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해 황씨 (平海 黃氏) 에 가문 내력 -
1> 시조 : 황 낙[黃 洛]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평해는 경상북도 울진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근을어현인데,
고려초에 평해로 고쳤고, 현종조에 예주(영해)에 속하였다가 지금은 울진군에 속한 평해면으로 남아있다.
평해황씨의 시조는 중국 후한의 유신(儒臣)으로 서기 28년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사신으로 교지국(베트남)에 가던길에 풍랑을 만나 안아진에 표착하여 그곳에 정착세거한 황낙(黃洛)이다. 낙(洛)의 후손에서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의 3형제가 있어 그중 갑고가 기성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로 전하는 온인(溫仁)이 고려조에서 금오위 대장군, 태자검교를 지냈고 평해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은 온인을 1세조로 계대하면서 본관을 평해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온인의 8세손 희석(希碩)이 1388년 요동정벌때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이 개국하자 개국이등공신으로 지중추원사가 되어 평해군에 봉해졌고, 문하시랑 찬성사에 추증되었으며, 공조판서 유저(有定)의 아들 현(鉉)은 세종때 대사성을 역임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던 여일(汝一)은 동래진 병마첨절제사를 지낸후 참판을 역임하여 평해황씨 가문을 빛냈으며, 영조때 실학자 윤석(胤錫)은 익찬(翊贊)에 이르렀고, 그가 저술한 문집 [이재유고]와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해황씨는 남한에 총 30,200가구,
124,0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주요 인물
황온인
고려조에 금오장군·태자검교를 지냄.
황근
고려 때 사예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황진
고려에서 검교군기감을 지냈다.
황서
고려 때 평리를 지냈다.
황우정
고려 때 군기소윤을 지냈다.
황원로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부사를 역임하였다.
황유중
고려 때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황종양
고려에서 호부 전서를 지냈다.
황태백
고려조에 자헌대부·형조 전서를 지냈다.
황용
시호는 충경, 고려 때 숭록대부 삼중대광보국에 이르렀다.
황유정
초명은 지정,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자헌대부·공조 전서를 역임하였다.
황희석
?-1394(태조 3)
고려·조선의 무신. 시호는 양무. 1388년(우왕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했고..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2등으로 지중추원사가 되어 평해군에 봉해졌다.
문하시랑찬성사에 추증되었다.
황현
1372(공민왕21)-?
조선의 문신. 전서 황유정의 아들로 1393년(태조 2) 춘장문과에 급제.
1407년(태종 7) 직강으로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직예문관 등을 역임한 뒤..
세종 초 대사성이 되고 1482년(세종10) 인수부윤을 겸했다.
학행이 뛰어난 당시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황응청
조선의 학자. 자는 청지, 호는 대해, 목사 황우의 아들로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
천거로 예빈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다시 연은전 참봉·장원서 별좌 등에 임명되었을 때 4가지 시폐를 개진하여 왕에게 받아들여지자..
진보 현감에 임명되어 민심을 수습했다.
얼마 후 벼슬을 내놓고 귀향, 조목, 박성·이산해 등과 교유하며 독서와 후진 양성으로 낙을 삼았다.
평해의 명계서원에 제향되었다.
황준량
1517(중종12)-1563(명종18)
조선의 문신. 자는 중거, 호는 금계, 황치의 아들, 이황의 문인.
1537년(중종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학유를 거쳐 지평이 되었으나, 앞서 부탁을 거절당했던 자가 언관이 되어 모함하자 외직을 자청..
신녕 현감으로 나갔다가 단양 군수를 지내고 1560년(명종15) 성주 목사가 되었다.
풍기의 우곡서원,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황여일
1556(명종11)-?
조선의 문신. 자는 회원, 호는 해월헌·매월헌, 황응경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고..
1576년(선조 9) 사마시를 거쳐, 158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여러 청환직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1594년 형조 정랑을 거쳐 1598년 진주사의 서장관으로서 종계변무의 서장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고..
1611년(광해군 3) 길주 목사가 되었다. 1617년 동래진 병마첨절제사를 지낸 후 참판에 이르렀다.
평해의 명계서원에 제향되었다.
황선신
1570(선조 3)-1637(인조15)
조선의 무신. 자는 사수, 1597년(선조30)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강화부 중군으로서 전사하였다.
병조 참의에 추증,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황윤석
1729(영조 5)-1791(정조15)
영조 때의 실학자, 언어학자로서..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와 그가 저술한 '화음방언자의해'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황종흡
1854(철종 5)-1903(광무 7)
조선의 학자. 자는 원여, 호는 운파, 황동규의 아들로, 외전경사를 읽어 대의에 정통했다.
고금 명가의 묵적을 보며 힘써 연마하여 글씨에도 대성, 특히 초서가 훌륭했다.
4> 현대의 평해황씨 주요 인물
성 명 |
생년 |
본관 |
관 직 |
황만영(萬英) | 1875~1939 | 평해 | 독립운동가 |
황인성(寅性) | 1926~ | 국무총리 | |
황낙주(珞周) | 1928~2002 | 국회의장 | |
황명수(明秀) | 1927~ | 국회의장 | |
황경로(慶老) | 1930~ | 평해 | 중앙 종친회장 |
황경로(慶老) | 1930~ | 포철회장 | |
황규환(圭煥) | 1939~ | 스카이라이프 | |
황수관 | 1945~ | 연세대 교수 | |
황우석 | 1953~ | 서울대교수 | |
황선홍 | 1968~ | 축구선수 | |
황영조 | 1970~ | 마라톤 선수 | |
평해황씨는 예로부터 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 중 하나입니다.
질문하신 분은 이런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분이신 것 같습니다.
항상 가문을 빛내준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 황씨의 시초는 중국 후한 때 漢學士였던 황락(黃洛) 公의 후예이다. 그는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년)에 귀화한지 2000여년의 역사와 더불어 종족사를 유래(由來)하면서 東邦의 거성(巨姓)으로서 世代를 계승(繼承).발전시켜온 黃氏의 始祖이시다. 黃姓字는 중국에서 사용하던 字를 그대로 사용하여 姓族이 되었다. 吾黃은 인간의 기본사상인 윤리와 도덕을 숭상(崇尙)하는 절의(節義)있는 宗族이며 후손들이 번창하여 본관을 달리하고는 있으나 한국에 살고 있는 黃氏는 모두 黃洛 始祖의 후손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 따르면 남한에서 16번째 순위의 성씨이며 약 13만4천가구에 60여만명의 종족이 방방곡곡에 살고있다.
黃洛 시조설은 중국문명의 開祖였던 黃帝(軒轅氏)는 有能國의 임금 少典의 아들로 태어나 中原(지금의 황하유역)의 여러 부족국가를 통일하여 黃帝가 되었다. 전욱고양씨(顚頊高陽氏)는 黃帝(軒轅氏)의 자손이며 육종(陸終)은 전욱(顚頊)의 증손(曾孫)으로 黃邑에 봉해져 성을 황씨로 창시(創始)하였다고 전해진다.
그후 육종(陸終)의 후예(後裔) 중에는 해(海), 락(洛), 호(湖) 3형제가 있었고 그중 둘째인 락(洛)(한나라 光武帝 建武 4년 신라 유리왕 5년) 후한(後漢)의 유신으로 구대림(丘大林, 평해 구(丘)씨의 시조)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옛 월남의 한지방)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평해에 도착하여 청착하여 살면서 황장군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 황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전해지며,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황락(洛)의 후손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3형제가 있었는데 각각 기성(현 평해)군, 장수군, 창원백에 봉해져서 각각 본관을 평해, 장수, 창원 황씨로 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제안, 항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씨는 이 3본에서 분관되었다고 한다.
본관은 평해(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
우주(紆州) ·덕산(德山) ·회덕(懷德) ·황주(黃州) ·관성(管城) ·부안(扶
安) ·강화(江華) ·삼기(三岐) 외에도 문헌상에는 163본이 전한다
황씨중앙종친회측에서는 대략 20여 본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모두 평해 ·장수 ·창원의 3본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황씨의 원시조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儒臣)이었다는 황락
(黃洛)으로 전해온다.
그는 광무제(光武帝) 건무 4년(유리왕 5:AD 28)에 장군 구대림(丘大
林:平海丘氏의 시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지금의 베트남)에 사신으
로 가던 길에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착, 그곳에 자리잡고 살
며 황장군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황씨의 시원(始源)이다. 현재에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전해지
며,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후세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의 3형제가 있어 각각 기성
군(箕城君:箕城은 平海의 옛이름) ·장수군(長水君)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져 훗날 평해 ·장수 ·창원 등 3관향이 여기에서 비롯돼었다.
오늘날 전하는 20여 본이라는 것도 이 3본에서 갈린 분파라는 것이 통
설이다.
예를 들면, 상주 ·덕산 등은 평해에서,
간주 ·남원 ·해주 등은 장수에서,
회덕 ·황주 · 제안 등은 창원에서 각각 분적(分籍)된 것으로 전해진다.
인구가 가장 많은 창원황씨는
각각 계보를 달리하는 3파가 있는데,
토황(土黃)으로 불리는 시중공(侍中公)파와
당황(唐黃)으로 불리는 공희공(恭僖公)파,
그리고 호장공(戶長公)파 등이다.
이들 3파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족보도 각기 따로따로 편찬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황’이라 불려온 공희공파의 파조(派祖) 황석기(黃石奇:고려 공민왕때의 중서문화평장사)가 원래 고려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때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적(趙)의 난’(1339)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
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 위왕(衛王)의 딸 노
국공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때 배행(陪行)하여 왔
던 것이다.
황씨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상신(相臣) 3명, 대제학 2명을 비롯하여 총 17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6만 1435가구에 인구 35만 907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6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3만 4347가
구, 전국 가구 구성비 1.4 %로 274성 중 제16위였다.
(평해황씨)
대표적 인물로는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
군하여 조선개국공신 2등에 오른 희석(希碩)을 비롯해 현(鉉) ·여일
(汝一) ·윤석(允錫) 등을 들 수 있다.
현은 세종 때 대사성을 지낸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며, 여일은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뒤에 진주사(陳奏使)의 서
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기록한 《조천록(朝天錄)》 등의 저서
가 있다.
윤석은 영조 때의 실학자 ·언어학자로서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
齋遺稿)》와 그가 저술한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
늘날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우주황씨의 인물로는 명종 때의 정승 헌(憲)이 있다. 그는 명종
3년 우의정에,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
衡)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또, 제안(齊安:黃州) 황씨의 대표적 인
물로는 영조 때 황고집으로 불린 순승(順承)이 있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생이던 그는 효자로 이름이 났을 뿐 아니라, 기
행기벽으로 일화를 남겼다. 중종 때 개성의 한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난 송도의 명기 진이(眞尹)가 유명하다.
(장수황씨)
조선시대의 4대 명상(名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황희(黃喜)가 배출
되었다.
그는 정승(政丞)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治績)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의 아들 세 명도 모두 현달하였는데,
치신(致身)은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고,
수신(守身)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회의 후손으로 열(悅)의 아들인 정욱(廷彧)은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기(璣)의 아들 경원(景源)은 대제학을 비롯해 이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던 맹헌(孟獻) ·여헌(汝獻) ·효헌(孝獻) 3형제가 유명하고, 성조 때 일본에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내침(來侵)을 예고한 윤길(允吉),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엽(曄), 순조 때의 명신 승원(昇源), 한말의 야사(野史)를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현(玹) 등은 모두 희의 후손이다.
(창원황씨)
시중공파 ·호장공파 ·공희공파 등 3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였다.
시중공파에서는 자(梓) ·인검(仁儉) ·인점(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자
는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큰아들 인검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둘째아들 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
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호장공파에서는 사우(士祐) ·응규(應奎) ·섬(暹)의 3대가 두드러진다.
사우는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응
규는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
사를 지냈다. 손자 섬은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
慶)의 처남으로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
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공희공파에서는 파조(派祖)인 석기의 아들 상(裳)이 문하찬성사 ·서
강도원수 등을 지냈고, 상의 현손 형(衡)은 공조판서를, 그의 아들 기
(琦)는 직제학 ·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
다. 형의 증손 신(愼)은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
(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直言)을 회피한 사실
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구하(龜河),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 사영
(嗣永), 순조 때의 명문장 ·명필 기천(基天), 고종 때의 학자 재영(在
英)과 명의(名醫) 필수(必秀) 등이 있다.
평해 황씨(平海 黃氏)
황씨의 도지조인 황락의 첫째아들 갑고가 기성(평해의 옛지명)군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로 전하는 온인이 고려조에서 금오위 대장군을 지내 평해에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인 락(洛)을 시조로 하고 온인을 일세조로 계대하면서 본관을 평해로 삼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조사 인구수 : 124,072명)
집성촌 : 경북 청송군 청송면 청운동
장수 황씨(長水 黃氏)
시조 황경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벼슬은 시중을 지냈다.
그후 10세손 황공유가 고려 명종 때에 전중감으로 이의방의 난이 있은 후로 장수로 낙향 하였고, 15세손 황감평이 후학을 위한 덕망있는 학자 였다는 것 외에는 18세손 황석부 까지는 고증할 자료가 없다.
중시조 황석부는 황희의 증조부로 사후에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황석부를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황희(黃喜) : 조선시대의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정승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황치신(致身): 황희의 아들.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황수신(守身): 황희의 아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황정욱(廷彧):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황경원(景源): 대제학을 비롯해 이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황맹헌(孟獻): 황여헌(汝獻), 황효헌(孝獻) 3형제: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황윤길(允吉): 성조 때 일본에 다녀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예고했다.
․황엽(曄):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했다.
․황승원(昇源) : 순조 때의 명신 , 한말의 야사(野史)를 엮었다.
․황현(玹) :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이다.
항렬
17세 주(周)/ 18세 의(義)/ 19세 연(淵)/ 20세 (示)변 인(仁) / 21세 (土)변 하(夏) / 22세 (水)변 규(圭) / 23세 (人)변 상(商) / 24세 (火)변 영(永) / 25세 (土)변 진(震)
창원 황씨(昌原 黃氏)
창원황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각각 선조를 달리하는 8파가 있는데, 이들 8파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족보도 각기 따로 따로 편찬한다.
시중공(侍中公)파 : 황신. 토황(土黃)으로도 불리운다.
공희공(恭僖公)파 : 황석기(회산군). 당황(唐黃)으로도 불리운다.
호장공(戶長公)파 : 황량충.
예빈동정공파 : 황성찬.
전서공파 : 황윤기.
호장공파 : 황우용.
규정공파 시중공파의 시조 황신의 원조는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이며 그후의 세계는 알 수가 없으나, 창원황씨가 확실하다고 한다.
공희공파의 파조 황석기(黃石奇)는 원래 고려 공민왕 때의 중서문하 평장사이었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339년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때 따라 왔던 것이다.
[ 대표적 인물 ]
[ 시중공파 ]
․황자(梓) :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 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황인검(仁儉) : 황자의 큰아들. 형조판서를 지냈다.
․황인점(仁點) : 황자의 둘째 아들.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 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 호장공파 ]
․황사우(士祐) :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다.
․황응규(應奎) : 황사우의 아들.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 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황섬(暹) : 황사우의 손자.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 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 (柳永慶)의 처남이다.
[ 공희공파 ]
․황상(裳) : 황석기의 아들.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다
․황형(衡) : 황상의 6세손.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기(琦) : 황형의 아들.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 임하였다.
․황신(愼) : 황형의 증손.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을 회피한 사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황구하(龜河) :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황사영(嗣永) :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이다.
․황기천(基天) : 순조 때의 명문장이며 명필이다.
․황재영(在英) : 고종 때의 학자이다.
․황필수(必秀) : 명의(名醫)이다.
상주 황씨 (尙州 黃氏)
1> 시조 : 황 락[黃 洛]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상산(商山)은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옛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진한의 영토였으며,
신라 첨해왕때 상주(上州)라 하였고 그후 경덕왕이 상주(尙州)로 개칭하였다.
상주황씨는 황씨의 도시조인 황낙(黃洛)의 후손이며, 고려조에서 벼슬이 상주국에 이른
황석주(黃石柱)를 1세조로 하고 있다.
[상주황씨족보]에 의하면 석주(石柱)의 4대손 을구(乙耈)가 상주에 정착 세거하면서부터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상주황씨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특히 조선 세종26년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양관 대제학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에 오른
효원(孝源)이 좌익 및 좌리공신에 책록되어 상산부원군에 봉해졌고 후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므로 크게 명성을 떨쳐 가문을 중흥시켰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세근(世懃)의 아들 우한(佑漢)과
호조참판에 추증된 이환(以煥)의 아들 징(徵)이 있다.
우한(佑漢)은 선조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으며
징(徵)은 현종때 생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을 거쳐 훈련원부정․부호군․승지를 지냈고
전라좌수 수군절도사르 역임하였다.
한말에 와서 는 한국통신원 주사 휘동(暉東)의 아들 노식(魯軾)이 1935년 오성면 양고리에
신흥학원을 설립하고 운영비와 교사의 보스 등을 자비로 부담하여 불우한 농촌아동 교육에
헌신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상주황씨는 남한에 총 3,951가구,
17,1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
충북 보은군 보은읍 삼산리
경기도 평택군 현덕면 도대리
경북 선산군 선산읍 봉곡동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서천리
경북 영천군 북안면 북동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북암리
제안 황씨 (齊安 黃氏)
1> 시조 : 황을구[黃乙耈]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제안은 황해도 황주의 고려 성종때 별호이다. 황주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인데,
신라 헌덕왕 때 취성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초에 황주라 하였으며,1895년에 황주군이 되었다.
제안황씨(齊安黃氏)는 창원황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회산부원군 황석기의 증손 황을구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시조 을구는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소윤과
이조참의 를 역임한후 나라에 훈공을 세워 제안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명인 제안을 본관으로 삼아 창원 황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을구의 7세손 대붕이 조선조에 호성원 중공신에 올라
현령, 군수를 지냈고, 후손 대임의 아들 응성은 조선 중엽에 보령현감, 청도군수를 역임하였다.
이렇게 대대로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낸 제안황씨는 창원황씨 시조 황석기 계통의
제안공파로 이어져 계대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안황씨는 남한에 총 603가구, 2,3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평남 대동군 부산면 화곡리
平海黃氏
1. 都始祖: 口傳하여 後漢將軍 儒臣公 黃洛
始祖: " 箕城君 黃甲古
入鄕世居 1世祖: 고려조 太子檢校公 黃溫仁
2. 유래
도시조 황락은 지나(支那)의 후한 신하로서 서기28년
(신라 유리왕5년)에 신라의 평해 월송의 해안가에 도착
하여 세거하였다는 구전이 있고 그 후손으로 구전하는
甲古, 乙古, 丙古중 갑고가 기성현(箕城縣: 현 平海)의
기성군에 봉해져 평해황시의 시조가 되었다고 함.
그러나 이후 世系는 전하지 못하고 고려말 금오위장군
.태자검교를 지낸 황온인을 1세조로 삼고 계대하였다.
3. 분파
황온인의 손자로서 고려말 시중을 지낸 황유중(黃裕中)
은 아들이 셋 있었으니 검교공 황진(黃璡), 충절공 황서(黃瑞),
충경공 황용(黃 王+庸) 으로 나뉘어 크게 번성했는데
*황진(黃璡)의 후손인
직제학 황근(黃瑾) 계통을 ................제학공파(提學公派)
중랑장 황중록(黃中祿)의 계통을.....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전서 황견(黃견패옥견. 현)의 계통을 ....전서공파(典書公派)
진사 황인비(黃仁庇)의 계통을 ........불권헌파(不倦軒派)
*황서(黃瑞)의 후손인
병사 황길보(黃吉甫)의 계통을.........기성파(箕城派)
황유보(黃有甫)의 계통을..................평해파(平海派)
*황용(黃墉?)의 후손인
판서 황천록(黃天祿)의 계통을..........의정공파(議政公派)
찬성사 황천상(黃天祥)의 계통을......찬성공파(贊成公派)
밀직사 황천복(黃天福)의 계통을......밀직공파(密直公派)
관찰사 황천계(黃天繼)의 계통을......관찰사파(觀察使派)
로 분파하고 있다.
4. 역사적 중요인물
* 황 서( 黃 瑞 ): 忠節公 (고려사 참조)
* 황희석(黃希碩): 襄武公
* 황 현( 黃 鉉 ): 大司成. 學者
* 황응청(黃應淸): 號 大海. 學者. 平海 明溪書院 配享.
* 황준량(黃俊良): 號 錦溪. 學者. 退溪門人. 愚谷書院 配享
* 황여일(黃汝一): 號 海月軒. 學者. 明溪書院 從享
* 황선신(黃善身): 武科. 丙子胡亂 戰死. 贈兵曹參議. 享忠烈祠
5. 인구분포
* 의성군 다인
* 안동시 풍천.와룡
* 청송군 청운동.신기동
* 상주군 사벌.중동
* 문경 산북.
* 예천 로상.
* 영풍 풍기
* 울진 기성.평해.온정
* 강원 홍천.고성
* 함북 명천
* 함남 이원.함주
* 기타 각 시.도 분포.
(참고) 황씨를 지나의 건국 전설에 나오는 신화적 인물인 헌원씨의 자손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기자의 자손이라고도 하는데 헌원씨의 자손이라는 것은 한나라 백성인
한족 모두가 주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백성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오늘날도 한족들은 비단 황씨뿐만 아니라 모든 성씨가 헌원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역사적 확실한 근거는 없다. (예를 들어 백씨나 왕씨도 헌원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고려조나 조선조에는 시조설에 관하여는 중국모화 사상으로 중국 도래설을 인용하지만
삼국시대에는 한반도 자체의 일반 백성은 성씨가 거의 없었고 당나라에서 귀화했거나
유학한 소수의 씨족만이 성을 사용하였다.
출처 : 삼국사기. 진흥왕 순수비. 평해황씨족보. 사마천의 사기. 고려사. 도산급문록. 석계유고.
시조 : 황 낙[黃 洛
유래 :평해황씨의 시조는 중국 후한의 유신(儒臣)으로 서기 28년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사
신으로
교지국(베트남)에 가던길에 풍랑을 만나 안아진에 표착하여 그곳에 정착세거한 황낙(黃
洛)이다. 낙(洛)의 후손에서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의 3형제가 있어 그중 갑고가
기성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로 전하는 온인(溫仁)이 고려조에서 금오위 대장군, 태자검교를 지냇고
평해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은 온인을 1세조로 계대하면서 본관을 평해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파 : 검교공파 /충절공파 /충경공파
주요인물 :대표적 인물
- 황희석(希碩) :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개국공신 2등에 올랐다.
- 황현(鉉) : 세종 때 대사성을 지낸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 황여일(汝一) :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뒤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기록한 '조천록(朝天錄)' 등의 저서가 있다.
- 윤석(允錫) : 영조 때의 실학자, 언어학자로서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와 그가 저술한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