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도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 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 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홀로 가노 라.』(출가시) 세상살이를 「한 점의 눈송이」로 여기며 오직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철 저한 수행과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한 마디의 법어로 출가자는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속인들에게도 깨달음의 경지를 일깨워준 그가 태어난 생가를 통해 다시 되살아났다.
진주~대전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산청 단성인터체인지에서 내려 시천면 쪽
으로 2·4㎞ 가면 단성면 묵곡리가 나온다. 엄혜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 진주남강 지류인 경호천이 내려다보이는 분지인 이 곳에 성철큰스님의 생가가 있다. 이 일대는 고려말 삼우당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몰래 면화씨를 들여와 처음으로 재배했던 「문익점 면화 시배지」와 거유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며 세운 덕천서원과 세심정 등이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은 1912년 4월 이 곳에서 태어나 1936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
하기 전까지 24년을 살았다. 부친 이상언은 대지주였는데 지주집안의 7남매중 장남이었던 성철스님이 출가하자 충격을 받아 저택을 부수고 인근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허물어진 생가는 지난달 30일 복원되기 전까지는 논밭으로 있었다. 성철 스님은 출가 후 한번도 고향 땅을 밟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생가자리엔 통상적인 한옥형태의 집을 지어 기념관으로 건립된 생가와
그 앞쪽에 창간된 겁외사라는 사찰이 울타리모양으로 둥글게 들어서 있다. 이들 건물은 1998년 성철스님문도회와 산청군이 성철대종사 열반5주기를 맞아 단순한 생가 복원 차원을 넘어서서 성철 스님의 정신과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사찰을 건립, 종교를 뛰어넘는 공간을 조성하기로 한 결과물이다.
생가쪽로 들어가면 먼저 나타나는 것이 「겁외사(劫外寺)」. 시간과 공간
을 초월한 곳이라는 의미의 이 사찰명은 성철 스님이 말년에 건강 때문에 겨울이면 백련사에서 부산의 한 암자로 옳겨 지내면서 붙인 이름을 따온 것이다. 세속을 초월한 영원한 삶을 화두로 평생을 정진해왔던 스님다운 절묘한 작명이라 할 만하다.
겁외사에 들어서면 정면 중앙에 한손으로 주장자를 잡고 서 있는 스님의
동상이 보인다. 좌대 3m를 포함해 6m 규모로 건립된 동상의 우측에는 선원인 쌍검당과 요사채인 정오당이 있고, 좌측에는 대웅전을 세워 놓았다. 대웅전에는 김호석 화백이 그린 성철대종사 진영과 불상이 모셔져 있다. 겁외사는 단순한 사찰기능에서 벗어나 젊은 불자들에게 큰스님의 뜻을 21세기에 새롭게 이어받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창건됐다. 주지 원구스님은 『겁외사에서 4㎞ 떨어진 폐교를 임대해 가칭 「퇴옹수련원」을 세워 청소년과 청년불자들을 위한 다양한 선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겁외사 뒤편에 복원된 생가는 성철 스님 기념관과 안채 사랑채 등으로 이
루어졌다. 안채를 중심으로 왼쪽에 건립된 기념관엔 평생 깨달음을 추구했던 한 수도승의 고뇌와 번민, 그리고 다짐과 깨달음이 가득하다. 전시실로 들어서면 스님이 평생 걸쳤던 누더기 한 벌과 검정 고무신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이를 통해 무소유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출가이전의 스님의 모습을 담은 유품으로 학적부를 보면 초등학교 졸업
이 전부인 성철 스님은 초등학교 때 반에서 5~10등 정도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26살로 절에 들어가기 전에 속세에서 읽었다고 기록한 목록들도 눈에 띈다. 거기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비롯해 <하이네 시집>, <민약론>, <철학개론>, <중용>, <대학>, <사적유물론>, <자본론> 등이 적혀 있어 그의 학문적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읽던 책 <남화경>(南華經)에는 「return to nature(자연으로 돌아
가라)」란 낙서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는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영원에서 영원으로)」이란 낙서가 보인다. 영원한 가치에 대한 그의 관심이 손에 잡힐 듯하다
출가 이후의 기록은 모두 수행과 직결된 것들이다. 선수행을 강조한 스님
이기에 대부분 기록이 수행의 자세를 스스로 가다듬는 내용들이다.
안채의 왼쪽 방에는 스님이 30년 동안 지냈던 해인사 백련암 염화실이 재
현돼 있다. 매일 새벽예불을 하면서 백팔참회 할 때마다 바라보던 석굴암 부처님 사진, 평생 사용하던 낡은 책상, 한여름의 햇살을 피하기 위해 쓰던 삿갓 등 스님의 체취가 가득 담긴 일상적인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오른쪽 방은 모친 강상봉씨가 생활하던 방의 모습을, 안채의 오른편에 자리잡은 사랑채에는 부친 이상언옹이 거주할 당시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성철 스님의 제자로 생가복원 사업을 주도해온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
개인을 추앙하자는 의미보다도 누구라도 성철 스님을 따라 깨달음을 향한 의지와 실천이 굳으면 성철 스님처럼 영원한 진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다』며 『추모의 공간이 아니라 발심의 공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