟았다.
돌아오는 길에 세계 최대의 칼데라 활화산이라는 아소화산을 관광하고, 熊本(쿠마모토)를 들러 옛날 조선침략의 근거지라고도 할 구마모토성(가토키요마사가 축조한 城 : 일본 3대 성 중의 하나)을 관람할 예정이었으나, 계속해서 눈이 내리는 바람에 산간지역을 통하는 도로들은 통행이 금지되고 있다고 TV 아침 뉴스가 전하고 있었다. 아소산 쪽은 아예 포기하고, 벳부지옥을 관광하기로 했다. 이 곳 벳부는 지질학에서 말하는 태평양판과 유라시아대륙판이 만나는 곳으로서, 어디든지 땅만 뚫으면 온천수가 솟아나며, 수량이 무한정이라 아무리 써도 남아돌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別府시에서 건너다 보이는 大分(오이타)시에서는 전혀 온천수가 솟지 않는다고 한다. 그 곳은 딱딱한 태평양판 위에 얹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벳부지옥은 노천에서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곳을 관광지로 개발하여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보여주고 기념품도 팔고 하는 곳이다. 물이 끓어오르는 구덩이가 마치 지옥 같다 하여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海地獄」, 「山地獄」, 「龍捲地獄」 등 20여개소의 지옥이 성업하고 있으며 벳부지옥조합이란 것도 결성되어 있다.
벳부에서 하카타로 돌아와 일박하고 하카타항으로 출발했다.
비틀호가 하카타항을 출항한지 한 시간 채 못 되어 배 좌측으로 섬이 보였다. 대마도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현재 대마도의 인구는 4만 5천 정도이며 나가사키 현에 속한다고 방송은 덧붙이고 있었다.
종전 직후 아버지는 야마즈미탄광 사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 길에 올랐다. 항구에는 귀국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순서를 기다려서 연락선을 타려면 하자세월이었다. 마음이 급한 아버지는 闇(야미)로 작은 배를 구해 출항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오른 귀국의 길마저 순탄치 않았다. 작은 배는 폭풍우를 만났고 여기 보이는 대마도에 불시착하여 사흘을 피항한 뒤 다시 항해를 하여 닿은 곳은 경남 통영이었다고 한다.
하카타항을 떠나서 닷새가 걸린 것이다. 통영에서 다시 배를 타고 마산으로 가서, 마산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땅 군위군 우보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45년 8월 열 하루, 떠난 지 만 1년이 지난, 추석을 나흘 앞둔 바로 그 날이었다. 이렇게 하여 끊어질 뻔했던 한 가족의 역사는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終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