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의 ‘두류산 양단수를…’
신 웅 순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백두산 줄기가 이곳까지 뻗었다하여 명명한 이름이다. 양단수는 두 줄기로 갈리어 흐르는 물을 말한다. 무릉은 무릉도원, 별천지, 선경을 말한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전부터 듣고 이제 와 보니 복사꽃 뜬 맑은 물에 산그림자조차 잠겼구나, 아희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두류산 양단수를 무릉도원에 비유했다. 그는 무릉도원에서 살기를 원했고 그가 사는 곳이 무릉도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유가가 아닌 처사로 살기를 자처했다. 남명은 그렇게 살다가 갔다.
조식(曺植 1501, 연산군 7-1572, 선조 5) 은 조선 중기 때의 학자로 경상도 삼사현 토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령이며 자는 건중, 호는 남명이다.
1526년 부친이 억울하게 벼슬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이 일로 부친은 자리에 눕게 되었고 결국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 후 왕명을 거역했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었다. 남명은 3년 간 시묘살이를 끝내고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부친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었다.
남명은 벼슬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의 길을 포기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남명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어머니! 지금 조정에는 간사한 무리들이 권력을 휘둘러 걸핏하면 어진 선비들을 몰아 죽이고 있습니다.조정에 남아 있는 벼슬아치들은 대부분 구차하게 족봉을 챙기며 그 목숨 보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어머니께서도 저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간악한 사람들에게 굽실거 리면서 벼슬하라 하십니까. 자칫 바름말을 하다가 그들의 뜻을 어기면 목숨마저 부지하기 힘듭니 다.
남명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명했고 남달리 학문을 좋아했다. 그런 남명이었기에 과거의 길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머니로서는 무척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간곡한 뜻을 헤아려 주었고 학문에 매진하라는 위로의 말까지 해주었다. 어머니의 사려 깊은 덕택으로 남명은 그 피비릿내나는 을사사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23년 22살 되던 해 남명은 조수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처가는 김해에 사는 풍족한 집안이었다. 벼슬도 없는 학문만 하는 처사로 가난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1931년 어머니를 모시고 부유한 김해 처가를 찾았다. 거기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조씨 부인은 14년이 지나서야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9살에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그 후 아들을 낳지 못했다. 1548년 남명은 아내를 처가에 두고 김해를 떠났다. 삼가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남명은 아내와는 살뜰한 정은 없었지만 평생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혼자 사는 남명에게 음식이며 옷가지이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1551년 은진 송씨를 첩으로 맞아들여 여기에서 세 아들을 얻었다.
1554년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했고 1556년 단성현감, 1560년에는 조지서사지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도 거절했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의 명성은 자꾸만 높아져 갔다.
1561년 회갑을 맞이한 남명은 지리산 덕산으로 새로운 거처를 옮겼다. 거기에다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학문과 후진 교육에 힘썼다.
이 무렵 남명은 이런 시를 남겼다.
청컨대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크게 치니 않으면 소리나지 않는다네
어떡하면 저 두류산 처럼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천적들이 큰 종은 크게 쳐야한다. 거기에 맞는 당목으로 쳐야 소리가 난다. 자신의 뜻을 큰 종에 비유했다. 벼슬과 재물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는 지리산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웅지. 남명은 그런 뜻을 세우고 그런 경지를 추구하고자 했다.
남명이 대곡 성운을 만난 것은 18살 서울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조석으로 학문 토론도 하고 잠도 같이 자면서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대곡은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을사사화 때 수많은 선비가 죽는 것을 보고는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남명집』에 대곡에서 보낸 7통의 편지와 10여수의 한시가 전해지고 있다.
남명이 죽었을 때 대곡은 묘갈문에 이렇게 적었다.
벗을 사귀는 일도 반드시 신중하였다. 그 사람이 벗 삼을 만한 사람이면 비록 평범한 사람일지 라도 왕처럼 높여 예의를 차려 존경했다. 그 사람이 벗 삼을 만한 사람이 못될 경우에는 비록 벼 슬이 높을 지라도 마치 흙먼지나 지푸라기처럼 보아 그들과 같이 남아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 다. 이런 까닭에 교우가 넓지 못했다. 그러나 공이 사귀어 사람들은 모두 학행과 문예가 뛰어난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남명의 면모를 잘 보여준 예이다.
우암 송시열은 대곡의 묘갈명에서 두 사람과의 관계를 이렇게 썼다.
대곡선생은 남명과 가장 막역한 친구였다. 대개 남명이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낭떠러지와 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다면 선생은 순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다. 남명이 말하기를 “대곡은 다듬은 금붙이나 아름다운 옥 같아서 내가 미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1533년 향시 때 경상 좌도에서는 퇴계가 경상 우도에서는 남명이 1등을 했다. 이들은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이렇게 해서 퇴계학파, 남명학파는 우리나라 사상계의 큰 두 흐름을 형성했다.
퇴계와 남명은 서로 명성을 듣고는 있었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고작 세 번의 편지를 주고 받았을 뿐이었다. 이무렵 퇴계는 기대승과 편지로 이기론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남명은 이들의 생각과 달랐다. 학문의 본질은 말보다는 실천하는데에 있다고 믿었다.
후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퇴계와 남명을 이렇게 썼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 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퇴계는 성리학의 뿌리인 인을 숭상하고 남명은 생활을 중시하는 의를 실천했다.
남명은 깨끗한 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꿇어 앉은 채 밤을 새우고 옷에는 쇠방울을 매달아 놓고 때때로 흔들어 정신을 일깨우면서 수양했다. 그리고 손수 그린 주자․정자의 초상화를 보며 스스로를 독려했다. 남명은 따로 스승에게 배운 것도 아니었는데도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은 이러한 자신의 치열한 수양 때문이었다. 남명은 남명 스스로를 가르친 것이다.
남명은 평생을 초야에 묻혀 살았지만 현실 비판에는 직언도 서슴치 않았다.
1955년 명종이 남명에게 단성현감 자리를 내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님께 단성소를 올렸다.
자전(慈殿,문정왕후)은 깊은 곳에 처하여 있으니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못하고 전하는 나이 어리니 선왕의 한 고자(孤子,고아)에 지나지 못하는데 백천가지의 재앙과 억만 창생의 인심을 무 엇으로 당하려 하십니까?
임금이 진노하여 다시는 남명을 부르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죽음으로 임금과 맞선 것이다. 이렇게 불의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논의만 일삼았지 남명처럼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남명은 경과 의를 강조했다.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했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의다’ 라는 문구를 새긴 칼을 항상 차고 다녔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구․곽재우․정인홍․김우옹․이제신․김효원․오건․강익․문익성․박제인․조종도․곽일․하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경상 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경상 우도의 학풍을 대표했다. 대부분은 은둔적인 학풍을 지녔으며 국가의 위기 앞에서는 앞장 서서 싸움에 참여한 의로운 문인이기도 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국가의 위기 앞에서는 투철한 선비정신을 발휘했다. 이러한 정신은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선조 때 대사간, 1615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진주의 덕천서원, 김해의 신산서원, 삼가의 용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명집』․『남명하기유편』․『파한잡기』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남명가」,「권선지로가」가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청구영언』,『해동가요』에 시조 3수가 전한다.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 인 의, 진실 거짓도 이익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님들이 갈수록 그립기만 하다.
- 『월간서예』(미술문화원,2011,1),174-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