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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제독의 '일본접수' 간략소개
미국해군 동인도함대 소속의 전단 4척을 이끈 페리제독은 1853년 대서양을 건너는 '아시아대장정'에 나섰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Capetown)을 지나 홍콩, 상하이, 오키나와(沖縄)를 차례로 순례 하고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 도쿄 남남동 1,000km 태평양의 30여 작은 섬)를 거쳐 1853년 7월8일 드디어 도쿄만 우라가(浦賀) 항에 입항했다.
▲ 페리의 함대를 묘사한 일본인의 그림. 일본은 19세기의 아시아 해안에 빈번하게 출몰했던 서구 함선들을 '흑선' (黑船; 검은 배)이라 불렀다. 엄청나게 큰데다 색깔까지 거무튀튀했기 때문이다. 흑선에 대해 일본인들은 반쯤은 호기심으로, 또 반쯤은 그들의 무력에 공포심을 느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서구 함선들을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렀는데 "조선 배와는 생김새가 틀렸기 때문" 이다.
페리제독 일행의 일본해안 상륙모습에 대해서 당시 일본기록은 "태평스럽게 잠자는 일본을 깨운" 요란스런 행차였다고 전한다. 가장 크게 놀란 쪽은 일본의 실세정권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미국함대의 가공할 만한 함포위력과 상륙군 무장에 대해서 익히 알고있는 터여서, 막상 상륙군을 실은 미군함대가 도쿄의 턱밑에 정박하자 초긴장상태가 됐던 것. 당시 일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주력군 무장이 '화승총(뎃포)'이었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붙어봤 자 승산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쿠후는 결국 미국의 힘 앞에 굴복, 쿠리하마해변(久里浜) 상륙 허가를 내 주었다. 7월14일 일본 땅에 상륙한 미국군은 무장한 채 시위행진을 벌였고, 페리제독은 미국대통령 친서를 바쿠후 측에 전하면서 "내년에 와서 답장을 받겠다" 며 떠났다. 페리 제독은 1854년2월 다시 쿠리야마에 상륙, 일미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체결을 성사시켰다.
이때부터 일본은 개국을 서둘렀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거쳐 "빨리빨리" 서구 산업화를 추진하고 무력증강에 나서 제국주의의 기틀을 닦아나갔다. 페리제독이 처음 발을 디뎠던 쿠라야마 해변 에는 지금 '페리제독 상륙기념비'가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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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땅에 처음 상륙한 미국인들"(First landing of Americans in Japan) 이란 제목의 당시 미국 언론보도.
▲ 전함에서 상륙한 미국군의 질서정연한 사열과 행진에 일본당국은 완전제압 당했다.
무력시위에 굴복한 일본 에도바쿠후는 '항복'을 택했고, 미국의 조약을 받아들였다.
사진 속에서 미군시위에 압도당한 일본군들이 '구경꾼'처럼 미군주위에 모여있다.
▲ 페리제독을 앞세운 미국측 수행원들이 일본 바쿠후가 마련한
요코하마(横浜)의 회담장으로 들어서는 모습. 회담장 주변을 무장한
미국병사가 줄줄이 늘어서서 위압적인 분위기로 경호하고 있다.
일본측 협상 대표단이 기다리는 막사 앞에서 미국대표단을 맞는
일본측 관계자의 태도가 매우 '공손' 하다.
▲ 1854년 2월에 다시 일본 우라가(浦賀)에 상륙한 미 페리제독(그림
왼쪽)이 통역자를 대동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본 바쿠후 측 회담
관계자의 깍듯한 인사를 받고있다.
요즘 일본인들은 '일본개항'을 어떻게 생각할까. * 2010.5.28일자 요코하마 경제신문(横浜經濟新聞)의 '일본개항 칼럼' 발췌.
1853년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페리제독이 이끈 4척의 흑선(黒船)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다음해인 1854년에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고, 1858년에는 일·미수호 통상조약이 요코하마에서 체결됐다. 그리고 1859년 6월2일 요코하마가 개항했다. 동시에 나가사키(長崎)와 하코다테(函館)가 개항했으며, 그 후 니가타(新潟)와 코베(神戸)도 개항을 맞았다.
230년간이나 지속됐던 일본의 쇄국시대는, 흑선과 함께 찾아온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6년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래서 요코하마의 개항일은 근대일본의 새벽햇살이 비친 날 임과 동시에 일본을 대표하는 항구거리로 이름을 날리는 첫 울음을 터뜨린 날이었다고 여겨진다. 6월2일은 문자그대로 요코하마의 탄생일이자 요코하마 시민으로서는 특별한 날인 것이다.
현재의 요코하마 모습만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상상이 안 될지 모르겠지만, 개항 당시 요코하마는 80가구에 불과했고 반농반어(半農半漁; 농사 반, 어업 반)의 자그만 시골동네였다. 당시 페리제독의 통역을 맡아 동행한 선교사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밭은 잘 경작됐지만, 살림집을 살펴보면 누추했다. 길가에는 똥을 담은 비료통이 줄지어 늘어섰고, 마을에는 악취가 풍겼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는 요코하마가 아니라도 나가사키나 코베등은 이미 항구로서 발전한 도시가 있었지만, 페리제독은 국제적 관례로서 행정부(바쿠후)가 있는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조약을 맺는 것이 원칙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 바쿠후는 왜 낙후된 어촌마을 요코하마를 조약체결 장소로 선택했을까. 그 하나는 바쿠후가 위치한 에도에 외국인의 발을 들여놓게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본의 간선도로인 도카이도 (東海道; * 필자 註; 일본의 5대 간선도로 가운데 하나로 도쿄와 쿄토를 잇는 도로. 우리의 '경부선'에 해당하는 도로다)를 따라 미국군이 행진할 때, 일본인과 접촉에 따른 분쟁발생 소지를 사전에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출처: http://www.hamakei.com/column/218/>
(일어 기사원문)
1853年、浦賀沖にペリー提督が率いる4隻の黒船が現れたのをきっかけに、 翌1854年に日米和親条約締結、1858年には日米修好通商条約が横浜で締結さ れ、1859年6月2日に横浜港は開港した。同時に長崎と函館、その後新潟と 神戸も開港を迎える。
230年の長きに及ぶ日本の鎖国の時代は、黒船とともに訪れた激動の時代の中、 来航から6年後に幕を下ろした。そして横浜港の開港日は近代日本の黎明の日 であると同時に、横浜が日本を代表する港町として産声をあげた日である ともいえる。6月2日は文字通り横浜の誕生日であり、横浜市民にとって 特別な日なのである。
現在の横浜を知る人にとっては想像できないことかもしれないが、当時の 横浜は戸数にして80戸、半農半漁の小さな村であった。当時ペリーの通訳 として同行していた宣教師の記述よれば、「畑はよく耕されているが、 住まいを見ると豊かではない。道ばたには糞尿の肥料を入れた桶が並んで いるため、村には悪臭がにおっている」という風景だった。
当時、横浜でなくとも長崎や神戸などすでに港として発展した町があった ことに加え、国際的な慣例として、幕府のある江戸で条約を結ぶのが筋で あるとペリーは主張したという。
にもかかわらず、なぜ江戸幕府はまだ拓けていない横浜を締結の場所として 選んだのか。ひとつには、幕府のある江戸に外国人を入れたくなかったという ことがある。そしてもうひとつには、東海道沿いを避けることによって、 外国人と日本人の接触によるトラブルを避けたかったという意図も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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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을해왜요(乙亥倭擾)와 강화화승총 - 일본측 기록. 끝
* 본문내용은 강화 화승총동호인회의 소중한 지적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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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화화승총의 기증자가 일본의 골동품시장에서 구입하였다고 하였는데 윗글에 각종 군용물을 절취해간 과정이 간략히 기록되어있듯이 이놈들이 그때 뺏아갔던 것이었다고 봐야 하겠네요.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정말 분통터지는 노릇이지요...
강화역사박물관에 고이 모셔져야 했을 우리 조상들의 유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강화 화승총은 총신에 "신축년(1901년)..." 이란 붓글씨 명문이 있었던 걸로 보아서,
을해왜요때 노획해간 물건이 아니라, 왜(倭)가 한반도를 강점했을 때 "모조리 쓸어가듯" 헐값에 수집해간
유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36년간이나 됐던 식민지시절에 강화 화승총말고도 국보급 문화재도
엄청 많이 일본에 반출되었을 겁니다. 아마, 우리 국립박물관 소장품 수십배는 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ㅠ.ㅠ
으... 생각만해도 분통터지는 노릇입니다.
그렇군요 명문에 신축년(1901년)이 기록되어있다면 1907년 8월경 군대해산에 이어 그해 9월 총포화약단속법으로 엮어 모조리 걷어갔을때 가져간것이라고 봐야겠네요. 상태가 좋은 물건은 (제국주의 일본 군인들이)개인소장도 하고 후손이 골동품시장에 내다팔기도 하고 그랬겠지요. 그래도 현 강화화승총은 골동품시장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기증자 분이 명문을 보고 재빨리 챙기셨던것 같습니다.
일본이 미국을 통하여 개항을 한 것은 정말 기가막히게 좋은 계기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단순하게 (좋게만) 평가할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