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제강점기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의 9월에 조선총독부관제 및 조선총독부지방관제가 공포되었으나 조선후기의 지방관제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러나 그후 일본인들의 조선진출이 늘어나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일본식 지명표기방식의 강행에 따라 수성지역도 영역의 변화를 일으키는 등 많은 영향을 받게되었다. 일제의 첫 관제(官制)공포에서 대구군은 대구부(府)로 바뀌었고 29개면,260개동으로 구성되었는데 수성지역의 면과 동은 다음과같다. *수북면=범어동(泛魚洞)소계동(小溪洞)황청동(黃靑洞)지계동(支界洞)만촌동(晩村洞)검정동(檢汀洞)효목동(孝睦洞)*수동면=두산돈(斗山洞)지산동(池山洞)범물동(凡勿洞)*수현내면=상동(上洞)중동(中洞)하동(下洞)신동(新洞)*하수남면=흥덕동(興德洞)퇴계동(退溪洞)신전동(薪田洞)행정동(杏亭洞)전평동(錢平洞)창산동(昌山洞)박곡동(朴谷洞)상원동(上院洞)단산동(丹山洞)대일동(大逸洞)중촌(中村)상촌(上村)냉천동(冷泉洞)대천동(大川洞)*상수남면=내주동(內蛛洞)외주동(外蛛洞)하주동(下蛛洞)상백동(上白洞)하백동(下白洞)우록동(友鹿洞)녹문동(鹿門洞)금동(金洞)옥분동(玉盆洞)단양동(丹陽洞)*상수서면=정대동(亭垈洞)대암동(大岩洞)매계동(梅溪洞)양오동(陽梧洞)음오동(陰梧洞)용계동(龍溪洞)파남동(巴南洞)파북동(巴北洞)봉산동(鳳山洞)덕산동(德山洞)대명동(大明洞)검암동(檢岩洞)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1년 11월에는 대구지역의 도심권인 동상면과 서상면을 폐지하고 새로 대구면을 설치하는 한편 일차로 대구면의 각 동명을 통(通),정(町),정목(丁目) 따위의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다시 1914년 3월에 새로운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대구부의 행정구역을 대구면만으로 축소하고 나머지 지역의 27개면은 달성군(達城郡)을 신설해 관할케했다. 이는 한국을 일본화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당시의 재정에 맞춰 수탈의 거점을 도심에 두고 일본인 중심의 시가지에 도시시설을 집중하기위해 일차적으로 권역을 축소한뒤 도시계흭을 수립실행했던 것이라할 수 있다. 이에따라 수성지역은 경산군에 속한 고산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달성군에 편입되었고 1938년까지 그같은 상태가 지속되었다. 다만 1917년 4월에 달성군에 속해있던 수성지역의 일부 동을 묶어 수성면(壽城面)을 신설하고 수성면 봉덕동의 일부와 대명동의 일부가 대봉동(大鳳洞)이 되어 대구부에 편입되는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1938년 10월에는 일제의 침탈이 심화되면서 일인들의 대구진출인구가 늘어났고 도시의인구 흡인에 따른 지방인구유입의 증가와 함께 수탈재정이 증가함에 따라 대구부역의 확장 필요성이 높아져 인접 달성군의 일부 지역을 편입시켰다. 수성면 소속 14개동과 성북면 일부,달서면 일부를 수용한 것이다. 당시 편입된 수성면의 동(洞)은 중동,하동,신천동,신암동,효목동,만촌동,범어동,황청동,지산동,범물동,두산동,상동,봉덕동,대명동 등이다.
한편 일제의 한반도 식량기지화 정책과 더불어 강행된 산미증산계획(産米增産計劃)에 따라 1924년5월 평야지대인 달성군 수성면에 370정보의 몽리면적을 대상으로 대구지역에서 가장 먼저 수성수리조합이 만들어졌다. 이와 더불어 식민 수탈정책에 의한 농민들의 궁핍화로 수성지역에서 가장 먼저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1922년 7월 달성군 가창면의 소작농민들은 부당하게 소작권을 박탈하는 지주와 마름의 횡포에 항거하여 단결을 통해 소작권 박탈조치를 무시하고 원소작인이 소작지에 모내기를 강행하여 소작권확보에 성공하는 쾌거를 보이기도했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극도에 이르면서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 생산에 필요한 광산자원확보에 나섰다. 이 때 수성지역에도 달성군 가창지역에 동광,텅스텐광을 개발해 건국후에까지 계속됐다.
일제하의 교육기관은 수성지역의 경우 1921년 최초로 대구수성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에 앞서 대구공립농림학교가 현재의 동인동에 있었던 향교의 일부를 빌려 건립되었고 1923년에 당시 신천동 1093번지(옛 코오롱 공장터의 아파트 지역과 대구은행 본점,대구시 교육청사 자리)로 옮겼다. 1940년3월1일 대구동도심상소학교(大邱東都尋常小學校)가 설립되었다.
또한 대구에는 서양문화가 유입되던 여명기부터 선구적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 있었고 그 가운데 시인 이상화의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수성들을 소재로 한 시로서 일제하의 대표적 애국시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