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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에필로그가 완성 될 즈음이면 많은 동기들이 카페에 참여하리라 기대함니다.--- (틈 나는대로 짬짬이... 긁적이다 보면 2-3달 걸릴것 같기도하고....)
1971 입학 동기 카페를 만들기 까지... 얼마전 약대 동기들이 동창회관에서 오랜만에 모이자는 한통의 서신을 받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이제 50줄이 훌쩍 넘었을 학창시절 동기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다...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 30여년간의 세월/기억을 더듬어 긁적여 보기로하였다.
1974년.... 대학 4학년... KIST, 유학을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당시는 병역을 필하지 않으면 자격 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절이였기에.... 나름대로의 미래에 대한 고민 끝에... 장교시험을 준비하기로 작정하고는... 체력 보강을 위해... 2-3개월 동안 이른 새벽 한강뚝을 무작정 달렸었던 일, 특강도 빠지고 약사고시 준비는 건성으로 하다 ... 우연히 학교를 찿아갔다가 하숙까지 하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인 동기들을 보고... 뒤늦게 불안한 생각이 불현듯 들어... 한달여 남기고 방에 처박혀...정신없이 보내다... 공군/해군 장교시험을 보고....며칠 후 약사고시를 본기억들이 새롭다. 다행히 약사고시에 겨우 합격하고.... 공/해군 모두 합격했지만 공군을 선택하였다.
그해 4월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대전교육사령부에서의 훈련 생활! 심신은 고달펐지만 나를 시험할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한강뚝을 꾸준히 달렸던 덕에... 가입교시절 체력검정에서 오래 달리기에서 여유있게 1등으로 골인.... 입교 초 한밤중에 비상이 걸려 연병장에 완전군장 집합후 기합 받고.... 보름달을 쳐다보며 전후보생이 집생각에 눈물을 흘렸던 일... 칫솔을 뒷주머니에 꽂고 군가에 맞춰 훈련장으로 향하다 구대장으로 부터 뒷통수를 일격 당해... 별이 번쩍! ....이때 이유없이 눈물이 핑그르 돌았던 일...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 재빠르게 점심 두번... 성공은 하였으나... 배가 너무 불러... 고생 했던일... 대대장 보직을 맡고 있을때 한밤중에 비상이 걸려.... 야간 당직 사령 앞에 연병장에 완전군장하고 집합한 전 후보생(약500여명)을 인솔하여 사열 받던일... 어느덧 입교시 새옷이었던 훈련복은 소금/땀으로 얼룩져 빛이 바래고... 두컬레의 군화도 굽이 다달고... 그럭저럭 긴여름은 지나고 코스모스가 길가에 보이기 시작할 무렵.... 소위 계급장을 달고... 대구 기지 약제과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당시 대구 통합병원 의무병 교육을 위해 갔다가... 훈련병중에 박효식을 비롯한 후배 몇몇을 우연히 만나 반가웠던 기억도 난다. 일년후 운좋게도 공군 본부로 발령을 받고... 집에서 통근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준공무원 생활(팔자에 없는 ...)을 2년여 하는 동안 인생의 목표가 다소 수정되었다. 당시 위관 장교 였지만 예하부대 의무 장비/예산에 관한 엄무와 육군/해군/국방부를 상대로 행정엄무를 2년 동안하면서... 무역실무도 익힐 기회(KOTRA 에서...)도 갖게되어.... 당시까지만해도 세상물정도 모른체 젊은 혈기만 앞세웠던 나에게는 좋은 인생경험이었다.
이젠 머리에 서릿발이... 외할아버지가 되어...
제대 무렵 몇군데서 특채 제의가 있었지만... 1978년 가을 동아제약에 공채로 입사하여... 우수한 성적(?-당연히 비약사들이 대부분인 관계로...)으로 개발부에 픽엎되었고... 특허 엄무를 일년여 담당하였다. 지금은 각 회사 마다 보편화 되었으나 당시에는 과기부 장관을 하였던 이상희 박사를 중심으로 특허 부서를 확충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현재는 개인 변리사 사무실을 차려 독립하고 있는 김재천선배(69학번)도 다른 회사에서 특허엄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그당시 개발에 공동으로 참여한 흔적으로 지금도 특허권에 관한 서류가 아직 어딘가 보관되어 있다.
고심 끝에 약 일년반 동안의 회사생활을 접고... 집 근처 약국에서 일여년간의 관리 약사로 근무하며, 한강변을 다시 무작정 달리면서 미래를 구상하였고, 휴일이면 오산,평택,안중,수원,안양 등 한수 이남과 의정부,철원, 일산,파주 등 한수이북 경기도 일대를 누빈 끝에.... 우연히 파주와 인연을 맺은지 25 년이 되었다. 1980년 12월 말경... 언제 서울을 다시 밟아 볼수 있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구파발 검문소를 거쳐... 흐린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통일로를 달려 이곳에 둥지를 틀게되었다. 당시만해도 통행금지가 있었던 탓에 청담동에 살았던 집사람을 바래다주고... 구파발에서 총알택시에 신세를 지다... 드디어 1981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약국 쪽방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던 탓에 장인 장모님이 모처럼 방문하시면 혹시 실망하시지 않으실까? 걱정을 하기도 하였고... 다음해 무남독녀인 집사람이 첫딸을 나은것을 무척 섭섭해 하시더니, 외손자가 태어나는것을 보시지 못하시고 장인께서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여하튼 개업후 오년간은 새벽 6시부터 12시까지 약국 근무... 지금도 그당시를 생각하면 !!!!! 그럭저럭 10여년이 흘러... 제법 투자(?)라는 것에도 눈을 돌리게 되어 당시 논(지금은 하제마을로 변한...)을 비롯해 약간의 부동산에 적당히 묻어 둘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게 되자... 대학 졸업후 10년이 지난 1986년... 집사람의 양해하에...1987년 전반기 석사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고... 학창시절 은사였던 손동헌교수님 밑에서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의욕이 왕성하여... 약사회무/대학원 생활/ 약업신문 기고.... 정말로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 분주히 살았던것 같다.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박사과정 입학 시험도 집사람 몰래 준비하였으나.... 한번에 합격하리라고는 기대를 안하였지만... 합격 통지를 받고... 몇일간 머뭇거리다 집사람에게 슬쩍 내밀었더니.... 최소한 3-4년을 더 정신없이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낙심(당시는 내빈자리를 집사람이 담당하고 있던터라....) 의 그늘을 얼굴에 드리우던 기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실험결과가 여의치 않아 일년이 지체되었지만 한풀이 공부도 마치었다. 드디어 1992년 학위를 받은후 대학원 입학전... 투자하였던 팔학골의 논에 대한 구상을 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공순영릉 입구에 우리나라 원로 건축가 김수근선생이 돌아가시기 몇해전에 건축에 관한 아카데미 설립을 구상하여 부지를 확보하여 당시 붉은벽돌로 건축한 건물(지금은 모기업체에서 연수원으로 운영하고 있고 가끔 남북 적십자회담 장소로도 사용하고 있다)만 완성하였는데... 갑자기 간암으로 타계해 부속 부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팔학골 논과 인연을 맺게 된것이었다. 좁은 약국에서 세월을 보낸 대부분의 동료들이 그렇듯 .... 경제적인 여력이 생기면 뭔가(?)에 도전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마련인데... 당시 중대 3회출신 원로로써 약국을 하시면서 내수면 양식에 원조격인 김진근 선배님(충청도 서산 간척지에 대규모로 만든 가두리 양식장/ 백경수...광탄 양어장을 운영하시며 비단잉어/ 이스라엘잉어...특히 국내최초로 떡붕어 양식을 성공하여 석탑산업훈장까지 받으신 특이하신 선배...)의 배려로 간접적인 경험을 할수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때마침 금촌에 대형건물을 건축하면서 나오는 흙을 모두 받아 약 2000평에 달하는 논을 매립하고 양날개로 공장을 2동 / 가운데 근린생활시설을 1동을 ㄷ 자 형으로 건축하여 나머지 공간은 단풍나무 묘목을 이식하였다.
한동은 인쇄업 한동은 음향업자에게 임대를 주고 일부가 비어있었다. 이때부터 아침마다 팔학골(옛날 8마리의 학... 즉 학자가 살았다하여...) 에 출근하여 노동(?)후 약국으로 출근하는 일이 시작 되었다. 아침일찍 출근하여 한두시간 노동(?)을 하다... 출근하는 직원들과의 눈인사를 나눈후.... 나는 약국으로 출근하기위해 퇴근 준비를 하곤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일년 이상 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제조업으로 살아 남기가 얼마나 힘든것인가를 몸소 체험하면서 뭔가 보람있는 일을 구상하다가 우연히 1994년 가을 젊은 조각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의 작업생활에 관심을 갖다.... 다음해 동양화/서양화/도자기를 각각 전공하는 세명의 작가와 추가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후 인쇄공장의 부도로 여유공간이 생김에 따라 기획자 한명과 이태리에서 조각을 하던 작가 한명이 합류하여 제1회 오픈 스튜디오를 열면서 하제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제2회 오픈스튜디오를 끝으로 일체의 단체 활동은 중단하고 현재까지 작가들의 독립적인 창작공간으로 내실을 기하고 있다.
재작년 여름 딸아이가 카나다에서 고교 졸업후 미국으로 대학 진학을 위해 귀국시 우리 4식구(집사람,아들,딸)가 유럽 자동차 여행을 계획하였다 미수에 그치고 2주간의 유럽package여행으로 만족하였으나,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만10년이 되는 올해 해외 교류 일환으로 독일 미술관장과 중국 미대교수 초청사업을 경기문화재단으로 부터 일정예산을 지원받아 일차로 9월 초에 독일에서 Mrs 엘리자베스와 Mr. 하인즈가 약 7일간 방문하였고 이차로 10월 6일부터 약2주간 중국 작가들이 방문할 예정이다.
그리고 얼마전 모화랑 큐레이터의 석사 논문 자료에 의하여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스튜디오인 하제( 순수 우리말로 내일을 의미...)마을과 내가 같이 할수 있다는것을 행운으로 생각하여 하제마을의 공공성 유지에 보다 겸허한 자세로 임하려 한다.
2편이 이어짐니다...... |
첫댓글 더 좋은 프롤로그도 기대합니다. 삶의 시와종이 늘 그러하드시 고해와 예술또한 공존하는 것같소.
세상사는게 다 그렇구그렇게 비슷한줄 알았는데 참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군요. 난 남들이 '<게으름>이라고 말하는 선까지를 <편한함>이라고 우기며 살았는데요.__ 후회하지않을만큼 편하게 살자???___
성격상 부지런떨며 사는것 뿐이지... 뭐 유별난 삶이라고는 생각 하지않습니다.
맞아! 30년을 슬쩍 돌이키면 사연도 많을꺼야...정도!!! 참 열심히 살았네그려, 그리고 인생의 후반전은 전반전에 비해 정말 더 멋있는 삶이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