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산청 흑돼지 (망경동 444-14번지) 원문보기 글쓴이: 나야(이규인)
차 황 장 날 차황은 5일장이다. - 아지매, 아재요 ! 장에 안 가실랑교? - 찢어진 문풍지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로 우리 집에 자주 오시는 동네 어르신의 장터 가시자는 말은 초등이였던 어린 내가 들어도 반갑기만 하였다. 뽀마드를 발라 착 달라붙은 머리결에 아지매는 동동구리무를 반짝반짝 바르고 분을 쳤으며, 아저씨의 두루마기는 풀을 입히고 다듬이 돌에 두드리고 인두로 주름을 펴서인지 깨끗하고 정갈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이 간직하던 하얀 고무신을 걸레로 문질러 닦으시고는 부부동반 나들이를 가셨다.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갓을 쓰시고 벌써 출타하셨다. 아무리 바쁜 일이 생겨도 시장에는 꼭 가야만 했고, 가지 않으면 5일 동안 뭔가 허전하던 그 시절이였다. 우체국 건너편으로는 차황초등학교가 남산(정수산)을 바라보며 서 있고 그 밑엔 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는 데, 장터에 오면 제일 먼저 면사무소부터 들러서 출생신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막걸리 한잔 하다보면 깜빡하고 이름을 잊어버려 생년월과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지만 누구하나 토를 다는 이 없었다. 뭐 그려러니 하였고 유난히 차황출신의 생년월일이 5 .10. 15. 20. 25. 30일이 많은 이유가 다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1, 6, 11, 16일로 되어있는 사람은 구장님이 산청 장(場)에 가다가 신고한 흔적이기도 하였다. 면사무소 밑으로는 배의사가 운영하던 병원이, 그리고 건너편엔 찐빵집과 서점이 있었고, 그 아래는 버스 정류장과 떡방앗간이 있어서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지고 시루의 떡상자 사이로 하얀 수증기가 새어 나오면, 한줌 얻은 고드밥을 아껴 먹는다고 쬐끔씩만 떼어 입에 넣으며 폴짝폴짝 즐거워하였다. 물론 너더리 앞 방아실을 거쳐 털거덕 삐그덕 소가 이끄는 달구지에 나락을 싣고와서는 그 쌀로 생필품을 사는 사람도 많았다. 수레바퀴는 현재의 자동차 바퀴보다 작은 삼발이 자동차(세륜자동차)바퀴 두개를 달고 누렁소의 어깨에 멍에를 씌워 어거정 어거정 세월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장돌배기의 무리에 자연히 동요되었다
버스 주차장에서 시장을 갈라치면 외기름을 파는 우씨 집 앞을 지나야만 하였다.(차황사투리:외지름) 여기에서는 무연/경유/백등유(=외지름:외국에서 들어온 기름)를 큰 유리 술병에 넣어서 한되씩 팔기도 하였는데, 드름통을 반으로 잘라 만든 통의 뚜껑을 열고 한되짜리 국자로 석유(외지름)를 붓고나면 조금 더 퍼주던 인심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집 보다는 조금 비싸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여 잡화 등은 다른곳에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땐 등잔불이 유일한 실내등이였고, 남포등은 석유가 많이 든다하여 특별한 날이 아니면 사용을 아니하였다
그래서 벽을 가로세로 약 30cm 크기로 뚫어 그곳에 등잔을 올려 불난리를 방지하였고, 방바닥의 등잔은 잘 엎어져서 기름이 쏟아지니 불이 남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 옹이에다 송판 받침을 만들어 등잔을 올리기도 하였다(등잔 받침대) 앞산의 아름들이 소나무 뿌리에 관솔이 붙어있어 손가락 굵기 정도로 땍키칼(도로코 면도칼)로 오려 몇개 가져와서는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서 불장난을 하였고 간혹 소나무 관솔 뿌리로 불을 밝히기도 하였다. 관솔로 불을 밝힌 방에는 천장벽지를 바르지 않은 곳이 많았는데 서까래 (천장 나무 버팀목)에 거미줄이 엉켜서 새까맣게 그을린 기억이 아련하기만 하다. ※ 관솔 : 주로 옹이(나무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에 많이 엉긴다. 예전에는 송진이 많은 관솔에 불을 붙여 촛불이나 등불 대신으로 썼다. 소나무속 나무의 줄기에서 분비되는 송진이 나무줄기에 발달한 세포간도(細胞間道)에 엉겨서 생긴다. 성분은 로진과 테레빈유이다. 이것으로 짠 기름을 솔기름이라고 하며 기계 등에 사용한다.(국어사전) 그 옆(우성기 집이라고도 하였음)엔 부침개와 막걸리를 팔았다. 여기서 새벽녁에 장보러 나온 이들은 불어 터진 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웠고, 연신 굽어제키는 국화 빵 틀 옆으로 얼어붙은 손을 녹이려 옹기종기 모여들어 정겨운 이들과 만나는 곳이기도 하였다. - 아지매는 뭐 살 낑교?- - 쌀하고 콩 서너되 팔았는 데 뭘 살까 고민중이라오…- 옆에 있던 아지매도 거든다. - 난 본동띠기가 가자고 해서 백지 따라 안 나섰는가베- 그때의 고등어 찌게는 김치를 듬뿍 넣어 질보다 양으로 조림을 해 먹었는 데 부엌에서 솔솔 풍기던 그 내음새는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그 흔적을 찾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국수는 소풀 무친 것에 양념한 조선 간장을 뿌려주는 데 그 시절 그 맛 또한 잊을 수 없어서 타향에서 재래시장을 찾아 의례 먹어보지만 그 옛 맛을 찾을 수가 없다. 백발 머리를 하신 할머니(故박한종씨 모친) 집의 식당 앞으로는 식품류 난전이다. 다랭이 밭에서 키웠을, 고구마, 감자 , 마늘, 홍시, 파 등이 즐비해 있다. 이곳이 차황사람이 생산한 농산물 매매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고구마는 수수깡으로 얼기설기 엮어서 보관하였는 데 서너가마나 되니 보관할 장소도 그렇거니와 얼어서 썩으면 버려야 했기에 따스한 사랑방에 보관하고서 간식으로 또는 주식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또 소 죽 끊이던 숯불에 구워먹거나 긴긴 겨울 밤엔 간식용으로 생고구마를 깍아먹기도 하였다.
한켠엔 반평 남짓한 조립식(?)합판건물이 있어 이약장수가 목청을 돋군다 "이 약이요 이 약! 쭈~욱 쭉 늘어지는 고무줄 ! " 몸에 고무줄이랑 실타래를 감고 시장안을 누볐던 시장. 사람이 너무 많아 비집고 다녔던 차황 장터. 그때의 차황초등학생 정원이 팔구백명이였고 금호, 황매초교 학생까지 합하면 꽤 많은 인원이였을 성 싶다 그러한 까닭에 시장 안이 좁기는 좁았으리라. ※ 이 : 몸길이 1∼4mm. 몸빛은 담황색 또는 갈색. 흡혈 기생충으로 사람이나 가축의 몸에 붙어살며, 발진 티푸스·재귀열·참호열 등을 옮김. 일생 동안 300알쯤을 낳는다. 약 1주일이면 부화하고 1∼3주일이면 성충이 된다
가끔식 엿장수의 구성진 소리가 들린다. " 자아 뽑으세요... 긴 줄을 뽑으신 분께는 엿 10가닥이 공짭니다" "나까치 나까치 비로꼬 ...' 하며 장돌뱅이들을 불러 모아 엿치기로 유도하였는 데, 중간을 뚝 잘라 구멍이 큰 사람이 승자가 되었고 구멍이 없다거나 하면 그날의 엿판을 몽땅 다 사야하는 낭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장돌뱅이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계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친하게 지내시던 한약방 집에, 아버지께서는 기름집 맞은 편에 있는 중국집(故김중현씨 집)에 계셨는 데 그땐 짜장면 한그릇 먹을려면 쌀 한되를 팔아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엔 특별한 날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음식이였다. 지금도 [옛날 손짜장]이라며 간판이 즐비하지만 화학양념에 찌들지 않던 그 옛날 입맛을 지금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련지...
(당시 짜장면 집에서는 털...금성 라디오 등을 팔았다) 아버지께선 짜장집에서 친구분들과 막걸리를 잡수시고 계셨는 데, 나를 만나면 그리도 반가워 - 뭐 묵을래 ? 뭐 사줄꼬? - 하시며 주머니에서 십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시곤 하였다. 학교 마치고 시장에서 부모님을 못 만나면 그렇게 서운하고 원통할 수 없었다. 이약장수 점포 왼편엔 사잇길이 있는 데 참기름집 가는 길목이다. 참기름집은 연탄집이라고도 하였으며 다과류 잡화 등을 파는 점빵집이였다. 기름집 길건너에는 한약방이였다. 한의사 아저씨 고향이 이북이다 하여 이북쟁이 집' 이라고도 불렀다. 딸만 여섯이다 보니 나를 볼 때 마다 '우리 아들 삼자'고 하셨는 데, 난 그게 싫어서 도망나오기 일쑤였다. 어릴적 기억으로는 아저씨와 큰따님은 멋지게 생겼는 데 아주머니와 그외의 따님의 얼굴과 마주치기가 거북하였던 점과 우리집은 여자형제가 귀해서 도망을 나온 원인이였는지도 모른다. 이약장수 점포의 뒤쪽엔 긴 대청마루 기왓집으로 갓을 쓰신 할아버지들께서
여럿 모인 곳이기도 하였으며, 신수와 점쾌를 보시는 분도 있었고, 시조를 읊는 분도 계셨으며 늘상 술상이 차려져 있어 노인정이 아니였나 싶다. 할아버지는 늘상 이곳에서 뵈었는 데 할아버지가 우리에 들려주시던 [역적 이두병 의형제는 정의의 칼에 죽을거야 !]로 시작한 이야기는 아직도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누나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할아버지가 젤 반겼으나 그 순간부터가 이 옛날 이야기를 서너편씩 서너시간 들어야 하는 고역이였다고 하였다. 옛날 이야기 하시는 도중에 빠져나가기가 상당히 힘들었다고 가끔 애기하기도 한다. 천자문를 못외우면 의례 담뱃대가 휘져어졌던 기억과 산청 향교에서 산청인 유지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면, 유일하게 차황에서는 할아버지만 참석을 하셨는데 손자를 꼭 데리고 가셨던 그 기억과, 그날 밤이면 뭐 좋은 정보가 없나 싶어서 면장님이 우리 집에 아슬렁 오시곤 하였다... 그 대청마루집 아래엔 가끔씩 들러 도장파는 아저씨와 시계를 고치는 아저씨가 있었고, 그 앞 뜰엔 담배를 질끈 깨물은 아저씨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 자아 귀를 막으시고"라는 말과 동시에 펑! 하는 소리가 시장을 뒤엎으면 우리는 수증기가 사라지기 전에 손쌀같이 뻥튀기를 훔쳐 먹곤 하였다.
그 앞엔 지붕을 양철로 씌운 깨끗한 가게인데 한칸씩 나누어 옷이랑 신발을 팔았고 중간 중간 전포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동쪽으로는 싸전이 있었다 돈이래야 쌀.보리를 팔아야 시장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라 제일 먼저 찾던 곳이다 그래선인지 사잇길 양편은 식당이 각각 차지하고 있었고 가끔은 밥상 두드리는 노래소리도 들려오곤 하였다. 아마도 장터식 '니나노'판이 아니였나 싶다. 싸전에서 보면 궁소와 양곡에서 합쳐진 또랑 건너편의 북쪽은 소 시장이다. 소와 돼지 염소 닭이 함께 매매되던 곳인데 특히 단계사람의 닭장수의 장사수단이 특히하였다. 소시장은 남자들이 제일 많이 모이던 장소라 술집도 많았다. 한복을 곱게 입은 아주머니들의 노래소리가 흥겨웁기도 한 모양이였다. (당초 소시장은 현재의 장터다리 위쪽에 있었고 (지금은 농기구수리센터) 이후 부리골 입구로 이전하였으나 이젠 그 흔적이 없어졌다) 싸전에서 서쪽으로 90도 꺽으면 옹기장수와 장롱과 문을 만들던 농방이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두른 대장장이 옆에는 농자재(낫)를 빨리 다듬질 해 주라는 요량으로 풀무질을 대신해 주었고 불꽃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니 신기하여 구경꺼리가 되었다. 그러면 두 대장장이는 박자를 맞춰 ' 땡캉땡캉'소리를 내며 망치질을 하였다. 대장간 옆에는 어류와 어물전이 있어서 갈치를 사 오는 날이면 잔치가 따로 없었다. 양념장을 발라 숯불에 구운 갈치는 대식구인 만큼 중간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 드리고 우리는 한토막씩 배식을 받아 아껴 먹는다고 조금씩 떼어서는 간장에 푹 담궈 먹었었다. 그래야 최소의 양으로 최고의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였다. 어쩌다 김을 사 오시면 한장씩 배식 받은 김을 아껴 먹는다고 약 1~2cm만 떼어다가 간장에 찍어 먹었고, 가로세로 3~5cm 크기로 잘라서는 밥을 말아 먹어야 했으나 밥만 입으로 넣고 김을 아낀다고 입에 넣지 않았던, 그 어물전을 지나면 식당이 두어개 있었는데 그 옆엔 작은 우물이 있었고 우물이 있는 집은 식당으로 작은 사잇길이 나 있어 맷골천으로 가는 길이였다. 지금은 중학교로 가는 사잇길이다. 우물 옆에는 삼천포 할매(금이빨 할매)가 멸치를 팔고 계셨는 데 장날이 아니더라도 동네마다 머리에 이고 다니시다가 우리 집에 자주 들러 점심식사를 하신 기억이 아련한데 인삼장수랑 단짝이였던 것 같았다. 이층집. 차황에서 보기 힘든 이층집으로 농자재와 담배 등을 팔았다. 지게, 바지개, 까꾸리(갈퀴), 쟁기,괭이, 홑개(벼타작하는 기계) 등을 팔았는 데 쓰케토(썰매)를 만들 때 못이랑 철사를 살 때는 이층집에서 구입하였다. 기름집에서도 철물을 팔았으나 이층집에서 더 싸게 팔았기애 우리는 살짜기 이층 집에서 사오기도 하였다. 이층집 우측에는 가끔 냄비와 물동이를 납으로 때우는 장사꾼이 오기도 하였다. 그 당시는 수도시설이 없어서 동네 어귀에 마련한 우물에서 물지게를 지고 날라야 하였기에 어린 아이일 지라도 당연지사 물지게를 지고 정지에 있는 물동이에 물을 채워야만 하였다. [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 ] 하며 부르던 당시의 유행가는 동네 우물은 청춘남녀의 만남이 자연스레 이뤄지는 곳이라 봄에 피는 핑크빛 앵두꽃의 화사함에 비유하였으리라. 또 추석이나 설 일년에 두번만 하는 줄로 알았던 목욕물도 소죽 끓이는 솥에서 해결하였는데 찬물 한동이로 해결을 하여야했고, 이때는 홑이불을 막아서 훔쳐보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시장을 한바퀴 누비고 나니 배도 출출하고... 앞엔 석유를 파는 기름집이요 그 옆엔 국화빵을 굽고 있다. 이제 지게에다 보따리를 짊어지고 막걸리 힘으로 노래를 부를 쯤이면 해는 궁소마을 서산으로 기울고 한 손엔 볏짚새끼로 묶은 갈치와 고등어 두어마리가 출렁인다. 그 시각 우리는 집 앞골목에 서서 기다린다. 아버지가 맛있는 것 사오시나 싶어서... -형님아 !. 뭐 사오실 것 같노? - - 낮에 본깨내(보니) 엿치기 장수가 있던데 엿이랑 건빵 ! - 우리 형제는 입맛을 다시며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고, 추우면 소 죽 끓이는 아궁이에서 손을 녹이며 먼데를 쳐다보곤 하였다. - 숙자야 ! 아부지 왔다 ! - 우리 형제는 5남 1녀인데 외동딸인 누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고 밖에서 일을 마치고 들어 오시면 꼭 세번째인 누나 이름만 불렀으나,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다른 집도 당연히 딸의 이름만 부르며 오시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빈손이시다. 볏짚으로 묶은 갈치는 온데 간데 없고 새끼줄만 달랑 들고 오시는 날이면 밤중이라도 그것을 찾으러 장터쪽으로 석유 남포등을 밝히고 달려 갔었던 기억. 풀을 입히고 다듬이 돌에 두드리고 인두로 주름을 편 두루마기는 쭈글쭈글 막걸리가 튀어 얼룩달룩 때 묻은 옷을 청마루에 벗어던지는 것으로 장날의 하루를 마감하였으리라. 그땐 장 보는 날이 하루의 일과였다. 시부모님을 모시던 며너리는 연배지기나 계모임의 친구분들을 만나 마음껏 놀다 저녁 때가 되어 집으로 갈 즈음이면 동네 사람과 여럿 뭉쳐서 돌아가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차황장터엘 들렸다 몇개되지 않은 점포. 두덕두덕 빈점포를 덮어씌운 천막지가 바람에 날려 황량함이 더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몇분만 보이시고 장돌뱅이는 보이시질 않는다 그래도 손님은 있어 장날이면 가게 문을 열고 한바퀴 돌아 보지 않아도, 저어쪽으로 고개만 돌려도 누가 있는 것 까지 아는 곳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붐비던 장터였는데... 차황에서는 최고의 문화거리(?)였는데... 빈 점포를 휘돌아 나온 찬바람이 나를 스쳐서는 서산으로 기우는 햇볕을 따라 저만치 휘몰아 날아가 버린다. 야속하게 훌쩍 가버린 지나온 시절이 그리워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 [... ...]
이규인
(나 야) 印 차황장터 : 경남 산청군 차황면 소재.
이규인
※본동댁 : 같은 동네에서 같은 동네로 시집간 여자
이가 기생하면 머리가 가렵고 긁으면 습진 등이 생기기 쉽다.
현대식으로 치장한 차황장터
첫댓글 참 아련한 기억이네요 이렇게 멋진 추억을 기억해 좋은 글을 남긴 후배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