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작전 및 지연전
(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 개시
1950년은 '30년 만에 최악'이라는 봄 가뭄이 닥쳤고, 아직 장마철이 아닌데도 6월 19일부터 24일까지 연거푸 비가 내리다가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멎었다. 6월 25일 새벽 3시, 김일성(당시 38세)은 내각 비상 회의를 열고 "오늘 새벽 1시에 남조선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공화국을 침공하였다."는 거짓말로, 전선 사령관 김책에게 "6월 25일 04시 국방군을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폭풍!'이라는 공격 개시 암호명과 함께 전차를 앞세우고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38선 240㎞를 일제히 넘어 일방적으로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적은 제 1차 공격 표적이 된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인민군의 주공부대인 제 1군단은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에 이르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그리고 조공부대인 제 2군단은 화천과 인제, 양양 일대에서 춘천, 강릉을 목표로 자주포(SU-76)를 앞세우고 일거에 국군의 38선 방어진지를 돌파하려 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전황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으며, 국군 서부 지역 최전방 부대인 옹진반도의 제 17연대가 6월 25일 당일에 무너지면서 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다. 그런데, 육본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은 17연대는 해주를 점령하고 38선 이북으로 20㎞를 북진하였다고 거짓방송을 하였다.
현재까지 좌파들은 이 방송을 근거로 국군이 북침하였고 6·25는 미국의 대리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군 1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때문에 해주를 점령할 수 없었고, 38선 이북으로 20㎞도 전진할 수가 없는 연대였다. 국군의 다른 부대들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인민군 전차 때문에 38선 이북으로 북진할 수가 없었다.
6월 26일 신성모 국방부 장관도 중앙방송국에 나가 "침입한 적은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군은 총 반격전을 개시하였는 바 차제에 압록강까지 전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국토의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는 생방송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피난민에 대한 비상계획이나 구호, 철수계획을 체계적으로 논의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데 분주하였다. 적의 압력이 가해질수록 서울은 이북 지역으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해 말할 수 없이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청량리 거리는 피난민으로 꽉 메워져 있었는데도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전히 전황이 좋다고 하였으니, 서울 시민들은 남침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순간까지 정부의 방송을 철썩같이 믿고 피난가지 않은 자가 많았다.
급기야 6월 28일 아침, 38선 접경지에서 수도 서울에 이르는 거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황상태였고,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무질서를 초래하여 주민들은 탈출로를 찾아 아우성쳤고 모든 거리는 사람들로 메워졌다.
- 피난길에 오른 남한 국민들 -
(2) 개성-문산 전투
1사단(사단장 백선엽 대령) 정면의 인민군은 제 203전차연대로 증강된 제 1사단 및 제 6사단(-)으로서, 그 중 제 1사단은 구화리-고랑포-문산 방향으로, 제 6사단은 개성-문산 방향으로 공격하여 왔다.
6월 25일 새벽 4시 인민군의 포격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인민군 제 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제 14연대로 옹진을, 제 13연대와 제 15연대로 개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적군 제 15연대는 기차로 개성역에 들이닥쳐 순식간에 그곳을 점령하였다. 국군 제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특공대를 조직, 인민군에게 빼앗긴 개성시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병력 부족으로 적에게 밀려 철수하였으며 25일 오전, 개성은 인민군 제 6사단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고 말았다.
제 13연대 3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전방에 배치된 제 10, 11중대장으로부터 북괴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상황보고를 받았으며, 곧이어 연대장으로부터 "적을 최대한 지연시킨 후 금곡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방 중대에 하달하려 했으나, 이미 모든 통신이 끊겨 있었다.
유재성 3대대장은 9중대 1소대장 장두철 중위에게 특공대를 조직하여 공격하라고 명령, 특공대 9명이 전차를 공격하였으나 전차로 접근하는 도중에 기관총 사격을 받아 모두 전사하였다. 이후 많은 장병들이 앞을 다투어 전차 육탄 공격을 지원하고 나섰으며, 김일하 이등 중사 등 특공대 7명을 선발하여 다시 전차를 공격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수색에 있던 제 11연대(연대장 최경록 대령)는 사단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고 6월 25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 사이에 열차를 이용해 3회에 걸쳐 이동하여, 임진강교 남쪽의 주저항선에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제11연대장은 제 12연대의 철수 상황을 확인한 후 사단장에게 임진강교의 폭파를 건의 하였다.
공병대대 작전 장교는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으나 불발이었다. 작전 장교가 급한 마음에 다시 폭파병 두 명을 이끌고 뇌관을 연결, 폭파를 시도했으나 배선이 끊어졌는지, 역시 실패하였다. 끝내 임진강교를 완전히 폭파하지 못하고 철수함으로써 중공군 출신으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의 북한군 제 6사단 주력부대가 임진강교를 건너 서울을 향해 물밀듯이 내려오게 되었다.
한편 육군본부의 조치로 지원부대가 도착하여, 보병학교 교도대대는 제 11연대에,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대는 제 13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제 15연대는 최후 저항선상의 위전리에 배치하고, 제 20연대 3대대를 배속시켰다.
이렇게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강되어 힘을 얻은 제 1사단은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오른쪽 인접부대인 제 7사단이 덕정-축석령쪽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에 사단의 동측방이 완전히 노출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백선엽 사단장은 6월 26일 오후 7시부로 사단을, 위전리-도내리를 연하는 최후 저지선으로 철수토록 하였다.
(3) 옹진 지구 전투
한편 개성 서쪽 옹진반도에서는 국군 독립 제 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가 45㎞에 달하는 38선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 17연대 정면의 적은 인민군 제 6사단 14연대와 제 3경비여단으로서, 적군 제 14연대는 전차를 선두로 제 17연대 3대대 정면 취야(황해도 해주군)에서 양원 및 강령 방향으로, 적군 제 3경비여단은 기마대를 앞세우고 제 17연대 1대대 정면 옥동에서 옹진방향으로 공격해왔다.
적의 기습을 받은 제 17연대는 초전부터 악전고투하였으며, 좌전방 1대대의 주저항선이 아침 6시경 인민군에 의해 돌파되었다. 연대장은 지체 없이 예비대인 제2대대를 투입, 역습하여 빼앗긴 지역을 되찾았으나, 우전방의 제 3대대가 적의 강력한 공격에 무너지고 오후 5시경에는 옹진과 강령이 점령당함으로써 연대 방어진지는 동서로 양분되었다.
제 17연대장은 이와 같이 전투지역이 양쪽으로 분할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연대본부와 3대대는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부포항에 집결, 다음날 오전 해군함정을 이용해 철수하였으며, 제 1대대 및 2대대는 사곶항에서 민간선박을 이용하여 각각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4) 동두천-포천 지구 전투
인민군은 서울 북방 의정부 방면을 공격하기 위해 3사단, 4사단, 105전차여단 등 총 37,000명의 병력과 T-34전차 123대, SU-76 자주포 80대 등 최대 군사력(30%)으로 총집중하였으며, 그 중 제 3사단이 포천 방향으로, 제 4사단은 동두천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한편 동두천, 포천 지역에는 국군 제 7사단 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38선 경계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동두천 정면에는 제 1연대(연대장 함준호 대령), 포천 정면에는 제 9연대(연대장 윤춘근 대령)가 배치되어 있었고 사단 예비대는 온양에 위치해 있어 전방에 즉각 투입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윤춘근 제9연대장은 포천에서 인민군 전차부대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38교에서 만세교까지 전차를 막을 수 있는 전차 함정이나 전차벽이나 교량 폭파준비나 어느 것 하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에 실패하였다. 또한 제 8포병대대의 105㎜ 곡사포 15문은 위급한 시기에 탄약이 없어 쓸모없는 무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인민군 제 3사단은 11시에 포천을 점령하였다.
6월 25일 오후 3시경, 수도사단 제 3연대가 포천 남쪽 송우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포천 읍내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뒤늦게 합류한 연대장은 상황을 종합판단한 끝에 송우리에 방어진지를 급편하기로 결심하고 태봉산과 그 남쪽에 2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제 3연대의 방어진지 편성이 미처 끝나기도 전인 오후 5시경 전차 7-8대를 선두로 하여 자주포, 장갑차, 차량 등 150대로 이루어진 적의 대규모 기갑부대가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대규모의 기갑부대를 맞아 장비가 열세한 제 3연대는 81㎜ 박격포를 비롯한 각종 화력을 집중하고 57㎜와 2.36인치 대전차 로켓트포로 전차를 공격하며 싸웠으나 적의 전차 1대만을 도로변 배수로에 빠지게 하였을 뿐, 적의 포격과 기총사격에 완전 압도되어 저항을 거의 포기한 상태로 빠져 들었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 아래서 연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방어진지를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 3대대장은 연대장을 대신하여 철수명령을 하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작전 초일에 국군 제 7사단은 동두천과 포천 및 송우리까지 피탈당하고 부대의 전력이 분산되어 의정부 방어가 위태로운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게 인민군 3사단은 송우리를 점령하였고, 인민군 4사단은 이날 해질 무렵 동두천 시내에 진입함으로써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의정부 방어를 위해 서울 부근 주둔 부대(수도사단 예하 제3, 18연대)와 후방에 있는 부대(대전의 제 2사단)까지 5개 연대, 총 15개 대대를 증원하였다. 그러나 투입된 병력은 비상 소집된 순서대로의 임시편성이었으며, 한꺼번에 모아서 집중 투입해야 힘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도착하는 대로 축차적인 투입을 한데다가, 통신망이 구비되지 않아 연락과 협조는 물론 상하부대 간의 지휘체제마저 확립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전차로 중무장한 인민군의 공세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26일 오전, 국군 제 7사단은 역습을 감행한 결과 동두천을 탈환하는 듯하였으나, 후방이 포위될 위협 때문에 철수하였다. 국군 제 2사단(5연대)은 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다음날 사단 병력이 모두 도착하면 집중해서 운용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채병덕 총참모장의 강경한 지시로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전적차로 인해 포천 공격이 실패함으로써 분산 철수하고 말았다.
그리고 문용채 제 16연대장은 휴가병과 외출병을 끌어모아 겨우 혼성 1개 대대를 편성하여 금오리에서 자일리 사이 동쪽 산으로 올라가 개인호를 파게 하였는데, 6월 26일 아침 8시, 자일리 쪽에서 금오리 쪽으로 인민군이 장사진을 이루며 내려오고 있었다. 이때 금오리에 포진한 육군 포병학교 제 2교도 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105㎜ 곡사포로 1번 전차만 집중적으로 공격· 파괴시켰다. 이로 인해 인민군 후미 전차가 전진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때 후미 전차 한 대가 포신을 돌려 전차포를 쏘아 김풍익 소령과 제 2포대장 장세풍 대위 및 포대원 전원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렇게 6월 26일 단 하루 만에 국군 제 2사단, 제 7사단, 수도사단 합 3개 사단이 참패하고 말았으며, 개전 3일째 6월 27일 새벽 4시, 포천과 동두천을 확보한 인민군은 의정부를 공격, 6월 27일 의정부 방어선이 붕괴되고, 이어서 창동, 미아리 방어선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무적의 괴물 T-34전차와 자주포가 국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나 자주포도 갖지 못했고,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도, 그에 대한 적절한 방어 훈련도 전무한 상태였다. 국군은 처음 보는 전차의 괴물같은 위력을 보고 겁에 질리고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 북한군의 105탱크여단 -
개전 초기, 인민군이 앞세우고 내려오는 전차와 자주포를 멈추게 할 효과적인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병사들,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들은 특공대와 결사대를 조직하여 박격포탄 및 수류탄 뭉치와 화염병을 손에 들고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를 공격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파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실로 초급지휘자(관)들이 몸으로 보여 준 전투는 가히 희생적이고 결사적이었으며, 나라를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한 위대한 구국적 행동이었다.
서울 사수의 마지막 저지선인 미아리 방어선은, 대체로 27일 밤중에 무너졌다. 북한군은 38선을 돌파한 지 불과 60여 시간 만에 수도 서울에 T-34탱크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서울에 맨 처음 돌입한 북한군 부대는 제 105전차여단과 이권무가 이끄는 제 4사단의 제 18연대였으며, 제 18연대는 그 본부를 덕수궁에 두었다.
이어 이영호가 이끄는 제 3사단이 입성하였으며, 방호산의 제 6사단은 서울로 들어오지 않고 곧바로 7월 3일에는 인천을 점령하였다.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서울 시내에 제일 먼저 돌입한 제 4, 3사단에게 7월 5일 서울사단이라는 명예칭호를 부여하였고, 제 105전차여단에도 사단 승격과 동시에 서울사단의 명예칭호를 부여하였다.
-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들 -
가. 한강교의 조기 폭파(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북한군이 침공한지 4일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의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되었다. 당시 북한군의 한강 이남으로의 공격을 막으려면 한강교의 폭파가 필수적인 조치였다. 문제는 그 시기인데, 한강교의 폭파는 그 시기의 잘못으로 인해 피해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한강교 폭파 준비는 27일 오후 3시 30분경에 준비가 완료되었으며, 채병덕 총참모장은 28일 새벽 1시 45분경 돈암동에서 돌아온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의 전차가 시내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리고, 그길로 장경근 국방부 차관과 육본을 떠났다.
한강교 폭파계획에 대해 들은 미 고문단 참모부장 그린우드 대령과 2사단장 이형근 준장,
미아리 지구 전투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한강교를 폭파해서 국군을 다 죽일 작정인가? 중화기와 군 장비와 군수품을 몽땅 인민군에게 바치려는 것인가???라고 항의하자,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잘못하면 오해를 받을 거라 생각했던 김백일 참모부장은 후퇴 명령을 내리고 장창국 작전국장에게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국군 주력이 통과될 때까지 폭파를 중지하라!"라고 명령하였다.
장창국 작전국장은 정래혁 중령, 공국진 중령, 류근창 대위, 박정인 중위와 같이 지프차를 타고 한강교 폭파현장으로 달려갔는데, 남한강 파출소를 150m 남겨두고 있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이 들렸다.
6월 28일 새벽 2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엄홍섭 중령과 황원회 중위에게 "다리 위의 피난민을 제지하고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시영 부통령이 지나간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폭음 소리와 함께 한강교가 폭파되어 내려앉았다. 다리 위의 차량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 일대는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타올랐으며, 사람들은 붕 떴다가 강물 위에 떨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은 다리 밑바닥을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그 참상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습니다. 당시 다리 위에 있던 약 800-1,000여 명이 한꺼번에 강물에 빠져 숨졌다.
강북에 고립된 6개 사단(1사단, 5사단, 7사단, 수도사단, 2사단, 3사단) 44,000명의 병력은 전사하거나 지휘체계가 무너진 가운데 실종됐으며, 중장비를 비롯한 개인화기까지도 고스란히 버리고 후퇴해야 했다.
의정부 쪽에서 혈전을 벌이던 7사단은 모든 장비를 버리고 헤엄을 쳐 겨우 500명의 장병이 기관총 4정만을 가지고 한강을 건넜다.
- 폭파된 한강교의 모습 -
한강교가 폭파된 줄도 모르고 봉일천에서 역습을 시도하고 있던 백선엽 1사단장은 눈물을 머금고 부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인민군이 행주에 오기 전에 한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철수를 서둘렀다.
한강교 폭파의 영향은 심각하여 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음성녹음만을 남기고 야간특별열차로 서울을 떠난 이승만 대통령, 서울 방어를 장담하던 군 수뇌부의 철수, 갑작스런 한강교의 폭파는 정부와 군의 커다란 허점을 드러내었고, 정부에 대한 신뢰와 그 권위는 완전히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군 수뇌부는 민심 수습을 위해 한강교 폭파와 관련된 자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였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된 후 14년이 지난 1964년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최 대령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 뿐이라고 판단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그 재판에서 그 상관이 누구인지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문제에 있어서, 군 내부 지휘책임과 군 내부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한강교의 조기 폭파는, 적의 진출로를 차단하는 효과보다 오히려 우리측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정부가 서울 사수를 약속하는 바람에 피난을 가지 않거나 다시 서울로 돌아온 사람들이 허다했으며, 한강교를 폭파하는 순간부터 150만여 명의 서울 시민들은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다.
나. 6월 28일, 서울대병원 국군 부상병을 집단학살한 인민군의 만행
6월 28일 아침, 마침내 북한군이 미아리를 뚫고 중앙청을 지나 서울대병원까지 들이닥쳤다. 개전 직후 의정부 지구에서 부상한 국군 부상병들은 모두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이들은 심한 부상을 입은 중환자들이었다.
인민군은 국군 부상자 100여명뿐 아니라 일반 환자까지도 악질반동이라고 하면서 닥치는 대로 죽였는데, 인민군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병실, 복도, 수술실, 변소, 식당 등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뒤쫓아 기어이 찾아내고는 잡히는 대로 즉결처분하였다. 이렇게 28일 낮 현재, 각 병실에서 북한 인민군에 의해 쓰러진 인원은 약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오후 1시쯤에는 모든 환자들을 현재의 의대 뒤(당시에는 무료진료소)에 집합시켰다. 이 시간에 모여진 인원은 대략 300여 명이었는데,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아 헐떡이는 환자들은 총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개머리판으로 난타하는가 하면 발길로 목을 짓눌러 죽이는 참혹상도 볼 수 있었다. 또 더 잔인한 살인마는 큰 돌을 번쩍 올려 머리에 던져 죽음을 재촉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부상병이 시체더미 속에 살아 남아 숨을 헐떡이자, 이를 본 인민군은 트럭 2대를 가져와 시체더미 위를 서너 번 깔아뭉개기까지 했다.
당시 서울대병원에는 붉은 사상을 가진 의사와 직원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러한 만행은 바로 그들이 앞장섰던 결과였다. 한편 병원을 끝까지 사수하고 있던 1개 소대(약 30명, 소대장 남 소위)는, 1개 중대(약 200명)가 넘는 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소대장 이하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여 부상병들과 운명을 같이하였다.
참으로 이같이 비인도적인 전례는 아직 세계 전사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서울대 병원 대학살 만행을 통해 우리는 짐승보다 못한 공산당의 정체를 똑바로 그리고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다.
다. 서울 점령이후 인민군의 3일 지체
서울은 북한군에 의하여 장악되자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바뀌어졌다. 북한군은 곧 마포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각 경찰서에 들어가 정치범은 물론 죄수들을 모조리 석방시켰다(남로당원 약 9,000명). 이들은 인민의 영웅으로 추켜져 북한군을 환영하는 선봉에 내세워졌고, 이른바 반민족주의자들의 색출에 앞장서게 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까지 공산치하 3개월 동안 입은 인명피해는, 전국적으로 165,000명이 학살되고, 122,000명이 북으로 납치되었으며, 서울에서만 민간인 9,500명이 피살되었고, 4,200명이 북으로 끌려가는 참상을 겪어야 했다.
- 공산치하에서의 인민재판 모습 -
북한 공산당은 창경궁 앞과 혜화동 로터리 두 군데서 자신들이 잔인하게 살해한 시체들을 태웠으며, 그 불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이것을 지켜보는 인근 주민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공산당의 정체가 바로 저것이구나 하는 것을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 무자비하게 학살된 양민들 -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승리에 들떠 2일간에 걸쳐 서울시청에서 승전 축하연회를 여는 등 일방적인 공격을 멈추고 3일간 서울에서 지체하였다. 북한군이 3일간이나 서울에서 지체한 이유는 무엇인가? 박헌영에 의해 은밀히 공작된 약 60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남한 전역에서 일제히 봉기하면 남한 전체를 순식간에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남로당 간부 김삼룡, 이주하, 이재복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인민유격대 2천여 명이 국군 진압부대에 의해 토벌되었으며, 남로당 서울시당 홍민표의 자수 이후, 그가 설득한 남로당원 약 33만 명이 자수하여 폭동을 일으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3일을 기다려도 남한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자 7월 1일, 김일성은 초조하여 인민군에게 한강을 건너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북한군 제 1사단, 3사단, 4사단, 6사단 등 4개 사단은 일제히 한강을 건넜다.
한편 국군은 대전 3사단, 광주 5사단, 대구 3사단이 국군 1사단, 7사단, 수도사단과 함께 한강 이북에서 궤멸되었기 때문에 이제 한강 이남에서 인민군을 막을 병력은 강릉 8사단, 원주 6사단, 대구 3사단 23연대뿐이었다. 단 3일 만에 국군 병력 98,000명 중 44,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54,000명만 남은 것입니다. 이는 인민군 대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5) 춘천-홍천 지구 전투
중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제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에 제 7연대, 홍천 북동쪽에 제 2연대를 각각 배치하고, 제 19연대는 사단 예비대로서 원주에 배치하였다. 6월 25일 새벽, 약 30분 동안 적은 엄청난 포격을 퍼부은후 공격을 가해왔다. 모진교는 춘천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며 매우 중요한 교량이었는데, 적은 제 7연대 3대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면서 인공기를 앞세우고 자주포와 함께 모진교를 건너 공격해왔다.
연대 57㎜ 대전차포 중대 2소대장 심일 소위는 옥산포에서 적 자주포 2문을 대전차포와 육탄공격으로 파괴하였는데, 이를 164고지에서 바라보던 아군장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제 7연대 장병들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이 사라지고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당시 6사단 7연대 헌병대장 조혁환 소령은 "제 6사단은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지 않고 외출, 외박을 금지한 상태였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 학도호국단원들을 지원받아 진지를 견고히 구축해 놓았습니다. 제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은 전쟁 전 현장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치밀한 화력계획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오자 계획대로 사격을 가해, 소양강 일대의 벌판이 쓰러진 인민군의 빨간 계급장과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27일 새벽 5시, 인민군은 소양강 돌파를 위해 증강된 4개 연대로 국군을 압박해 왔다. 이에 제 6사단장은 제 7연대를 춘천에서 철수시킨 후 지연전을 실시하였다.
6월 28일 아침 9시, 자주포 10대와 수 십 대의 트럭에 병력을 가득 태운 적군 제 12사단이 말고개의 제 2연대를 공격해 왔다. 이때 대전차 특공대원 조달진 일병 등 대전차 특공대원들이 수류탄과 휘발유를 넣은 화염병을 들고 적 자주포에 뛰어들어 10여대를 파괴함으로써 전쟁사에 빛나는 전공을 남겼다.
6월 29일 11시, 제 7연대 제 2대대 전방에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백기를 흔들며 접근하자 대대 장병들은 적이 투항하는 것으로 믿고 받아들일 채비를 하는 순간, 20m까지 접근하던 적이 숨겼던 다발총을 난사하여 기습을 당한 2대대는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인민군은 춘천과 홍천에서의 작전 실패로 인해 인민군 제 2군단장 김광협은 제 2군단 참모장으로 강등되었고 김무정이 제 2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제 2사단장 이청송 소장이 해임되고 최현 소장이 임명되었다.
춘천-홍천 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 6사단이 인민군의 공격에 맞서 춘천을 3일간 고수함으로써, 인민군 제 2군단에 의한 한강 이남에서의 포위를 막았고 7월 3일까지 6일간 한강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미 제 24사단이 한국에 도착하여 경부축선에 전개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6) 강릉 지구 전투
동해안 지역 방어는 국군 제 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 2개 연대가 맡았으며, 예하 제 10연대는 38선에, 제 21연대는 삼척에 집결하고 있었다. 당시 게릴라 토벌작전 때문에 각 연대에서 1개 대대가 각각 빠진 상태였으므로, 적의 남침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부대는 4개 대대 뿐이었다.
반면 인민군 제 5사단은 그 2배가 넘었으며, 여기에 제 945부대 및 제 766부대가 임원진, 정동진 등 해안으로 상륙하여 후방으로부터 협공했으므로, 제 8사단은 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6월 25일 새벽 4시, 제 10연대 전방부대들은 엄청나게 쏟아지는 적 포병화력에 압도당하여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2대대는 주문진으로, 제 1대대는 구룡령에서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광원리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적군 제 945육전대는 강릉 남쪽 정동진에 상륙, 삼척-강릉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밤재를 점령하였으며, 1개 대대는 강릉을 목표로 북상하고 1개 대대는 옥계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또한 아침 7시경에는 임원진에 적군 제 766부대가 상륙하여 1개 부대는 태백산으로, 1개 부대는 삼척방향으로 북상하였다.
제 8사단의 주방어진지는 연곡천과 송림리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는데, 6월 27일 새벽 4시경 적은 천마봉을 집중공격하여 철수케 되었으며, 주방어진지에서도 측방으로 접근하는 적을 아군으로 잘못 판단함으로써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때마침 증원된 제 21연대 3대대가 적을 사천선에서 저지하여 주방어선에서 철수한 병력들이 진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사단은 승산 없는 무모한 전투를 피해 대관령으로 물러나 반격을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6월 27일 밤 대관령을 넘어 유천리와 횡계리에 집결하였다.
이후 제 8사단은 6월 28일 아침 강릉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하던 중 "원주로 철수하라!"는 육군본부의 명령을 받고, 차량행군으로 원주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적이 먼저 원주에 도달할 상황이 되자 대화를 거쳐 제천으로 철수하였다. 그 결과 동부전선에 배치된 국군부대는 전무하게 되었으며, 국군 제 3사단 23연대가 울진으로 북상할 때까지 인민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남하하였다.
38선 일대에서, 국군의 방어진지를 기습공격한 북한군의 전투력은 처음부터 아군의 2-3배가 넘었다. 따라서 중과부적이었던 국군은 불과 3일 만에 중요한 방어 지역을 모두 북한군에게 빼앗긴 채 뿔뿔이 후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7) 한강선 방어
한강교가 폭파되자 국군 장병들은 지휘체제가 와해된 채 수영이나 민간인 배 등을 이용하여 한강 이남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시흥 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굶주린 장병들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그때까지 미군 참전이 확정되지 않았으나 '미군 참전'이라고 크게 쓴 간판들을 길목마다 세워 철수 중인 장병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이렇게 하여 시흥 지구 전투사령부는 놀랍게도 국군의 주력부대들이 흩어진지 불과 10시간 만에 3개 혼성사단을 편성하여, 양화교-광진교상의 한강 연변 24㎞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시흥 지구 전투사령부는 미 지상군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들이 가능한 한 북쪽에서 전투를 전개할 수 있도록 최대한 한강선에서 지탱한다는 방침이었으며, 김포방면에는 혼성병력 6개 대대 총 2천 여 명으로 구성된 김포 지구 전투사령부가 배치되어 있었다.
7월 2일까지 한강선에 공격을 계속하던 적은 전차가 없는 상황 하에서는 도하가 곤란하다고 판단한 듯 철도선로반원과 시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은밀하게 철교 복구 작업을 실시하였다.
마침내 북한군이 경부선 철교를 복구하고 7월 3일 새벽 4시 전차 4대를 도강시키는 데 성공한 후 영등포의 함락이 목전에 다가오자 김홍일 소장은 한강방어선에서 국군병력을 철수시켰으며, 국군은 7월 3일까지 한강 방어선과 곤지암-충주-제천으로 이어지는 선을 지탱한 후 수원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이 무렵부터 6월 25일 이후 10일간에 걸친 국군의 독립작전에서 오산 · 안성 지역에 배치되기 시작한 미군과의 연합작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한편 6월 30일에는 채병덕 소장이 육군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고 정일권 소장이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해임된 채병덕 장군은 이후 '영남 편성 관구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부여 받은 이후, 미 제 29연대 3대대의 고문관으로 1950년 7월 27일 하동 쇠고개에서 전투 중, 총탄 2발을 맞고 전사하였다.
(8) 유엔군 참전
1950년 6월 28일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8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북한의 무력공격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규정하고 파병 결의안을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찬성 7표, 반대 1표, 기권 2표(인도, 이집트)로 가결하였다. 30일 미 국방부에서는 지체 없이 제 24사단을 파견하였으며,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했고, 이것을 시작으로 이어서 미 제 24사단 주력 부대들도 속속 부산에 상륙하였다.
7월 7일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참전한 유엔회원국들을 미국의 통일된 지휘 아래에 두었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7월 14일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했다.
- UN군 사령부의 창설 -
예상과 달리 북한군에게 연속 패배를 당하여 밀리자, 맥아더 장군은 계속해서 증원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7월 24일 제 29연대, 7월 31일 제 5연대전투단, 그 다음 주에는 제 1임시해병여단과 제 2사단의 2개 연대가 도착하여 낙동강 방어선으로 급히 투입되었다.
한국전 참전 유엔국 16개국과 참전인원은 미국(302,483명), 오스트레일리아(2,282명), 캐나다(6,146명), 뉴질랜드(1,389명), 영국(14,198명), 필리핀(7,000명), 터키(5,455명), 네덜란드(1,700명), 룩셈부르크(44명), 콜롬비아(1,068명), 벨기에(900명), 에티오피아(1,271명), 프랑스(1,119명), 그리스(1,263명), 남아프리카공화국(826명), 태국(1,294명) 등이다.
(9) 미 제 24사단의 전투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1950년 6월 26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한국에 투입될 미군의 작전지휘권이 부여되자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직접 시찰하였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진지를 지키고 있던 한국군 병사에게 "자네는 언제까지 이 진지를 지키겠는가?"라고 질문하였는데, 그 병사는 "예! 저는 상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켜낼 것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맥아더는 이 답변을 통해, 국군 장병들이 불굴의 투지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몸소 확인하였으며, 국군 단독으로는 도저히 북괴군을 격퇴할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인민군의 후방을 차단, 격멸한다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1950년 7월 1일 오전 8시, 미 제 24사단 21연대 1대대 B중대, C중대 406명의 병사들은 이다스께 비행장에 집결하여, 대대장 스미스중령 지휘 하에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 열차편으로 대전을 거쳐 7월 4일 평택에서 북상, 오산 죽미령 일대에 전개하였다.
7월 5일 새벽 4시, 인민군 105전차사단 소속 전차 36대가 수원을 출발하여 인민군 제 4사단 16연대와 18연대 보병의 엄호를 받으며 내려왔다. 미군은 각종 포를 발사하여 전차에 명중시켰으나, 인민군 전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부대원들은 3.5인치 로켓트포가 있어야 T-34전차를 파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에는 로켓트포가 한 문도 없었다. 결국 스미스 대대장은 철수 명령을 내렸고, 7월 6일 안성에서 인원 점검을 해보니, 250여 명이 남았고, 실종 및 전사자가 156명이나 되었다.
7월 7일 아침 6시,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천안을 공격하였다. 전차 6대가 나타나 전차포로 공격하자 제 34연대의 3대대 장병들은 철수하였으며, 연대 지휘소가 위협을 받게 되자 연대장 마틴 대령은 포위망을 겨우 빠져나왔다가 직접 바주카포를 들고 전차를 공격하였는데, 마틴 대령은 인민군의 전차포에 맞아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천안은 인민군 제 4사단에 의해 점령을 당하였고, 인민군 제 6사단은 온양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미 제 24사단은 1950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인민군 제 3, 4사단과 대전에서 격전을 치렀다. 최초로 한국 전선에 뛰어들었던 미 제 24사단은, 경부축선에서 인민군 주력 3개 사단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켜, 차후 반격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확보해 준 고마운 사단이었다.
미 제 24사단은 인민군의 압도적인 전세에 전투병력 30%의 손실을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마지막까지 대전에 남아 있다가 실종되고 말았다(당시 52세).
딘 소장은 산야를 헤매다, 대전을 떠난 지 36일 동안 거의 물만 먹고 연명하던중, 8월 25일 전라북도 진안에서 한두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친절하게 모시겠다.'고 속이고는 딘 소장을 인민군에 밀고하여 체포되고 말았다. 딘 소장은 3년간의 포로생활 끝에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고, 미 의회는 용감하였던 그에게 미 육군 최고훈장을 수여하였다.
7월 7일 충북 음성-동락리 전투(국군 7연대)와 7월 21일 충북 괴산 화령장 전투(국군 17연대)에서 인민군 제 15사단 48, 49연대를 상대로 거둔 대승은 전쟁 발발 후 계속적인 패배로 불안감에 쌓여있던 국민들에게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 넣고 사기를 드높여준 소중한 전투였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월 21일 대전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을 도하함으로써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북한군은 전쟁 개시 35일 만에 낙동강 전선부근까지 밀고 내려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