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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모퉁이 가게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고(해피 투게더), 실연을 겪은 두 남녀가 동병상련의 아픔을 위로하다 서로에게 빠져들며(‘화양연화’), 묵묵히 기다리던 남자는 시간이 흐른 뒤 여자의 귀환으로 보상받는다(중경삼림). 스크린에서 객석으로 넘쳐 흐르는 음악에서 (빠른 움직임을 위한) 저속촬영의 도심 스케치 장면까지, 세부적인 부분에서도 얼마든지 자취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흔적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의 생생한 숨결은 이제 여기 없는데.
배신으로 고통받던 엘리자베스(노라 존스)는 헤어진 연인이 종종 방문했던 카페의 주인 제레미(주드 로)에게 연인 집 열쇠를 맡긴다. 그가 카페에 다시 오면 대신 돌려주라는 부탁과 함께. 엘리자베스는 카페를 들락거리다 제레미와 마음이 통하게 되지만, 이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느날 훌쩍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는 사랑에 집착하는 어니(데이빗 스트라탄)와 그런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수 린(레이첼 와이즈)의 아픈 사연, 아버지와 갈등하던 레슬리(나탈리 포트먼)의 어두운 내면과 마주친다.
사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는 달콤쌉싸름한 사랑의 사연과 화면에서 오려내고 싶은 이미지, 당장이라도 노트를 꺼내 적어두고 싶은 대사들로 가득하다. 다리우스 콘쥐의 촬영은 낭만적이고, 노라 존스의 노래는 감미롭다. 게다가 로맨틱 가이의 표정을 작심하고 보여주는 주드 로와 첫 출연작에서 괜찮은 적응력을 보여준 가수 노라 존스의 모습이라니!
그러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이전 과제물을 허겁지겁 고쳐서 낸 왕가위의 영어 숙제 같다. 거기엔 중언부언과 췌언의 문장이 적지 않다. 카페에 어울리는 실내 장식을 못 찾았다고 말하는 제레미에게 떠나간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엉뚱한 곳을 뒤지고 다녔거나, 너무 감상에 젖었겠지.” 왕가위가 엉뚱한 곳을 뒤지고 다녔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후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감성과 감상은 종이 한 장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