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디자이너 진태옥과 이신우. 두 사람은 사학의 라이벌 고대와 연대처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60년대 이후 한국 패션의 현재를 만들어온 패션 코리아의 살아 있는 두 아이콘임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힘의 느껴지는 이신우, 조선 백자의 단아함이
느껴지는 진태옥. 이들이 보여준 한국적인 오리엔탈과 에스프리는 패션 코리아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든든한 배경과 튼튼한 토양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흔히 대한민국 패션에 패션 역사가 없다고들 말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는 존재하지만
기록된 역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유럽의 디자이너들이 샤넬과 지방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일본의 디자이너들이 이세이 미야케와 요지 야마모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누구의 역사를 이야기하는가? 대한민국 패션에는 진정한 영웅은 없는가?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진태옥과 이신우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등등의 의구심을 가지고 이 기획은 출발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을 함께 등장시켜 대담하려고 했지만 다소 소원한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는 것은 왠지 넌센스처럼 보였다. 그래서 같은 질문을 하되 동일한 시간에 인터뷰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디자이너 진태옥. 2월 5일 화요일 오후, 청담동에 있는 진태옥 아뜨리에에서 만난 그녀는 검은색 재킷에 역시나 검은색 가죽 팬츠, 스포티한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60세를 훨씬 넘긴 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다. 오후 5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저녁 식사로
이어져 10시에야 끝났다. 두 번째 만남은 디자이너 이신우. 그녀와의 만남은 2월 7일 목요일 오후 5시에 이루어졌다. 청담동에 있는 박윤정의 매장에서 만난 그녀는 굽 높은 플랫폼 슈즈에 아방가르드한 스커트와 먹빛 재킷을 입은 단아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거장들은 인터뷰 내내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며 대한 민국 패션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표시했다. 그리고 둘은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비록 지면을 통한 만남이지만 이 둘의 상징적인 만남을 통해 패션 코리아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단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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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05/17:00/JIN TAE OK |
Affected 주로 자연에서 영향을 받죠. 자연에서 얻은 영감은 어느새 저에게 흡수되어 저만의 에스프리로 표현되니까요. 특정인물보다 선구자적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나 순수 예술을 하는 아티스트들에게서 정신적인 영향을 받죠. 특히 현대 여성들을 정신적인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디자이너 마들렌 비오네는 저의 정신적 우상이자
교과서예요.
Balance 패션은 예술성과 작품성이 조화를 이루어야죠.
요즘 들어 상업성 없는 예술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음악 하는 사람에게 관객이 없으면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패션도 마찬가지죠. 다만 상업성을 추구하더라도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을 가져야 생명력이 길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컬렉션을 할 때 관객을 의식하지 않아요. 예술에서 영향받아 내재된 에너지를 하나의 메시지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을 하겠다' '예술성을 강조하겠다'라는 계산은 무의미하죠.
Collection 한번도 만족스런 쇼를 해본 적이 없어요. 컬렉션이 끝날 때마다 이틀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후회를 하죠(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컬렉션은 파리에서 가진 첫 패션쇼죠. 리허설이 없는 파리 쇼에 적응이 안 되어 모든 것이 서툴렀고, 솔직히 옷도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스티치를 박는 데도 1센티미터로 할까, 3미리로 할까 고민했거든요. 하지만 그때 사진을 보니 나름대로 잘했더군요.
Daughter 노승은은 애초에 패션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에서 치의학을 전공한 거구요. 제가 거의 2년을 졸랐죠. 하와이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어느 날 뉴욕으로 데려갔죠. 전날 밤 몹시 앓았어요. 어릴 때부터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 밤새 끙끙 앓았거든요. 딸을 데리고 뉴욕 블루밍 데일 백화점으로 갔는데 딸이 없어진 거예요. 별별 생각이 다
들었죠. 처녀 때 무척 이뻤거든요. 영화감독이 캐스팅을 제안할 정도였으니까요. 어쨌든 납치된 게 아닌가 하고 백화점을 헤매고 다닌 끝에 5층에서 땀을 흘리고 앉아 있는 딸을 발견했죠.
충격이 컸나봐요. 그날 밤 호텔에 와서 스스로 디자인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몇 년 전 부터 조금씩 후회하는 것 같아요. 사실 한국에서 노 이사 같은 젊은 디자이너가 살아 남기란 무척 힘들잖아요. 힘들어도 그냥 모른 척 지켜보기만 하죠.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까 잘 헤쳐나가리라 믿어요.
Emotion 영감은 주로 그림이나 미술관, 작은 돌에서 얻어 그것을 '진태옥 비빔밤'으로 만들어요. 신기한 것은 무엇인가 만들고 나면 '뭐 같아' '뭐가 내포된 것 같아'라는 말을 듣는다는 사실이죠. 2년 전 파리에 출장을 갔을 때인데 서점에서 발견한 코를 흘리는 꾀죄죄한 모습의 몽고
소녀 사진이 마음에 와 닿더라구요. 그래서 몽고에 관련된 책을 무조건 읽었죠. 사실 '몽고
룩'이라는 것은 없잖아요. 단지 느낌만으로 몽고와 현대와 진태옥을 결합시켰죠. 절친한 외국
스타일리스트로부터 '이거 몽고 같은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 몽고의 영감이 잘 표현됐구나 싶어 기분이 좋더라구요.
Family 가족은 제 작업의 원동력이자 힘이죠. 그래서 이탈리아의 패션 기업의 가족 경영은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비즈니스란 인간관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죠. 그런 점에서 가족이라는 것은 일단 신뢰부분은 접고 들어가니까 유리하죠. 그래서 저는 딸인 노 이사에게 모든 경영을 맡기는 편입니다.
Goal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보다는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비교해서 내가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를 점수로 매기고 그것을 통해 한국 패션이 세계에서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저의 이상이죠.
Hobby 운동을 즐기죠. 수영하고 러닝 머신하고 그리고 영적인 호흡인 기도를 하죠.
International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표어가 한국 패션의 세계화의 걸림돌이죠. 한국적인 색채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 같아요. 요지 야마모토나 이세이 미야케 같은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일본계 디자이너들도 '가장 일본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은 안하거든요. 먼저 그들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다음 그들의 패션에
녹아 있는 일본의 색채가 주목받은 거지요. 예를 들어 진태옥이 세계 시장에 나가 인정받은 다음, '아 진태옥이 한국 디자이너였구나' 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이 바로 한국 패션의 세계화라는 거지요. 언젠가 파리 전시회에 갔는데 생활 한복을 모티프로 한 옷을 출품한 젊은 디자이너를 몹시 꾸짖은 적이 있어요. 그건 우리 세대가 20년 전에 고민했던 부분인데 아직도 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웠죠.
Jinx 징크스는 없어요. 사나운 꿈을 꾸더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Korea 기자들이 저에게 '더 늦게 태어났거나' 아니면 '파리에서 태어났다면'이라는 가상 질문을 하죠. 그럼 저는 한마디하죠. '그럼 대한민국이 없지요'라고요. 대한민국은 저에게 자궁과
같아요. 대한민국 디자이너이기에 국제 무대에 나가서도 '나는 대한민국의 디자이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또 내가 대한민국 디자이너로 외국에 나와서 이만큼 하는구나 하는
자긍심도 생기구요..
Love 저도 사랑을 했지만 그 사랑이 내 인생을 바꿀 정도로 절대적인 때는 없었죠. 깊은 사랑을 못해본 것 같아요. 저는 패션과 사랑을 했죠.
Music 주로 클래식을 듣는데 베토벤을 좋아해요. 힘있고 강렬한 그의 음악이 영감의 원천이죠. 그의 9번 합창곡을 들을 때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악을
자주 들어요. 그 외에 종교음악이 많은 바하와 비욕을 좋아합니다.
Nickname 아주 어렸을 때는 '까불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활동적이었어요. 그리고 사춘기
시절에는 '노랑 대가리'라 불렸죠. 그때는 유난히 머리가 노랬거든요.
Oriental 제가 생각하는 가장 한국적인 오리엔탈은 있는 듯 없는 듯한 백자의 아름다움이죠.
있을 때는 좋은 줄 모르지만 없으면 왠지 허전한, 뭐랄까 심심하면서도 뭔가 있는 듯한 '씀씀하다'는 표현이 제격인 것 같아요. 너무 드러나지도 나대지도 않지만 존재감이 확실한 한국적 오리엔탈에는 에너지가 있고 에지가 있죠.
Paris 파리는 저에게 애증의 도시죠. 파리가 제 마음의 고향이라고는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감히 패션의 고향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파리 공항에 내리면 흥분되고 마치 남자의 품에 안긴
느낌이 들어요. 안개에 젖어 물을 머금은 듯한 눅눅한 파리 시내의 가로수를 보면 더욱 그렇죠.
Quondam friends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만약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면 누구를 찾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6·25동란 때 제주도로 피난 갔을 때 저는 철없는 아이였죠. 당시 저는 보리가 무성한 보리밭을 거닐며 혼자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때마다 저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어요. 작곡을 하는 분이었는데 저를 멀리서 지켜보며 짝사랑의 열병을 앓았죠. 저를 생각하면서 지은 노래가 바로 '해당화'라는 노래라더군요. 정말 무지한
작은 소녀의 창문 앞에서 노래로 프러포즈를 했던 그 청년의 사랑을 외면했으니 저는 참 바보였죠. 하지만 얼만 전에 지인을 통해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Religion 저에게 종교는 절대적이자 제2의 인생이죠. 본격적인 제 인생의 시작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50대 후반부터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성경을 통해 그 안에 투영된 파노라마 같은 나의 삶을 발견하죠.
Sports 헬스장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하구요. 학창시절 배구 선수였기 때문에 TV에서 배구
중계를 하면 같이 흥분하면서 시청하죠.
Travel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바로 모로코죠. 두 번째 파리 컬렉션을 끝내고 모로코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어요. 호텔에서 1박을 하고 신문을 보려고 프론트에 내려가 신문을 펼치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옷이 사진으로 있더라구요. <헤럴드 트리븐>이라는 신문이었는데 컬렉션 특집으로 요지 야마모토, 꼼 데 가르송, 장 폴 고티에, 마틴 싯봉,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의
컬렉션 화보가 실린 거예요. 보는 순간 마구 흐느껴 울었어요. 카운터에서는 무슨 나쁜 뉴스냐며 안절부절하길래 저는 영문이름이 있는 여권과 신문 사진에 써 있는 '진태옥'이라는 이름을
동시에 가리켰죠. 그래서인지 모로코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Umbrella 내 삶에 있어 바람막이가 되어 준 것은 바로 가족들이죠. 기쁠 때 같이 기뻐하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하는 분량이 같거든요.
Valuable 제 삶에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뻔한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이죠. 나를 마지막
골인 지점까지 가이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죠.
White 백자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흰색을 좋아합니다. 언젠가 아시아나 항공의 유니폼을 디자인할 때 흰색을 쓴 적이 있어요. 그때 일본 방송에서 흰색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저는 흰색이란 어떤 색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과 어떤 컬러로도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색깔로 우리 젊은이들의 수용성과 가능성을 잘 나타내는 색이라고 했지요. 화려한 흰색보다
포목이나 백자와 같은 편안한 흰색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죠.
X-file 저는 컬렉션을 준비할 때 드라마 같은 라스트 신을 먼저 만든 다음 거슬러 올라가며 작업하죠. 라스트 신을 정한 다음 테마도 정해지고 원단도 정해지고 컬러도 정해지죠. 패션쇼에
올리는 작품도 클래식과 같은 작곡이라고 생각하죠. 어떤 곡이든 그 곡 안에는 흐름이 있어요.
주 테마의 멜로디가 중간중간 없어지지만 어느 시점에서 그 주 테마곡은 다시 나오죠. 마치 사랑을 하고, 삐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함께 춤추는 한편의 드라마처럼요.
Young 저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열심히 자신을 표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 트렌드를 추종하다 보면 생활조차 그 트렌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거든요. 트렌드를 각자의 색깔로 표현하되 자기 자신이 있어야죠.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은 자기를 잃고 너무 큰 물결을 좇아가는 것 같아 아쉬워요.
Zero 모든 것을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저는 디자이너로 살아가면서 더불어 유니세프나 기아 어린이 돕기 같은 단체를 통해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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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07/17:00/ICINOO |
Affected 어릴 때 주위 환경이 디자이너가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와서 군복을 만드는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옷과 친해질 수가 있었죠. 이런
환경에서 저는 그림을 그리거나 옷감을 잘라 인형 옷을
만들면서 유년기를 보냈죠. 컴퓨터같이 정확했던 엄마는
저를 이해하시지 못했지만 당신이 못 이룬 꿈을 이루길
바라는 아버지는 저의 정신적인 후원자였죠. 아버지가
임종하기 직전 일본에서 외국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마이니치 패션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고 해요. 저는 귀국하자 마자 아버지 산소로 가서 그
상패를 보여드렸죠. 마이니치 패션대상은 이세이 마야케와 요지 야마코토와 같은 일본의 톱 디자이너들이 받은
상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아버지에게는 큰 의미였던 것
같아요.
Balance 디자인하면서 하루도 안 빼고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갈등한 것 같아요. 결국 패션 디자인이라는
것 자체가 갈등이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러한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힐 때가 컬렉션을 준비할 때죠. 그러면 남편이 늘 그러죠. '그 고민은 지난번에도 했던 거야' 라구요. 저는 갈등을 느낄 때마다 피라미드를 생각하죠. 제가 아무리
상업적으로 가더라도 저에 대한 평가는 늘 그 피라미드의 위쪽에서 평가되거든요. 결국 저의
상업성과 예술성의 조화에 대한 평가는 바로 관객의 몫이죠.
Collection 모든 컬렉션이 다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컬렉션이라면 아마 첫 파리
컬렉션이겠죠. 그때는 마치 큰 산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때 제가 보여 주고 싶었던 건
한국의 새벽 하늘과 지는 노을이었어요. 사진으로부터 디자인을 시작했죠. 확대 전사 나염을
한 뒤 진주 누빔 기법을 썼는데 당시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경찰 모자를 쓰게 한 것도 독특했구요.
Daughter 대부분 모녀를 보면 엄마가 의젓한데 우리 모녀는 반대죠. 박 실장(박윤정)이 더 의젓하고 든든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의지하기도 하죠. 몸 가꾸기를 잘하는 박 실장이 내 앞에서
왔다갔다할 때면 역동적인 디자인의 영감을 받죠. 박 실장은 사춘기 때는 디자이너는 절대 안
한다고 했어요. 자기 나름대로는 멋있고 여유 있게 살려고 공부하는데 일에 치여 사는 저를 보니 영 아니었던 모양이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제가 뉴욕에서 패션쇼를 한 뉴스를 보고는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엄마와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고 해요. 어릴 때부터 박 실장은 그림을 잘 그렸어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는 엉뚱한 코디를 해서 저를 놀라게 했죠. 어떤 때는 저조차도 '아 저렇게도 입을 수 있구나' 하고 한수 배울 때도 있었거든요. 부도나기 몇 년 전이었죠. 하루는 박 실장이 재무재표를 브랜드별로 모두 보고는 이익이 안 나는 남성복과 잡화를 구조조정하자고 임원진에게 제안했죠. 결국 회사 간부인 전무와 상무가 반대했고, 그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박 의원도 박 실장을 심하게 야단쳤죠. 하지만 어렵더라도 그때 구조조정을 했더라면 하는 뒤늦은 후회를 했죠.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경영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게 부러워요.
Emotion 저는 음악과 자연에서 주로 영감을 얻죠. 하늘의 색깔, 바람, 음악, 시집 같은 것에서요. 고구려에 대한 영감도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아! 고구려 전'에 의상 두 벌을 재현하면서 영감을 얻었죠. 처음 슬라이드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그 감동은 내내 제 디자인의 바탕이 되어주었어요. 특히 빨강과 비치색이 너무 오래되어 바랜 듯한 고구려 벽화에서 생명을 느끼죠.
Family 가족은 저에게 자신을 편히 엮을 수 있는 울타리죠. 가장 좋은 부모 관계는 친구 같은
관계라고 생각해요. 가족을 너무 많이 느끼고 살면 언젠가 외로워지죠. 저는 마음속에다 자식들을 두고 되도록이면 그들의 영역을 지키주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저희는 모두 따로 살아요.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전화도 안 하죠. 그러나 문득 딸의 전화가 기다려지기도 해요.
아마 늙어서 그렇겠죠?
Goal 저는 너무 이상적으로 패션 비즈니스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앞선다는 말도 들었죠. 저는 제가 몸 담고 있는 이 패션계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몇 년 전 남성복과 잡화를 만들면서 저는 전문 업체와 함께 만들고 싶었죠. 하지만 너무 앞선
저의 이상은 난관에 부딪혔죠. 그러나 그 이상적인 시도들이 요즘 하나하나 정착되는 것 같아
기뻐요. 저는 요즘 언더웨어 전문 업체와 피델리아 바이 이신우라는 브랜드와 루 바이 이신우라는 침장 브랜드를 통해 그 이상을 만들어 가고 있죠.
Hobby 취미는 여행이죠. 산에 올라가거나 바닷가에 서서 먼 수평선이나 가까운 수평선을 번갈아 보는 것이죠. 음악을 듣거나 조용히 시집을 읽기도 해요.
International 우리 나라 패션이 국제화되기 위해서는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죠. 그러기 위해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하고 마켓도 커져야 하구요. 마켓이 넓어져야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고 좋은 것을 만들어야 우리 것을 명품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한국 패션이 살려면 외국으로 나가야죠. 제가 처음 파리 프레타 포르테 전시회에 나간 것이 79년부터였는데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고 한국관도 처음 생겼죠. 지금까지 우리는 뭐했나 하는 생각에 너무 속상해 울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요즘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해외에 나가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죠. 다만
'한국적이 세계적이다'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할 것 같아요. 한복의 라인이 아니라 우선 나를 표현해야죠.
Jinx 징크스는 없어요. 한때 빨간 옷을 입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징크스가 있었지만 요즘은
아예 빨간색을 시도 안 하니까 징크스가 없죠.
Korea '만약에 파리에서 태어났더라면?'이라는 가정은 저에게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은 운명이고 현실이죠. 그리고 내가 살아 있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내가 살아가야 할 땅이니까요. 물론 해외에 나가서 대한민국을 생각할 때 속상한 적은 많지요.
나라가 너무 작아서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구요. 어쨌든 대한민국은 제게 가족과 같은 울타리죠. 적어도 해외 비즈니스할 때는 더욱더 조국이 절실하죠.
Love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절대적인 사랑은 평생을 찾는 거 같아요. 어떤 사랑이건 사랑이란 단어는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요. 남편인 박주천 의원은 첫눈에 반했죠. 여대생 시절 저는 마초맨보다 문학청년이나 고민하는 철학 청년을 좋아했지요. 이런 저의 이상형을 알고
있는 친구가 소개해주어 당시 서울 공대생이던 박 의원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학교를 포기하면서까지 일찍 결혼했죠(당시 이대는 재학 중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운명적이라는 그 만남이
저의 첫사랑인 셈이죠.
Music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없고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을 좋아해요. 늘 FM을 틀어 놓고 생활하는데 맘에 드는 음악이 있으면 메모를 한 다음 음반을 사죠. 영화를 보고 나면 꼭 OST를 구입하기도 해요. 파리에서 열흘쯤 음악을 못 듣다가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샹송을 들었는데
막 눈물이 나더라구요. 음악은 저에게 공기와 같은 존재예요.
Nickname 기억나는 별명이 없는 것 같아요. 학교 때 너무 개성이 없고 내성적이어서 그런지
친구들이 별명을 지어주지 않았어요.
Oriental 직선적인 선. 검정색. 내가 좋아하는 먹색 그리고 흰색이 바로 한국적인 오리엔탈이죠. 고구려를 모던하게 푼 제품들이 해외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기억이 나요. 한국적인
오리엔탈을 단지 조선 시대에서만 찾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역사에서 5백 년 조선 역사는 일부분이니까요. 저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한국의 오리엔탈을
연구할 때 조선에서 벗어나 보다 과거로 갔으면 좋겠어요.
Paris 파리에 도착하면 괜히 그곳이 고향 같은 느낌이 들고 본능적으로 편안하죠. 일단 일터를
떠나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서 그럴 거예요. 안개와 건물, 거리가 모두 맘에 들어요. 파리는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요.
Quondam friends 저도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남편이 구봉
광산에서 근무할 때 사택에서 함께 살았던 박 의원 상관의 부인을 찾고 싶어요. 그 때 새댁이었던 저는 매일 연탄 불을 꺼트렸는데 그때마다 아무 군소리 없이 연탄 불을 꿔 주던 인천이 고향인 아주머니였어요.
Religion 종교는 인간이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죠. 성경책을 읽을 때마다 그 안에 제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 같아서 늘 성경을 읽죠. 그 안에서 내가 고쳐야
될 점도 많이 발견하죠. 처음에는 성경에서 위안만 받았지만 요즘은 성경말씀처럼 살려고 노력하죠. 지난번 부도가 났을 때 너무도 많은 사람이 미웠지요. 그때 저는 성경책을 두 번이나 읽으면서 그들을 용서하려고 노력했지요. 사실 저는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위선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거든요.
Sports 수영을 좋아해요. 거의 선수 수준이죠(웃음). 어릴 때부터 폐활량이 좋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혼자 수영을 배운 다음 스스로 수영복을 만들어 입기도 했어요. 요즘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수영을 해요.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을 섞어서 하는데 접영이나 배영은 사람이 없을 때만 하죠. 사람들이 보면 늙은이 주책이라고 말할까(웃음). 한 번에 25분 정도 쉬지 않고 50미터를 서른 번 정도 왔다갔다 하죠.
Travel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칸과 리스에 갔을 때였죠. 그곳 현대 미술관에서 본 작품에
반해 그 도시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아요.
Umbrella 바람막이가 돼준 것은 우선 가족일 것 같아요. 남편과 아이들. 뭐니뭐니 해도 제일
큰 바람막이는 남편이죠.
Valuable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구요. 그 분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도록 노력하는 장인정신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죠.
White 저는 흰색을 무척 좋아해요. 흰색은 꾸밈이 없어 좋아요. 흰색은 옷감에 따라 느낌이 천차만별인데요, 저는 특히 내추럴 화이트를 좋아하죠. 하지만 어떤 때는 하이테크 화이트에서
나오는 형광빛 화이트도 좋아해요. 흰색의 양면성을 모두 좋아하죠.
X-file 저는 디자인할 때 옛날에는 좋아하는 모델을 생각하고 그 사람에게 옷을 입히는 마음으로 옷을 만들었어요. 그러나 요즘은 어떤 무형의 이상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마지막 장면을
정하고 나서 역으로 처음으로 올라가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거죠.
동덕여대에서 강의할 때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그 음악에서 얻은 영감으로 디자인을 시킨 적이 있는데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Young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이 패션계에서 살아 남기란 무척이나 힘들죠. 우리 세대만 해도
유통망이 있잖아요. 그러나 새로 시작하는 30대 디자이너들은 어떤 유통으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아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인내심을 가지라는 거죠. 그리고 되도록 빨리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해요. 인내심도 지나치면 궁상맞은 아집으로 보이니까요. 안 되는 걸 기를 쓰고 하려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죠. 최선을 다해 좋은 물건을 만드는 생각을 먼저 하고 난 다음 유통을 생각해야죠.
Zero 무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저는 무엇인가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니면 점을 보는
점쟁이나 화가에 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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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ㆍYOO JAEBOO / PHOTHGRAPHERㆍJOO MYUNGKY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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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로피시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