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봄의 서막
창밖은 눈부시게 푸르다. 능글능글한 봄바람이 담벼락을 타고 넘어와 마당의 마른 풀들을 간지럽히는 계절이다. 생명의 태동으로 가득 차야 할 이 맑은 하늘 아래, 지구 반대편에서는 21세기 최초의, 그리고 인류가 도달한 가장 잔혹한 첨단 무기들이 불을 뿜고 있다. 2003년 3월 20일. 오늘, 세계는 다시 한 번 화약 냄새에 절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전쟁은 비현실적일 만큼 정교하다. 그러나 그 화려한 그래픽 뒤에 숨은 본질은 ‘균형’이라는 단어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일방적인 유린이다. 이것은 대등한 힘을 가진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다. 한쪽의 일방적인 폭격으로 치러지는 이 참상은 강대국의 힘의 논리가 얼마나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거인과, 녹슬고 닳아 문드러진 탱크 몇 대가 고작인 아이의 싸움. 말이 좋아 전쟁이지, 사실상 어른이 아이를 골방에 가둬두고 개패 듯 때리는 일방적인 폭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흔히들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 비난하지만, 냉정히 되짚어보자. 그들이 주변국에 가한 실질적인 위협이란 수년 전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실 정도다. 하지만 그 침공조차 실상은 과거 대영제국이 식민 통치 시절 제멋대로 그어놓은 땅가르기의 부산물 아니었던가. 본래 하나였던 영토를 강대국의 자로 잰 듯 나누어 놓았으니, 잃어버린 제 땅을 찾겠다는 이라크의 논리를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서글픈 우리의 현대사를 떠올린다. 우리 역시 구소련과 미국의 신탁통치라는 이름 아래 허리가 잘리지 않았던가.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분단의 현실 속에서 엄청난 안보 비용과 생존의 위협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의 나라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밑바탕에 석유 자원을 선점하려는 꿍꿍이가 있다는 것은 이제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간 산유국들의 단합체인 OPEC은 강대국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한 미국의 조종 능력이 예전만 못해지자, 그들은 ‘대량살상무기’라는 핑계를 앞세워 전격적인 침공이라는 칼을 빼 든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반전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정의로움 때문만은 아닐 터다. 이라크의 석유 이권을 쥐고 있던 자신들의 밥그릇을 미국에 뺏기지 않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음을 우리는 안다. 결국 이 전쟁은 인간의 존엄이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극도 서슴지 않는 강대국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서글픈 표본일 뿐이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는 해악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역사는 전쟁을 통해 문화를 전파하고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파괴의 현장에서 문명의 이기가 싹튼다는 이 기막힌 비극은 우리를 더욱 허탈하게 만든다. 지금 이라크를 태우는 저 불꽃도 훗날 누군가에게는 기술의 진보로 기록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싫다.
정작 두려운 것은 이 전쟁의 끝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의 다음 표적이 어디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수많은 전문가가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을 지목하고 있다. 미국의 비밀문서가 시사하듯, 만약 한반도에 전란의 불길이 옮겨 붙는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재앙이다. 서울에서만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고는 이미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와 있다.
우리는 이미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다가올 전쟁은 50년 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때의 전쟁이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현대의 무기 체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량 살상을 실현한다. 최전방에 배치된 북한의 곡사포 8천여 기가 일제히 남쪽을 향해 불을 뿜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소총을 들고 산야를 누비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는 앉은 자리에서 도시 하나가 증발하는 시대다.
이런 위기 속에서 나는 자문해 본다. 과연 우리나라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목숨을 걸고 전선으로 나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즘의 세태를 보건대, 아마도 앞 다투어 도망가느라 정신들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의문이 든다.
내가 군복을 벗은 지 어느덧 15년이 지났다. 하지만 장롱 한쪽에는 여전히 가지런히 정리된 내 군복이 걸려 있다. 나는 언제나 가족들에게 말한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주저 없이 전선으로 달려갈 것이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내에게 나는 덧붙인다.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 갈 생각 말고 지금 사는 이곳을 지키며 기다리라고.
전후방의 경계가 사라진 현대전에서 손바닥만 한 이 땅 어디로 피난을 간단 말인가.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이 좁은 국토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평화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의 미사일이 이라크의 밤하늘을 찢고 있다는 소식이 방송을 장악하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미국이 공언한 기간보다 훨씬 빨리 점령이 끝날 것이라 호언장담한다. 나 역시 압도적인 화력 차이를 보건대 미국이 승리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 간과하고 있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민족성’이다. 이라크는 아프리카 정글의 이름 없는 부족 국가가 아니다. 인류 문명의 한 축을 이루었던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의 후예들이다. 저들의 민족의식은 결코 미국의 장단에 순순히 춤추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일제 강점기 우리 선조들이 그러했듯, 이라크 국민들은 점령군에게 뼈아픈 시련을 안겨줄 것이다. 미국은 첨단 무기로 승리를 거둔 그 순간부터, 정말 고통스럽고 긴 전쟁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부디 무고한 시민들의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기를. 그리고 이번 사태를 보며 우리 국민들도 뼈저린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지도자 한 사람이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좌지우지하는지 똑똑히 목도하지 않았는가. 제발 지역감정이나 편 가르기에 휘둘려 지도자를 뽑는 어리석음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최후의 보루는 결국 그 나라 국민의 지혜와 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화마가 휩쓰는 이라크의 밤하늘을 보며, 나는 우리 땅의 평온한 봄날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것인지 새삼 실감한다. 장롱 속 군복의 매무새를 다시 한 번 가다듬으며, 이 맑은 봄이 부디 비극의 서곡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