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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관련자료실 스크랩 퇴계이황의 사상
石泉 추천 0 조회 16 08.07.02 16: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Ⅰ. 서론

  퇴계 이황은 조선조의 연산군 7년(1501)에서 선조 3년(1570)까지 생존한 성리학자로서, 후배 학자인 율곡 이이와 더불어 흔히 조선조 성리학계의 두 거봉으로 숭앙되는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하여 이미 많은 업적을 남겨 놓고 있고, 고매한 인격으로 지연과 학연을 초월하여 거국 적인 존경을 받아왔다.

  퇴계이황하면 그의 성리학의 기반을 두고 있는 철학적 사상을 먼저 떠올린다. 그의 철학적 사상은 우리나라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퇴계이황의 사상적인 연구보다는 그의 공직 생활과 학문적인 생활 자세를 중점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Ⅱ. 본론


1. 퇴계 이황의 생애


 1) 퇴계 이황의 출생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퇴계 이황의 수학 시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의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 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었다. 퇴계 이황은 이때부터 성리학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퇴계 이황의 관직시기

  퇴계 이황은 32세 때 문과의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34세 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그 후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는데, 당시에 권력의 실세인 김안로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켜 권력자를 찾아가 만나지 않았다. 이에 김안로는 앙심을 품고 그의 승진을 가로막아 첫 출발에서 시련을 맞아야 했다.

  이듬해 호송관으로 왜인을 동래까지 보내주었으며, 36세 때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에 올랐다. 39세부터 44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이 무렵 경연에 나가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에게 식사 때 반찬가지수를 줄일 것과 죄인을 사면하는 일을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임금의 덕을 닦도록 정성껏 간언하였다. 또 왕명을 받아 어사로 나가 충청도 지역을 돌아보고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어사로 강원도 지역의 재해를 시찰하였다.

  44세 때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으나 이 시기에 병으로 못 나가는 일이 잦았으며, 중종이 승하하자 중국에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였는데 두 표문을 지어 중국 예부관원이 표문의 문장과 필법을 칭찬하였다 한다. 그 당시 왜구의 사량진 침입 이후 정부는 대마도와 교류를 단절하였는데, 왜인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교류를 요청하자 그는 왜인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고 일본과 강화를 허가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그는 대마도에 보내는 답서와 일본군 장군에게 보내는 답서 등을 지었으며, 외교문제를 원칙과 현실의 조화로서 해결하려는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을사사화가 일어나 권력을 잡고 있던 간신 이기의 상소로 한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죄 없는 사람을 벌 줄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 곧 복직되었다.

  48세, 49세 사이의 2년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외직에 나가 있었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는 일이 말고 간결하였으며 아전이나 백성들을 모두 편안하게 해주었다.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그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편액과 서적을 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서원이 융성하게 되었다. 그 후 감사에게 세 번 사표를 내었으나 회답이 없자 해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관직에서 파직 삭탈 당하였다. 

  52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경연시독관을 겸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의를 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학의 선생과 학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학풍이 퇴락함을 지적하고 예의를 바로잡도록 타일렀는데 무너진 학풍을 회복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명종이 21세가 되자 수렴청정하고 있는 대왕대비에게 임금이 친정하도록 정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지어 올렸다. 또한 여러 제문을 지었으며 새로 중수한 경복궁의 전각과 편액을 쓰는 등 당시 국가의 중요문서와 궁중의 기록이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55세 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여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58세 때 임금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대사성으로 나갔다. 59세 때 휴가를 받아 귀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임금의 재촉으로 67세 때 서울에 다시 올라왔다. 며칠 뒤 명종이 승하하여 명종의 행장을 지었다.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거듭 사표를 올려 두 달 만에 다시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68세 여름 또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임금은 퇴계를 깊이 신임하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의 중책을 겸임시켰지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였으며, 임금은 휴가를 내리고 내의원을 보내어 문병하며 음식물을 하사함으로써 세심하게 공경하였다. 이 때 새로 등극한 17세의 선조임금에게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렸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원리와 당면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경연에서 임금의 도리를 진언하고, 선조를 위하여 자신의 평생 학문을 응축하여 성인이 되기 위한 수양의 원리와 방법을 집약한 성학십도를 올렸으며,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69세 때 판중추부사로서 재상들과 문소전의례와 법도를 고증한 일이 조정에서 활동한 마지막 사업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남길 말을 요구하였고, 이에 그는"태평한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나라는 항상 위난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은 겸허하여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성학십도에 관한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임금의 요청에 따라 이응경과 기대승을 천거하고 돌아갔다.

  69세 때 이조판서,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겼다. 귀향한 이후로도 모든 벼슬을 벗고 은퇴하기를 거듭 상소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강직한 퇴계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는 벼슬을 사양하였고, 퇴계를 아끼고 공경하는 임금은 그의 벼슬을 거둘 수가 없었다.

  70세 겨울 그의 병이 위중하자 임금은 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게 하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조정에 올라가자 임금은 애통해하며 영의정으로 증직을 명하였고,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는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30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질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일단 직책을 얻으면 책임을 다하고 소신껏 일을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행한 일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무를 겸비한 국방책, 침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인 걸물절왜사소, 왕도를 깨우친 무진육조소,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 성학십도를 올려 나라의 교학을 개혁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을 하여 농업을 진흥시켰고, 단양에서는 팔경을 지정하여 자연을 가꾸었으며,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수를 기록하여 치산과 등산하는 법도 등을 남겼다. 충청, 경기, 강원에 어사로 나가서는 탐관오리를 잡아내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아서는 행패를 막았고,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시켰다. 궁궐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문서 작성 등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4) 퇴계 이황의 은퇴 강학 시기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 이황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퇴계 이황의 사망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2. 퇴계 이황의 업적 및 평가


 1) 퇴계 이황의 사상

  퇴계는 16세기 중반에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토대 위에서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한국 성리학의 특징인 심성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사상적인 연구는 너무나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사상은 한국 성리학의 지대한 공헌을 미쳤으며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더욱더 연구를 거듭해 현재 퇴계학이라는 학문이 있을 정도이다. 그의 사상을 전부 살펴보기에는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간단히 중요 부분만 서술 하겠다.


①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리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의 주기설 및 오초려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

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정한다.


②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된다.


③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 사상적 특징과 업적을 보면 한국화한 성리학이라는 중점을 둔다. 그 첫 번째로 퇴계의 사상은 양명학을 배척하고 정주학의 입장을 취하였다. 퇴계 이후 양명학은 한국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한다. 중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한국의 양명학은 거의 전무에 가까운 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두번째로는 정주학 중에서도 주리적 이기 이원론을 견지하였다. 한국에서 기에 치중하는 철학은 이미 화담에서 두드러지는 반면, 이에 치중하는 철학은 이언적(1491~1553)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하지만, 이러한 경향이 각기 주리론, 주기론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오로지 퇴계의 사칠론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중 주리론은 퇴계로 말미암아 완전히 사림파의 철학이 되어 정통철학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특히 사칠설과 같은 심성론의 이론적 탐구를 병행하는 주지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 퇴계의 사칠설은 당시 학계에 관심을 집중시켰음은 물론 후대 학자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어, 마침내 조선 성리학자들의 필수적인 문제로 되었고, 결국 조선 성리학 풍토 위에 처음으로 학파의 형성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조선 성리학이 다른 나라와 달리 심성론을 중심으로 한 정주계 성리학으로서 내향적 이론 추구의 경향으로 발전하였고, 그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이 더욱더 강한 독자성을 지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인 연구는 이웃나라인 일본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2) 퇴계 이황의 교육

  퇴계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그의 교육관을 밝힌 적이 있다.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의 본거이다. 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지도록 하라. 서로 채찍질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라." 이 말은 올바른 선비를 길러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 퇴계 이황이 지향했던 교육자상 이었다.

  퇴계 이황은 이러한 교육관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맨 먼저 소학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 심경, 논어, 맹자 및 주자서를 가르친 다음 모든 경서를 가르쳤다. 또한 처음 배움에 나아가는 제자가 읽어야할 고전으로서 특히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퇴계 이황은 이러한 교육의 자세로써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많은 후학 양성으로 그의 학문적인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후세에도 그의 학문이 더욱 빛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퇴계 이황은 과거 시험 준비나 출세를 하기 위한 학문 풍토를 개선하여 출세 지향주의를 지양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쓰는 풍토를 만들어 그의 후학들도 공직뿐만 아니라 후학양성에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하여 제자양성에 힘을 썼고,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상을 확립하였다. 퇴계 이황은 스스로 제자를 사랑하는 올바른 스승상을 정립하여 그의 모습은 제자들의 사상적인 기틀을 잡아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3) 퇴계 이황의 문학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한 분이다. 전문적 저서는 별도로 하더라도 일기는 손수 쓴 것 4년분 외에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9종이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60수, 편지는 3천 수 백편이 문집에 전하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긴 글이 문집에 298편 실려 있다. 퇴계의 시는 '도산전서' 중에 실린 것이 2천여 편이 넘을 만큼 풍성하여 종전의 학자 문집 중에서 보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전문작가의 시집 중에서도 보기 드믄 존재였다.

  퇴계는 조년부터 종년까지 사이에 중국문단의 명시인들의 시의 영향을 받았다. 곧 도연명·두보·한유·유종지·백락천·유우석·구양수·소동파·소옹·주희 등의 시를 읽고, 차운·용운·화운했다는 것은 문집 도처에 보인다. 그 중에도 도·두·구·소·주의 시를 가장 사랑하였다. 초년엔 도·두시를 중년엔 소시를 만년엔 주·소시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도두주시를 즐겨 읽고 인간서정을 승화시켰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퇴계의 저술을 다 읽은 이는 없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여 읽기도 힘들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일기와 한글 편지는 거의 행방을 알 수 없고 그의 수학에 관한 글과 계몽전의는 어려워서 잘 해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퇴계 이황은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하게 하였으며,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4) 퇴계 이황의 생활

  퇴계 이황은 생활에서 합리적인 모습이 돋보인다. 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퇴계 이황은 그의 생활 속에서 흠을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인격자였다.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학봉집'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 이황은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퇴계 이황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 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Ⅲ. 결언


  퇴계 이황은 일생의 학구생활을 통하여 성리학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을 세움으로써 당시의 학자나 유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관리로서의 청렴하고 조심스러운 그의 생활은 그를 청백리로 만듦으로써 여러 사람의 숭앙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는 당시의 국왕이나 신료들로부터 아낌을 받았고, 따라서 그들은 그를 늘 국왕의 측근에 두고 고문의 임무를 맡기고자 간절히 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왕이나 신료들의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늘 사직, 귀향할 것을 희망하였고, 따라서 그의 관직생활은 공백기가 많은 산만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늘 현실에서 멀리 떠나 향곡에 숨고자 노력한 것은 중종기의 기묘사화와 특히 그의 형이 피화한 을사사화로 인한 직접적 충격과 사화 후의 사습의 퇴폐 및 세도의 탁란에 말미암은 점이 적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사화를 겪고 난 뒤 사림에는 현실의 정계를 떠나서 향곡에 숨어 살려고 하는 현실기피적․은둔적인 풍조가 생겨나서 이황처럼 출사에 신중을 기하거나 출사를 완전히 체념하는 인물도 드물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본질적인 요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곧 그의 성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의 성품에는 다소 소극적, 피동적인 일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를 스스로의 학문의 성취와 인격의 수양에 만족하는 학자형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데는 매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폐의 리정이나 시정의 개혁에 공헌할 만한 탁월한 능력과 강렬한 참여의식을 갖춘 바람직한 관료형 인간으로 그를 성장시키지는 못하였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성리학을 확고한 기반 위에 정착시키고 또 그 차원을 높이는 데 공헌함으로써 후대에까지 추앙을 받게 되었던 것이나, 그가 성취한 학문을 현실에 도입하여 정치적 경륜으로 적용하는 데까지는 끌고 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은 자기가 터득한 학문의 지식을 현실에 도입하여 온갖 시대적, 인적 악조건을 무릅쓰고 「지치」의 현실을 꾀하다가 마침내는 스스로의 피화를 자초하였던 조광조의 경우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광조가 적극적․능동적․현실참여적인 특징이 강한 관료형 인간이었다고 한다면, 이황은 순수․겸허․염정․명백한 성격의 학자형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황의 성품․생활태도라든가, 관직관․현실참여태도․업적 등을 종합해 볼 때, 그는 탁월한 행정능력과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지닌 훌륭한 관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성실성을 지니고 학문에 집착하여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또 후대에까지 큰 영향력을 지닌 훌륭한 학자였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참고문헌

『한국의 사상가 10인 퇴계 이황』-예문 동양 사상 연구원 저- 《예문서원》

『퇴계이황의 삶과 교훈』 -하창환 김종석 저- 《일송미디어》

『이퇴계의 실행유학』  -권오봉 저-  《학지원》

http://members.nate.com/hyosang/

http://www.toegye.ne.kr/

http://my.dreamwiz.com/ohjs7/iw/iw1s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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