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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회도(素惠繪圖) |
| [대기원] 보살은 청량한 달과 같이 항상 필경공(畢竟空)을 유주하거니 (菩薩清涼月,常遊畢竟空) 수없이 긴 세월 소원 이루기 위해 앞으로 호탕하게 나아가노라 (為償多劫願,浩蕩赴前程)
이 한수의 시는 하나의 극히 광활(浩瀚)한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부처와 보살은 무수한 원(願), 무수한 중생을 업고 세상에 왔다. 사람을 구도하기 위해 큰 위험을 무릅쓰고, 큰 업을 감당하고 육도윤회로 진입했다. 청량한 달을 따라 공(空)마저도 없는 끝없는 필경공(畢竟空)의 경계로, 탁하디 탁한 세상속으로 왔다. 호탕한 자비와 용기로 이름도 명예도 없이...
중국 역대 왕조의 기재를 살펴보면, 부처를 공경한 황제가 있었는가 하면 멸불(滅佛) 정책을 펼친 황제도 있었다. 특히 불법(佛法)을 가장 숭상한 황제는 양(梁) 무제(武帝)와 수(隋) 문제(文帝), 북위(北魏)의 도무제(道武帝)·효문제(孝文帝)·문성제(文成帝)·선무제(宣武帝), 유송(劉宋)의 문제(文帝), 진(陳) 무제(武帝)가 있으며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불교를 숭상하는 황제가 있었으니 바로 청(淸) 옹정제(雍正帝)다.
옹정제의 일대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청조의 의심스러운 몇가지 사건(疑案)을 주목한다. 이를테면 강희제가 옹정제에 황위를 넘기는 과정에 관련된 ‘개조탈위(改詔奪位)’, ‘옹정제의 사인(死因)’ 등이다.
이외에도 옹정제와 관련된 야사는 많다. 옹정제가 황제로 등극하기 전 왕자들이 태자의 자리를 가지고 다투는 것을 그린 ‘구왕탈적(九王奪嫡)’, 옹정황제가 형제 등 정적을 암살할 때 썼다는 암기 ‘혈적자(血滴子)’에 관한 야사, 신하들의 글을 트집 잡아 처벌한 ‘문자옥(文字獄)’ 등이다.
야사의 대부분은 옹정제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사람들은 흔히 옹정제를 엄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옹정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만청십삼황조연의(滿清十三皇朝演義)’와 같은 후대의 야사와 소설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저작물들이 편협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옹정제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은 깊이 새겨져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있다.
최근 청조에 대한 사료가 대거 공개되면서 옹정제의 일생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해졌다.
사극 전문 작가인 얼웨허(二月河)는 청나라의 부흥기인 이른바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끈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황제 3대에 대한 소설 ‘제왕삼부곡’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중국과 한국 등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TV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이와 함께 학자 펑얼캉(馮爾康)은 전통 사학의 각도에 입각해 옹정제에 대해 새롭게 연구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시도는 이전보다 옹정제에 대해 비교적 정면으로 접근하고 있다. 다만 얼웨허는 겉으로는 옹정제를 숭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옹정제의 사인을 난륜과 치정살인으로 그리는 등, 실제로는 옹정제를 두 번 먹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했다.
펑얼캉은 ‘탄정입무(攤丁入畝-인두세를 개혁해 가난한 사람들이 인신의 구속을 당하지 않도록 한 개혁조치)’ 등 옹정제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부각시켜 옹정제를 ‘강옹건(康雍乾)’의 한 축을 담당한 뛰어난 황제로 그렸다. 다만 옹정제와 불교의 긴밀한 관계를 생략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만약 옹정제의 신앙과 인생관, 우주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옹정제의 정책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옹정제의 집정을 살펴보면서, 필자는 옹정제의 사유와 행동에서 시대와 시공을 초월한 무언가를 느꼈다. 사람의 행위에는 일반적으로 관성과 맥락이 있기 마련인데, 옹정제의 시정(施政)에도 일관된 흐름이 있다. 그것은 정치를 시행함에 있어 옹정제 자신의 불교수행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이를 떼놓고서는 옹정제를 설명할 수 없다.
이제 이 글의 제목인 ‘만주와 문수보살’에 문수보살이 들어가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와 옹정제의 관계, 제목에서 언급한 옹정제와 문수보살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기에 앞서 짚어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만주(滿洲)의 기원이다.
앞서 소개한 “항상 필경공(畢竟空-부단공(不旦空)이라고 하며 유(有)를 인정하지 않는 공(空)도 역시 공하다는 절대 부정의 공을 일컫는다)을 유주하는 보살”에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일 것이다. 혹은 지장왕보살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 중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만주사리보살(曼珠師利菩薩)’이나 ‘만수실리보살(曼殊室利菩薩)’이라고 부른다.
사실 문수는 모든 부처의 지혜를 체현한 것으로 이는 지혜의 주불(本尊)이라 할 수 있다. 문수는 범어로 만주(Manju)라고 음역할 수 있으며 ‘오묘한 덕(妙德)’이나 ‘오묘한 행운(妙吉祥)’을 뜻한다. 중국 4대 불교명산 중의 하나인 오대산(五臺山)에는 문수보살이 세상에 응화(應化-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남)한 도장(道場)이 아직 남아 있다.
유마힐경(維摩詰經)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도의 대부호였던 유마거사는 홀로 수련하여 경지가 자못 높아 그와 자신있게 법담(法談)을 나누는 이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어느 날 유마거사는 '모든 중생이 앓고 있음으로 나도 앓고 있다'는 마음의 병을 앓게 된다. 하지만 모든 대나한과 대보살이 감히 석가모니 부처를 대신해 병을 앓고 있는 유마거사를 문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때 지혜로운 문수보살이 몸을 일으켜 유마거사를 찾아 나섰고, 다른 대나한과 대보살도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만난 문수보살과 유마거사는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한 유명한 법담(法談)을 나누게 된다. 이후 몽폐된 모든 이들은 문수보살을 극도로 숭배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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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카(唐卡-티베트 탱화)에서 묘사한 문수보살(文殊菩薩-Manjusri).ⓒ 그림출처=위키피디 |
| 여진족의 선조에 대한 신화
여진족의 전설에 따르면, 동북지역 장백산(백두산) 천지의 물이 아주 맑아 천녀(天女)들이 내려와 몸을 씻었다. 그 중 ‘불고륜(佛古倫)’이라는 천녀가 있었는데, 목욕을 하기 위해 벗어 놓은 옷에 한 쌍의 까치가 물어 놓은 빨간 과일을 먹었다. 이로 인해 불고륜은 잉태를 하게 되고 남자 아이를 낳게 되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할 수 있었고, 빠른 속도로 자라 금새 어른이 되었다. 불고륜은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천명을 받들어 인간 세상에 온 것이니 혼란스러운 이 나라를 평정하거라.” 그러고는 아들에게 쪽배 하나를 줘 물을 따라 내려가게 했다. 불고륜은 날아서 천국세계로 돌아갔다.
후에 불고륜의 아들은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으로 불렸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離雍馴)이었다. 그는 산 아래 부락의 분란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생활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게 했다. 그가 일으켜 세운 나라는 훗날 청나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전설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시초가 천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려준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전력이 분산되자 여진족은 명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동북지방을 통치하게 됐다. 여진족은 1375년(홍무(洪武) 8년) 요동지역에 지휘사령부를 설치하고, 각 부족이 모여 힘을 합치게 된다. 당시 건주여진(建州女真)이라 불리던 이 지역은 3개 부족으로 나눠져 있었다. 시조 포고리옹순의 후손인 애신각라 누르하치(努爾哈赤·1559~1626)는 각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요령성 신빈(新賓)현 사로(西老)성에서 칸(汗)에 즉위한다. 나라의 이름을 대금(大金)이라 했다.
만주와 만수는 문수의 대용어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난 난 후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칸을 승계한다. 1636년 홍타이지는 심양에서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숭덕(崇德)이라 개원(改元)했다. 또한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치고 여진족을 만주(滿洲)족 혹은 만수(曼殊)족이라 고쳐 부르도록 했다.
원래 변경된 부족명은 만주나 만수가 아닌 문수(文殊)였다. 만주는 다만 음역해서 한자로 표기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홍타이지는 문수라고 하지 않았을까? 최근 역사 자료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료에는 홍타이지가 집권하기 이전에 문수(文殊)라고 불리는 족장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전 족장의 이름을 부족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수와 비슷한 발음의 만주와 만수를 대신 택했던 것이다.
중화민국 건립 후에도 청나라 표준어를 계속 사용했는데 ‘국어(國語)’라고 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이를 푸퉁화(普通話)라고 부르지만, 외국인에게 푸퉁화를 할 줄 아느냐고 물을 때는 ‘Do you speak Mandarin?’이라고 묻는다. 이 만다린(Mandarin)은 만주(Manchu)에서 온 말로서 영어로 번역하면 ‘만주 표준어’가 된다. 그리고 만주가 원래 문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만다린은 ‘문수보살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문수라는 호칭에 대한 기록은 청나라 국서를 비롯해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청 세조 순치(順治) 10년 3월, 국서(國書)에 ‘문수대황제(文殊大皇帝)’라는 구절이 나온다. 티베트 수도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布達拉宮) 내부에 ‘황제 만세만만세(當今皇帝萬歲萬萬歲)’라고 적힌 좌대가 있다. 그 뒷면에는 만주족, 몽고족, 한족, 티베트족의 문자가 새겨져 있고, 건륭제가 불가의 복장를 입은 그림도 볼 수 있다. 그림에서 건륭제는 수인(手印)을 하고 법기(法器)를 들고 있는데, 이는 문수보살의 상(像)과 완전히 동일하다.
베이징의 옹화궁(雍和宮)에는 청나라 때 세운 황실미술관인 여의관(如意館)이 있다. 민국 초기부터 개방한 이곳에는 한 폭의 대형 괘도(掛圖)가 있는데 ‘건륭좌선도(乾隆坐禪圖)’라고 한다. 그림에는 티베트어로 ‘지혜로운 문수보살의 성스러움, 인간을 위해 사람으로 응화(應化)했구나. 광대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좋구나 대법왕(大法王)이시여. 금강(金剛) 성(寨)에 안주하니, 견고하여 돌릴 수 없구나. 뜻에 따라 크게 자유자재하여, 수승(殊勝-아주 뛰어남)함이 세간존(世間尊-세간의 높은 사람)이로다.’
글/ 小童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