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산면 (靑山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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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사랑 >청산소개 >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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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은 원래 신라(新羅) 초에는 굴산현 (屈山縣)이었는데, 제35대 경덕왕 (景德王) 16년(757년)에 삼국을 통일한 후 기산현 (耆山縣)이라 고치고, 삼년산군 (三年山郡 : 현 보은군) 영역 (領域)으로 하였다.
고려 (高麗) 현종 (顯宗) 9년(1018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청산현 (靑山縣)으로 고치고 경상도 상주목 (尙州牧)의 직속으로 하였다. 조선 태종(太宗) 13년(1413년)에 행정구역제도가 일대 개편될 때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되면서 충청도의 10현(十縣)중의 하나인 청산현이 되고, 현감 (縣監)으로 종6품 (從六品)과 향교(鄕校)에서 가르치는 훈도 (訓導)로 종9품이 각각 배치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태종 14년 (1414년)에 황간현 (黃澗縣)과 폐치 분합되면서 황청현 (黃靑縣)이라 고친후 청산현감을 두고, 상주 (尙州)의 주성부곡 (酒城副曲)을 청산에 부속시케게 되었다.
1739년에 발행된 여지도서 (與地圖書)에는 청산현에 북면(北面), 동면(東面), 현내면(縣內面)과 남면(南面), 서면(西面), 주성면(酒城面) 등 6개면(面)이 있었으며, 현 청산면 관내인 북면에는 장연동리(長連洞里), 만월리(萬月里), 대사전리(大寺田里), 예곡리(藝谷里) 등 4개리 262호(戶)에서 15세 이상된 사람이 1,281명이 살았고, 동면(東面)에는 가지리(加旨里), 효림리(孝林里), 인정리(仁政里) 등 3개리(里) 262호에서 15세 이상된 사람이 1,281명이 살았다. 그리고 청산현의 소재지인 현내면은 백운동리(白雲洞里), 저전리(楮田里), 하동리(下洞里), 장위리(長位里) 등 4개리 479호에서 15세 이상된 사람이 2,209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 청산현이 청산군(靑山郡)으로 잠시 승격되어, 군청이 있다하여 군내면이라 하여 평상, 교동,백운, 상지전, 하지전, 하동, 천서, 자매, 학촌, 신평, 덕곡, 대사, 장위 등 13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군내면과 동면의 가지, 의동, 한곡, 효림, 목동, 판수, 인정의 7개리와 북면의 내례곡, 외례곡, 가삼, 사방, 명월, 척치, 법곡, 화동, 성촌, 대사전, 월남, 상만월, 하만월 등 13개 동리와 군내면의 국화동을 병합하여 청산군의 이름을 따서 청산면이라 하여 옥천군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산면의 행정구역은 백운리, 지전리, 교평리, 하서리, 신매리, 대덕리, 장위리, 한곡리, 인정리, 판수리, 효목리, 의지리, 예곡리, 삼방리, 명치리, 법화리, 대성리, 만월리 등 18개리, 3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산면의 면적은 77.5km이며 군내에서 가장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의 동(東)은 경북 상주군 모서면에, 서(西)는 청성면에, 남(南)은 영동군 용산면에, 북(北)은 보은군 마로면에 각각 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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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자료]
-충청북도 (忠淸北道)
-옥천군 (沃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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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면 (邑面) 명칭의 변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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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郡) 읍면 (邑面)의 지명은 한자 (漢字)가 들어온 때 부터로 신라 (新羅) 제35대 경덕왕 (景德王) 16년(757년)에 삼국을 통일한 후 종래의 각각 다른 문자가 순 한자어화 (漢字語化) 됨에 따라 군현 (郡縣)의 이름은 물론 읍면등 주요 지명을 고유어의 2~3자 씩에서 일제히 한자의 두자 지명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이때에 한자로 고치면서 발음대로 썼거나, 그 글의 뜻을 새겨 이름을 지었다.
고려 때에 와서 삼국사기 (三國史記), 고려사지리지 (高麗史地理志) 간행때에 새로운 지명이 수록되었고 지명끝에 ~川 (천) 또는 ~山 (산)자가 많이 든 지명을 ~州 (주)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太祖)때에 지명 끝자가 ~州 (주)로 된 지명을 ~山 (산) 또는 ~川 (천)으로 다시 환원하였으며,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의 간행때에 지명을 많이 바꾸었다.
일제수난기에는 창씨 (創氏) 개명 (改名)과 함께 일본들의 사용에 편리하도록 변질된 지명이 많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많은 곳에 합성지명 (合成地名)이 많이 생기었다.
■ 고장의 來歷
○ 신라 경덕왕 3년 (서기 1009) 보은(報恩) 領域에 屬 ○ 고려초 共讓王 2년 (서기 1310) 경상도 상주에 屬 ○ 조선 태종 3년 (서기 1403) 縣務를 두다 ○ 조선 태종 13년 (서기 1413) 충청도에 屬 ○ 조선 태종 14년 (서기 1414) 黃靑縣 (황간과 합) ○ 조선 고종 32년 (서기 1893) 靑山縣 ○ 서기 1914. 3. 1 沃川郡을 합병되고 靑山面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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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장의 내역 - 위치 - 기본현황 . 면적 . 인구 .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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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 인접도군 : 1道, 3郡, 7面
- 군청소재지로부터 동남방향 39.2km 지점 위치 - 도청소재지로부터 남방향 87.0km 지점 위치 - 동쪽은 경상북도 상주군 (化東面, 牟西面) - 서쪽은 충청북도 옥천군 (靑城面) - 남쪽은 충청북도 영동군 (龍山面) - 북쪽은 충청북도 보은군 (三升面, 炭釜面, 馬老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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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특성
- 옥천군 동부지역 . 청산 → 청주간 87 km . 청산 → 옥천간 39.2 km . 청산 → 보은간 24 km . 청산 → 영동간 25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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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 → 청주간 87 km (1시간 30분) . 청산 → 옥천간 39.2 km (50분) . 청산 → 보은간 24 km (30분) . 청산 → 영동간 25 km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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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향교 1)
(청산향교 2)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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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忠北 有形文化財) ¤ 지정번호 : 제98호 ¤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269번지 ¤ 창 건 : 1398년 (조선 태조 7년) ¤ 수 량 : 4동 ¤ 지정일 : 1981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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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향교(靑山鄕校)는 1398년 태조(太祖) 7년에 창건(創建) 하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자 1602년 선조(宣祖) 35년 백운동(白雲洞)에 재건한 것을 1654년 효종(孝宗) 5년에 지금의 교평리로 이전하였으며 1777년 정조(正祖) 1년과 1848년 헌종(憲宗) 14년에 중수(重修)한 바 있다. 1979년 대성전·내삼문·명륜당을 해체 보수하고 전면의 담장 일부를 신설하였다.
이 향교의 건물배치는 제일 앞에는 강당인 명륜당, 다음이 유생(儒生)들이 거쳐하는 서재(西齋) 맨 안쪽에 내삼문(內三門)을 통하여 들어가면 문묘(文廟)인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명륜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며, 대성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단층 목조기와집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主享)하고 그 양편에 사성을 배향하였고 옥천향교와 달리 동서무(東西무)가 없기 때문에 내성전안 동편에다 송나라 여섯명의 성현중에서 주돈이, 정이 그리고 우리나라 성현 설총, 안유,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을 서편에는 송나라의 정호, 주희 두성현과 우리나라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흔, 조헌, 송시열, 박세채 등 18성현을 같이 모시고 있으며 청산, 청성면 유림들이 매년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처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있다
관성동호회의 유적지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대성전의 기단은 사찰의 탑 부재로 보이는데, 현재 향교에서 500m 뒷편에 절골이 있고, 이곳 절터에서 고려때의 많은 기와편이 나을 뿐 아니라 대성전의 좌측 계단석에 사용한 돌이, 문주초석으로 보이며, 여기에 크기나 깊이가 같은 점으로 보아 이곳 절터에 있던 탑을 옮겨 향교의 대성전 뜰을 만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태종(太宗) 13년(1413년)에 행정구역제도가 일대 개편될 때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되면서 충청도의 10현(十縣)중의 하나인 청산현이 되면서 향교(鄕校)에서 가르치는 훈도 (訓導)로 종9품이 배치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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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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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ㅣ 문묘 ㅣ명륜당 ㅣ대성전 |
【 선돌 (立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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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 충북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 형 식 : 남성형 선돌 ¤ 재 료 : 거정편마암 (巨晶片磨岩) ¤ 규 모 : 길이 305cm, 폭 170cm, 두께 2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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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하서리 본마을 입구 교량 옆에 서 있는 이 선돌은 그 규모로는 군내에서 가장 크다고 볼 수 있고, 윗부분을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손질된 것으로 보아 숫선돌임을 알 수 있다.
당초 이 선돌은 현위치에서 20m 떨어진 큰 나무 밑에 위치하여 있었으나, 남해~원주선 국도 확장포장시에 현위치로 옮겨 세우고 바닥을 콘크리트로 견고히 하였다.
몇 년전까지만 하여도 마을에서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 선돌을 신성시하여 이곳을 더럽히거나 짐승을 매면 큰 해를 받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관리를 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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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1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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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정수장 앞 ¤ 형 식 : 남방식 (南方式) ¤ 재 료 : 거정화강암 (巨晶花崗岩) ¤ 규 모 : 길이 330cm, 폭 200cm, 두께 60cm ¤ 시 대 : 청동기 시대 (靑銅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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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인돌은 청산면 교평리 정수장 앞에 세 개의 고인돌이 나란히 있는 것중의 하나로서 그 규모가 아주 크다는데 특징이 있다. 이 주변이 작은 능선(稜線)이 뻗어 내려와 남향을 한 끝부분에 양지바른 택지로는 아주 양호한 곳이기 때문에 한곳에 나란히 세 개의 고인돌을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인돌 주변이 경작지임으로 경작을 하기 위하여 밭 경계로 조금씩 밀어내지 않았나 의심이 간다.
그 이유로는 고인돌의 개석(蓋石)이 반듯하게 놓여있지 않고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윗면에는 편평하지 않고 약간 둥글 게 되어 있고 작은 구멍을 2개 파 놓았다. 그리고 머리부분은 방위 90도인 正東을 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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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2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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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정수장 앞 ¤ 형 식 : 남방식 (南方式) ¤ 재 료 : 거정화강암 (巨晶花崗岩) ¤ 규 모 : 길이 270cm, 폭 168cm, 두께 63cm ¤ 시 대 : 청동기 시대 (靑銅器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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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인돌은 청산면 교평리 정수장 앞에 세 개의 고인돌이 나란히 있는 것중의 하나로서 그 규모가 아주 크다는데 특징이 있다. 이 주변이 작은 능선(稜線)이 뻗어 내려와 남향을 한 끝부분에 양지바른 택지로는 아주 양호한 곳이기 때문에 한곳에 나란히 세 개의 고인돌을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인돌 주변이 경작지임으로 경작을 하기 위하여 밭 경계로 조금씩 밀어내지 않았나 의심이 간다.
그 이유로는 고인돌의 개석(蓋石)이 반듯하게 놓여있지 않고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윗면에는 편평하지 않고 약간 둥글 게 되어 있고 작은 구멍을 2개 파 놓았다. 그리고 머리부분은 방위 90도인 正東을 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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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3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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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정수장 앞 ¤ 형 식 : 남방식 (南方式) ¤ 재 료 : 거정화강암 (巨晶花崗岩) ¤ 규 모 : 길이 300cm, 폭 217cm, 두께 35cm ¤ 시 대 : 청동기 시대 (靑銅器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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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인돌은 교평리 2호 고인돌과 10m 떨어진 언덕 토락지(土落地) 밑에 위치한 것으로 타원형에 가까운 개석(蓋石)을 별로 손질없이 갖다 놓은 돌로써 반쯤은 땅에 묻혀 있다.
현재 위치로 보아 언덕위에 있던 고인돌이 언덕이 무너지면서 현위치로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여져 원형이 많이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없겠다. 그 이유로는 현재 놓여 있는 위치가 3m 정도의 허물어진 언덕밑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찾아진 고인돌은 그 앉은 자리가 양지 바르고 햇빛이 잘 들며 배수가 잘되는 능선을 택하였는데, 이곳만이 언덕밑이라는 것이 수긍이 가지 않고 또 뒤가 허물어져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밑으로 내려 앉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석(蓋石)위에는 지름이 7cm 되는 큰 구멍을 파놓아 고인돌임을 말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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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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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향교 뒤 ¤ 형 식 : 남방식 (南方式) ¤ 재 료 : 거정화강암 (巨晶花崗岩) ¤ 규 모 : 길이 191cm, 폭 130cm, 두께 45cm ¤ 시 대 : 청동기 시대 (靑銅器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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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향교 바로 뒤 작은 산에 위치한 이 고인돌은 교평 1,2,3 호 고인돌과는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이 능선으로 뻗어 내려 온 끝에는 청산향교를 지었고 능선의 정상에 이 고인돌이 있으며, 능선 전부를 밭으로 개간하여 경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위치가 약간 변경된 듯 20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그 형태는 앞이 조금 나온 오각형의 개석 앞 부분은 손질을 하여 거북이 모양을 만들었다. 그 부근에는 깨어진 화강암 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인돌을 깨어다 쓰고 남은 돌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 고인돌은 방위 125도로 南東을 향하고 있으며 이쪽은 보청천이 흐르고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모든 점으로 볼 때 고인돌은 그 모양이 거북이 모양을 항고 있으며 그 머리는 正東을 향하지 않고 거의 江과 河川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옛부터 오래사는 거북이를 靈物스러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며, 또 그 머리가 물쪽을 향하고 있는 것과는 무슨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임으로 이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
영신사(迎神寺)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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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청산면 장위리 (長位里) 영신(迎神)이 마을 뒤쪽 능선에 수천평의 밭이 있고, 20년전만하여도 이 밭가운데 탑(塔)의 일부와 많은 기와조각들이 밭가에 쌓여 있었다.
옛 기록에 절 이름이나 창폐(創廢)에 관한 것은 없으나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을 영신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은 영신사가 아니였나 추정할 수밖에 없겠고, 탑의 부재나 기와 조각들로 보아 고려때 세워진 절임을 알 수 있다. 기와 조각이 수습되던 지역은 500여평이나 되며, 현재 남아 있는 탑부재는 옥신석(屋身石) 1개와 옥개석(屋蓋石) 1개만이 있는데 옥신석에는 전후면의 양쪽에 기둥을 만들고 가운데에 좌불상을 양각하였다
현재 탑부재의 높이는 38cm이고 폭 53cm로 삼층탑 내지는 5층석탑의 부재로 보이며, 절터의 규모 등을 종합하여 볼 때 대가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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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淸凉寺)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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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청산면 삼방리 장노골 앞 천금산(千金山) 골작 2km를 올라가면 좀 넓게 벌어진 분지 같은 곳에 1,000여평 되는 논과 밭이 있고 300여평의 절터가 있다.
이 절은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에 "청량사"는 천둔산에 있다 (淸凉寺在 千芚山) 라 기록됐으며 "천둔산은 청산현 동쪽 십오리에 있다" 라 기록되어 현재의 천금산이 옛날에는 천둔산(千芚山)으로 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절 이름은 기록에 있어 알 수 있으나 창폐 연대는 알길이 없고 다만 이곳에 산재되어 있는 기와 조각과 논뒤에 방치되어 있는 탑부재로 보아 조선초에 절을 지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탑부재는 3층석탑인 듯하나 몇 개의 옥신석과 옥개석뿐으로 규모 등은 알 수 없다. 절터에서 오른쪽 산중복 50m 지점에는 부도(浮屠)만 남아 있고 옥개석과 상륜부는 찾을 길이 없다.
이런 모든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 불교탄압정책에 의하여 이와 같이 해발 700m나 되고 2km나 되는 깊은 심산유곡에 절을 지은 것으로 볼 수 있겠으며, 절터나 유물로 보아 규믄 비교적 큰 가람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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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암(日出菴)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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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청산면 삼방리 장노골 천금산(千金山) 안에 청량사(淸凉寺) 와 한 계곡 안에 나란히 있는 이 절터는 여지도서에서 "일출암은 천둔산에 있고 암자 동쪽에 송대가 있는데 가뭄을 만나면 기우제를 지낸다" 라 기재되어 있다.
일출암은 청량사에서 남서쪽으로 계곡을 300m쯤 더 올라가면 100여평의 절터가 있고, 그 뒤산을 가리켜 일출봉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일출봉 아래 "용짓날"이라 부르는 능선이 내려와 있으며, 이 "용짓날" 아래 바위가 넓게 깔려 있고 작은 소(沼)가 있어, 이 곳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무이 마르지 않아, 이 곳 청산에서는 기우제단(祈雨祭檀)으로 삼아 옛부터 비만 오지 않으면 면장을 제주(祭主)로 하여 기우제를 지내는데 近年에 까지 행하고 있다.
이곳 절터는 유물도 없고 옛 기록에 절 이름만 알뿐 창폐년도를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수습되는 기와조각들로 미루어 보아 청량사와 함께 조선초에 지었다가 운명을 같이 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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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일암(忘日菴)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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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마을 뒤 우뚝 솟은 덕의봉 중턱에 100여평 되는 망일암 절터가 있는 바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에 다같이 "망일암은 덕의산에 있다" 라 기록되어 있어 절 이름은 알 수 있으나 이 절이 언제 생기어 언제 없어진 것인가를 알 없다.
이 절터 밑에는 백운암이 자리하고 있어 절터 부근에서 가끔 수습되는 기와 조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여, 고려시대 불교의 전성기에 지었다가 조선시대에 없어진 것이 아닌가 보아진다.
이 절터의 뒤로는 층암절벽을 이루고 있고,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청산의 조망은 가히 장관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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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평리(校平里)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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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마을 뒷편 500m 지점 1,000여평되는 절터가 있는 바,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절골"이라 하나 옛기록이 없어 절의 이름이나 절의 창폐년대를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과 절에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문주초석(門柱礎石)으로 보아 고려의 불교 전성기에 대가람을 지었다가 조선초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헐려 버린 것으로 추정이 간다.
그 이유로는 현재 청산향교 대성전 뜰의 기단석과 계단석은 아주 큰 탑을 헐러다 쌓은 것으로 그 탑의 원래 위치가 어디였을까를 찾던 중 이 향교로부터 500m 북동쪽이 절터에서 옮겨 왔음을 확인하였다. 그 증거로 청산향교 대성전의 좌측 계단석 맨 아래 돌이 지름 14cm,깊이 16cm의 구멍이 파여 있는 문주초석으로 보이는 돌이 놓여 있고, 교평리 절골의 절터밭 뒷둑에 버려진 기이 70cm, 넓이 53cm, 높이 43cm 의 돌에도 똑같은 지름 14cm, 깊이16cm의 구멍이 파여있어 두 개가 똑같은 화석으로 볼 수 있겠다. 또 2개의 문주초석을 네모반듯한 돌을 대성전에 옮겨다 사용을 하고, 둥글고 쓸모가 없는 이 돌은 버리어 밭가에 나 딩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성전 뜰의 기단석은 그 길이가 2m를 넘고 수량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주 큰 5층석탑으로 추정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점을 볼 때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의 여파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한눈에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현재 절터에는 밭으로 경작을 하고 있어 그외의 유물은 찾을 수 없으나 소재지로부터 멀지 않은 얕으막한 능선밑에 남동을 향하여 세워졌을 이 가람은 군내에서도 가장 큰 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망일효종 (望日曉鐘)
망일암(望日庵)의 새벽 종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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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리 뒷산 덕의산 (德義山) 중턱에는 유명한 사찰인 망일암이 있어 청산면을 굽어보는 자리에 터를 잡아 몇 백년을 하루같이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는 모든 중생에게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뜻을 널리 전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 숭엄한 광경을 찾을 길 없고 망일암 폐허는 잡초만이 우거져 있어 그 옛날의 종소리는 들을 길이 없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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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귀학 (白雲歸鶴)
백운리에 돌아오는 백학군 (白鶴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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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리 뒷산 덕의산 (德義山) 의 울창한 수림에 사는 수백마리의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어 석양을 받으며 제 집을 찾아들기 위해 온통 하늘을 뒤덮고 몇 차례씩 공중을 선회하다 서서히 내려앉는 모습은 흰구름이 천 만 파편이 되어 떨어지는 듯 또는 흰눈이 퍼 붓는 듯 하더니 어느덧 낙랑장송(落落長松)에는 흰눈이 덮힌 듯 새하얗게 만든다.
그러나 이 아름답던 광경도 옛 이야기가 되었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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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전세우 (芝田細雨)
보청청 잔디밭에 내리는 이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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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전리 앞 보청천의 길게 뻗은 제방에 잇다른 잔디밭에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비는 보얗게 방울되어 튀어오르고 잔디와 파란싹은 더 한층 초록빛 무지개를 곱다랗게 그려 놓는다.
이 신성스러우리 만큼 진기한 이 풍치에는 지나는 행인의 바쁜 걸음도 멈추게 할 뿐 아니라 선남선녀의 밀회 때에는 이 광경에 도취되어 옷 젖는 줄을 모르고 넋을 잃고 서 있게 마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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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모연 (紫霞暮烟)
하서리(下西里) 자하동의 저녁짓는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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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의산 (德義山)을 뒤에 담장으로 두르고 있는 하서리 자하동 마을 백여호 농가에서는 저녁 노을이 질 때가 되면 집집마다 저녁을 짓는 연기가 덕의산 정상을 향해 줄지어 뻗어 올라가고 있다. 평화롧게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에 오색이 영롱한 저녁노을까지 펼쳐지면 한폭의 그림이며 농가의 풍요를 자랑하는 농촌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는 나무로 밥을 짓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평화로운 모습은 볼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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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정어화 (鶴汀漁火)
고학정보(孤鶴汀洑)의 밤고기 잡는 불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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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리 앞에 있는 고학정보 안에는 무이 깊어 피라미, 마주, 메기 등 많은 고기가 사식하고 있어 낮에는 큰 버드나무 밑에서 천렵(川獵)군이 고기잡아 생선국수로 포식을 하고 밤에는 광솔에 불을 붙혀 어린 증은 얕은 곳에서 마주 등 작은 고기를 잡고, 어른들은 작은 배를 띄워 깊은 곳에 들어가 메기 등 큰 고기를 잡아 올린다.
광솔불은 물속에서도 비추어 물 위에 불인지 물속의 불인지 분간 할 수 없게 찬란한 꽃밭을 이루어 장관을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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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포청풍 (竹浦淸風)
죽포 대나무 밭에 부는 맑은 바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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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리 죽포동(竹浦洞)은 보청천 연변에 있는 대나무가 많은 갯마을로 죽림을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기 이를데 없다. 특히 빼곡히 들어선 대 밭에는 솔솔 바람에 서로 몸을 비비며 바스락대는 그 소리는 더욱 시원스럽게 한다.
죽림(竹林)이 청풍(靑風)을 끌어들이는지 청풍이 죽림을 찾아드는지 보는이의 몸과 마음을 맑고 시원하게 하여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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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항월 (鳳坮沆月)
봉황대 (鳳凰坮)의 깊은 달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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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리의 봉황대 절벽 밑에는 수십길이나 되는 봉황소가 있고 이 물 위에 비친 십오야 (十五夜) 쟁반같이 둥근 달은 수중명월이라 이를 내려보고 있던 시인 무객들은 시(詩) 한수를 읊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봉황대에 앉아 수 한잔을 곁들이면 그 흥취와 경관은 더할 나위가 없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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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령비폭 (葛嶺飛瀑)
갈전 (曷田) 고개의 폭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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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평리 뒷산 도독봉(道德峰)의 갈전(葛田) 고개를 한참 오르다 보면 비탈길 옆 계곡에 있는 이 폭포는 30여척의 층암 절벽에 있다. 이 계곡 전체는 험준한 바위로 형성되어 있어 이 폭포에 접근하기가 어려워 고개마루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먼 발취에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시원스럽기 그지없고 심장이 약한 사람은 무서워 소름까지 끼고 간장을 서늘케하는 웅장하고 장엄한 경관을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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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화신 문 바위와 장수발자국
[문 바위] 전설에는 문바위에 장수발자국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이 문바위에서 300 미터 정도를 더 올라가야 장수 발자국 바위가 있다.
사진의 고목은 문 바위에 있는 수령 150년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이다.
반석위의 장수발자국 흔적
느티나무와 넓은 반석
반석위에서 내려다본 문바위 저수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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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십리쯤 가면 한곡리(閑谷里)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에 문바위라 부르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위에는 장수 발자국이라 부르는 몇 개의 우묵한 자취와 그 옆에는 사람 모양을한 두 개의 바위가 서 있다.
아득한 옛날 하늘에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천국이 있었다. 매우 평화로운 천국의 옥황상제는 두 공주를 두었고 황후는 마침 아기를 잉태 하고 있었다. 천국에는 갖가지 진기한 보물도 많고 기이한 꽃이 피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가득하였다.
그 중에서 계수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 나무에 꽃이 피면 계화처럼 아름다운 공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 후 황후는 공주를 낳고 이름을 계화(桂花)라 했는데 이때 천국 재상이 웅인(雄人)이란 이름을 가진 귀여운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남다른 바가 많았다.
계화공주는 항상 웅인과 더불어 놀았으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웅인은 매우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혜있는 총명한 총각이 되었고, 계화 동주도 활짝 핀 계화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처녀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때 또다른 천국의 대신 한명이 계화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자신이 임금과 사돈이 되어 권세를 잡고자 하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과 힘을 합쳐서 착한 재상 웅인의 아버지를 모함하여 급기야는 반역죄인으로 몰아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게 하였다.
옥황상제는 웅인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벌주기 위하여 인간 세상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그 때 옥황상제는 웅인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특히 이르되 "너의 무용은 인간세상에서는 당할자가 없을 것이니 천국에 오를 때까지는 절대로 무술을 쓰지 말라"하고 명하였다.
계화 공주는 웅인이 떠난뒤 병이 들어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공주를 사흘동안만 인간세상을 다녀오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계화공주는 웅인을 찾았지만 그가 청산면 찬곡리 뒷산 기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이 동네에 큰 괴물이 나타나서 가축을 닥치는 대로 잡아 가고 사람도 함부로 해치는 일이 생겼다. 이 괴물의 횡포를 보다못해 웅인은 옥황상제의 특명은 있었지만 자신의 무술로 이 괴물을 때려잡으려 했다.
웅인을 당해낼 수 없음을 안 괴물은 도술을 써서 개구리가 되어 바위 밑으로 기어 들어가고 웅인도 도술로 뱀이 되어 뒤쫓았고, 괴물이 새가 되어 나르면 웅인은 매가 되어 쫓았으며, 마침내 지네로 몸바꿈한 괴물은 문바위 속에 있는 제집으로 기어들어갔다. 지칠대로 지친 웅인은 그 바위 위에 올라앓아서 괴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몰래 도망치려던 괴물 지네를 발견한 웅인은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지네를 두 동강이 내고 말았다. 그러나 이 치열한 싸움에서 웅인도 온몸이 피투청이가 되고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웅인을 찾고자 천하를 헤매던 공주는 인간세상에 내려온지 사흘째 되는 날 마침내 이곳 한곡리에 도착하였다. 괴물과 더불어 싸우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공주는 허겁지겁 산으로 을라갔으나 피가 낭자한 현장에 당도하여 보니 괴물은 두동강이 나서 죽어 있고 웅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웅인을 꼭 닮은 바위가 하나 근심스러히 서 있을 뿐이었다.
웅인은 옥황상제의 특명을 어긴 죄로 하나의 바윗돌로 변하고 말았고 공주도 옥황상제에게 부탁하여 바위로 되었는데 지금도 괴물의 돌문이 있었다는 문바위 위에는 계화공주의 눈물자국이 남아 있고 괴물과 싸울때 남긴 웅인의 발자국이 있으며 이 바위옆에는 웅인과 공주가 변하여 되었다는 바위 두 개가 우뚝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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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명 : 충혼탑
¤ 위 치 : 청산면 인정리 국화동 용머리 바위
¤ 건립문 이 탑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고귀한 피로써 나라를 지키시다 돌아가신 고 중령 장영진회 131명의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우리 청산 6,000여 주민들의 혼과 정성을 담아 성금을 모으고 옥천군의 협조를 받아 이곳 국화동 용머리 바위 반석위에 건립하다.
우리모두 유명을 달리하신 호국영령들의 넋을 참되고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하고 영원히 지키며 길이길이 보전할지어다.
1997.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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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혼탑 시문
고귀한 피로써 나라와 겨례를 지키신 우리 고을의 호국 열령 모두를 이곳에 모시오니 고이 잠드소서
님들은 조국과 민족이 위태로울 때마다 용감한 선봉장이 되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셨습니다.
아 !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있사오리까 ?
님들의 높은 뜻을 오래 기리면서 후세에 전하고자 우리 면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노라
1997. 10.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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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강 (朴文綱) 충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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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청산면 예곡리 하예곡 마을 앞에 있는 충신문은 병자호란 때의 충신이었으나 벼슬이 낮아 200년이 가깝도록 그 공적이 묻혀 지내다가 1812년에야 업적이 밝혀져 같은 해 순조(12년) 께서 충신으로 정려하여 목와조익공(木瓦造翼工) 집 두 평으로 지어 상산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박문강 충신은 1636년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종6품인 훈련원주부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청군이 몰려오자 다들 혼비백산 달아났으나 박충신 만은 춥고 무서운 혼란중에서 끝까지 명령을 지키고, 청군과 대항하여 최후까지 사수하다 장열히 순절하여 뒤늦게 나마 그의 충신문에 다음과 같은 편액이 걸려 후손들이 떳떳하게 되었다.
"贈宣務郞軍資監主簿行宣略將軍訓鍊院主簿朴文綱之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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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방법 】 민물고기를 손질하여 중불로 4∼5시간 폭 고은 다음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오면 그 국물에 고추장을 풀어 간을 맞추고 국수를 넣어 삶은 다음 파, 애호박, 깻잎, 미나리, 풋고추를 곁들여 먹는 음식으로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그만이다. 생선국수는 칼슘과 비타민이 풍부하여 성장기 어린이, 노약자에게 매우 좋은 먹거리다.
【 찾아오실 곳 】
☞ 선 광 집 : 043-732-8404 ☞ 금강식당 : 043-732-8083 ☞ 청양회관 : 043-732-8163 ☞ 찐한식당 : 043-732-3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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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소명 : 선광집 ○ 위 치 : 지전리 (정류장 근처) ○ 메 뉴 : 생선국수, 생선튀김, 도리뱅뱅 ○ 맛자랑 멋자랑 - 향토음식 지정업소 - 한국관광공사 추천업소 - KBS, MBC, SBS TV 소개업소
○ 전화번호 : 043-732-84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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