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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30년 이상 지속되어 온 건강 챙기기 프로그램이 있었다.
1월의 제3주말에 한라산에 오르고, 설 전후에 지리산 종주를 마치는데 별
탈이 없으면 그 해는 병원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여기에 삼백산 종주가 추가되었다.
20세기말(1997년)의 IMF 공포가 확신을 더욱 확고히 갖도록 추가하게 한
것이 연말연시의 함백산과 태백산, 소백산 등 3개의 백산 등산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31일 석양의 함백산과 새 해가 시작되는 1월 1일
새벽의 태백산에서 물러가는 해와 새로 맞는 해에게 부탁한다.
테니슨(Alfred Tennyson/1809~1892:영국 시인)의 시구(詩句)
"Ring oout the old, ring in the new."를 빌어서.
낡고 부정적이었던 것들은 지는 해와 함께 모두 물러가고 새롭고 희망찬
해를 맞도록 종소리 크게 울려 퍼지기를.
이 과정이 여의하게 끝나면 소백산에서 현지 산우들과 정을 나누는 것이
덤으로 받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지리산은 수년 전에 종료하였고 한라산도 33번 오른 것을 끝으로
작년부터 고정된 날자를 풀었다.(아무 때나 1년에 한 번 오르는 것으로)
80대 중반이라면 건강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나이라 판단되었기 때문에.
공자는 "70을 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했거늘 80 넘어
서도 욕심을 부린대서야.
그래서, 삼백산 종주도 건강 체크가 아니라 년 1회 만나는 현지인들과의
정리(情理)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고한역에서 정암사를 거쳐 함백산에 오르는 만항재길, 폐광촌 만항마을이 야생화 마을로
환생했지만 눈 덮힌 겨울이라 유감이다(위)
멀리, 눈에 잡힌 한백산의 송신탑(KBS)이 점차 완연해 가면함백산 등산로가 시작된다.(아래 1~3)
1572.9m 함백산 정상(위 1~4)과
정상에서 내려다 본 늦은목(晩項)재와 주변 능선(아래)
겨우 오후 4시 반이 되었을 뿐인데, 반시간 전에도 청천이었던 하늘이 요동치더니 저 꼴이 되었다.
작열하던 해는 간 데 없고.
삼백산에서도 손자들과 한 1월 4일의 약속에 들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인 큰 손자도 함께 하므로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다.
걱정도 따라서 늘 겠지만.
손자들이 약속을 잊거나 급작스런 일로 인해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번쯤의 리마인드(remind)는 무방하다 하겠으나 그들에게 조급
스러운 할아버지로 비취는 것을 저어해서 연락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손자들로 하여금 약속의 지엄함을 각인하는 계기가 된다면 쓴
잔도 달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교육의 一環이니까)
그랬는데도 그들은 약속대로 나왔다.
새 해인 2017년 1월 4일 아침 9시 30분에 지하철 3호선의 수서역에.
제3코스의 역(逆) 도보코스는 송파,강동 양 구의 서울과 경기지역 경계를
걷지만 들머리인 수서역은 아직 강남구에 속해 있다.
강남구 동남부의 허파라는 데모산을 지나왔으므로 곧 송파땅이 되겠지만.
수서역 앞에서 광나루역 앞까지, 이 구간의 총 길이는 26.1km란다.
여러 하천과 마을의 공원들을 이어가고 해발 134m로 낮기는 하지만 산도
넘어야 하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도 난이도는 하((下) 구간이다.
"햇비둘기는 재를 넘지 못한다"는 속담을 첫날에 실감했기 때문에 유일한
수칙인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명심하고 절반을 넘어선 이후에는 애들의
몸 상태에 따라서 도중에 마감해야 하는 구간.
두 손자의 나이 차는 2년에 불과하지만 노.장년과 달리 세월에 덜 익숙한
그들에게는 늙은이의 10년 차 만큼이나 큰 갭이 있는 것 같다.
두 달 안에 같은 중학생이 되겠지만 아직은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다.
그 신분처럼 언행의 품위와 격이 다른 두 손자를 원만하게 거느리려면 두
개의 채널을 운영하거나 변신을 거듭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다.
9시 55분에 수서역 5번 출구로 나온 우리는 10시 05분에 탄천 진입부에 있는 첫 스탬프(3코스 4번째)를
찍고 광평교(?)를 건넘으므로서 본격적인 도보가 시작되었다.(위 1~4)
(이번 코스에는 스탬프가 4곳에 비치되어 있다. 코스가 길기 때문?)
전번 코스(4코스)의 돌탑전망대에서 바라보던 12시 방향의 롯데월드타워 빌딩이 정 반대 위치(6시방향)
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123층, 높이 554.5m의 초고층 빌딩 다우며 개략 명세는
한반도 최고, OECD국가 최고, 아시아 3번째, 세계 6번째의 높이에 세계에서 2번째 높은(500m) 전망대.
탄천(炭川)은 한강의 한 지류로 총연장 35.6km의 하천이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서 발원, 성남시를 거쳐서 서울의 강남구 삼성동과 송파구 잠실동을 끝으로
한강으로 유입되는데 황당한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옥황상제는 이승의 동방삭(東方朔) 때문에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18만년 살았다 해서 삼천갑자(三千甲子/1갑자는 60년)라 불리는 그를 저승으로 데려와야 하는데
워낙 노회하여 잡는데 번번이 실패한 저승 사자.
흐르는 냇물에 검은 숯을 씻고 있었다.
동방삭이 이 근동에 자주 출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저승 사자가 발휘한 기지다.
지나가던 영감이 이 괴이쩍은 짓을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숯을 왜 씻고 있는 거요?"
"검은 숯을 희게 하려고요"
"삼천갑자를 사는 동안에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 본다"
계책임을 알 리 없는 영감이 사자의 대답에 중얼거린 말이다.
이 영감이 동방삭 임을 간파한 저승 사자가 즉시 그를 포박하여 옥황상제 앞으로 데려갔으며 '숯을
씻은 내'라 하여 탄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나.
동방삭은 중국의 전한시대의 문인(前漢/B.C.154?~B.C.93?)이다.
그가 조선 땅에서 살았을 리 없거니와 겨우 1갑자를 넘겼을 뿐인 수명인데 선사시대 부터 18만년을
살았다는 황당한 전설이다.
냇물이 쉬이 넘치기 때문에 농민들이 탄식하는 하천이라는 뜻인 탄천(歎川)의 와전.
옛날부터 강원도에서 벌채된 목재가 한강따라 뗏목으로 운반되어 오면 이 냇가에서 숯으로 구웠다
해서 붙여진 이름 또는 숯을 구워냄으로서 검어진 냇물을 숯내라 했는데 탄천은 숯내의 한자.
등의 전설이 오히려 긍정적인 유래라 하겠다.
이에 더해, 남이장군의 6세손 남여이(이조20대 경종때)가 살았던 마을 이름을 그의 호 탄수(炭搜)를
따서 탄리(炭里)라 했는데 이 마을(성남시) 이름이 탄천의 유래라는 것.
그러나 이 유래는 인터넷에서 퍼가기로 떠돌고 있을 뿐 근거가 없다.
자연인의 호를 마을 이름으로 정할 정도라면 당대의 명망가일 것임이 분명한데 남이장군가 족보에
그런 명망가는 없다.
의령남씨 9세손인 남장군의 6세손이라면 15세가 되며 그 전후세대를 다 살펴보아도.
진위의 여과 없이 마구 퍼다가 확산시키는 인터넷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
1945년 광복은 되었으나 당장에 사용할 우리 말(글) 교재가 없기 때문에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조선어독본'을 임시 교재로 사용했다.
이 책에는 '삼년고개 설화'도 있었다.
"삼천갑자 동방삭도 이 고개에서 6만번이나 굴렀다"는 구절이 아직도 생생하다.
넘어지면 삼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미신 때문에 낙심한 노인으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한 역발상이다.
넘어질 때마다 3년씩 늘어나므로 6만번을 굴러 18만년을 살았다는 것.
영악하기 그지없는 이즘의 소년들이 이 설화를 수용하겠는가.
그러나, 무릇 설화(전설)는 그 시대를 양분으로 하여 탄생한다.
그래서 설화에는 그 시대상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황당해도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1990년대 말부터 상류 지역(용인)에 거센 개발풍이 불어닥치므로서 하천으로 유입되는 생활하수와
공사장의 토사 등으로 인해 수질이 급속히 악화되었단다.
다행히도, 경기도와 용인시의 생태하천 복원사업으로 주변경관과 수질이 좋아지고 있으며 송파구도
'탄천생태경관 보전구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단다.
(위위 그림 뒷쪽 아치교는 숯내교)
탄천의 서울둘레길 구간은 1.5km 안팎으로 빨리 끝나고 왼쪽 장지천으로 옮아간다.
남한산성의 일부인 청량산(497m/하남시)에서 발원하여 송파구 거여동, 장지동을 지나 탄천에 합류
하는 길이 4.08km 하천의 합수지점에서.
서울둘레길은 장지천변길 따라서 장지교 밑을 지난 후 왼쪽 장수공원으로 들어간다.
관할 송파구청이 장지천의 생태복원공사를 마침으로서 자연생태천으로 겁듭났단다.
우기 외에는 항상 개천물이 마르고 쓰레기가 나뒹굴던 하천이 4계절 물이 흐르고 창포와 멧미나리,
구절초와 붓꽃 등이 군락을 이룬 자연 하천으로.
자연생태하천의 실감이 나지 않는 겨울철인 것이 유감이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하천을 걷는 맛만은
신선하고 달콤했다.(아래)
장지천을 떠난 서울둘레길은 마을이 길게 분포되어 있다 해서 동명을 장지동(長旨洞)이라
하였다는 마을에 조성된 공원(장수공원/장지공원)을 지난다.
서울외곽순환도로와 평행해서 거여동의 공원(거여공원)도 밟고 간다.
고층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면서 만든 소규모 인공 공원들이다.(위)
내가 손자들의 나이 때 서울둘레는 대부분이 한강의 안쪽이었다.
1c도 되지 못하는 70년 세월에 이뤄진 변모가 하도 심해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표현으로는
태부족하다는 느낌이다.
20c 중후반 단기간의 발전이 19c에 걸친 발전보다 더 거창하며 21c는 겨우 16년이 지났을 뿐이
지만 예측 불허의 혁명이 거듭될 것이라잖은가.
서울의 한강에는 하나의 철교와 나란히 가는 하나의 인도교 외에는 이번 구간에 있는 광나루 ~
천호동 간에 놓인 목교(광진교)가 전부였는데 현재는 30개가 넘는 다리가 놓여있다.
60년대 초까지도 오늘 구간도 이전 구간들과 동일하게 예외 없이 경기도의 순박한 농촌이었다.
특히 왕십리에 들어서면 이 구간 한하고 분뇨의 악취가 진동하는 시골이었다.
비속어도 시대를 반영한다.
'궁둥이'를 '왕십리'로 표현하던 비속어가 사라진지 꽤 되기도 하지만 이 말 뜻을 손자들이 이해
할 리 있는가.
지금은 왕십리와 뚝섬 일대가 고층 빌딩 숲을 이루고 있지만 서울시민이 먹는 채소의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알리 없으니.
서울시민이 배출하는 분뇨의 수거차 대부분이 왕십리로 향했고(남으면 이 지역까지) 그 분뇨를
먹고 자란 채소들을 서울시민이 다시 먹는 묘한 순환이 오랜 세월 계속되었다.
아무튼, 그 일대를 지나가려면 코를 막아야 했으며 이런 연유로 궁둥이가 왕십리로 불렸고 한
때는 이 지역민들로 부터 이 비속어 사용금지 또는 자제 캠페인이 벌어진 적도 있다.
성내천에 진입할 때 소홀한 처신으로 벌을 받았다
한참을 반대 방향으로 갔으니 되돌아 오는 것은 벌임이 분명했다.
더구나 할아버지의 잘못으로 손자들까지 벌을 서야 했으니 이보다 더 미안할 수 있는가.
그래도, 지도를 꺼내어 보고 목적물들을 설정하여 대조하는 등 의젓하게 대응하는 큰 손자.
의외의 값진 보물을 새로 얻은 듯 가득 차고 넘치는 포만감이어!
2가닥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역 Y자 형의 성내천 중간을 P턴 하듯 돌아서 가는 방이동 생태경관
보전지역은 아직은 어수선하고 어설프다.
너저분하지만 속전속결의 장기가 발동하면 상전벽해를 비웃을 것이다.
화훼 원예를 중심으로 각종 생업이 걸려 있기 때문에 중지를 모으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지만.
2번째 스탬프(제3/아래)를 찍었을 때는 정오가 지났다.
첫 날인 큰 손자는 내색을 자제하는 듯 한데 반해 작은 손자는 지난 4일간과 다름 없다.
마치 맛 좋은 점심 먹기 위해 걷는 듯이.
그러나 오늘도, 공교롭게도 점심식사 시간대에 대중 식당이 없는 화훼단지를 통과하게 되었다.
식당이 있기는 하나 손자들이 즐겨 먹는 메뉴가 없다.
오후 1시 반이 넘은 시각에 하남시 강북동 소재 설렁탕집(팔복설렁탕)을 찾았다.
서하남 IC인근이다.
서울둘레길을 많이 벗어나지 않고 맛이 좋을 듯 한 집을 찾느라 늦어지기도 했지만 길을 잘못
들지 않았더라면 30분쯤은 앞당길 수 있었겠기에 손자들에게 미안했다.
저들 나이에 식욕이 없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으니까 당연히 왕성해야 하지만 돌이라도 녹여낼
만한 식욕에 늦은 식사가 결합해서 설거지가 편할 것 같다.(식기가 깨끗하도록 먹어치웠으니까)
2시경에 먹은 점심식사로 만복 상태가 되었다면 식곤증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식곤증이란 나이 든 층에 해당할 뿐 두 손자 연령대와는 무관한 생리현상일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 걷기를 강행함으로서 극복한 체질이다.
우리는 식사 후 바로 걸을 수 있었다.
상일동 화훼 단지 옆을 지나 일자산으로 올랐다(위 1.2)
하남시(경기)와 강동구(서울)에 걸쳐 있는 산이다.
남동으로는 하남시의 감북동과 초이동, 북쪽은 강동구 고덕동과 상일동, 서쪽으로는 강동구 둔촌동과·
길동을 끼고 있는 해발 134m의 낮은 산이다.
1971년에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휴양시설과 산책로를 조성했단다.
이 때 조성된 길의 일부가 서울둘레길일 텐데 지역민들의 애용을 반영하는 듯 길이 많아 헷갈리겠다.
공동묘지를 지나 검은 안내판 '둔굴' 앞 휴식처에서 잠시 쉴 때.(아래 1. 2)
내용을 읽어가던 큰 손자가 제동이 걸린 듯 물어왔다.
'설정탄핵'이 무슨 뜻이죠?
<. . . 고려말에 등용된 대학자로 이색, 정몽주, 이승인 등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공민왕 17년
(1368년) 신돈의 설정탄핵을 계기로 신돈의 박해를 피해 이 곳에서 일시 은거하였던 곳으로. . >
매끄럽지 못한 통문장인데다 중학생에게 걸릴 정도로 오자(誤字)를 방치하고 있다니.
'탄핵'은 이즈음 많이 회자되고 있으므로 잘 알고 있지만 실정(失政)을 설정이라 했으니 걸릴 수 밖에.
작은 손자도 곧 같은 중학생이 되겠지만 중학생과 초등학생의 차이가 2년이라는 년차로는 설명될 수
없는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학령기 청소년들에게 합리적이고 실리 있는 학제 개편의 당위를 실감하게 하는 케이스(case)다.
이집(李集/1327~1387)은 고려 후기(27대 충숙왕14년~32대 우왕13년)의 학자, 문인아다.
29대 충목왕 때 과거(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공민왕 17년에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신돈의 미움을 샀다.
영천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는데 그 새에 이 곳에 일시 은거한 듯.
한데, 은거의 인연을 잊지 않기 위해 호를 둔촌(遁村)으로 바꿨다는 주장은 억지다.
더구나, 마을 이름 둔촌동이 그의 호에서 비롯되었다면 전후가 틀리지 않은가.
은거했다는 굴은 어디에?
일자산(一字山) 정상으로 향했다.(위 1~4)
정상은 둔촌이 차자하고 있다.
그의 훈교비(訓敎碑), 원형 석비에 새긴 유훈(?)이 시선들을 끌고 있으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630년 전의 훈교다.
그가 현재 생존해 있다면 어떤 당부를 할까.
'돈도 실력이다', '능력 없으면 부모를 원망하라'고 강변하는 이 시대에 여전히 독서만을
강조하고 금 한 광주리의 유산보다 경서 한 권 가르치라고 말할까.
IT시대에 맞는 당부로 재해석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상에 오른 손자들에게 피로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긴, 오후 4시 반이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한 시간이다.
마감할 고덕역이 겨우 2.6km 남았다는 강조가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순 방향으로 '강동그린웨이 명일근린공원' 들머리(위)에서 마감한 시간은 17시경.
한 손자에 비해 두 손자와 함께 걷는 즐거움이 덧셈 공식으로는 2배가 되겠지만
실제로는 계산할 수 없다.
양적일 뿐 아니라 질적으로 도저히.
걱정도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도 빗나갔다.
집에서는 늘 옥신각신, 티격태격하다가 양비론에 걸려 모두 벌을 받기 일쑤지만
2살 아래 동생을 챙기는 의젓한 형이 곁에 있으니 걱정이 거의 사라졌다.
나도 손자들 만한 성장기에 형과 많이 싸웠다.
부모와 조부모까지도 시비를 가릴 때 때로는 일치된 견해지만 많은 경우에 양분
되어 편애성 시비가 일기도 했는데 이 아이들의 경우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형제란 어떤 관계?
우리 가족 관계에서 부부와 부모에 이어 3번째로 가깝다.
부부란 무촌으로 가장 가깝지만 무촌이기 때문에 가장 멀다.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점 하나에 의하여 님과 남이 된다.
그러므로 형제는 1촌인 부모에 이어 2번째로 가까운 관계다(2촌이니까)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점은 인류 최초의 살인이 형제간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구약성서(창세기 4장)에 의하면 형(카인)이 아우(아벨)를 죽였다.
(약 43만년 전의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에서 살인 흔적이 발견되었다지만)
단지 편애(偏愛)가 살인의 이유였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민법에 의하면 조부모와 손자는 직계 존비속이지만 혈족이면서도 직계가
아닌 형제 관계.
며칠에 불과하겠지만 함께 걷는 동안에 내가 이 애들의 우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이 나의 과제일 것이다. <계 속>
첫댓글 서울둘레길의 곳곳의 지명이 저에게는 까미노 길의 지명만큼이나 생소하게 느껴지는 기분...... 어쩌면 좋을런지요.
평생을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저에게도 생소한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