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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 크라우더 (이종환 옮김)
▣ 개 요
반복되는 예배 속에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르타처럼 분주하기만 할 뿐 마리아가 누린 평안함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탐 크라우터, 게릭 구스타프슨, 켄트 헨리 등 7명의 활발한 찬양 사역자들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지치지 않고 음악적 성장을 이루는 법과 예배 인도자나 음악 목사 또는 찬양과 예배 사역에서 섬기는 사람들에게, 사역에 능력을 더하는 성경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영감을 전한다.
▣ 차 례
1. 생각과 태도를 다듬는 예배자
2.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예배자
3. 탁월함을 추구하는 예배자
4. 하나됨을 지키는 예배자
5. 삶을 예배로 바꾸는 법을 배우는 예배자
1. 생각과 태도를 다듬는 예배자
♣ 끝까지 신실한 태도를 유지하라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1디모 4:7)
예수님은 마음속에 '인류 전체의 구원' 이라는 영원하고 최종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어떤 것도 예수님이 그 목적을 달성하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셨다. 사탄과 직접 맞닥뜨렸을 때도 목표를 수정하지 않으셨으며, 따르던 무리들이 자신을 버렸을 때도,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거부할 때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단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목표를 가지고 계셨고, 상황에 관계없이 그것을 추구하셨으며,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셨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확신에 차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처음 시작한 것을 끝내기를 바라시며,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2디모 4:7)라는 사도 바우로의 고백을 우리가 삶의 마지막 때에 하게 되기를 소망하신다.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을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사라져 버리는 폭죽이 되고 싶은가?
♣ 익숙함과 무뎌짐을 구별하라
"야훼여, 당신의 업적 생각하며 이 몸은 행복합니다. 손수 이루신 일들을 앞에 그리며 환성을 올립니다. 야훼여, 하신 일이 어이 이리 크시옵니까? 생각하심 또한 어이 이리 깊으시옵니까? "(시편 92:4~5)
요한묵시록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지 60년이 지난 AD90년대 후반에 씌어졌다고 한다. 이 책은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분명히,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의 부모 세대 중 몇 명은 예수님을 직접 뵙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다. 바로 그런 점을 주님은 꾸짖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로가 되는 사실을 찾았다. 안주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죄를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회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회개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함께 기도하자.
♣ 약할 때 강함 주심을 믿으라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 (골로 2:6)
사실, 나는 내 자신이 커다란 진흙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리고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나의 결점에 대해서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고, 나 혼자서 이루어낼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이 있음도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찾는다. 하느님은 완벽한 사람을 쓰시지는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분의 자비와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완전히 진흙 덩어리 같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느님이 당신을 쓰실 만큼 완벽해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런 꿈은 접어두라. 하느님은 이미 완전히 순전하고 온전히 완벽한 유일한 그릇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그릇은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한 흠투성이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 (골로 2:6).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는가? 아마도 간절히 죄를 용서받기 원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주님을 받아들였으니 주님을 받아들인 그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
♣ 섬김을 특권으로 삼으라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예수님은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마태 20:28) 오셨다고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볼 때, 다른 사람들이 손과 발로 예수님을 시중들 때에 예수님이 가만히 앉아 계시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예수님이 다른 세력가들처럼 누군가가 섬겨주기만을 기대하시는 분이라면 자신이 온 목적이 섬기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편하고 그 일에 열심인가, 아니면 섬기는 것이 특권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느님이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셔야 하는가?
♣ 하느님께 온전히 위탁하라
"야훼께서는 당신께 일편단심인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온 나라를 두루 살피고 계십니다."(1역대 16:9)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분께만 온전히 위탁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과 신뢰가 오직 그분께만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재능이나 생각이나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니라 가장 높으신 주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 바랄 때에 그분은 우리에게 능력 베푸실 방법을 찾으신다.
♣ 동기를 점검하라
"사제로서는 사독과 에비아달이 있었다."(2사무 20:25)
사독과 에비아달이라는 두 제사장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면에서 비슷했지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 사독의 혈통은 하느님이 축복하셨지만, 에비아달의 혈통은 심판받았다. 그들은 거의 평생을 같이 사역했다. 사독과 에비아달은 다윗 왕 시대에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길 임무를 맡을 제사장의 명단의 가장 위에 올랐던 두 사람이다. 그리고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언약궤를 예루살렘 밖으로 옮겨야만 했을 때, 다윗 왕은 이 두 사람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그렇지만 다윗의 통치 말년에, 이 두 제사장은 누가 다윗의 뒤를 이을지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에비아달은 "한편 하낏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될 속셈으로 "(1열왕 1:5)고 말했던 아도니야의 편을 들었다. 그렇지만 사독은 아도니야의 과도한 야욕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다윗의 명령에 따라서 하느님이 선택하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
무엇이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후손들이 사독의 자손들이 받은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사독과 에비아달의 삶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있는 동기의 문제에 대해 환상적이고도 교훈적인 차이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행위 뒤에 숨어 있었던 동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있는 마음의 동기다.
아마도 사독은 다음과 같은 말을 매일 묵상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속에 있는 것을 충실히 행하자. 그리고 주님을 계속해서 섬기자". 모든 찬양팀과 예배자, 우리 모두가 이런 사독의 열정을 갖기를 소원한다!
♣ 예배할 때 믿음을 사용하라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 11:6)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 예배하든, 개인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예배에 대한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믿음이다. 우리의 예배가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든 간에, 믿음이 없으면 그 예배는 의미가 없다. 성경의 단어들을 사용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예배에 대해 강조하는 교회를 다닌다 해도, 이것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증표는 아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살게 되어 확신을 가지고 서슴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에베 3:12)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 즉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하느님이 보시는 시각과, 능력과, 지혜와 넉넉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진리들을 단지 믿는 것뿐 아니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손을 드는 행위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노래와 말로 고백한 것을 적극적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사고와 삶이 바뀌도록 믿어야 하는 것이다.
♣ 하느님의 음성에 민감하라
"야훼께서 세 번째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제야 엘리는 야훼께서 소년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알아차리고사무엘에게 "가서 누워 있어라. 그리고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나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사무엘은 돌아와 자기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러자 야훼께서 거기에 나타나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사무 3:8~10)
우리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음성을 알 수 있는가? 다음의 세 가지 면을 고려해 보자.
① 하느님께 언제나 순종하려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하느님과 교제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쓰러질 때면(분명히 쓰러질 것이다), 재빨리 하느님께로 와서 회개하고 회복의 손길을 경험해야 한다. 사무엘이 어린아이 때 하느님께 드려진 것처럼 우리 또한 자신을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
② 우리는 걷기 전에 반드시 기어야 한다.
웅장한 시작을 하기 전에 작은 걸음을 먼저 걸어야 한다. 어쩌면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배 첫 곡을 콘티와는 다르게 시작하는 것일 수 있다. 회중에게 모범이 되도록 손을 들고 예배하는 것과 같이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사무엘은 그가 훌륭한 선지자가 되기 이전에 하느님의 성전에서 간단한 일을 하면서 사역을 시작했다.
③ 당신의 목사님이나 예배 팀원들에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마라.
당신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한 믿음의 발자국들을 다시 돌아보라.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신학적으로 오류가 없는가에 민감해야 한다. 사무엘은 그의 스승인 엘리에게 자신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했다. 하느님은 그분의 말씀과 일치하는 방법으로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그분의 음성을 주의해서 듣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를 바라신다고 나는 믿는다. 하느님의 세미한 음성에 순종하려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드리라.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신다. 그러므로 사무엘처럼 말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2.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예배자
♣ 예배하는 이유를 잊지 마라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요한 4:16)
왜 하느님은 우리의 예배를 원하실까? 예수님이 우물가의 여인과 말씀하신 장면을 읽어보면 하느님이 우리의 예배를 찾으신다는, 즉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읽다가 한번쯤은 질문해 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왜?" 많은 성경 구절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예배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가장 심오한 영역을 드러낸다. 하느님이 우리의 예배를 바라시는 이유는 그분의 자녀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우리와의 관계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본성이다. 그분은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신다. 창조하신 피조물과 관계하기 원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본질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와의 친교를 갈망하면서 말씀하신 구절을 보자.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묵시 3:20)
우리와 관계를 갖는 것 말고, 하느님이 어떤 이유로 우리를 창조하셨겠는가?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본질적으로 나눔과 관계가 있다.
♣ 하느님을 기대하라
"그 네 생물은 각각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고, 그 몸에는 앞뒤에 눈이 가득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로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묵시 4:8)
우리는 종종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리스도는 놓친다. 경외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매일 보았다. 하느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40년 동안이나 주셨다. 하느님의 손길 말고는 다른 무엇으로도 이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임재와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것들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감을 더욱 계발해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그렇게 평범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는 기대감을 잃어버렸고 하느님이 정말 거기에 계시는 것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우리 어깨를 두드리시더라도 아마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열의 없는 태도에 안주하지 말자. 하느님께 당신을 사로잡아 달라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구하라. 기대감을 계발하라.
♣ 거룩한 낭비를 드리라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마태 26:7)
지금까지 들어본 예배 중에서 가장 전심으로 드린 능력 있는 예배의 예를 하나 들으라면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 이 여인의 예배 행위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은 각자 예배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은사와 사역들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로마서 12장 1절은 바로 그러한 삶이 살아계신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요, 제사라고 말한다.
마태오복음 26장에 나오는 여인이 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린 이야기는 지금도 전 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이 행동이 왜 기릴 만한가? 그녀는 자신의 삶과 사랑의 제일 중심 되는 분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소유물을 드린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대답하신 것과 권고하신 것을 살펴보라.
예수님은 "그녀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이 경우에는 여인의 드리는 행위, 그리고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후 온 방에 퍼진 향내가 바로 예배의 아름다움이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웠다!
자, 이제 당신에게 도전하고 싶다.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 위대한 예배를 드리자. 우리 삶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주님께 내어드림으로 그분과 달콤한 교제를 나누자. 그렇게 할 때 예배를 드리는 성소로 계속해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지식과 열정으로 예배하라
"야훼의 성전 뜰 안을 그리워하여 내 영혼이 애타다가 지치옵니다. 나의 마음 나의 이 몸이 살아 계신 하느님께 기쁜 소리 지르옵니다."
(시편 84:2)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기쁨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열정이 솟아나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가 되어야 한다. 찬양은 우리의 사랑으로 울려 퍼진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표현하려는 소망 안에서 우리의 음악은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축복 받은 방법이 된다. 세상 음악가들도 감정을 벅차게 하는 사랑의 노래를 멋지게 불러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거짓된 인간의 사랑도 노래로 그렇게 잘 표현할 수 있다면, 가장 위대한 사랑이신 하느님을 찬양할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더 타올라야 하겠는가?
시편 기자는 자신의 영혼이 야훼의 궁정을 사모해서 쇠약해지고, 마음과 육체가 하느님께 부르짖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찬양 가운데 있어야 할 열정이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하고 싶어서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였다. 시편 103편 1절에서 다윗은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속으로부터 그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여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속사람에게 열정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 중에 깊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 마지막 순간이 언제였는가? 상황이 어떻든 간에 당신의 속사람에게 제한 없이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했던 마지막 때가 언제였는가? 예배를 인도할 때는 최신 인기 찬양에만 의지해서 예배를 이끌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당신의 마음과 영과 뜻과 힘을 다해서 예배를 인도하라.
♣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6:15)
당신이 만들어내는 음악, 즉 예배를 특별하게 만드는 당신의 목소리나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느님이 그런 은사와 능력들을 당신에게 주셨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이신다.
바리사이인과 같은 태도 때문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마음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라. 우리의 음악과 은사와 능력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만 사로잡혀라.
3. 탁월함을 추구하는 예배자
♣ 자신의 은사(재능)를 갈고 닦으라
"노래를 메기는 사람은 레위인들의 지휘자 그나니야였다. 그는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1역대 15:22)
하느님은 모든 좋은 은사들을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은사들을 알아가고 발전시키는 데 귀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사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이 아시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은 정말로 모든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하느님께 보여드림으로써 감사를 올려드리자. 여든다섯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악기 연주법의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고는 '유레카!'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훌륭한 제화공이 되자!
♣ 실패를 뛰어 넘으라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베토벤은 훌륭한 작곡자 중 한 사람이지만 지휘자로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렇지만 지휘자로서 실패했다는 사실이 베토벤이라는 한 사람을 실패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실패의 두려움을 넘어서 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갔고 세계는 그의 도전으로 더 풍성해졌다. 당신은 어떠한가? 과거의 실패 경험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가? 하느님이 새롭게 지경을 넓히라고 말씀하시지만 실패 경험이 가져온 두려움 때문에 그냥 안전지대에 머물고 싶은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날개를 펴고 앞에 다가올 실패의 가능성을 직면하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다. 창조자시며 삶에 힘을 주시는 분, 온 우주에서 가장 높은 권위로써 행성들이 그 궤도에 있을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바로 그분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에 믿음의 큰 걸음을 뗄 수 있을 정도로 자유 해진다.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실패가 사실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또 그렇게 될 만큼 자유하다. 하느님은 당신의 부족함을 쓰신다. 지금 시작하라!
♣ 자신에게 맞는 예배를 훈련하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로마 12:6)
사람들은 각각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느님이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하느님은 우리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좋아하신다.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우로가 설명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르다.“
게다가 하느님은 사람들이 가진 개성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배를 받으시길 원하신다. 화려하게 춤을 추는 사람부터 침상에서 경배하는 사람까지 모두를 원하시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개발해야 하며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물론 각자의 '스타일'로 예배를 드려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이지 어떤 특정한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적인 개성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것에 따라 하느님을 예배하는 특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예배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개성을 이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어렵고 부자연스러울지라도, 그렇게 하도록 계속 훈련하라. 하느님은 분명히 은혜를 베푸실 것이고 하느님을 예배하면 할수록 예배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4. 하나 됨을 지키는 예배자
♣ 시너지를 이해하라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1고린 12:21)
배경과 스타일과 취향과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 필요하다.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지만 같이 하면 이루어낼 수 있다. 기러기 떼가 'V' 자 형태를 지어서 날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앞에 있는 기러기들은 바람을 막아주면서 뒤의 기러기를 도와준다. 그렇게 무리지어 날아감으로써 혼자 날아갈 때보다 더 적은 힘으로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너지'다.
얼마 전에 나는 시너지에 대한 환상적인 예를 보았다. 평균적으로 농장의 말은 6톤 정도를 끌 수 있다. 그렇다면 말 두 필은 23톤을 끌 수 있다! 이것이 시너지다! 성경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씀한다.
"너희는 다섯 명이 원수 백 명을 추격하고, 백 명이 원수 만 명을 추격할 수 있을 것이다. "(레위 26:8)
수학적으로는 다섯 명이 백 명을 쫓는다면 백은 2천 명을 쫓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백 명이 만 명을 쫓을 수 있다. 그것이 시너지다. 함께 걸어가고 함께 일할 때에 혼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하느님이 피조물들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것을 이해하는가? 서로가 많이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 필요하다!
♣ 다양한 스타일을 인정하라
"그러니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를 넘어뜨리거나 죄짓게 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합시다." (로마 14:13)
많은 교회들의 다양한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교단마다 예배 형식이 다를 뿐 아니라, 같은 교단 내에서도 교회들마다 서로 다르다.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옮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교회를 찾아서 '다녀보면' 당신은 아마 계속해서 이사 가기 전에 다니던 교회와 새로 옮긴 교회들을 비교할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다니던 교회와 똑같은 교회는 없을 것이다. 아니, 전혀 없다고 확신한다. 교회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매우 창조적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보시기에 이런 다양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네 개의 서로 다른 복음서를 쓰도록 저자들을 감동시키셨는데, 복음서들은 모두 우리의 삶을 바꿀 만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각 책이 서로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함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 함이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 연합으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라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요한 4:24)
하느님은 반어와 대조를 좋아하신다. 하느님은 나비와 코뿔소를 모두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걸작품인 남자와 여자 역시 대조의 좋은 예다. 도대체 하느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걸까!
여기 또 하나의 반어가 있다. 하느님은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영이란 본질적인 것이고, 진리는 부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늘 아버지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 둘 중에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 모두로 예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원칙은 이렇다. "하느님이 받으시는 희생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며, 성령과 조화를 이루고, 그분의 진리에 따르는 예배다." 예배를 통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면, 진리가 없는 영이나, 영이 없는 진리 모두 하느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다른 이의 동기와 진심을 신뢰하라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큰 형 엘리압이 엿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 새끼는 누구한테 맡겼지? 이 건방진 못된 녀석, 네가 싸움 구경하러 온 걸 모를 줄 아느냐?"(1사무 17:28)
찬양팀 안에서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 때문에 그의 동기나 진심을 의심한다. 마치 엘리압이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이 무례하거나 아니면 적대적이라고 생각한다. 목소리 톤이나 생김새나 태도 때문에 누군가의 동기에 대해서 의심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피해를 주려하고 있어.'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
이 외에도 그 사람에 대한 다양한 판단들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보시듯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우리는 사도 바우로의 조언을 따라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립 2:3).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동기들을 판단하지 마라. 그렇게 할 때 결국에 가서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결론 내리게 될 것이다. 대개 우리는 진실과는 180도 정반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판단하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 예배의 본질에서 다양함을 발견하라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왜 너희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느냐?"(마태 15:3)
다음 세 가지는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들을 발견하는 핵심 요소다:
① 영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본질이다.(요한 4:24)
② 예배는 인간의 전인격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본질이다. (마태 22:37)
③ 시와 찬미(찬송가)와 신령한 노래들로 하는 것이 본질이다. (에베 5:19, 골로 3:16)
이 세 가지 형태는 하느님이 다양함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은 우리가 단지 한 종류의 연주만 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런 하느님의 다양함을 연습하는 교회는 감정적인 사람들이나, 지성적인 사람들, 그리고 직관적인 사람 모두를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성경적인 예배는 우리 모두에게 예배의 더 큰 완전함을 표현하도록 도전할 것이다.
5. 삶을 예배로 바꾸는 법을 배우는 예배자
♣ 섬김의 예배를 드리라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 25:40)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가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졌듯이,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최고 계명처럼, 우리는 위를 향할 뿐 아니라 밖을 향해서도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느님을 소리 내어 찬양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 이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이 둘 중에 하나만 있다면 예배를 불완전하게 표현한 것이다.
'예배란 노래 부를 때만 드려지는 것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남을 섬기는 것도 예배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작은 자' 라고 부르신 이들에게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하느님이 찾으시는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어린아이, 힘없는 자, 갇힌 자, 태어나지 않은 뱃속의 아이 등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즐겨 섬길 때 하느님은 우리의 예배를 온전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만약 찬양팀에 속해 있으면서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연습을 잠시 멈추고 '작은 자'를 찾아 나섬으로써 당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말씀드리라.
♣ 삶으로 예배하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 1:17)
이 구절 바로 앞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의 '행위'는 있지만 진정한 마음이 없다고 꾸짖으신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성경의 이 부분을 가르쳐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는 구절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성들이 예배에 대해서 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꾸짖으신 다음에 말씀하신 것이 "공의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대받는 자들을 도와주라고 말씀하셨고 고아를 위해서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명령하신다. 내가 이해를 잘못한 것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주님이 정말로 예배를 어떤 자비로운 행동과 연결하시는가?
자비로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삶 가운데에 공의로운 행동이 없다면, 우리의 찬양은 의미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는가. 하느님은 우리의 말보다 행동에 훨씬 더 관심이 많으시다. 교회 안에 들어가 찬양을 부르지만 공의를 향해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면 그 찬양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한다(1사무 15:22).
나는 하느님이 정말로 우리의 예배를 자비로운 행위들과 연결하고 계시다는 증거들을 점점 더 많이 발견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야고 1:27)
놀라운 말씀이다. 여기서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나 손을 드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하지 않으신다. 기도나 중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순전한 경건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다.
'예배'는 주일날 아침 또는 일주일 내내 찬양을 하는 것 그 이상이다. 예배는 살아가는 방법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며, 아주 작은 자비로운 행동들까지도 포함한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신다. 우리의 예배는 교회의 벽을 넘어야 한다. 곤란에 처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자. 그것이 진정한 예배다.
♣ 예배자의 부르심에 견고히 서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따로 갈라 세우면, 레위인들은 나의 것이 된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레위인들은 만남의 장막으로 봉사하러 들어갈 수 있다. 너는 그들을 이렇게 정화시킨 다음 흔들어 바치는 예식을 올려야 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뽑혀 나를 섬길 성직자가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처음으로 모태를 여는 모든 맏이 대신 나의 것으로 삼았다." (민수 8:14~16).
의심할 여지없이 레위인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었다. 즉, 그들 자신이 하느님께 드려지는 제물인 것이다. 그들의 삶에 있는 다른 모든 일들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행하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 거룩히 구별되었고, 하느님께 그들이 속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오늘날의 찬양 사역자들이 레위 족속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둘 다 음악 사역을 한다는 분명한 유사점 외에도, 하느님이 레위인에게 요구했던 것과 찬양 사역을 하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느님은 단지 재능 있는 음악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우리 삶의 가장 주된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어떤 큰일에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하느님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도 관계없고, 어떤 제한도, 조건도 없다. 우리는 하느님께 온전히 드려진 그분의 레위인들이다.
♣ 어디서나 예배하기로 결정하라
"군중까지 합세해서 그들을 공격하자 치안관들은 부하를 시켜 바울로와 실라의 옷을 찢고 매질을 하게 하였다. 이렇게 몹시 때리고 나서는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깊숙한 감방에 집어넣고 발목을 차꼬로 단단히 채워두었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바울로와 실라는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고 다른 죄수들은 그것을 듣고 있었다." (사도 16:22~25)
바우로와 실라가 '예배 인도자'라고 언급된 적은 없었지만, 이 놀라운 구절로부터 예배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상상해 보라. 당신과 당신의 동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수천 리를 여행했다. 이제 필립보라는 도시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을 보기 시작한다. 하루는 어떤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었다. 그런데 그 여종의 주인은 자신이 이제 돈 벌 방법이 없어졌다는 것에 화가 나서 당신을 끌고 관원에게로 간다. 그가 그럴싸한 재판에서 잘 조작된 거짓말을 늘어놓자, 군중들은 당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관원은 당신을 묶고 매를 때린다. 지치고, 멍들고, 외롭게 감옥으로 던져져 도둑과 살인자와 반역자들과 함께 있다. 당신의 발에는 차꼬가 채워졌고, 간수는 당신의 행동을 감시한다.
괴로운 시간이 흘러서 이제 자정이 되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눈을 좀 붙여서 육체의 고통을 잊으려 하고 예배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우로와 실라는 달랐다. 그들은 자정에 감옥에서 '하느님을 찬미'했다. 이들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① 예배는 언제나 드리는 것이다.
② 예배는 어느 곳에서나 드리는 것이다.
③ 예배는 모든 상황에서 드리는 것이다.
④ 예배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⑤ 예배는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된다.
비록 그 사람이 한밤중에 감옥에 홀로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느님은 끊임없이 찾으신다. 누가는 '찬미'가 즉시 지진을 일으켰다고 기록한다. 우리의 예배가 항상 그런 결과를 얻지는 않겠지만, 이들의 행동으로부터 배운 교훈들을 적용할 때마다 하느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준비가 되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끝-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 11:6)
예배에 대한 대부분의 논쟁들은 어떤 스타일로 해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 현대적인 음악으로 예배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인 음악으로 예배할 것인가? 우리의 교회는 고교회(성공회, 정교회, 천주교)이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저교회(개신교)이어야 할 것인가? 예배는 경건해야 하나, 아니면 축제 분위기여야 하나?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 예배하든, 개인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예배에 대한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믿음이다. 우리의 예배가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든 간에, 믿음이 없으면 그 예배는 의미가 없다. 성경의 단어들을 사용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예배에 대해 강조하는 교회를 다닌다 해도, 이것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증표는 아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살게 되어 확신을 가지고 서슴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에베 3:12)
믿음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성경적인 믿음에는 최소한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다.
로마서는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로마 10:17)고 말씀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계시하신 것과, 하느님이 하신 일과 하느님의 계약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지나가버리는 감정이나 의견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둘째는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렇지만 야고보서는 사탄도 믿고 벌벌 떤다고 기록한다. 그런 것은 분명히 믿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셋째 요소가 필요한 것이다.
셋째 요소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 즉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하느님이 보시는 시각과, 능력과, 지혜와, 넉넉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진리들을 단지 믿는 것뿐 아니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손을 드는 행위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노래와 말로 고백한 것을 적극적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사고와 삶이 바뀌도록 믿어야 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도, 우리는 마음속으로 곧잘 다른 생각들을 한다. 점심으로 뭘 먹을지, 저녁에 뭘 할지, 해야할 일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은 마음속에서 믿음을 쫓아내고, 우리의 찬양들을 의미 없게 만든다. 믿음은 우리가 노래하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붙잡고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강하신 요새는 하느님, 절대로 실망치 않으시네. 우리의 도움 되신 주님은 무서운 질병도 이기시네'하고 찬양하는 동안에 상황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주 행한 일 기뻐 노래하며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리라 신실하신 주의 약속 나 받았네'라고 찬양함으로써, 이 땅에서 얻는 기쁨은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찬양할 때 우리의 하느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시며 그분이 행하신 일이 얼마나 큰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일들에 대해서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하느님이 직접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예배는 하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속죄 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느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도 없고, 하느님께 드릴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구약의 역사를 좀 안다면 이런 사실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생 제물의 피가 없이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의 인도하심 없이 하느님의 거룩한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제물의 피도 그들의 죄에 대해서 영원히 용서를 받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사제가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히브 10:19-22)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음악으로? 우리의 연주 실력으로? 간절한 열망이나 가진 달란트로?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 사실이, 우리가 전심으로 하느님께 찬양할 수 있도록 얼마나 큰 격려를 주는지 모른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아니면 찬양팀의 소리가 너무 좋기 때문에 우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지시고, 죄의 대가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예배의 처음부터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기억해야 한다.
창조자와 구원자의 얼굴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예배에서 믿음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믿음을 거저 생기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끝-
첫댓글 익숙함과 무뎌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