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대장의 상상 유목]
얼마 전, 친구를 기다리며 서점 앞에 있는데 그 곳에서 모 소설가의 사인회가 열리고 있었다. 널리 알려진 소설가가 아니어서인지 처음에는 좀 허전하다 싶더니 차츰 줄을 서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그 소설가의 신작 소설을 하나씩 사들고 있었다.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유명인의 사인을 받는 것일까?
지금부터 나는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구별해 보려 한다. 당신도 김연아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성장담이나 노력에 관한 일화 등은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느 정도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당신은 다큐멘터리나 TV 광고, 아니면 뉴스나 스포츠 중계에서 그녀와(실제로는 그녀의 이미지) 충분한 시간을 교감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엄밀히 말해, 김연아와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김연아 이미지가 만들어 낸 이야기와 관계를 맺었다.
그런 당신이 만약 김연아의 사인회에 가서 김연아와 악수를 하고 사인을 받는다면, 이제 김연아와 당신의 관계는 새로운 전환을 맞을 것이다. 방금 당신은 김연아 이야기(story)에 대한 일방적 수신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현장감(ing)'있는 '상호작용(tell)'의 첫 걸음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당신은 김연아에 관한 이야기에 실질적인 참여자가 된다. 바로 스토리텔링의 순간이다.
당신도 스토리텔러
네 살 된 딸을 둔 친구가 자신의 육아일기를 보여준 적 있다. 일기란 보통 자기 일상에 대한 기록이거나 자신과의 또 다른 대화다. 그런데 그 친구의 육아일기는 미래의 딸을 향하고 있었다.(이런 식의 육아일기는 물론 낯선 것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문체는 아주 구술적이었으며, 대답 없는 수신자와 쌍방향 소통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photo by. ganyganygany그때 네 살짜리 딸이 방에 들어와 낯선 아저씨(필자)의 손에 들린 커피 텀블러(tumbler)에 대해 아빠(친구)에게 물었다. "저게 뭐야?" 참으로 간단한 질문이다. 그에 대한 친구의 답변은 대충 이랬다.
"OO이는 분홍색 원피스 입을 때 제일 예쁘잖아요? 근데 어른들 마시는 커피는 따뜻할 때 마셔야 제일 맛있대요. 그래서 커피가 이 아저씨한테 '나 좀 따뜻하게 보관해 주세요.'라고 자꾸 보챘대요. 그러자 아저씨는 따뜻함이 오~오래 가는 그릇에 담아가지고 다니는 거래요. 자, 만져 봐봐. 따뜻해요? 안 따뜻해요?"
텀블러에 대한 기능이나 의미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했다면, 그 아이의 기억에서 텀블러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현명한 '스토리텔러'를 아빠로 둔 아이는 텀블러의 가치나 기능까지 당분간 기억해낼 것이다. 오래도록 회자되는 가치 있는 대상들은 그렇게 구술적 이야기로 연명한다.
기업전략으로써 스토리텔링
앞의 사례는 바로 오늘날 뜨고 있는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중요한 내용을 함축한다.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경쟁 사회에서 기업은 차별화된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도 어렵고, 이미지를 바꾸는 것도 어렵고, 구축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각인될 수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유포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때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는 기법이 있다면, 그것이 스토리텔링일 것이다.
일단 브랜드 스토리텔링에 성공했다면, 이제 기업은 제품 분야와 개별 제품 하나 하나에 일관된 이야기를 심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면 광고, TV CF, 인터넷 등의 매체는 다른 표현 수단과 소통방식을 갖기에 이야기의 가공은 필수적이다. 그렇게 해서 소비자에게 생생한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기업과 제품이 된다면, 이런저런 고비가 닥쳐도 그들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게 된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시대
사실 '스토리텔링'은 탐구의 대상으로 개념화가 안 되었을 뿐, 인류의 근본적인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는 현장에서의 대면 접촉 외에는 의사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량 인쇄술이 보편화되어 지식 소비의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만 해도 일상의 영역에서 구술문화는 막대한 힘을 가졌다. 그러다가 말보다 글이 지식을 보존하고, 문화를 전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존중받게 되자, 우리는 스토리텔링의 가치를 잠시 소홀하게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의 말대로 오늘날은 구술문화의 힘이 다시 폭발하고 있다. 그런 정황은 정보통신 기술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의해 출현한 다양한 놀이문화에서 발견된다. 인터넷 공간만 보자. 이제 우리는 주말 드라마의 서사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올려 주말 드라마의 결말에 영향을 미친다. 조금 과장하면 공동창작, 혹은 집단 창작의 풍경이다. 실시간으로 서로 대화하며 하나의 유력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hoto by. toughkidcstMMORPG 게임은 어떠한가? 우리가 키우는 아바타가 또 다른 페르소나가 되어 우린 가상세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간다. 인쇄된 책에 갇힌 이야기(소설이나 동화를 떠올려 보라)는 단선적이고 일방적이며 수용자(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지만, 게임 속 이야기는 '내가 참여했을 때 비로소 흘러가는 이야기'이지 않나? 이것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일면을 보여준다.
아직도 스토리텔링을 모른다면
지금까지 연구원으로 몇몇 용역을 수행하면서,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융합', '통섭', '컨버전스'의 동력이자 가능성이라는 것을 느꼈다. 연구 분야는 주(主)전공이라 할 수 있는 문학, 영화를 넘어 문화콘텐츠의 범위 바깥까지도 나아갔다. 방문객이 테마 공간에 참여하여 스스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쾌감을 얻는 테마파크를 기획한 것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것은 요즘 활발하게 회자되고 있는 '공간 스토리텔링'에 대한 연구였다. 또 다른 사례는 한 식품기업에서 자문위원을 하며 루머에 의해 바닥까지 떨어진 기업 이미지를 반전시킬 전략을 찾는 일이었다. 이는 '브랜드 스토리텔링'에 대한 연구였다고 할 수 있겠다.
스토리텔링의 시대,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는가
이제 '스토리텔링'은 대세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서 그 중요성을 발빠르게 흡수하고자 한 노력은 다행스럽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를 지정하고 이를 지원하고자 시도하는 모습도 긍정적으로 비친다.
이제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일반인이 함께 할 필요를 느낀다. 스포츠 중계를 보면서 결과 예측 퀴즈에 대한 정답을 문자로 보내고는 당첨자 명단이 지나가는 TV화면에 눈길 주는 당신이라면, 홈쇼핑 광고에서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제품수량에 안절부절 못하다가 전화기를 드는 당신이라면, 인터넷 공간에서 당신의 댓글에 대한 상대방의 실시간 반응을 보고 희열을 느끼는 당신이라면, 당신도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이미 알고 있을 터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제임스 딘이 결코 죽지 않는 이유를 떠올리며 내년에는 당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쌓아가길 바란다. 세상은 지금도 서로 나누고픈 이야기 속 주인공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