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環會와 減膳會,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土曜講座 講士 徐 昌 植
Ⅰ
탈환회와 감선회라는 단체는 반지를 마련하고 웰빙식품을 통한 다이어트를 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다. 놀러 다니거나 부동산 투기를 목적으로 한 복부인들의 모임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들 모임은 대한제국 말기, 정확하게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체결로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뒤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을 눈 앞에 둔 시점인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일환으로 결성된 여성들의 구국운동모임인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은 보통학교 설립을 통한 신교육 구국운동을 펼치던 대구광문회(大邱光文會)의 서상돈(徐相敦)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국가의 존망이 달린 국채 1천3백만원을 국민의 단연(斷煙)운동을 통한 의연금으로 보상함으로써 국토와 국권을 보존하자”면서 “국채를 갚아야 국가가 살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報則國存 不報則國亡)”고 외침으로써 전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간 애국계몽운동이다.
그들은 그다지 힘들지도 않고 자기 재산을 축내지도 않으면서도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도로 2천만 동포가 석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 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천3백만원이 되어 국채를 갚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 보았다. 당시 망국 직전 우리나라의 재정형편은 매우 열악해 1905년 통감부(統監府) 가 설치된 이후에는 통감 이토오(伊藤博文)가 식민지 준비작업 명목인 이른바 시정개선비(施政改善費)조로 1천만원의 차관을 새로 들여오는 등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진 1907년 2월까지에는 1천3백만원의 빚을 일본에 지게되었던 것이다.
국채보상을 위한 대구 군민의 첫 모임인, 아니 전국 최초의 국민대회는 1907년 2월 21일 대구성 밖의 북후정(지금의 시민회관 자리)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언론을 타고 전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게 되었다.
Ⅱ
전 국민적인 국채보상운동에서 간과되어 오다 싶이 했지만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아니 그 이상으로 강조되고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부문이 여성들의 국채보상의연금 모금 활동이다. 봉건적인 체제속에서 남성들의 종속적인 존제에 불과했던 여성들은 그때까지는 사회운동에 참여해도 기껏 여성지도자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에는 여성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가정부인은 물론 기생,노비 등 천한 신분의 여성까지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여성들의 이 운동의 진원지도 역시 대구였다. 국채보상 대구국민대회가 열린 이틀 뒤인 2월 23일 대구 남일동에서 정운갑의 모친 서씨, 서병규의 부인 정씨 등 7인이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南一洞佩物廢止婦人會)」를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경고(警告), 아부인동포(我婦人同胞)아」라는 격문을 띄워 본격적으로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다.
우리가 일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삼종지도(三從之道)외에는 간섭할 일이 없으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자오니 2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돈을 모은다고 하나 여자는 논외로 한다고 하니 대저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며 천지만물중 일물이 아니리오. 본인 등은 여자의 소치로 몸에 지닌 것이 다만 패물 등속이라, 태산이 흙덩어리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河海)가 가는 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로,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나니 뜻 있는 부인 동포들은 다소를 불구하고 열심 의연(義捐)하와 국채를 정리하심이 천만다행이겠음.
남정네들이 단연으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면 아낙네들은 몸에 지닌 반지나 비녀 등 패물을 벗어 던져 의연금을 마련함으로써 탈환회의 단초를 열었고 외환위기때 금모으기운동의 효시가 되었던 것이다.
대구에서의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역시 당시의 언론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나갔다. 서울에서는 김석자 등이 반찬을 줄이는 등 식생활을 절약하여 국채보상기금에 보태자는 뜻으로 부인감찬회(婦人減餐會)를 결성하였으며 상류층 양반 부인들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를 결성하여 의연금모금에 적극 발벗고 나섰다. 이밖에 서울에는 전부터 설치되어 있던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등이 보상금모집소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한 대구에서는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이외에도 반지를 빼서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의 국채보상탈환회가 조직되었으며 부산에서는 감선의연회(減膳義捐會)가 설립되어 반찬을 아껴 조그마한 돈이라도 모아 국채상환에 보태고자 하였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도 삼화항패물페지부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회에서는 1천만 여성이 2원 이상의 의연금을 내면 3천만원이 될 것이니, 1천만원으로는 국채를 상환하고 1천만원은 은행을 설립하며, 남은 1천만원으로는 학교를 설립하자고 하였다. 그리고는 회원 모두가 금은 패물을 일절 쓰지 않기로 결의하였으며 이를 어기면 벌금 10원을 징수한다고 벌칙까지 정하여 보상금 모금운동을 맹렬히 추진하여 나갔다.
평양의 여성국채보상운동은 기생들에 의하여 발단되었다. 평양의 작부 31명은 32원을 갹출하였으며 기생 18명도 50전씩 거두어 내자 각계의 호응과 칭송이 대단하였다. 진주에서도 기생 부용이 동료들과 함께 진주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였고 서울의 기생 39명도 비녀를 뽑아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이밖에도 창원국채보상부인회, 선천의성회,안악군국채보상탈환회 등등의 단체가 속출하여 이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모든 남성들의 분발심을 일으키는데 큰 원동력이 됨으로써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케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열화같이 전국으로 번져 나갔던 국채보상운동도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던 20여 만원까지 모금하였지만 일진회(一進會)등 친일단체의 반대와 일제의 탄압, 거기다 국채보상운동주체의 한계성 등으로 일본에 진 빚을 갚지 못하고 한일합방과 더불어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그러나 소기의 성과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남녀노소와 상하가 오직 애국심 하나로 똘똘 뭉쳐 국권회복운동의 하나인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했으며, 외세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내외에 과시하는 효과는 거두었다 하겠다. 그런가하면 1920년대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항거하여 벌였던 범국민적 민족경제자립운동이었던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과 21세기 금모으기운동의 밑거름이 된 그 정신만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Ⅲ
이상으로 국채보상운동, 그 중에서도 탈환회, 감선회 등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활약상을 살펴 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그런대로 활발하였지만 유교국가였던 조선조에 들어와 심한 남존여비사상으로 말미암아 여성들이 규방(閨房)에 갇혀버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한말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여성지도자, 일반가정부인, 그리고 기생과 노비 등 신분이 천한 여성까지 모든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던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현대사회에는 금녀(禁女)의 벽이 허물어진지는 오래이다. 끝까지 금녀의 집으로 남을 것 같던 3군 사관학교에도 여생도의 구령소리가 우렁차는가 하면, 거대한 유조선을 만드는 조선소에서도, 고공을 가르는 골리앗 크레인위에서도 우리의 당당한 여성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초등학교 교사와 사법고시, 외무고시 합격자의 여초현상(女超現狀)에서 여성파워가 가히 하늘을 찌를듯 함을 목도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향교와 서원에도 여성들의 출입이 허용되고 이제는 석전대제 등에도 여성들이 참례하고 있다. 말하자면 남자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여자들은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사회는 바야흐로 남성의 힘이 절대로 필요했던 농경시대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정보화시대로 급격히 발전해 가고 있다. 오늘의 정보화시대는 남성의 완력보다는 여성의 섬세함과 정밀함, 치밀함, 거기다 정확도까지 더 요구되는 컴퓨터와 인터넷 시대이다. 남성들의 배려로 약자보호의 의미로 사용되어온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라는 용어도 이제는 실력제일이라는 뜻의 「레이디 퍼스트」로 바꾸어 불러야 할 때가 되었으며 여성상위시대라는 말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뿐 아니다. 이제 시대는 우리가 자각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벌써 여성이 사회를 지배하던 원시모계사회(原始母系社會)를 닮은 신모계사회(新母系社會)로 진입해, 빠르게 변모해 가고 있다.
신모계사회에 진입해 가면 갈수록 여성의 역할이 그 중요성을 더해간다. 보수적인 향교에, 진취와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신모계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낙후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 여성들의 분발이 기대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