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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은 죄가 아니다
재수할 때였다. 나는 몇 해째 아주 심한 축농증을 앓고 있었다. 일 년 내내 코가 막혀 편히 숨조차 쉴 수가 없고 머리는 무거워 공부할 때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대학 가면 수술하리라 마음먹고 몇 해를 미뤄왔는데 낙방해 다시 입시생이 되는 바람에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재수학원을 등록하고 다시 책을 폈지만, 뼛속까지 들어찬 고름으로 머리에선 썩는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결국, 견디다 못해 그해 초여름에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하며 수술을 했다. 하지만 너무 심했는지 수술 경과가 좋지 못해 몇 달 동안 주에 한 번씩 계속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 오전에 병원치료를 받고 나오는데 그날따라 발걸음이 도무지 학원 쪽으로는 떼어지지 않았다. 샛길로 빠져본 전력이 거의 없는 발걸음인지라 가면 어딜 가겠냐고 코웃음 치며 발길 닿는 대로 따라가 보았다. 급할 것 없는 걸음은 경희대병원을 나와 청량리 시장통을 가로질러 청량리역 대합실까지 느릿느릿 나를 실어다 놨다. ‘나보고 어쩌라고?’ 어깨를 들썩이며 손을 내밀었는데. 이런! 어느새 손에는 기차표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손과 발의 합작 태업으로 사지가 풀린 몸뚱이는 기차에 실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교실 창문으로만 바라보았던 다리 묶인 풍경들이 차창 밖 한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참 평안해 보였다. 언제 이렇게 나를 온전히 풀어 놓은 적이 있었나. 이미 풀린 사지와 더불어 눈과 귀 오감이 하나씩 하나씩 열리기 시작했다. 순간 옥에서 탈출한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이 느꼈을 법한 해방감이 나비처럼 내 몸속으로 날아들었다. 활짝 열린 오감으로 강과 산, 바람이 가슴 벅차게 밀려왔다. 풀린 사지를 펼쳐 날갯짓하면 정말이지 나비처럼 강물 위로 날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쯤 됐을까. 주변 풍경에 매료돼 무작정 내린 곳은 능내라는 간이역이었다. 팔당댐을 막아 생긴 드넓은 인공호수 주변으로 뜨문뜨문 농가들이 모여 있는 한적한 강촌마을. 역사 안내판엔 다산 생가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라고 했다. 나는 야트막한 언덕 사이 철길을 가로질러 강으로 난 논둑길을 따라 내려갔다. 여름 햇살에 살 오른 벼이삭을 보고 윙윙 언덕에서 불어오는 매미바람을 맞고 시골 흙냄새와 섞인 물비린내를 맡았을 뿐인데 수술로도 약물로도 열지 못했던 코가 툭 트였다. 아! 얼마 만에 코로 들이쉬는 숨인가!
강물이 소머리처럼 마을 안쪽으로 감아 돌아가는 지점에 낚시꾼 서너 명이 강물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지긋이 수면 위 찌를 바라보는 모습이 얼마나 그윽해보이던지, 나는 반백이 다된 노인 옆에 소리 없이 앉아 고기 낚는 것을 구경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젊은이, 낚시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한 번 해볼 텐가?” 하며 자신이 하던 낚싯대 중 가장 작은 것을 뽑아 주셨다.
노인과 오 미터쯤 떨어진 곳에 받침대를 꼽고 바늘에 지렁이를 꿰어 낚시를 드리우는데, 얼마나 흥분되던지 온 몸이 들썩였다. 고추잠자리가 물속에 머리 처박고 수면 위로 붉은 꼬리 한 매듭만 내놓은 것 같은 낚시찌. 찌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쉬 달뜨는 기분. 연신 헛손질에 빈손이던 은빛 바늘에 어쩌다 꿰어 올라오는 피라미 한두 마리. 손바닥 위에서 팔딱팔딱 제 몸을 뒤집을 때마다 비늘에서 튕겨지던 햇살. 한동안 꼼짝 않는 찌머리 위로 한가로이 날갯짓 하는 물새들.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강물 위엔 건너편 산 그림자가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젊은이, 이젠 낚싯대 접어야할 것 같네. 낚시를 무척 좋아하나 보군. 학생인가 본데. 내말 고깝게 듣지 말고 아들 손자 같아서 하는 말이니 새겨듣게나. 낚시는 나같이 게을러도 되는 늙은이나 하는 거라네. 젊었을 때는 모름지기 열심히 공부해야지.”
조금은 머쓱해져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런데 마치 ‘게으름 죄’로 갇힌 학원감옥에서 탈출한 재(죄)수생을 잡으려는 듯 노인의 말이 내 등 뒤에서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한껏 풀어졌던 사지와 오감은 이내 오그라들고 코엔 다시 농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짧은 한낮 동안이었지만 학창시절을 통틀어 아무생각 없이 그렇게 평안하고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게 벌써 30여 년 전 일이다. 그런데 어제 일처럼 생생한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학교와 집 그리고 학원에 노예처럼 묶인 몸과 그곳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면 불안해하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이 된 아주 드문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자가 됐다. 20년 동안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삼십년 동안 책과 일로부터 완전히 내 손과 마음을 그때처럼 놓아본 적이 있었나싶다. 그러니까 ‘젊었을 때는 게으르면 안 된다’는 낚시터 노인이 쏜 화살 같은 충고에 나는 내내 쫓기며 살았던 셈이다. 낚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게을러도 되는 나이는 도대체 언제쯤일까. 아니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게으름이 죄가 되지 않는 그런 날이.
하지만 내 생에 그런 날은 쉬 올 것 같지 않다. 학교를 자퇴하고 밤과 낮을 바꿔 사는 큰아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방안에 콕 박혀 지낼 때, 참다못해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거란다”고 종종 타박하는 나를 보곤 한다. 어느새 낚시터 그 노인처럼 게으름은 죄라는 관념이 내 머리 속에도 콕 박혀있었던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 나오는 근면한 개미는 겨울엔 편히 쉬지만, 우리세대의 부지런한 아버지 개미들은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도 맘 편히 쉬지 못할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게으름은 악덕의 근본이고 부지런함은 이시대가 칭송하는 최고의 덕목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말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게으름을 죄악시하게 됐을까? 죄란 인간문명사회의 소산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규정이다. 하지만 내 게으름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 그건 철학자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에서도 밝혔듯, 힘을 가진 계급이나 집단이 하층민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게으름을 죄악시한 일종의 사회적 압력 때문이다. 특히 서구에서는 근대 산업혁명 이후 그 압박의 강도가 훨씬 심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전에는 노동자들이 그렇게 과로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동자라도 오히려 적당한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풍토였다. 그런데 산업혁명과 더불어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과 권력을 가진 부르주아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게으름을 죄악시하고 근면을 최상의 덕목으로 하는 근로이념을 세뇌시켰다. 그러니 ‘근면은 행운의 어머니’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돌을 뚫고, 근면함과 인내심을 가진 생쥐가 밧줄을 갉아서 두 동강을 낸다’ ‘일하는 개가 게으름 피우는 사자보다 낫다’ ‘잠자는 거인보다 일하는 난쟁이가 낫다’ 같은 근대 부르주아 사상가들로부터 나온 금언들은 모두 계층이 낮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짜내기 위해 세뇌시킨 말이었던 것이다.
근면을 강조하는 서구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노동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키웠다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직업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노동을 신에게 봉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가 미국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신?)대륙에 새로운 영국(New England)을 세우고 수 천, 만년 동안 평화롭게 살아오던 원주민을 게으르고 나태한 미개인으로 간주하고 정복했다. 지난 세기 미국을 비롯한 막강한 자본과 무력을 지닌 서구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비 서구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퍼트린 것이 바로 ‘근면 이데올로기’이다. 쓰라린 식민 경험을 한 비 서구세계에서도 서구식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게으름을 악습으로 간주하고 근면과 노동을 강조했다. 우리나라도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 같은 국가 주도 근대화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근면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윤리 못지않게 우리나라에서도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노래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며 어렸을 때부터 게으름을 죄악시하도록 국가적 차원에서 가르쳤다.
그렇다면 게으름은 본질적으로 도태시켜야할 인류의 열등한 유전인자일까? 미국의 교육학자 미하이 교수는 “인간은 원래 적게 일하고 많이 놀았다”고 한다. 러셀도 노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며 오직 타인에게 일을 시키는 자들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 양만 생산하면 하루 4시간씩만 일해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 실업 걱정도 없고 나머지 시간에 보다 창조적인 일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어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란다. 독일 철학자 니체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신대륙의 끔찍한 본질”이라고 비판하며 근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19세기 미국문화가 유럽까지 감염시키기 시작했다고 개탄했다.
근대 이전의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게으름은 나태함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보다 한가로움을 뜻하는 긍정적인 의미에 가까웠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게으름 예찬자였던 장자는 게으름이란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인위(人爲)에서 벗어나 무위(無爲) 즉 ‘마음 가는대로 유유자적하게 노닐 듯 살아가는 소요유(逍遙遊)’의 삶을 칭송했다. 서구 유럽의 온대가 죄악시한 게으름도 비서구 열대에서는 오히려 더운 기후로 인해 활동의 부족에서 오는 자연스러움이었다. 행복지수 1위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히말라야 산 중의 작은 나라 부탄은 일인당 GNP가 이천 불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다. 그들은 물질적인 부를 획득하기 위한 자본주의식 경쟁으로는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걸 일찍부터 알았다. 그들은 행복이란 경쟁 대신에 공동체의 협동에서, 개발보다는 보존을 통한 자연친화적인 ‘느린 삶’에서 온다는 걸 몸으로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근대 산업문명이 고된 육체노동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대신 기계에 예속시키고, 현대 자본주의 자유시장체제가 경쟁을 부추겨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폐단을 보며 서구에서도 러셀을 비롯한 현대 철학자들이 게으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다. 프랑스 느림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게으름의 즐거움’이라는 글에서 게으름과 느림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에 대해 성찰했다. 그는 게으름을 ‘세상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라고 새롭게 정의했다. 물러난다고 해서 정신까지 멈추는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우리게 돼 더욱 풍성한 사람으로 다시 세상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는 휴식(recreation)이라는 말 속에 ‘창조(creation)’라는 말이 본래 들어있음을 새삼 간파한 철학자였다. 그보다 먼저 ‘게으름의 찬양’이란 글을 쓴 벨기에 철학자이자 신부인 자끄 러끌레르끄도 “게으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길을 찾은 사람”이라며, 게으름이란 근대 부르주아 사상가들이 말한 나태함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천천히 즐기면서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자랑스럽게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를 만큼 단기간 내에 산업문명을 이룩한 일인당 GNP가 2만 불이 넘는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나라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OECD국가 중 회하위권이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연간 근로시간은 2074시간으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많다. 우리가 이렇게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에는 무엇보다 쉼 없이 일한 노동자들의 피땀이 있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먹고살만하게 된 지금도 대다수의 직장인들과 노동자들은 일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일자리가 없어 불안한 휴식을 강요받고 있다. 물론 어느 쪽도 과도한 노동과 불안한 휴식을 본인이 좋아서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노동자들이 부지런히 일한 노동력으로 부와 권력을 쌓은 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체제 아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저 떠밀려 갈 뿐이다.
우리 청소년들은 어떤가? 직장인들 못지않게 우리 청소년들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하는 시간으로 보낸다. 근로시간과 노동생산성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듯 우리 학생들이 과도하게 투자하는 공부시간에도 효율성이 얼마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창의력 측면에서는 공부시간이 훨씬 적은 다른 OECD 국가 청소년들보다도 상대적으로 뒤진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그들도 자신이 좋아서 그렇게 죽기살기로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좀 더 좋은 대학, 좀 더 좋은 직장, 좀 더 높은 자리, 좀 더 부유한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오늘이 없는 내일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푸른 소년이라는 청소년의 오늘은 인생황금기라는 봄이다. 봄 물 오른 나무처럼 사지에 푸른(靑) 피 돋는 청소년의 손발은 그래서 뜨겁다. 그 뜨거운 손발이 종일 책상에 묶여있으니 얼마나 갑갑하겠는가.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기 위해 옆구리에서 날개가 돋는 우화기(羽化氣)기 같은 인생사춘기. 갑작스럽게 찾아온 성정의 변화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 그 여리고 섬세한 감정의 날갯짓이 몸을 띄우는,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변신(metamorphosis)의 시기가 사춘기이다. 내일은 아무리 날갯짓 해봐야 소용없다. 몸은 무겁고 날개는 이미 쭈글쭈글해져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고대그리스 철학자 호레이스도 청춘들에게 “카르페 디엠, 오늘을 잡으라(Seize the day)"고 그 유명한 충고를 남겼다. 게으름이란 단지 일 안하고 책 안보는 나태함이 아니다. 진정한 게으름이란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을 마음껏 밖에 풀어놓고, 안에서 움직이는 그 미묘하고 섬세한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다. 잠시만이라도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정직하고 충실한 순간이 바로 게으름이다. 사회의 번영과 질서 유지를 위해 부지런과 근면만을 강조하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우리 청소년들은 그 게으를 자유와 권리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소년)문학은 어떠해야 할까? 문학은 그 어떤 학문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구체적인 개인의 아픔을 다루는 섬세한 글쓰기이다. 국가, 민족, 집단, 전체, 문화, 사회,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개인 속에 들어와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반성하는 글쓰기가 문학이다. 『25시』의 저자 게오르규가 ‘시인은 잠수함에 탄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듯이, 문학은 누구보다 예민한 촉수로 남이 알지 못하는 위험을 미리 감지해서, 그 위험을 알리는 예언자 같은 존재이다. 무병처럼 남의 아픔을 대신 앓고 작둣날 같은 의식으로 병을 토해내는 것이 문학의 소명이요 존재이유인 것이다. 입시지옥 교실감옥에서 왕따와 폭력에 시달려 심지어 자살에 이르는 청소년들의 비명에 문학이 귀기우리지 않는다면 어떤 글쓰기가 귀를 열겠는가. 그러니 문학은 ‘청소년들에게 게으를 자유와 권리를 돌려달라고’ 깃발을 펄럭이며 전위에 서서 부지런함만 외치는 자본과 권력에 맞서야한다. 그렇다고 문학이 간단한 표어나 한마디 주장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문학만의 고유한 언어전술로 감추면서 드러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게으름의 겉면만 도드라지게 드러내 죄악시 하고 제거해야 할 사회적 악습으로 만든 자본과 권력의 근면 성공신화 뒤에 감춰진 속내를 폭로해 추문으로 만들 수 있다.
북미인디언의 한 부족은 대평원에서 말을 달리다가도 중간 중간 멈춰서곤 했단다.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못 쫓아올까봐. 오늘도 누가 쫓아올까봐, 나를 앞지를까봐 밤잠 안자고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 혹시 힘겹게 쫓아오는 게 우리 영혼은 아닐까.
여가
윌리엄 헨리 데이비즈(1871-1940)
이게 무슨 삶이란 말이냐, 근심에 싸여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양이나 소처럼 나뭇가지 아래 서서
오래도록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도토리를
풀숲에 숨기는 걸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환한 대낮에, 밤하늘처럼, 별들로 가득 찬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미인의 시선에 고개를 돌려, 그녀가 발로
어떻게 춤출 수 있는지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눈에서 시작된 그녀의 미소가 입가에
가득 번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면.
이 얼마나 볼품없는 삶이란 말이냐, 근심에 싸여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첫댓글 오늘 하루종일 빈둥거리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는데.. 웬지 위로가 되는데요.. 한참전 글인데 이제야 보게되었네요. 무튼.. 고맙습니다.^^
와! 내 글에 댓글이 달렸네. 신기하다^^
꿈 많은 아줌마소녀
보면 좋은 꿈 꿀 것만 같아 덩달아 행복해지는
드림캐쳐!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