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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박 정현
25년 전, 그 날!! 20살의 나이에 누렸던 아름답고 순진한 20대 청년시절 꿈과 소망이 한 순간에 무너진 것만 같았다. 지금은 참시 돌이켜 보며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왔던 나의 힘으로는 결코 견디어낼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1984년 12월 15일 저녁8시 이었다.
그 날 저녁, 차들 타고 부산에서 울산으로 물건 하로 가는 중에 불의 사고로 나는 그만 다리 한쪽을 절단하고 말아다 배와 다리 번갈아 수술을 하였다 부산 백병원 중환자실에서 3개월을 산소 호흡기로 의지해야만 했다. 거의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 나는 무의식중에도 코에 연결된 호스를 손으로 잡아 빼고는 하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고통과 통증으로 시간은 흘러가고 환자나 보호자도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나를 지켜보던 부모님을 물론 모든 형제들도 힘들었던 가슴 아팠던 병원시절이었다. 의족을 차고 거는 연습도 하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갔다. 그렇게 현실에 적응하며 살기 시작했다. 장애인으로 서의 새로운 삶이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힘든지 체험하면서도 나의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누구나 어떤 욕구를 가질 때 그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을 해도 그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고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욕구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불행하지만은 않다. 왜? 아직은 꿈이 있으니까. 숱한 세월 가슴을 치며 통한의 눈물을 뿌리면서도 아름다운 눈물 꽃을 피우기 위해 오늘은 참고 기다리고 있는 세월 속에서
부산에서 태어난 필자는 현재 부산진구 범천동 중앙시장 부근에서 부친은(작고) 어머니 김연희(72)씨 사이에서 2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집 부근은 시외버스터미널과 조선방직이 있는 번화가였다.
그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닭장 사를 하셨다. 지금은 중앙시장은 재건축 함
겨울에는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지금은 사라진 중앙시장 옥상마을도 좋은 놀이터였다. 가끔 엄마를 졸라 통닭 몇 마리를 얻어 친구들과 나눠 먹었는데 그 덕분인지 어쨌는지 그는 언제나 대장이었다. 5학년 때 범천동에 있는 성서국민학교로 옮겼으나 개구쟁이 짓은 여전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학교도 다니기가 싫었고 공부가 정말 하기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애원을 했다. “정현아 제발 중학교만 나와라.” 까짓 것 아버지의 소원인데 중학교는 한번 다녀 볼까. 금성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 몇이 그를 찾아 왔다. “덩빨도 있고 하니 태권도부에 들어오너라. 그래서 태권도부에 들어갔는데 태권도를 배워보니 제법 재미가 있었다. 덕분에 학교 다니는 것도 그런대로 견딜 만 했고 태권도는 3단을 땄다.
그리고 송도상고로 진학을 했다. 그런데 또 태권도부에 들어오라는 것이 아닌가. 마지못해 태권도부에 들기는 했으나 이미 3단을 딴 상태라 신출내기들하고 태권도를 배우는 게 영 재미가 없었다. 다시 4교시만 끝나면 줄행랑을 쳤다. 송도 바닷가에서 헤엄도 치고 다이빙도 하다가 바다에서 놀기가 시들해지면 근처 당구장에서 놀았다. 덕분에 당구는 500을 쳤다.
당시 집에는 1.4톤, 2.5톤 등 트럭이 2~3대 있었는데 겨울 방학이 되자 닭을 실러 가는 닭장차 트럭에 따라 붙었다. 가까이는 김해 양산 울산을 비롯해서 멀리 전라도와 경기도까지 닭을 사러 다녔다. 양계장에서는 1막사에 500마리 내지 1000마리 정도의 닭을 키우는데 흥정을 할 때는 1막사를 통째로 샀다. 닭은 38일~42일 키운 닭으로 무게가 1.2kg가 적당한데 요즘은 속성으로 키워 20일~23일 밖에 안 걸린단다.
2.5톤 트럭에 5단으로 닭장을 쌓으면 1천 마리 정도는 실을 수 있고 1천 마리를 실은 트럭을 구포에 있는 도계 장으로 몰고 가서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도계 장은 보통 새벽 1시쯤부터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데 하루에 20여대의 트럭이 들어온다. 트럭 1대에 1천 마리씩 20대니까 보통 하루에 2만 마리 정도를 처리하는데 대여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산닭 1천 마리를 도계 장에 넣으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먹을 수 있는 생닭으로 처리가 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리 된 닭을 가게로 가져와서 생닭으로도 팔고, 통닭으로 튀겨서도 팔았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을 무렵에는 그 주변 앞뒤로 늘어선 닭집이 족히 70~80곳은 되었을 거란다. 그럼에도 설이나 추석이 되면 완전 대목으로 5~6일전부터 온 식구가 밤을 새워야 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본격적으로 닭장차를 따라 다녔다. 그가 따라 다닌 트럭기사는 서른 살의 총각이었는데 조수석에 타고는 이러저런 얘기도 하고 사소한 것으로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1984년 12월 15일 저녁 8시쯤 기사와 함께 트럭을 타고 울산으로 닭을 실러 갔다.
겨울철의 8시라면 깜깜한 밤중이었지만 하루 이틀 다녀본 길이 아니기에 기사와 함께 룰루랄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나게 달렸다. 만덕터널을 지나고 노포동으로 접어들었을까,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물체가 나타났다. 어어, 어어……. 기사와 동시에 놀라면서 그 물체가 무엇인지 가늠을 하기도 전에 꽈당! 눈을 떠 보니 온통 회색이었으나 차츰 흰색으로 변했다. 왼쪽 옆구리와 왼쪽 다리가 묵직하고 아픈 게 돌덩이를 달아 놓은 것 같았다. 백병원, 12월 25일이었다. 벌써 열흘이 지났던 것이다. 그는 열아홉 살이었고 함께 탄 기사는 서른 살이었는데 결혼도 안 한 기사는 그날 밤 서른 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기사가 운전하는 2.5톤 트럭의 조수석에 타고 울산으로 가고 있었는데 노포동에서 덤프트럭 한 대가 불법으로 유턴을 하면서 갑자기 뛰어 들었고 깜깜한 밤중이라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 있었으니 터지고 찢어져서 제멋대로 튀어 나온 내장은 배를 가르고 제자리를 찾아 붙이고 꿰매기는 한 모양이었다. 열흘이나 깨어나지 않았으므로 다리는 수술 할 엄두도 못 내고 응급조치만 해 둔 상태였는데 의식이 돌아와서 수술을 하려고 보니 다리의 상처는 이미 곪아 터져서 썩어가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간호사가 미음을 떠 먹여 주었는데 두어 숟갈쯤 받아먹으면 그대로 올라왔다. 아무래도 다리를 잘라야겠다고 했다. 이 꼴에다가 다리병신까지. 살고 싶지 않았다. 미음을 가져오면 도리질을 했다. 죽으면 죽었지 다리는 자르고 싶지 않았다. 면회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물로 애원을 했다.
“제발 다리를 자르자. 이대로 두면 목숨이 위태롭단다.”
굳게 입을 다문 사이에 자고 나면 옆 침대의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응급실을 나가겠지. 열아홉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별로 서럽지도 않았다. 그냥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며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어여쁜 선녀가 미음 그릇을 들고 그 앞에서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보았다. 그 백의의 천사가 미음 그릇을 들고 웃으면서 “자 한 입만…” 아무리 죽기로 작정을 했다지만 천사의 미소 앞에서는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천사는 다리 수술을 권유했다. “수술을 해도 의족이 좋아서 별로 표도 안나.” 천사의 미음은 어쩔 수 없이 받아먹었지만 다리 수술에는 망설였다. 그런데 천사가 그에게 다가와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아닌가. 천사의 눈물이라니.
“우리 집은 서울인데 며칠 휴가를 다녀와야 되는데 정현이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파. 내가 휴가 다녀 올 동안 제발 수술 받아.” 천사의 눈물 앞에 꽁꽁 얼었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봄눈 녹듯 스르르 풀리는 게 아닌가. 천사는 서울로 휴가를 가고 그는 수술을 받았다. 왼쪽 다리 대퇴부 절단.
천사는 다시 돌아왔다. 천사를 바라보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난리가 났다. 백병원은 1978년에 문을 열었는데 개원이래. 중환자실에서 말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새해가 되자 8층 일반 병동으로 옮겼다. 천사도 중환자실에서 10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만 나면 휠체어를 타고 10층으로 천사를 보러 갔다. 간호사는 3교대이기에 천사를 만나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는 어찌 걸을 것인가. 막막하고 무겁고 아프고 정말 짜증나는 시간이었다. 5월이었는데 생일날 아버지가 닭백숙을 끓여왔다. 병동에 환자들과 보호자와 함께 먹어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 섰는데 나는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으니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 텐데 아들은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말을 지독히도 안 들어서 아버지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종아리를 때리시던 그 손으로 닭백숙을 끓여 오신 것이다.
그리고 병원생활 7개월 만에 의족을 맞추고 나는 1년 만에 퇴원을 했다. 의족을 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으나 한발자국도 제대로 옮길 수가 없었다. 한번 걸어 보려고 했으나 다리가 너무 무겁고, 문턱에도 걸리고 넘어지고. 비라도 올라치면 어깨부터 시작해서 전신이 쑤시고 아팠다.
어머니는 날마다 애원을 했다. “제발 밖에 좀 나와 봐라.”
엄마의 애원이 너무나 애처로워 3년 만에 목발을 짚고 조심조심 집을 나와 100여 미터 떨어진 가게로 갔다. 어머니는 가게로 나온 그를 보자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에게 약간의 돈을 얻어 근처 당구장으로 당구를 치러 갔다. 당구를 치다보니 어라, 저절로 걸음 연습이 되는 게 아닌가. 아마추어 당구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당구만 치고 있을 것인가.
2001년 국제장애인협의회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았다. 별로 재미도 없고 써 먹을 곳도 없어 다시 백수생활로 돌아갔다. 1년쯤 지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교육장을 찾았다. 1년 전에 배운 것을 복습하면서 교육을 체신청에서‘장애인방문 정보화교육 강사를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응시를 했고 합격이었다. 그로부터 현재 6년째 장애인방문교육을 하고 있다. 현재는 두 사람을 맡고 있는데 1주일에 3번을 찾아간다. 부산울산경남을 합쳐 현재 130명 정도가 방문강사를 하고 있는데 40% 정도가 장애인이란다. (2009년 1월 1일부터 체신청에서 지자체로 이관 하였다. 부산은 부산시청으로 경남은 경남지차제로 울산은 울산지자체로 이관 하였다)
“컴퓨터의 기초만 가르치고 그 다음부터는 인터넷 정보검색이나 워드자격증 등등을 가르쳐 줍니다.”
현재 6년째 강사생활을 하다 보니 어떤 장애인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지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다. 지적장애인은 자판을 치면서 글자를 배우기도하고, 발달장애인은 자판을 치는데 강약만 조절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황령산에서/박 정 현
흰 구름 떠있는 황령산 기슭 호젓이 피어 있는 이름 없는 들꽃
긴 꽃잎은 앞산을 넘어가고 있네. 가버린 어린 시절 투명색으로 묻어나 추억의 이야기로 나를 기다렸는가.
알아듣지 못한 속삼임 산등성을 타고 저 멀리 가고 있는 어릴 적 추억들
이 세상 소외된 계층을 위해서 아니 장애우 친구들을 위해서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도록 하며 더 욱 더 알찬교육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서 좋은 결과 을 맺을걸. 약속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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