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걱정거리들이 많이 생긴다. 눈이 침침해 지는 것,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그리고 치아 문제 등이다. 나는 눈과 귀 문제로 많은 어려움은 없는데 이는 계속 골칫거리다. 수시로 아프고 음식을 잘 씹지 못해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어 어디다 대고 불평할 수도 없고 자신에게 신경질이 날 뿐이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내 자신의 이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충치가 생겨 양쪽 어금니 위아래를 다 뺐는데 그래도 나머지 것들이 시리고 아파서 음식을 잘 씹을 수가 없을 때가 많다. 병원에 가면 신경치료를 해주고 잇몸이 나빠서 그러니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주의를 해 준다. 그러면서 이런 교육을 한다. 입 안에는 많은 세균이 살고 있는데 이를 잘 안 닦으면 치아 사이에 음식물이 끼어서 그것이 부패하여 치주염과 충치가 발생하고, 또 오래되면 치석이 쌓이는데 이 치석은 세균 덩어리로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로 잇몸에 염증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그 동안 이를 잘 관리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그 동안 나는 이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이쑤시개도 잘 쓰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길거리에 나와서 이를 쑤시며 큰 소리로 길 건너편에 있는 친구를 부르는 사람은 한국사람 뿐이라고 해서 부끄럽게 생각하던 터였다. 지금도 나는 이쑤시개를 잘 안 쓴다. 이를 쑤시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전봇대로 쑤셔야 한다는 말도 있는데 이 사이가 자꾸 뜨는 것 같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 사이가 너무 떠서 스스로도 보기 흉해 좀 이를 씌워서 사이를 좁게 해 줄 수 없느냐고 말했더니 치주들이 엉킨 상태가 있어서 마음대로 씌울 수가 없다고 양쪽으로 나누어서 씌웠기 때문에 외관상 별 효과가 없다.
그런데 내가 치과병원에 다니면서 들은 가장 충격적인 말은 내 이가 이렇게 나빠진 것은 치간 칫솔이나 치실(dental floss)을 안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치실? 내가 경멸했던 것 중 하나이다. 밥 먹으면 바로 화장실로 가서 칫솔질 하고 치실로 거울을 쳐다보며 이물질을 제거하는 미국 애를 보면 대단한 위생적인 국만 같아 그 꼴이 아니 꼬았었다. 내가 어릴 때는 한국에는 치과 의사도 별로 없었으며 이가 썩어야 치과 병원에 갔지 스케일링이라든가 치열교정 같은 것을 해서 교정 장치를 입에 걸고 다니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따라서 지금도 이런 것을 보면 꼴불견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내가 무시했던 모든 것들이 내 무식의 소치요 내 이를 이렇게 나쁘게 한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치과의사의 교화(敎化)를 받아 치간 칫솔을 쓰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아무리 이를 잘 닦고 관리를 잘 해도 치간 칫솔이나 치실을 사용하지 않으면 치아 표면의 30%가 닦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치아관리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신 장비로 이틀을 다 바꾸는 대 공사를 하기 전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예방책은 치실로 이 사이를 닦아 내는 ‘가장 작으면서도 간단한 일’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 사소한 일을 어린 아이 때부터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로 고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고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는 잇몸이 나빠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잘 달래서 나쁜 잇몸과 함께 사는 일이며 식사 후마다 이를 닦을 뿐 아니라 치실과 치간 칫솔을 쓰며 덧붙여 구강청정제를 써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의사는 구강 청정제가 민트향을 넣어서 입을 상큼하게 해주기는 하지만 프라그를 제거하는 데는 아무 효과도 없다고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잇몸 신경 치료를 한 뒤 그냥 두면 다시 아프다. 그래서 프라그를 제거한다는 리스테린을 쓰기로 했는데 또 어떤 의사는 이것이 입 안의 세균을 죽이면 살아남은 세균이 서로 싸울 적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기세를 올려 번성한다는 부정적인 말도 했다. 아무튼 아픈 데는 약도 많고 말도 많다. 나는 내게 효과가 있는 한 상관하지 않기로 하고 구강청정제와 잇몸 약을 겸해서 먹고 있다.
아무튼 이 치간 칫솔이 주는 교훈은 이제부터는 사소하고 간단한 일부터 모든 분야에서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활의 모토가 되었다. 예를 들어 가정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소한 일에 내 성의를 다한다.
내복이나 양말을 벗어 세탁물 바구니에 집어넣을 때는 뒤집어 벗은 채로 던져 넣지 않고 바르게 해서 넣는다. 변기를 사용하고 나서는 뚜껑을 닫아서 아내가 멋도 모르고 쭈그려 앉다가 웅덩이에 빠지지 않게 한다. 신발장을 열 때는 반드시 아내에게 무슨 신발을 신을 거냐고 물어서 꺼내 준다. TV 채널을 바꿀 때는 먼저 상대방 의견을 묻는다. 교회에 갈 때에는 무슨 옷을 입고 갔으면 좋겠느냐고 아내의 의견을 묻는다(잘 못 입으면 다시 갈아입으라고 할 때 시간을 낭비하니까). 살림에 관한 일에는 전문인의 의견을 존중한다. 이런 것은 정말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짓을 잘못해서 내 이는 이렇게 나빠진 것이 아닌가?
해서는 안 될 사소한 일도 있다. 정치적인 문제는 토론하지 않는다. 쇼핑한 일에 대해서는 새로 사든, 교환하든 토를 달지 않는다(일주일에 쓸 수 있는 예산만큼 인출해서 봉투에 넣어 놓고 서로 자유롭게 쓰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자기 푼수를 아니까.) 여행할 때는 짐을 어떻게 싸라고 잔소리 하지 않는다. 운전할 때는 아내의 말을 더 잘 듣고 내비게이터 말을 듣지 않는다. …… 등등이다.
그렇다면 나는 모든 남성다운 꿈은 접고 아내 앞에 쪼다가 된 것인가?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지금 나가 돈을 벌어오겠다고 한들 믿겠는가? 도의원 출마라도 하겠다한들 코웃음밖에 더 치겠는가? 작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수행해서 큰 사고를 막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내의 말을 다 듣는 것은 아니다. 원고를 쓰면 먼저 아내에게 검열을 받지 않는다. 이 원고만 하더라도 검열을 받아야 한다면 거의 다 가위질 해버리고 남은 것은 엉성한 가시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