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황용사(黃龍寺)는 낙양의 영녕사(永寧寺)다-마무리 황??2007.04.16 12:25222.236.**.** 조회 235댓글 2 크게
그냥 읽어봐^^
황용사와 황용사 9층탑이 13C 몽고 병란으로 소실되었다고 했을 때의 동경도 현재의 중국 낙양이며 북위시대에 양현이 쓴 낙양가람기를 보면 황용사와 9층탑의 성격과 규모는 같고 이름만 다르며 화재로 인하여 잿더미가 되어버린 사찰이 있었다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찰의 이름은 '영녕사(永寧寺)'다. 이 영녕사는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도 나오는 사찰이름이다. ?선비족 북위 희평(熙平:516~518) 년간에 효명제(孝明帝:숙종)의 태후 호씨가 낙양(동도)의 왕궁 남쪽에 세웠던 사찰이라고 낙양가람기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영녕사는 신라 진흥왕과 같은 태창 연호를 썼던 출제(出帝,효무제)시대(532~534)에도 있었다. ?이뗴의 동도 낙양은 1,367개소의 불교사찰이 있었으며 그중 최고 으뜸의 사찰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황용사와 같다. ?영녕사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양현의 낙양가람기) ?'영녕사는 왕궁 남문 1리쯤의 어도 서쪽에 있으며 사찰 중앙에는 목재로 지은 9층 불탑이 있다. 탑의 높이는 90장(丈:200~270m) 높이의 사찰이 있다. 9층탑의 높이는 땅으로부터 1,000척(尺:220~300m)이나 되여 백리 멀리에서도 영녕사 불탑을 볼수 있었다. 5,400여개 풍경소리는 10리 밖에까지 들렸고 9층탑의 북쪽에는 불전(佛殿:대웅전)이 하나 있는데 왕궁의 태극전(太極殿)모양과 같았다. ?불전에는 장팔금상(丈八金像, 4.8m~5.4m, 삼국유사의 황용사는 장육존상) 1존을 비롯하여 20여존의 협시불상이 있었고, 섬세하고 정교한 솜씨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승려들의 방과 누각은 1,000여 칸(間)으로 향나무,잣나무,참죽나무,소나무로 지어졌다. 사찰주위의 담장은 왕궁의 담장 모양과 같고 ,사방으로 방향별 문이 하나씩 있었으며 남문의 누각은 3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영녕사에 화재가 났을 때 3개월 동안을 타도 불이 꺼지지 않았으며 영녕사 9층 불탑의 기초는 정방형(정사각형)으로 동서 길이가 100m나 되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영녕사 9층탑을 보고 불가사이 한 불탑이라고 했다.' ? ?라고 쓰여져 있다. ?같은 태창 연호를 썼던 진흥왕과 북위의 효무제는 나라의 서울을 동도로 했던 것도 같다. 그곳은 반도가 아니라 현재의 낙양이다. 불탑 조영시대의 차이는 약강 있을지라도 선덕여왕과 태후 호씨는 같은 여자로 9층 목탑이란 거대한 불탑을 세운것도 같고 불국을 건설하랴 했던 목적도 같다. ?정방형 이였던 것도 같고 장팔,장육이란 불상크기의 차이 표시만 다를 뿐이다. 동경의 백리 밖에서까지 볼 수 있었다는?불탑은 동경 잡기 만수천사이 한눈에 들어오고 신라서울 동경 집들이 멀리까지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하게 보였다고 한 표현과도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서울 동경에 세웠던 황용사와 9층 목탑은 북위의 서울 동도에 세웠던 영녕사와 영녕사 9층 목탑과 같은 것이며 동일한 사찰과 9층 목탑을 다르게 부르는 이칭일 뿐인 것이다. ?역사서에 쓰여져 있는 동경이자 동도가 신라의 서울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황용사와 9층 목탑이 세워진 곳은 신라왕궁의 남쪽에 있었으며 아득히 멀리까지 펼쳐진 신라의 서라벌을 볼 수 있었던 곳은 황용사 9층 목탑 꼭대기에서 볼 때만 가능했고 영녕사의 9층 불탑이기도하다. ?이러한 불가사이 한 불탑이 반도의 경주에 있었다고 하여 나쁜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국가로써 역사시대의 신라를 알게되고 황용사와 9층 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본질 적으로 역사서에 쓰여진 기록들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릐 역사서라는 원전들의 기록 실체들은 반도를 말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황용사 9층탑에 층별로 명시한 정벌 및 복속 대상국들 모두는 대륙 중원의 남북에 있었던 고대국가와 종족들을 말해 놓은 것처럼 대륙의 중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서울(서라벌) 동도와 동경에 관해 써놓은 어떠한 역사서와 사료들을 막론하고 지금의 중국 하남성 520만 도시 낙양을 말해 놓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필자가 낙양의 동쪽이자 백마사(白馬寺) 동쪽에 있는 황용사 및 황용사 9층탑의 유지를 찾았을 때는 거대한 9층탑의 유허지 규모는 발굴되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방형 영녕사 유지의 스케일은 너무 컸고,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필자 자신도 위축되어 할말을 잊었었다. 주변의 작은 언덕과 잡초 밭은 세월의 무상함을 증명해 주는 듯 했으며, 영녕사 유지 근처에느 고구려,신라의 고성 유지였던 것이 동한과 위의 고성유지로 바뀌어 불리면서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으나 성(城)유지로 보기보다는 흙더미 야산구릉과 같은 규모로 남겨져 있었다. 0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미투데이 더보기 목록보기 글쓰기 삭제 전체댓글 수[2] [갸갹]121.133.**.** 영녕사 목탑은 9칸x9칸 기초의 목조건축 최고의 거대한 목탑.... 하지만 영녕사 목탑을 설계한 도목수도 자신이 없었던지 몰라도 가운데 5칸x5칸은 흙을 판축하여 토심(흙 언덕)으로 하였죠. 달리말해 흙으로 탑을 쌓고 겉을 목조 건축으로 감싼 형태처럼 된 것. 2007.04.16 12:40 [어 그렇군요]222.2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