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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순자강인가
분위기 영향도 있겠지만 내 입에 꼭 맞게 단 식혜는 내 어머니 세상 뜨신 이후 처음이다.
밤내 식혜 마시느라 잠을 설칠 정도였다.
자꾸 드나들어야 했는데 인적 없는 강가라 모기떼의 극성은 천막문(지퍼)을 여닫을 때
마다 전날 밤의 무문정을 그립게 했다.
낚시가족은 철수했으나 반짝이는 불빛이 사라질 줄 모르는 곡성의 밤 섬진강.
하늘의 별들과 내기라도 하고 있는가.
모기떼만 아니면 밤내 밖에 있고 싶었다.
정자 옆에 횡탄정 무인인증센터가 있다.
막 잠이 들려는 심야에 인증센터를 묻는 자전거 주자들.
바로 길가에 전화부스처럼 서있는 빨간 인증센터도 보이지 않는다면 위험한 곡선, 굴곡
구간을 어떻게 달릴 것인지.
보이는 것은 코앞의 길뿐인 밤에 패달을 밟는 이들을 내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가슴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이러라고 농사길을 빼앗아 자전거길 만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식혜와 밥도둑이라는 다슬기 농축액이 배낭을 더욱 무겁게 했다.
어깨와 허리에게는 매우 미안하지만 그래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짐을 꾸린 후 예사롭지 않은 횡탄정(橫灘亭)과 보인정(輔仁亭)을 살펴보았다.
편한 하룻밤을 제공받았는데 그게 예의 아닌가.
그러나 자전거길 무인인증센터 설치 위치 안내에 사용되었을 뿐 두 누정에 대한 곡성군
당국의 관심은 전무 상태다.
두 정자 모두 기문(記文)과 원운(原韻) 등이 걸려있으며 회안(會案), 시판(詩板), 추진위
원록(推進委員錄) 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마을의 향약계원들이 시회(詩會)를 여는 등
모임을 위해 섬진강가에 건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에는 나같은 늙은이와 섬진강 소요객에게 요긴한 쉼터가 되고 있지만.
횡탄정을 떠나서 둑길 따라 대사리(고달면)를 지날 때 이른 아침부터(07:50) 잘 정지된
논들 위를 앞뒤로 왕복하거나 빙빙 도는 꼬마헬기가 앙증스러웠다.
저공으로 왕래하며 약 또는 비료를 뿌리는 기계다.
일손이 절대부족 상태인 농촌에서 유용한 이 살포기 값이 1억 2천만원이란다.
여간한 대농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이 기계는 농협에서 구입, 지원한다니 다행이다.
다행이기는 해도 이 기계가 국산이 아니고 일제(YAMAHA)인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기계를 제작하지 못해 수입한다는 것이 언뜻 납득이 되겠는가.
우주개발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우리나라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지 않은가.
과연 국내 제작이 불가능할 만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기계냐고 취급자에게 물었으나
얼버무리는 그를 추궁할 일인가.
고려때는 물건을 지고 다니는 떠돌이 장꾼들이 하도 험한 길이라 하여 곡성(哭聲/슬피
우는 소리)이라고 부르다가 곡성(穀城)으로 바꿨다는 곳.
그러나 조정에서 곡식이 풍부한 고을로 오해, 세미를 많이 징수할까 우려해 골짜기가
많다는 뜻의 곡성(谷城)으로 다시 고쳤다는데 떠나기 전에 짚고 가야 할 이름이 있다.
순자강(鶉子江)이름이다.
섬진강과 잔수강 이름에 대해서는 이미 광양과 구례에서 언급했다.
청계동(淸溪/谷城邑)에서 압록(鴨綠/梧谷面)까지 곡성땅을 관통하는 36km가 순자강이
된 내력도 살펴봐야 하지 않겠는가.
순하디 순하게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은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섬진강과 요천, 수지천의 세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 근처의 들판에 메추리가 많다 해서
순자강이라 불러왔다고도 한다.
남원쪽에서도 더러는 순자강이라고 부르는데 위와 같은 이유란다.
그런데, 곡성군 관계자들은 강 이름만 소개할 뿐 침묵한다.
<성인은(부성인/夫聖人) 메추리처럼 살고 새새끼처럼 먹으며(순거이구식/鶉居而鷇食)
새가 날아다니듯 자유자재롭다(조행이무창/鳥行而無彰) 세상이 올바르면 모든 사람과
함께 번영을 누리고(천하유도 즉여물개창/天下有道 則與物皆昌) 그러하지 못하면 덕을
닦으면서 한가히 지낸다(천하무도 즉수덕취한/天下無道 則修德就閒)>
장자(369?∼286/莊子의 天地篇)의 글을 인용하여 <메추리鶉(순)자와 높임의 뜻으로 子
(자)자를 붙인, 성인(聖人)들이 사는 강>이라는 뜻이란다.
또한, 마한(馬韓)시대에 서진(西晉/265~317)에서 유입된 법화사상(法華思想)의 역사
에서 비롯된 성인(聖人) 즉, 관세음보살이 출현하였다는 성출산(聖出山/곡성의 진산 동
악산)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역시 성인들이 사는 강이라는 뜻이란다.
동악산록 어느 분의 주장인데 곡성군 당국은 왜 이렇다 할 대꾸가 없는지.
막걸리 한잔이 상추쌈 정식으로
동해마을에서 서북으로 거스르다가 압록에서 북상,두계에서 횡탄정까지 북서로 올라온
섬진강은 수지천에서 남원(松洞面)을 곡성의 새 파트너로 맞는다.
(내가 역행하고 있기 때문에 뒤집으면 순리가 된다)
수지천 초입에 자전거길 다리를 놓으면 자전거가 세창교까지 길게 U턴하지 않음으로서
농로가 확보되고, 그만큼 원성을 줄일 텐데 왜 그 쪽에는 무관심할까.
관계 당국자들에게 영농인들에 대한 관심이 있기는 한지?
긴 수지천을 따라가서 세창교와 수지천에 합류하기 직전의 남창천 세전교를 건넜다.
반대편 수지천을 따라서 역으로 걸으면 섬진강 둑인 듯 보이나 요천둑이다.
세전(細田里/松洞面) 들을 짝하여 둑을 걸으면 요천대교(蓼川)다.
장수군(전북) 장수읍 덕산리 덕산골짜기와 번암면(장수군) 지지리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원시내를 관통, 섬진강에 합류하는 요천은 섬진강의 지류중 하나지만 국가하천이다.
세전교에서 도로 따라 직진하면 요천대교까지 3분의 1 이하로 단축되는 길이다.
요천대교를 U턴하면 비닐하우스가 대부분인 하도리(下島里/金池面) 들이다.
둘러치고 있는 물 맑은 두 국가하천 덕인지 풍요로워 보이는 들판이다.
귀석리(貴石里/금지면) 앞을 지나는 17번국도가 금곡교를 건너 곡성읍으로 간다.
바로 옆에는 금년(2013)말 개통예정이라는 남원-곡성간 도로의 새 다리가 공사중이다.
남원 곡성의 문척교(구례에 있는 2개의 다리)가 아닌지?
300m 미만에 사람만 다니도록 강등된 옛 금곡교가 있으므로 3개의 다리가 모여 있다.
이러고도 국민의 혈세를 또박또박 받아 먹는 사람들의 심장에는 얼마나 두꺼운 철판이
깔려 있을까.
간밤에 별이 총총했는에 어디에 숨어있던 소나기 구름인가.
용케도, 금곡교 다리들을 막 지나 강가의 정자(院津亭)를 목전에 두고 소나기를 만났다.
바로 앞 섬진강에 전라선 철교가 놓여있고 금지역 지근인 원촌(상귀리)마을 정자다.
예전에 원 나루가 있었던가.
강건너 곡성땅은 섬진강 자연생태공원이다.
대강면과 순창쪽(가는 방향)에 비가 없으니 곧 갤 것이라며 걱정 말고 쉬어 가라면서도
자전거꾼이 떼로 와서 정자를 차지해 자기네 쉴 곳이 없을 때가 잦다고 푸념하는 촌로.
농로 외에도 이런 민폐도 있다니.
한더위에 소규모가 아닌 큰 무리가 모여들면 야박하게 내몰 수도 없고 난감하겠다.
원촌마을을 지나서 섬진강 따라 난 자전거길도 '자동차통행금지' 푯말이 서있으며 새로
조성된 넓지 않은 시멘트 길이다.
엉성하게 급조한 길이 벌써 물난리를 겪은 듯 곳곳이 파괴되었으며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길인데 자동차가 수시로 드나든다.
바로 위에 있는 잘 포장된 730번지방도로가 한가로운데도 왜 이 길을 고집할까.
우리 글을 모르기 때문일까 자동차 홀대(?)에 대한 어깃장 심리일까.
영농과 무관한 강변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달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섬진강물이 불어날 때마다 곤욕을 치르게 될 운명의 길을 따라 서진하여 조성이 초기
단계인 듯한 너른 유원지(?)에 당도했다.
남원시가 고리봉(環峰) 자락 섬진강변에 조성중인가.
강 건너는 이름난 곡성 청게동계곡이다.
명성을 입증하려는 듯 840번지방도로가 끝을 모르게 일렬종대 주차장에 다름 아니다.
잘 가꾸면 청계동계곡의 차선처(次善處)가 될 수 있겠다.
아직은 상막한데도 정자마다 사람들이 찼다.
설마 여기가 목적지는 아니었을 테고 정녕 청계동계곡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삼겹살 구워지는 냄새가 진동한 정자 옆에 이를 때 넉살스럽지 못한 늙은이는 고백컨대
불러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젊은 두쌍은 합창하듯 "더운데 시원한 막걸리 한잔 하고 가시지요"
막걸리 한잔이 상추쌈 삼겹살 점심으로 커졌다.
간밤의 낚시가족에 이어 광주의 청춘들로 이어져 라면은 저녁으로 미루게 되었고.
젊은이들에게 곡성에서 받은 다슬기 농축액 4개와 남은 식혜를 답례물로 주었다.
산에서 "배낭 무게가 벅찰 때는 머리카락 한올도 무겁게 느껴진다" 는 말을 종종 하는데
기분도 좋고 짐도 가벼워졌다.
이름 뿐인 자전거전용도로는 남원과 곡성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다리, 남원쪽 청계동교
밑을 지나면 섬진강가든(음식점)이 가로막아 730번도로에 흡수되고 만다.
대강면땅(사석리) 석촌4교 이후에는 도로의 강쪽 가장자리에 자전거길을 공사하는 중
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좁디좁은 갓길이나마 없다.
이것이 6월 29일 준공식을 가진 자전거길의 실상이며 여러 곳에서 진행중인 공사 현장
에서 들은 이야기는 8월 말까지 완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
남원의 공사를 기준해도 2개월 이상 앞당긴 준공식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곡성의 순자강보다 남원의 순자강이 더 사실적이다.
석촌삼거리 직전, 드디어 도로를 벗어났다.
제법 큰 휴게소를 꾸며놓았으나 그늘이 없어 무더위에는 무용지물이겠다.
자전거길은 얼마가지 않아 섬진강에 합류하는 개천 하나를 건너야 하는데 목교다.
13번국도의 사석교가 가까이 있음에도 다리를 놓았다.
개울의 폭에 따른 건설비의 문제가 있겠지만 대국적으로 보면 수지천과 요천을 비롯해
합수지역의 교량건설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뙤약볕 길에서 졸음이 왔다.
자전거길이 13번국도에 잠시 의지하다가 독립하기 직전 지점의 쉼터에 잠간 누웠다.
실은, 밤에 숙면을 하지 못해 잠이 태부족 상태라 수시로 토끼잠으로 보충한다.
완성된 길은 물론 진행중인 남원땅의 자전거길은 전체가 시멘트길이다.
공사비의 절감효과 때문인지 과잉생산된 시멘트의 재고처분 효과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새마을운동때 남아도는 시멘트를 처분하기 위해 온나라를 시멘트로 뒤덮었다.
농토 외에는 도농 가리지 않고 마을 골목은 물론 집마당까지 모두 시멘트로 포장했는데
그 피해가 지금도 진행중이다.
신덕리(新德) ~ 방산리(芳山)로 이어지는 둑길에도 '순자강 유래 전설'판이 서있다.
<전주 판관을 지낸 김취용(金就容/옛 豆洞面/현松洞面 거주)이 와병중이었다.,
아들(金廷卨)의 지성에도 차도는 없고 한여름인데도 메추리고기가 먹고 싶다는 아버지.
가을철에 찾아오는 메추리를 무더운 여름철에 구할 수 있겠는가.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천지신명에게 빌며 메추리가 많이 서식한다는 강을 찾아갔을 때
돌연 메추리 한 쌍이 하늘에서 나타나 강으로 떨어졌다는 것.
그 메추리를 건져다 부친에게 공양한 아들과 병환이 말끔히 완쾌된 아버지.
나라에서는 아들의 효성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메추리가 떨어진 강이라 해서 순자강
(메추리순, 아들자)이라 했다>는 것.
전설과 무관하게 삼수지역에 메추리가 많으며 전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생성되었을 터.
곡성보다 유역이 짧은 남원이 더 적극적이며 사실적이다.
요천 합수점 이후 서진하여 청계동계곡을 지나면서 북서로 오르다가 대강에 들어서서
길게 U턴한 후 무진정까지 방산리 둑을 다시 서진했다.
강 건너편 곡성의 임면농공단지, 금호타이어공장이 설마 섬진강을 어쩌지는 않겠지.
우사(牛舍)의 주인 영감에게도 영향 여부를 타진했더니 펄쩍 뛰듯 했다.
강으로 한방울도 흘러가는 일 없다고.
그의 말을 믿지만, 한강 지류인 경안천에 돼지 분뇨를 몰래 버린 우리나라 제1재벌이 한
짓이 늘 상기되기 때문일 것이다.
1천만 수도와 수도권 인구가 마시는 강물인데도 정화시설 두고도 그런 짓을 했으니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 잖은가.
오늘의 목적지 향가유원지를 4km쯤 남겨놓은 시각이 17시 20분.
지금쯤 목적지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20km 밖에 걷지 못했다면 아주 나태한 하루다.
하지만, 무진정(無盡亭)이 또 걸음을 붙들었다.
바로 아래 강안은 흔적만 남아있으나 무진정과 관련있는 방산나루터다.
1751년, 무진 윤정근(無盡尹廷根/남원윤씨 죽곡파종중의 선조)이 선산자락에 세웠으며
본래의 이름은 무진장(無盡藏)이었단다.
방산나루에서 섬진강을 건너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 가도록 지은 고마운 정자였다는 것.
많은 세월이 흘렀다.
13번국도가 연장되고 양안을 잇는 다리가 놓임으로서 건너편 곡성의 종방나루와 함께
나루의 기능도 끝났다.
당연히, 인근의 주막도 없어지고 인적이 드물어짐으로서 외진 곳의 건물이 쇠폐해지고
묵객들의 시문 현판들도 낡아질 수 밖에 없다.
뒤늦게 전라북도 지정문화재가 됨으로서 보수하게 되었단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천국의 밤을 보내다
합강리(곡성군 옥과면)는 옥출산 자락 섬진강변 마을이다.
옥과천이 섬진강에 합수한다 해서 합강(合江)이란다.
남원쪽 자전거길은 섬진강 둔치를 닦아 시멘트 포장한 길이라 홍수때는 우회해야 하고
곡성쪽은 옥출산이 섬진강 폭을 좁혀서 수심이 깊고 유속이 빠르고 센 수역이다.
조금 북상하면 향가목교다.
일제가 섬진강에 남원(대강면생암리)과 순창(풍산면대가리)을 연결하는 철교(219m)를
놓기 위해 교각공사를 마친 상태에서 패망한 듯 한데 유사한 현장이 전국에 더러 있다.
향가유원지지역은 옥출산을 뚫은 터널공사(390m)까지 마무리단계에서 쫓겨간 것 같다.
교각의 높이로 보아 당시에는 난공사중 하나였을 것이다.
일부 지자체는 레일바이크용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터널과 다리를 완성하여 자전거길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임에 틀림 없다.
그 발상은 평가받을만 하다.
그러나, 고백컨대 목교를 걷는 동안에 불안을 느꼈으며 소위 스카이워크(skywalk)라는
시설도 밟기 주저되었다.
내가 소심한 영감이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건망증이 심하고 심한 안전불감증에 걸려있는 민족이다.
안전도를 최대치로 잡아도 불가항력이 있는데 중간치도 아닌 최소치에 만족한다.
튼튼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썩은 나무다리도 거침없이 걸어간다.
소 잃은 후라도 외양간을 고치면 반복의 어리석음은 면할텐데 외양간 고치는 일마저도
까맣게 잊어먹는다.
그래서 같은 과오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물 위의 높은 곳에 깔려있는 나무가 침목이 아닌 널판지다.
몇년을 버틸까.
군데군데 썩어가면 일제히 교체하지 못하고 땜질할 것이다.
과연 안심하고 패달을 밟거나 걸어갈 수 있을까.
왜 거시적이지 못할까.
미시적인 데는 예산을 집행하는 법에도 맹점이 있단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산림청이 산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설치하는 산길 계단의 간격이
지나치게 커서 이용은 커녕 옆에 새 길을 내며 오르내린다.
보호가 아니라 파괴를 가속화하는 짓을 비판하면 예산의 한계를 핑게댄다.
2년치를 모아서 하려고 다음해로 미루면 불용예산으로 몰려 기존 예산은 회수되고 다음
해에는 아예 삭감되고 만단다.
공사를 연차적으로 조금씩 하면 되련만 그것마저 용이치 않다나.
인증센터를 지나 향가터널 앞에서 이 지역(대가리) 거주 중년 한쌍과 동행하게 되었다.
터널을 걷는 동안 내 계획을 듣고 자기네 차로 나를 천막칠만한 장소까지 안내하겠다는
고마운 그들.
그러나, 터널을 벗어나는 순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향가마을의 한적한 정자
앞에 당도했을 때는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중년남은 자기 집으로 가서 식사하고 마을의 정자를 이용하라고 제의했다.
저녁 7시 반을 넘겨 어두워지기 시작한 시각에 공포의 소나기 앞에서 염치를 챙기거나
사양할 처지인가.
차가 빗속을 한참 달려 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배려로 샤워부터 했다
아무리 스스로 하는 짓이라 해도 염천에 5일을 세수마저 제대로 하지 못한채 걸었다.
땀을 흘리지 않는 체질이라 해도 비교급일 뿐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뙤약볕 길을 종일 걷는데 땀이 없으며 끈적거리지 않겠는가.
지옥에서는 그 곳이 지옥인 줄 모르다가 천국에 오른 후에 비로소 지옥이었음을 안다?
그럼에도, 다시 스스로 그 지옥으로 돌아간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나는 잠시 천국의 밤을 보냈다.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 지내길 31-8 양순석"의 집이 바로 그 천국이다.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시간에 나는 어떤 꼴을 하고 있을까.
비 때문에 아직도 터널 안에 갇혀 있을까.
배낭 안에 라면이 있으나 젖은 터널 바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비는 등대에다 집을 짓고요. 즐겁게 즐겁게 살아가건만. 외로운 물새는 오늘도......
물결 따라 끝 없이 헤매ㅂ니다"
옛 동요의 한 마리 늙은 물새가 되어 있을까.
비에 홈씬 젖어 양 어깨쭉지가 축 늘어진.
저녁식사후 된장과 고추장을 비롯해 고온에 상하지 않는 반찬을 싸주었다.
막걸리도 1병 배낭 옆구리에 쑤셔 넣어주었다.
담아주는 정을 배낭의 무게를 이유로 뿌리칠 수 있는가.
이 밤에 고맙다는 인사 외에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늙은 나그네.
며칠 후, 그 집에서 온 평창 소정네의 피망과 아사기 고추 1박스를 받았다는 전화가 내
짐을 조금 덜어주는 듯 했지만.
중년남은 세심한 분이다.
내일 새벽에 찾아갈 유풍교까지의 길을 눈에 익히도록 비가 갠 밤중에 서행하며 다녀서
묵을 마을 정자에 내려주었다.
대단한 인내심과 끈기가 필요한 울트라마라톤을 한다는 조용한 성품의 그가 간 후 나는
다시 가장 평안한 시간 속으로 침잠되어 갔다.
어제도, 오늘도 연일 "염려하지 마라"(Take no thought for your life)
'그 분'의 말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