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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퐁듀
( Time Fondue )
양산제일고등학교 3학년
김동휘
끈적끈적한 공기가 코끝에 감긴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 겨드랑이 사이로 떨어지는 눅눅한 공기. 팔꿈치에서, 옆구리에서, 손가락 사이에서 배어나는 진득한 땀냄새. 오늘의 목표는 남고 교복. 감색 마이와 짙은 회색 바지의 키 작은 소년에게로, 다가간다. 다가간다.
등교버스는 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은 채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카락에 구겨진 교복을 입은 학생들. 가끔은 아직도 차 한 대 뽑지 못한 무능한 회사원. 장날이면 아직도 존재하는 게 신기한 5일장을 나서는 할머니, 혹은 나이 많은 아줌마. 하나같이 졸린 어깨를 감싼 채 뒤엉켜 좁은 공간을 메워간다.
그곳에서 나는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태연하고 무심한 눈길로, 때론 졸음으로 끈적이는 눈두덩이를 밀어내며 주위를 둘러본다. 소심하고 둔해 보이는, 쉽게 말해 만만해 보이는 목표를 골라 뒤를 비집고 선다. 일단 자리를 잡으면 한 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조심스럽게 남은 손을 내려 다가간다. 조금씩, 긴장감 있게, 스릴 있게.
오늘의 목표는 내 턱까지밖에 오지 않는다. 숨을 내뿜자 질척한 입김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 덜컹거리는 버스를 적신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폴리에스테르의 촉감. 거칠고 가벼운 표면을 따라 미끄러지는 손가락. 사람의 냄새로 젖어버린 손바닥. 덥고 무거운 공기.
살짝 발꿈치를 떼고 한 걸음 다가서서 가까이 손을 댄다. 텁텁한 체온. 묵직한 둔부. 목표물의 엉덩이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나는 묘한 쾌감에 휩싸인다. 사냥을 하고 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인간의 시선으로 발 디딜 곳 없는 이 좁은 공간에서, 평범한 인간은 시도조차 못할 새로운 사냥. 이내 쓰다듬는 것은 관두지만 손은 떼지 않는다. 그가 내릴 때까지, 체온과 냄새와 눅눅한 숨소리만 남기고 사라질 때까지.
맹세컨대 내가 남자를 밝히는 건 아니다. 목표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사냥감으로 충분해 보이는 상대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사냥을 하는 거니까. 매일 아침 반복되는 사냥을 마치면서 나는 영웅이 되어간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냥을 즐기며, 조금씩 평범한 고등학생에서 멀어지면서.
학교에 도착해 교실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종이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오렌지색 PK셔츠를 꺼내 갈아입고 나자 그제서야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진회색 교복의 숲 속 원색 셔츠. 나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안다. 단순히 교복을 입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평범함을 거부하기 때문에. ‘특별함’, 그 농밀한 단어. 나라는 인간 자체를 꾹꾹 눌러 담아놓은 듯한 두 글자.
교실로 돌아와 이어폰을 꽂고 영화를 재생한다. 아침 교실을 부유하는 먼지와 슬리퍼 소리. 1초당 30장씩, PMP의 작은 액정을 스쳐가는 무수한 화면들.
“진환이~. 또 이상한 영화 보냐?”
그 적막의 경계를 찢어들며 ‘오랑’이 옆에 앉았다. 오랑우탄을 닮아서 별명이 ‘오랑’이라고 했다. 1학년 때까지 우탄이라고 불리던 걸 지긋지긋해하다가 기껏 새로 생긴 별명이 오랑이라는 풍문이다.
“오늘 우리 학년에 누가 전학 온다는데~.”
오랑이 자기 얼굴의 반도 채 안 들어갈 듯한 거울을 들고 짧은 머리털을 슥슥 빗어댄다. 누가 봐도 오랑우탄이 사람 흉내를 내는 모양새다.
“고3이 웬 전학?”
“그러게~. 근데 엄청 예쁘다는 것 같던데?”
그의 푹 파진 인중을 따라 화색이 흘러넘친다. 모든 전학생은 예쁘고 돈 많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졌다. 물론 실제로 전학을 오기 전까지는.
“구경 안 가? 난 지금 가봐야지~.”
설사 그 전학생이 정말로 돈 많고 아리따운 공주님이라 한들 누가 너한테 관심이나 가져준다던, 하는 말이 혓바닥을 맹렬히 쳐댔다. 옹기종기 모여 뉴페이스를 향해 떠나는 뒷모습들. 저 녀석들은 19살을 먹고도 덜 자랐다.
시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녹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녹여낸다. 칠판 가득 필기거리를 메워대는 방식으로,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밀린 버라이어티를 만끽하는 방식으로, 혹은 시간을 녹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방식으로.
시간은 때우는 것도 아니고 죽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커다란 퐁듀 그릇에 시간을 담고 은근히 데우는 것이다. 굳어버리지 않게 적절한 온도를 유지해주는 게 중요하다. 급한 성질 때문에 태워먹어서도 안 된다. 어차피 시간은 꾸준한 속도로 꾸준히 들어오고 잘 녹은 시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쉬엄쉬엄 골고루 저어주는 일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생에는 그 정도 온도만 있으면 된다. 필요한 것은 청춘의 들끓는 열정이 아니라 미지근한 일상의 연속.
그런 의미에서 내가 시간을 녹이는 방식은 탁월하다. 예컨대 혼란스러운 급식소를 피해 구교사 뒤켠의 정원에서 여유로운 점심을 즐기는 것. 밥을 삶의 의미쯤으로 여기는 듯한 고3들로 가득 찬 급식소는 과한 열정의 총체 같은 장소다. 그 땀냄새와 밥알로 가득 찬 수다소리와 식판을 긁는 쇠수저 소리. 어영부영 남들을 따라 그런 방식으로 시간을 녹여버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미적지근한 일상 속 버려진 교정, 그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점심시간을 녹여내기엔 최적의 장소다. 가을이면 잎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낙엽수 아래. 비가 올 때를 제외하면 늘 그곳에서 밥을 먹었다. 처음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한 반년쯤 지나자 인적이 뚝 끊겼다. 듣자하니 소문이 돌았다는 것 같다. 무슨 사정인지 1학년 하나가 구교사 뒤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그것도 잘못 건드리면 뼈도 못 추릴 듯한 살벌한 표정으로.
편의점 커피와 크림치즈로 꽉꽉 채운 빵을 다 먹고 나서 교복 뒷주머니를 뒤진다. 하얗고 기다란 한 개비를 피워 물고 한 모금 빨아들이자 맨솔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목구멍을 싸늘하게 적시는 민트 맛. 훅, 길게 회색 연기를 내뿜으면서, 어쩌면 성인이 되는 순간 내 인생의 절반은 무의미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셔도 담배를 피워도 당연한 일이 돼버리는 순간. 그런 일들이 조금도 특별해질 수 없는 나이.
정규수업을 마치고 8교시는 보충이 있었다. 익숙한 시간이 되고 익숙하게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일어났다. 원칙상 특별한 사정없이는 11시까지 자습이 의무였지만 7교시 이후 내가 사라지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었다. 전교에 하나밖에 없는 오렌지색 삼선 슬리퍼를 캔버스화로 갈아 신고 학교를 나섰다. 저녁시간을 좀 넘어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만난 형과 약속이 있었다. 마중을 나온 그에게 가볍게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바다를 향해 뚫린 호프집에 들어서자 그의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 다들 미성년의 신참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자리를 권했다. 쑥스럽다는 듯이 앉아 들뜬 분위기 속으로 녹아든다. 그럼 고등학생 아니냐, K랑은 어떻게 알게 됐냐, 벌써 술 마셔도 되는 거 맞냐, 하는 질문들이 술잔 사이로 떨어지고 ‘일단은 수험생 비슷한 거 맞을 거예요’하는 대답과 함께 맥주잔이 입에 닿는다. 이내 질문이 뜸해지다가 곧 분위기 속에 내 존재감도 형체를 잃어갔다. 이런 자리가 항상 즐겁지는 않다. 늘 비슷한 호기심과 늘 비슷한 염려를 받는다. 결국 헤어질 쯤에는 오늘 재밌었어요, 하는 밋밋한 인사를 남기고 이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술자리를 꼬박꼬박 찾는 것은 우선 평범한 척 학교 자습에 목매달고 싶지 않아서고, 둘째로 자습을 안하고보니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던 탓이다.
호프집 구석 천장에 매달린 TV에서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슬쩍 시계를 보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래방이라도 같이 갔다 가지, 하는 알콜내 나는 권유를 학교 핑계로 거절하고서 거리로 나왔다. 바닷바람이 닿자 반팔 사이로 한기가 스민다. 버터콘과 알탕이 뒤섞여 위장을 헤집었다. 자판기 앞 벤치에 앉아 여기저기 18연발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수평선 어귀에서 배 한척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 있자 천천히 시야가 트였다. 비린 공기와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지하철을 타려 걷는 길에 생수를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던힐 프로스트 한 갑을 끼워 계산하고 있는데 교복차림의 고등학생 하나가 등 뒤로 스쳐갔다. 낯익은 교복.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다 말고 몸을 기울여 한번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나와 달리 그녀는 태연하게 커피 하나를 골라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가슴에 달린 마크는 분명 우리학교 것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얼굴이라 1학년이겠거니 했는데 가슴에 빨간 이름표를 달고 있다. 3학년에 이런 녀석도 있었던가 싶어 한참 쳐다보자 그쪽에서 노골적으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2년이 넘도록 마주친 기억조차 없을 만큼 존재감 없는 얼굴은 아니었다. 얼핏 봐선 하얀 얼굴에 피부도 괜찮았고 나름대로 예쁜 얼굴에 가깝지 않을까. 마크를 잘못 본 건 아닌지 잠깐 고민하다가 생수를 따 마시고 지하철을 향했다. 학교일은 나에게 더없이 가깝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다지 관계없는 일이기도 하다. 고1 때 담임은 내가 학교에 애착이 없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내가 속한 세계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다음날 좁아터진 버스에 몸을 싣고 커다랗게 하품을 하자 진득한 공기 사이로 알콜냄새가 퍼졌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집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부모님 얼굴을 못 본지도 꽤 되었다. 내일 아침엔 자는 엄마를 깨워서라도 아침밥을 얻어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버스 안쪽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가족 관계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내가 술을 마시든 외박을 하든 부모님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렇다고 내가 마냥 삐딱선을 타는 것도 아니다. 스쿠터를 몰고 다니다가 한쪽다리를 갈아버리지도 임신한 여자친구를 데려와 독립하겠습니다 따위 턱 빠질 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엄마가 아직까지 동창회 자리에서 ‘우리 아들은 그냥 전국에서 좀 하는 정도야’ 따위 자랑을 하고 다니는 걸 보면 나도 제법 훌륭한 자식인지 모른다.
간밤 과음으로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오늘의 목표물을 탐색했다. 타겟은 제법 열심히 드라이까지 마친 듯한 긴 생머리의 여고생. 슬금슬금 다가가보니 밝은 회색치마의, 우리학교 학생이었다. 학교 앞에서 함께 내려야하는 목표물은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늘 거기서거기인 먹이만 먹는 것도 질리지 않는가? 사냥은 리스크가 클수록 보람이 큰 법이다. 간만에 심장박동이 커지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사냥감 뒤로 자리를 잡았다.
목표물은 여자치곤 꽤 키가 큰 편이었다. 술 냄새가 치약 향에 뒤섞여 후둑후둑 떨어진다. 버스가 턱을 넘느라 덜컹거리고 버스 안을 가득 메운 질척한 공기가 한순간 출렁인다. 습기 찬 공기가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조금씩, 손을 내렸다.
끈적한 물엿 사이를 휘젓는 듯이 손 마디마디가 더디게 움직인다. 순간 내 손이 나와는 별개의 생물체처럼 보였다. 치마 위를 스치는 손끝이 해면처럼 느껴진다. 찌릿한 한기가 손가락을 파고들고 인조직물 덩어리가 흡사 처음 접하는 생물의 표피 같다.
조금 과감하게 손바닥을 가져다대려는데 발끝으로 문턱에 찧은 듯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일개 사냥감이 반격을 시도하다니! 단화 뒷굽이 하얀 운동화를 있는 힘껏 찍어 누르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흘렀다. 맥주거품을 되새김질하는 느낌?
턱 아래 공기가 작은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달아났다. 아주 짧은 정적. 슬며시 시선을 떨어뜨리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예상외로 덤덤한, 그러나 명백히 불쾌한 시선이 혈관을 따라 흐른다.
“…죄송합니다.…….”
‘……뭐?’
희생양이 가해자로 둔갑하는 순간. 침묵이 쏟아졌다. 식은땀이 받쳐 입은 반팔 셔츠로 스며든다. 괜찮다고 대답이라도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문이 열렸다. 주객이 전도된 가해자는 성큼 계단을 내려서버렸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얇은 샴푸냄새와 뜨뜻한 공기만 남기고.
때로 시간은 뭉텅뭉텅 떨어진다. 시간이란 퐁듀 그릇이 아니라 팔팔 끓는 물에 수제비 조각을 던져 넣는 모습에 가까울는지도 모르겠다. 차임벨 소리에 정신을 차리면 50분이라는 수업시간이 댕강댕강 날아가 버린 뒤다. 50분, 10분,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풍덩풍덩 떨어지는 시간.
계절이 한여름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자 발밑으로 조각난 햇빛이 떨어진다.
‘운이 좋았다고 치자.’
뒷주머니를 뒤지자 납작하게 거미무늬가 달라붙어있는 지포 라이터와 달랑 담배 한 개비가 남아있었다. 아쉬운 대로 남은 한 개비를 피워 물고 하늘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결과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쩌면 당사자는 의식조차 못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런 것쯤 감수하고 벌이는 행각이 아니던가. 대범해지면 될 일이었다. 폐 저 깊숙이까지 맨솔 향이 퍼졌다가 다시 뿜어져 나온다. 불붙은 종잇장의 청량감. 깨끗하게 속을 비워내는 기분이 들자 한결 상쾌해졌다.
“여긴 네가 전세 낸 거야?”
등 뒤에서 날아온 소리에 번뜩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리다 담뱃재가 옷 위로 떨어졌다. 오렌지색 셔츠 위로 쌀벌레 같은 점이 박힌다.
“지포 라이터 비싸지 않아? 겉멋인데, 그런 거.”
불청객은 주저 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빈약한 팔다리를 휘휘 저어 곁에 앉는다. 고개를 돌려보자 비밀의 교정 속 이방인은 낯선 여자였다. 하얀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 문득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보자 무심한 표정을 짓는다.
“왜 그렇게 쳐다봐?”
갑자기 나타난 건 본인인 주제에 무례한 말투였다. 취향에 관계없이 나쁘지 않은 얼굴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술 냄새 나는 기억이 스쳐갔다. 어젯밤 바닷가에서 봤던 그 여자애! 퍼뜩 오랑이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과연, 그저 이 낯선 침입자가 소문의 전학생인 모양이다. 그리고 또 어디서 본 듯한…….
“아침에 너였지? 만원버스 치한.”
한순간 심장까지 담배연기를 쐰 듯 손끝이 저릿해온다. 그녀는 태평한 얼굴로 편의점 커피를 쭉쭉 빨며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눈치채놓고 모른 척 내렸다는 말인가. 그것도 두 정거장이나 일찍!
“원래부터 거기서 내리려고 했어. 아침엔 좀 걸어야 하루가 상쾌하거든.”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혼자 재잘재잘 앞서나간다. 당황 같은 거 안 했다고 못이라도 박고 싶은 건가. 아니면 난 쿨하고 배려심 깊은 소녀라고 광고라도 하고 싶은 건가.
“…그냥 어쩌다 손이 닿은 거였어… 사과하려는 참에…….”
내 입을 나와 내 귀로 듣는 목소리에 현실감이 없었다. 궁색한 변명은 안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열린 입은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으려 애쓴다.
“넌 왜 이런 데서 밥 먹어?”
정작 당사자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여기가 편하니까.”
어어-하고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너야말로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건데.
“친구가 없는 거 아냐?”
아침에 너였지? 만원버스 치한. 그렇게 말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무게, 같은 표정에 같은 억양. 이런 녀석이라면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라든지 수학 시간에 숙제 있었지 않나? 하는 질문도 똑같이 울릴 것이다. 사심도 진지함도 없는 눈빛이 제법 날카롭다. 통증이 미간을 따라 관자놀이를 타고 등을 휙 쓸고 지나갔다. ‘친구가 없는 거 아냐?’
“…그런가보지.”
때때로 솔직한 인간은 상처가 된다. 담담히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은 그런 척 하는 수밖에. 악의도 배려도 없는 그 날것덩어리의 진실 앞에서 나는 몸 둘 바를 모른다. 찰박찰박. 껍질째 벗겨진 산곰장어를 떠올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이런 데 와 있잖아.”
태산 같은, 그것도 단단한 바위산 같은 자존심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나도 친구가 없으니까.”
전학생이라 그런가? 하는 자문을 조그맣게 덧붙이면서, 그녀는 빈 커피팩을 주물럭거렸다. 구겨진 플라스틱을 빨대로 푸푸 불어 펴나 싶더니 구교사를 향해 휙 던진다.
“여기 청소 담당 있다며? 치울 거리가 없으면 청소하는 보람이 없지.”
그녀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두리번거리더니 아직 뜯지 않은 땅콩버터빵과 제로콜라를 가리킨다.
“점심 안 먹어? 쓰레기는 버려줄 테니까.”
버려준다고 해봤자 집어던지는 것뿐이면서……. 콜라캔을 따 한 모금 마시면서 그녀의 가슴팍을 살폈다. ‘이솔이’. 남자이름 같다.
“내 이름 신기하지? 거꾸로 해도 똑같고.”
자신의 이름이 자랑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넌 왜 이름표 안 달고 다녀?”
“필요 없으니까.”
또다시 어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멋대로 빵을 뜯었다.
“그래서, 이름이 뭔데?”
그녀는 땅콩버터가 없는 테두리 부분을 얇게 뜯어내더니 잘금잘금 씹어댄다.
“김진환.”
세 번째 어어-. 비슷한 이름이라도 생각났는지 먼 곳을 쳐다보며 잠깐 골똘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엄청 밋밋한 이름이네?”
아, 그래, 심심한 이름이라 죄송하다. 처음부터 줄곧, 이 앤 대체 뭐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마디한마디 겉포장 없이 내뱉으면서 진지한 무게는 조금도 없다.
“바람소리 솔. 옥편에도 없는 한자래. 그래서 그냥 한글 이름이라 그래.”
자기소개서에 한자로 이름 쓸 필요 없으니까 편하고 좋지, 하며 테두리만 뜯어먹은 빵을 건넸다. 묘하게 불쾌한 상대였다. 제잘난 맛에 떠들어대고 듣는 태도도 말하는 투도 가볍기 짝이 없다.
“보통 진환이~ 이렇게 부르나? 별명 같은 거 없어? 김진환~, 이게 나은가?”
“난 내 이름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순수하게 의문부호로 가득 찬 질문. 거꾸로 불러도 이름이 같다는 그녀는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시작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부르면 되잖아. 야, 라든지 저기, 라든지. …‘너’도 있고.”
평범하게?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그러고 보면 다들 나를 그렇게 불렀다. ‘저기 있잖아’ 라든지 ‘어이’라든지. 어쩌면 여태껏 내 이름이 낯선 것은 그런 탓인지도 몰랐다. 내 이름인 걸 뻔히 알면서도 좀처럼 익숙해질 일이 없으니까. 그녀는 대놓고 푸하하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너’가 제일 멀쩡하네, 하는 사족도 잊지 않고.
그 뒤로 그녀는 정말로 나를 그런 식으로 불렀다. ‘야, 담번엔 내 점심도 사와.’, ‘어이, 웬만하면 담배 좀 끊지?’. 물론 그러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야, 너, 인마, 그 정도면 이방인 ‘바람소리 솔’과 대화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 후 점심시간마다 비밀의 교정은 우리 둘의 몫이 되었다. 친구가 없다던 그녀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여자애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수컷 고3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은 점심시간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점심도 같이 먹자는 여자애들을 떼어놓고 오는 거겠지.
우리의 대화는 서로 자신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는 식이었다. 공통된 화젯거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넌 왜 제로콜라만 마셔? 다이어트 하냐?” “그냥 콜라는 너무 달잖아. 맛없어.” “단 거 싫어하는 애도 있구나.” “머리 아프잖아, 단 거 먹으면.”
우리 둘은 분명 다른 세계에 있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 하나부터 열까지 몽땅 다. 난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녀 역시 평범한 무리는 아니었다. 한번은 4교시를 주저 없이 땡땡이치고 베스킨 라빈스를 사오는 일도 있었다. 급식소에서 훔쳐온 숟가락 두 개까지 덤으로 끼워서,
“거기서 숟가락 주잖아. 이만한 거.”
“안 돼, 그런 건. 플라스틱은 부러지잖아.”
“아이스크림 좀 먹는다고 안 부러져.”
“그래도 쇠로 된 게 나아. 절대 부러질 일 없으니까.”
“넌 꼭 이상한 데 집착하더라.”
“이상한 거 아니라니까. 아, 너 그거 알아? 사람이 목을 매면 발버둥 치다가 목뼈가 부러져서 죽는대.”
“질식해서 죽는 거 아니었나?”
“글쎄. 암튼 우리 외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대. 목을 맸는데, 목뼈가 부러져서.”
“…….”
“접때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꽁꽁 얼려놨다가 퍼먹는데 숟가락이 부러진 거 있지. 근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거야. 목뼈가 뚝. 그래서 그 뒤로는 그런 부실한 숟가락이 싫더라고. 그래서 나, 연필도 잘 안 써. 뚝뚝 부러지고 그러니까.”
그녀는 어떤 이야기에도 쓸데없는 무게를 싣지 않았다. 물 줄 필요가 없다던 선인장이 말라죽어버렸다는 얘기를 할 때나 할머니가 목뼈가 부러져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할 때나, 늘 같은 무게의 문장만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점은 곧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미묘한 거리. 그녀의 이질감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자신만의 세계. 그런 것들을 슬그머니 내게 풀어놓을 때마다 숨이 막히는 것이다. 정체모를 불쾌함은 불쑥불쑥 나타나더니 함께 있는 자체마저 불편해지기 일쑤였다.
그녀에 대해 알아갈수록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녀가 중학교 때는 미국에서 살았다는 것,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는 것, 아버지의 외도가 원인이었다는 것, 외할머니의 자살 역시 그 때문이었다는 것까지. 그런 것들을 스스로 입에 담는 그녀가 낯설어졌다. 다른 세계의 생물체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이혼하고 나서 쭉, 엄마는 한 곳에 있는 게 싫대. 그래서 이사도 계속 다니고 나도 전학 다녀야하고. 기숙사 학교도 알아봤는데 그럼 엄마 혼자 지내야하니까……. 그래서 이래저래 여행 다니는 기분으로 따라다니는 거지 뭐.”
다 먹은 커피를 연신 빨아대면서 그녀는 자신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 그녀의 이야기는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고 그녀 역시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무거워야할 이야기가 건조함으로 버석버석 부서질 때마다 찾아드는 위화감.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해?”
자그만 입술이 빨대를 떼고 고개를 돌렸다.
“넌 네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잖아. 비극 속의 여주인공.”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답답함이 목을 죄어왔다. 그녀는 쭉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수긍도 적대감도 없이, 이야기하는 내내.
“네 입으로 네가 특별하다고 떠드는 이유가 뭘까. 위로받고 싶어서? 아님, 남들이랑 다르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말투는 공격적으로 변해간다. 죄책감을 숨기려는 듯, 더욱더 날카롭게.
“모두한테 사랑받고 사니까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지겠지. 일상 하나하나를 비극으로 포장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말이 내 입에서 쏟아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한기 어린 괴리감. 지금 말하고 있는 게 내가 맞긴 한 건가. 이렇게 얘기할 만큼 그녀에 대해 불만이 쌓일 이유라도 있었던가.
“너 되게 웃긴다.”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로, 그녀가 말했다. 상처를 받은 듯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기분 나빠하는 기색조차 없는 한결같은 말투.
“그건 내가 아니라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잖아.”
구겨진 플라스틱 병이 포물선을 그린다. 떨어진다. 굴러간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명치를 찍힌 것처럼, 숨소리가 멎어들고 소름 같은 상처가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 교정 밖으로 멀어져갔다. 귓가에서 파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우르릉쾅 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태산 같던,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무너지는.
다음날은 비가 내렸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그녀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게 돌았다. 그녀가 자퇴를 했다는, 교통사고가 났다는, 유학 준비로 바쁘다는.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애들 누구도 그녀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 출석부에도 전화번호가 없는 걸 보면 핸드폰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
어렸을 때, 아마도 초등학생 무렵, WWE 레슬러가 그려진 티셔츠가 유행했었다. 언더테이커, 더 락, 크리스 제리코……. 검은 바탕에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프린트들. 그것을 입는다는 자체가 특별했다. 구하기 어려운 티셔츠일수록 더더욱. 그 시절의 나에게도 그 박스 티셔츠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 커다란 해골이 정면에 박힌 그 티셔츠를 꼭 입고 말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그러나 결국 중학교에 입학하고 줄인 교복이 유일한 패션으로 전락할 때까지, 나는 그 티셔츠를 입어보지 못했다. 주위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특별해지기만을 꿈꾸면서, 평범한 초등학생 속에 숨어. 용기도 자신감도 없는 ‘평범한’ 꼬마. 아니 어쩌면 그때부터 쭉, 나는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부재는 나흘째 이어졌다. 결국 출석부를 뒤져 전화번호 대신 주소를 베껴들고 그녀를 찾아 나섰다. 우리 집에서 멀지않은 아파트 단지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작은 긴장이 쌓인다. 시간이 식어가는 듯 했다. 조금씩 미지근해지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어간다.
딸칵, 현관문을 열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침묵이 둘 사이에 안개처럼 내렸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시간 많아?”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교통사고가 나지도 자퇴를 하지도 유학을 가버리지도 않았다.
“시간 남아돌면 나랑 어디 안 갈래? 좀 멀리.”
부재의 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금방 본 사람처럼 물어온다. 그녀가 하듯, 어어-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문을 닫고 들어가더니 주황색 박스 하나를 안고 나왔다.
“어디 가는데?”
박스를 대신 받아들며 묻자 그녀는 ‘멀리!’라며 앞장서서 걸었다.
“엄마가 죽었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등받이 없는 녹색 의자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면서.
“집에 돌아왔는데 욕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거야. 욕조에 물을 한가득 받아놓고, 샤워캡까지 머리에 쓰고, 목까지 푹 잠겨서는.”
그칠 듯이 그치지 않는 비가 오래된 시외버스 위를 적시고 있었다. 차가운 대합실 바닥은 얇은 습기로 덮여있고 그 위로 그녀의 목소리만이 건조하게 떨어져 내렸다.
“욕조가 전부 빨갛게 물들었어. …손목을 그은 거지, 그러니까. 엄마는 원래 빨간색을 좋아했거든. 빨간색 원피스 같은 거……. 그래서 엄청 잘 어울렸어, 그러고 있는 거.”
나는 그녀를 닮은 세련된 중년의 여인을 떠올렸다. 샤워캡을 쓰고, 빨간 욕조 속에 몸을 담근. 무척 잘 어울렸을 것이다. 도도하고, 따뜻하고, 때때로 슬픈 빛이 스치는 짙은 빨강.
“화장했는데, 출상까지 모르는 사람이 다 해줬어. 친척이라는데 난 처음 보는 사람. 빈소가 너무 썰렁하니까 이런 걸 왜 차려놨나 내가 다 민망한 거 있지. 상주가 안 우니까 뒤에서 막 수군거리고, 하하.”
하하, 하고, 맥 빠진 웃음이 발등에 떨어졌다.
“그 사람도 찾아왔었어. 아… 그, 아빠. 꼭 남의 집에 부조하는 것처럼 흰 봉투에 돈을 담아온 거 있지. 죄지은 사람처럼, 아니 죄지은 사람 맞긴 한데, 고개를 이렇게 푹 숙이고 있는 거야. 그래서, 갑자기 생각나서, 뺨 때렸어. 엄마 대신.”
감정 없는 목소리에 힘조차 담기지 않자 금세 그녀의 말은 죽어버렸다. 파삭파삭, 조각난 채로.
버스에서 내려 도중에 택시를 한 번 타고 도착한 곳은 납골당이었다. 입구에 커다란 불상이 있었다. 그녀는 ‘우리 집에 종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라며 신발을 벗었다. 꽃과 향과 나무냄새가 나는 곳. 그녀는 가져온 박스에서 MP3와 작은 액자를 꺼냈다. 담배 두 갑을 올려놓고는 문을 닫았다. 두 갑의 블랙스톤. 그녀의 엄마는 그 체리 향 나는 담배를 피웠다고 했다. 냄새는 달짝지근한 체리향인데, 사실은 시가만큼 독하다고도.
액자를 비스듬히 세워놓는 그녀의 뒷모습이 쓸쓸해졌다. 그렇게 무게 없이 말할 때마다 어딘가로 슬픔이 쌓이고, 또 새어나가고 있었을까. 나는 어쩌면 그녀의 그 특별함을 질투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혼자서만 스톤콜드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
냉정하게 자신을 인정해야 모든 게 편해진다. 때때로 사람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우리는 남색 밤이 거리 가득 깔리고서야 돌아왔다.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 젖은 그네에 앉자 하늘 가득 별이 떠있었다.
“내일은 비 안 오겠다.”
그녀는 주황색 박스를 소중히 안고 짐짓 들뜬 듯이 말했다.
“아직 학교에 전화도 안 했는데. 자퇴나 해버릴까?”
그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녀 곁엔 자상하고 듬직한 파트너 대신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만 꿈뻑이는 고등학생이 있다.
“너 그런 말 들어봤어? 사람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거라는.”
“그러니까, 결국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랑 다르다, 그런 거?”
그녀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아니. 그냥 그렇다구. 자고나면 하루씩 죽어있는 거지. 웃기지 않아?”
정해진 시간을 다 써버릴 데까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 하루치 시간을 몽땅 녹여내면 그 하루를 죽어낸 걸까. 이렇게 차례차례 시간을 녹여내다가 퐁듀 그릇이 흘러넘치면, 그땐 어떻게 될까.
끈적한 밤의 공기가 그넷줄을 타고 흘렀다. 심장이 뛰고, 오늘의 시간이 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