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사회사업가 꿈도 꿔............
서울의 밑바닥 인생들의 양상은 시중에 몇 곳 안 되는 시립병원의 응급실들이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민층의 환자만 돼도 일반 병원을 찾기 마련이지만 시립병원에는 당시만 해도 버림받은 인생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길에 쓰러진 걸인 등의 행려 병자, 음독자살미수의 윤락여성들, 신원을 알 수 없는 변사직전의 영세민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간혹 길에 버려진 노인과 노파도 있었다.
이런 곳들은 연말이 되어도 찾아오는 위문 객도 없어 환자들은 정말 처량하고 외로운 곳이기도 하다.
설사 누가 사망한다해도 울어줄 사람도 없는 그런 외진 곳이기도 했다.
60년대 말 당시만 해도 서울 용두동에 있던 동부시립병원이나 원효로 쪽에 있던 남부 시립 병원 등지의 응급실엔 해마다 봄철이 되면 음독자살을 꾀했다가 미수에 그쳐 아직 의식이 깨어나지 못한 윤락여성들이나 무작정 상경해 걸인행세를 하다가 병이나 쓰러진 행려 병자들로 항상 그득 차 있었다
견습기자 시절 매일 출입처 관내의 이런 병원을 체크하면서 의식을 되찾은 이들을 붙잡고 사연을 묻다보면 너무 눈물겨운 사연들에 함께 코허리가 시큰해져버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내 딴엔 깊은 감동을 받아 기사를 써봤자 냉철한 데스크 측에서 보면 너무 흔한 케이스여선 지 휴지통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어떤 무연고 환자는 심지어 기자를 붙잡고 시골로 되돌아갈 수 있는 교통비를 동냥해 오는 일도 있었다.
아직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나이에 이처럼 가련한 인생들을 수많이 대하고는 안타까운 생각이 넘치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치 못해「차라리 기자 직을 그만두고 사회사업가가 되는 게 인생을 더 보람되게 또 값지게 사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해 한동안 고심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66년5월초 원효로의 남부시립병원에 음독자살미수로 실려 온 막노동꾼 상이용사와 그의 두 아들의 경우도 딱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을 안고 있었다.
6.25때 가평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어 다리를 저는 상이용사(석병섭씨)는 생활고에 견디다못해 아내의 1주 기일에 피를 판돈으로 키니네를 사먹고 9살과 7살인 두 아들의 손을 붙잡고 한강 물 속으로 뛰어 들려다 큰아들의 재치로 미수에 그쳐 병원으로 옮겨져 온 것이다.
다음날 두 아들의 보살핌 속에서 의식이 깨어난 이 상이용사로부터 사연을 들어 3단 기사로 싣자 경기도양주군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 부대 원들과 중대장이 이 기사를 읽고는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생계를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해와 그는 「이젠 꿋꿋이 살겠다.」며 떠났다.
이 밖에도 저명인사 심모씨가 금일봉을 보냈고 서대문에서 혼자 산다는 모 여인이 위로의 말과 함께 푼푼이 모았다는 돈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런 뒤 얘기가 다시「인정분수」라는 제목의 박스 기사로 알려지자 회사와 기자실, 그리고 병원 등지에서 필자에게 「이왕이면 그 모 여인과 재혼하도록 중매까지 해줬으면 더 좋을 것이 아니냐?」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처럼 기자로서 가슴 뿌듯한 보람 감을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은 그 후에도 많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기억에 생생한 것은 훨씬 뒤인 기자생활 15년째인 지난 80년5월5일 어린이날에 맞춰 주간한국에 실린 「고아 6형제의 눈물겨운 생활전선」얘기다.
필자는 당시 차장 직에 있었는데 좀 고약스런 P부장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서울에서 가장 변두리지역인 서울 상계동 수락산 골짜기의 판자촌에 산다는 이들 6형제를 찾는, 주로 신참 기자가 하는 일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날따라 수송부의 배차 사정도 극히 나빠 사정사정해서 취재용 승용차대신 봉고트럭을, 그것도 목적지에 내려만 준다는 조건부로 얻어 타고 달릴 때는 이젠 회사를, 아니 기자 직을 그만둬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니냐는 회의감에 빠져 허덕이는 마음고생을 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날의 취재는 훗날 두고두고 꼬리를 무는 대 히트 작이 될 줄이야......
아마 그 부장도 오히려 역효과를 거둬 그런 곳에 필자를 보낸 것을 후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그는 결국 타의로 회사를 그만두면서 정말 필자에게 「그동안 너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여튼 그들 6형제의 사연은 `재일 동포 아버지와 모국 딸의 30여 년만의 해후 건` 등 이미 여러 차례 최루탄 성(?) 기사 취재에 특기를 보인 필자에게는 가장 안성맞춤 격인 내용이었다.
2년 전 아버지가 뇌출혈로 숨지고 1년 전 어머니마저 인근의 사찰 공사일 에 나섰다가 수해로 익사해 고아가 된 아들은 운전을 배우려고 안양의 할아버지 집에 가있던 20살의 장남, 등산 배지 장사 등 행상으로 돈을 버는 17살의 차남, 그리고 집안에서 어머니 역을 맡고 있던 14살의 3남, 또 10살 ,6살, 3살짜리 4남, 5남, 6남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3남 상필 군(당시 신상계 초등학교 6년)의 고생얘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했다.
특히 ,학교에서 담임선생이 그에게 급우들에게 도와주라면서「고아」라는 지칭을 할 때가 가장 괴로웠다는 상필 군은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물지게를 지고 개천에서 물을 져다 올라와 데워서 동생들을 씻겨 주곤 했다.
이런 그들이지만 막상 그들에게서 그늘진 표정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오히려 밝은 표정이었다.
부엌의 쌀독에 쌀도 별로 없고 찬거리도 거의 없음에도 그들은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엄마 역의 상필 군 역시 겉으로는 밝은 표정이었으나 얘기를 들어본즉 마음속으로는 한없이 안타까워하고 있었고 동생들을 안쓰러워 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미주판 주간한국에도 그대로 전재해 국외에서도 성금이 쏟아져 들어와 당시로서는 큰돈이 모여 그들에게 전달됐다.
독지가들 가운데서 하와이의 임선자씨 경우는 성금 함에 이 기사를 오려 붙이고 다니면서 동포들에게 보이고는 2백 달러의 성금을 모아 보냈었는데 동포들을 만날 때마다 함께 이 기사를 읽으며 같이 울음보를 터뜨렸다고 했다.
또 뉴욕에서 의류수입상으로 대 성공해 화제의 인물이었던 재미동포 조 모씨는 일부러 귀국까지 해 상계동 상필 군 집까지 찾고는 현금 10만원에 백만 원 짜리 3년 만기 개발신탁수익증권 3장을 사줘 상필 군 형제들의 앞길을 터 줬고 서울여의도에 사는 안과의 이철재씨는 일부러 세 아들등 온가족과 함께 상계동 판자 집을 찾아 이들 형제들을 위문, 현금 10만원과 의류 1백 점을 전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독자는 필자를 찾아와 격려해주며 술을 한턱내기도 했다.
필자가 이 통에 한동안 이 형제들 뒷바라지 일로 분주 하자 회사동료들이 필자에게 「대부」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요즘 생활은 어떤지는 알 길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좋은 일 외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못내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케이스도 많다.
그 가운데 한 건은 역시 한강에서의 자살 음독 미수로 남부시립병원에 실려 왔다가 정처 없이 떠나버린 20살 가량의 처녀얘기다.
용산서 시절 한가로운 어느 날 하오 남부시립병원 응급실에는 얼굴이 곱살하고 아주 얌전해 보이는 이 처녀가 음독자살 미수환자로 들어왔다.
병원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나이에 얼굴도 예쁜데 안타까운 일이라며 측은해 했다.
이틀 뒤 의식이 깨어나 일반 병실로 옮겨진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사연을 물어본즉 마냥 훌쩍거리며 눈물만 흘리다가 `고아출신으로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다가 주인 아주머니의 심한 구박에 너무 외로워 자살을 꾀 했노라 는 대답이었다.
이로부터 필자가 그 병원에 갈 때면 그녀는 마치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몹시 반겼고 어느새 오누이처럼 친근한 말들이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일부러 환자가 없어 텅 빈방의 한 침상 위에 혼자 누워 있었다.
이런 줄 모르고 그녀를 그저 보고싶어 찾고 있던 필자는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잠자고 있는 그녀를 발견,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곱살스런 얼굴을 내려다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는 스스로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제야 깨어 일어나는 시늉을 하는 그는 평소와는 다른 좀 섭섭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필자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일부러 필자와 단 둘의 만남을 위해 이 빈방에 누워 자는척하며 필자를 기다린 것이 틀림없음에도 막상 필자를 대하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런 그녀가 다시는 불행해지지 않게 하는 방안을 숱하게 생각해봤으나 하숙생활을 하는 필자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마치 필자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보따리를 옆구리에 낀 채 병원정문 옆에 서있던 그녀는 필자가 문안으로 들어서자 앞으로 쫓아 나오며 「이젠 퇴원하게 됐다.」는 인사를 했다.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는 말을 던졌다가 「글쎄요....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을 듣고는 오히려 내 쪽이 당혹스러워 제대로 격려의 말조차 못해 주고 떠나 보냈다.
이날 이후 한동안은 이 병원을 들릴 때마다 그녀를 어떻게 라도 구조 못해준 것이 못내 안타까운 일로 생각나곤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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