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전쟁위원회. 영국의 전쟁수행을 위해 내각과 군부의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오늘도 여김없이 주요인사들이 위원회에 참석하였다.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영국이 참전한 이후, 대륙의 영프연합군이 독일군의 파리 점령을 막아내었지만 독일이 후퇴 과정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교착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영국의 동맹국과 우방국이 독일,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들을 일소하였지만, 유럽에서의 전쟁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제국전쟁위원회의 참석자들 중 상석에 앉아있는 남자-영국의 전시총리 애스퀴스가 굳은 표정으로 회의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이번에 위원장인 내가 위원회를 소집한 것은 대륙의 상황 때문이오. 해협 건너 서부전선의 상황이 어떤지는 키치너경을 비롯한 이 자리의 참석자들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오. 아시아-태평양 방면은 코리아에 비밀리에 파견된 공무원 덕분에 잘 해결되었소. 문제는..."
애스퀴스가 말끝을 흐리자 콧수염이 인상적인 장성급 장교가 나섰다. 그는 수단의 하르툼과 남아프리카에서 수단인, 보어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영국 육군의 영웅이자 상징적인 존재인 전쟁장관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경이었다. 입대를 호소하는 모병포스터의 모델(?)로 영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하였다.
"동부전선은 러시아군이 동프러시아 방면에서 패배한 이후, 폴란드 방면의 러시아군이 그럭저럭 싸우고 있지만 독일군을 상대로 열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하는 갈리치아 방면에서 러시아군이 선전하고 있지만, 문제는 오스만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러시아가 동부전선 뿐만 아니라 카프카스 지역에서 새로운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러시아가 감당해야 할 전선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
오스만투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편으로 전쟁에 참전해 러시아의 시선을 돌린 원인을 제공한 자가 제국위원회에 있었지만, 회의참석자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원인제공자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현재의 상황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는 러시아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력과 물자지원을 위한 통로를 확보해 달라는 것입니다."
"..."
키치너의 발언에 회의참석자들은 웅성거렸다. 전쟁발발 이전부터 영국, 프랑스와 군사교류를 하였던 러시아는 동맹국을 위해 10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고, 무리한 공세를 벌여 독일에 커다란 타격을 입히려 하였다. 독일에 대한 공세는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동맹으로써 '도리'를 다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고 있는 회의 참석자들은 러시아가 영국정부에 하는 요청을 가볍게 듣고있을 수 없었다. 애스퀴스가 조용히 하라고 낮게 말하자 웅성거리던 좌중이 조용해졌다. 의견을 말해보라고 하자 회의참석자들은 눈치를 볼 뿐,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머리가 반 벗겨진 40대 초반의 젊은 해군장관을 제외하고.
"해군장관? 좋은 의견이라도 있소?"
해군장관 처칠의 얼굴에는 근거있는 자신감이 담겨있었다. 애스퀴스는 내심 그가 전쟁의 향방에 (좋은 쪽으로) 커다란 영향을 줄 방안을 위원회에서 제시하기를 바랬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영국이 러시아에 물자를 지원하려면 발트해를 거치거나 북해, 태평양을 거쳐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발트해는 독일함대의 앞바다라서 그곳으로 물자를 전하려면 우리 영국함대가 독일함대가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북해는 독일함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만 겨울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태평양은 미국과 한국, 일본이라는 우방국이 있지만 물자를 옮기는데 오랜 시일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애스퀴스의 눈에서 빛이 났다. 해군장관에 대한 작은 기대같은 것이었다.
"우리 영국해군이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국에게 '부드러운 아랫살' 같은 곳을 노려서 대러 보급선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부드러운 아랫살' 같은 곳은 다르다넬스 해협입니다. 그곳을 우리 영국함대가 돌파해서 러시아에 물자를 보급하는 것입니다."
"다르다넬스 해협?"
해군장관이 말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은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후 그곳을 지배한 오스만제국과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가 해로를 지키고 차지하기 위해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던 곳이었다. 불과 60년 전에 벌어진 전쟁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전쟁에 참전해 많은 피를 흘렸었다.
"다르다넬스 해협 돌파라... 전략은 그럴싸 한데 주력함대를 동원해서 해협을 돌파할 것은 아니지요?"
위원회에 소속된 해군제독 하나가 말했다. 처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력함대의 최신전함들을 대독일함대 봉쇄에 투입해도 모자란데, 최신전함들을 해협돌파를 위해 동원하게 되면 독일함대가 우리 함대의 봉쇄망을 돌파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국이 경제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요."
"..."
해군제독이 말하는 '커다란 위기'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는 상선들이 독일함대와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거나 차단되어 종국에는 영국이 봉쇄되는 것이었다. 국민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자가 끊기게 되면 영국과 연합국의 전쟁수행에 커다란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회의참석자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해군장관,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본 것은 있소?"
"어... 그게..."
해군장관은 신문기자 출신 달변가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한참을 끙끙거리다 다음 발언을 하였다.
"동맹국인... 몰타에 있는... 한국함대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함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놔두면... 서재필이 쪽팔려서 어떡합니까?"
"장관...! 방금 그 발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