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임금은 되었지만..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빚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충신으로 추앙받는 분들은 많다. 백제의 성충이나 계백,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사육신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대의 대학자나 고관으로서 나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이들이다. 또한 그들의 계획(신라군의 방어, 이성계 축출, 단종 복위 등)이 성공하면 응분의 보상을 기대할 수도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두문동칠십이현은 나라의 고관도 아니었고, 무엇을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유학을 배운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신념과 배운 바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을 버렸고,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충절을 지킨 분들이다.
고려에 대한 신의를 지키던 유신들은 대개 고려 멸망 전에 두문동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이성계(李成桂)의 등극을 반대하다 살해되기도 되었고, 또는 향리에 은거하기도 했다. 그들 중에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을 72현이라고 지칭하는데, 그들 전부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은 아니다. 두문동에서 나와 향리에 은거하거나, 이성계의 간곡한 부탁으로 조선에 출사한 사람도 있다. 그 대표적이 사람이 황희 정승일 것이다.
우리가 황희정승을 변절자 인 냥 아는 이가 있지마는 기실은 그렇지 않다.
황희는 변절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재주를 아낀 동료들이 세상에 남아서 가지고 있는 재능을 세상을 위해 쓰라고 권유했고, 그는 거기에 떠밀려 나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선 왕조의 신하가 된 황희는 조선 역사 5백년 동안 대표적인 청백리이자 세종 임금 때의 황금시대를 연 최고의 영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 역시 황희가 지니고 있었을 두문동의 정신을 다른 의미로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대표적인 인물 3隱(은)만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3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본관 연일(延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야은(冶隱) 길재
본관 해평(海平). 자 재부(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목은 이색
고려 (충숙왕15-태조5) 문신, 학자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한 고려말 문신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ㆍ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ㆍ지공부사(知工部事)ㆍ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ㆍ지병부사(知兵部事)ㆍ우대언ㆍ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ㆍ동지춘추관사ㆍ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ㆍ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ㆍ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이23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ㆍ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그는 원ㆍ명교체기에 있어서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말 신유학의 수용과 척불론의 대두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ㆍ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王建)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여부로 판단하는 인간중심, 즉 성인ㆍ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ㆍ김종직(金宗直)ㆍ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세분의 고향이 모두 경상도다.(포은은 영천사람이고, 이색은 영덕. 야은은 구미사람이다.)
고려말 성리학의 줄기가 이색-정몽주-길재-양촌 권근- 점필재 김종직- 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학맥을 이루었다.
*조선 초기는 아무래도 고려의 충신열사들을 조금 이해를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선초에는 고려 사람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물은 제도개혁이 된다고는 하지만 거의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