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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당(김태원) 서신
주)집의당 유고집에는 조선말의 원용팔 의병장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여 있어서 자료실에 올림.
집의당 유고 서(集義堂遺稿序)
의암(毅庵) 유선생[柳先生 -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에 의로운 선비가 많이 있었는데, 집의당(集義堂) 김공(金公)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공은 을미년에 국변(國變)을 당하게 되자 앞장서서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스승 의암(毅庵) 유인석을 따랐다. 대운(大運)이 전도(顚倒)되는 바람에 패하긴 하였으나, 의로운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어 전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삭발(削髮)의 화를 면하게 한 그 공을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제갈 무후(諸葛武侯 - 제갈량(諸葛亮))의 성취하느냐 그르치느냐, 이로우냐 불리하냐 하는 것은 예견(豫見)할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하겠다. 의암 유인석이 집의(集義)라는 두 글자를 써서 줄 때 어찌 공연히 그랬겠는가.
공이 돌아가신 후에 공의 아들 경당(敬堂) 성모(性模)가 공의 유고(遺稿)를 싸가지고 찾아와서는 내게 교수(校讐)하는 일을 부탁하면서 아울러 서문까지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완강히 사양하며 여러 날을 보냈으나, 글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끝까지 사양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감히 정서(淨書)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찬미하는 것은 실로 경당이 경계한 바였기에 그 사이에 찬미하는 말은 한마디도 집어넣지 않았다.
공은 평생토록 의리를 숭상했지 문(文)을 숭상하지 않았으므로 본고의 양이 많지는 않지만, 의를 실천한 그 행동은 귀신과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아! 곤륜산(崑崙山)에서 나는 아주 조그마한 옥이라도 안목을 갖춘 자가 평가하기에는 충분한 법이다.
영력(永曆) 여섯 번째 신묘년(1951) 10월 1일 아침에 문화(文化) 유지혁(柳芝赫)은 서문을 쓰다.
집의당 유고 목차(集義堂遺稿目綠)
시(詩)
금계 이근원 만사(與錦溪李先生根元)
호은 원석홍 만사(與湖隱元公錫洪)
송하 선종원 만사(與宣松下鐘元)
글(書)
집의당 유고(集義堂遺稿)
성남 박기권(與朴星南基權)
성남 박기권(與朴星南)
성남 박기권(與朴星南)
오진사(與吳進士●●)
오진사(與吳進士)
가정 유씨(與柯亭柳氏)
송와 배진환(與裵松窩縉煥)
사문 강복선(與姜斯文復善)
도 사문(與都斯文)
종제 태희(與從弟泰喜)
정로 이병대(與李正路秉大)
가족성모(與家皃性模)
가족(與家皃)
가족(與家皃)
화남 좌익장 이창식(與華南左翼將 李昌植)
술헌 이배인(與李述軒培仁)
●●
을미(1895)·병신(1896)년 사략(乙丙事略)
제문(祭文)
의암 유인석선생 제문(祭毅庵先生祭文)
운강 이강년 제문(祭雲崗李公康年祭文)
금계 이근원선생 제문(錦溪先生祭文)
통문(通文)
성재 유중교선생 묘의 통문(省齋先生墓儀通文)
금계 이근원선생 묘의 통문(錦溪先生墓儀通文)
●綠
유사(遺事)
행장(行狀)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 만사
노(魯)에서 기린 잡히고*
낙수(洛水)에서 거북 나왔으니**
문명의 이치를
뉘 알 수 있으랴
공교롭게 오랑캐가
날뛰는 날 만났어도
음양이 소장하는 시대
홀로 지키셨네
갑자기 임금님 잊고
가신 이 누구인가
선비들 참지 못해
슬피 흐느끼네
아아, 품으신 지혜
끝내 쓰지 못했어도
참으로 당당하신
백세의 스승일세
*노나라 애공(哀公) 14년에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을 잡은 일을 말한다. 기린은 본래 상서로운 동물이어서 치세(治世)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왕도(王道)가 쇠한 시대에 기린이 나타난 것은 오히려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공자는 춘추를 찬술하다가 기린이 잡혔다는 대목에 이르러 절필(絶筆)하였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치수(治水)하던 때에 낙수에서 신구 (神龜)가 나왔는데, 등에 점으로 된 아홉 가지 무늬가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낙도(洛圖)로서, 우임금은 이 법칙에 의하여 구주(九疇)를 배정하였고, 기자는 홍범을 진술하여 연역(演繹)을 붙였다.
호은(湖隱) 원석홍(元錫洪) 만사
만년에 십여 년간
가르침 받았는데
오늘 슬피 곡할 줄
어이 짐작했으리
충성과 의리를
선인들께 전수받고
변함 없는 마음 공부
후학을 인도했네
이 세상 시끄러움
본래 싫어하셨지만
사문(斯文)의 정맥(正脈)
누가 다시 온전히 하셨는가
돌아가는 푸른 산
붉은 깃발 아래에
따르는 자손들
모두다 훌륭하네
송하(松下) 선종원(宣鐘元) 만사
강녕하신 구순(九旬) 부모
백발이 성성한데
오늘 이 영전에서
곡할 줄 뉘 알았으리
감동 주는 자애로움
명성 널리 퍼졌었고
날 미루어 남을 아는
인품 또한 훌륭했네
부모님 앞 아이 시늉
노년의 노래자(老萊子)요
유안(遺安)하는 은거 생활
녹문산의 풍도였소*
지난날 끊임없이
서로 방문하던 곳
애사 쓰는 붓 놓자니
슬픔만 한량 없네
*: 한말(漢末)에 방덕공(龐德公)이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여 농사를 짓자 유표(劉表)가 벼슬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 자손에게 무엇을 물려주겠소? 하고 물었는데, 그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물려주지만 나는 안전함을 물려주겠소 하였다. 그후 그는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으로 올라가 약초를 캐어 생활하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성남(星南) 박기권(朴基權)에게 주다
안주(安州)에서 밤차를 타고 떠난 후로 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식 한 자 전하지 못했었는데, 높으신 풍도 사모하는 마음 놓이지 않습니다. 지난 봄 편지를 보내면서 부쳤던 예해(禮解) 한 질은 틀림없이 받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만났을 적에 말했던 책을 간행하는 일은, -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문집을 말함. - 일을 끝마쳐 두루 배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리 멀리에서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기약이 없으니 믿을 것이라곤 소식을 묻는 편지를 서로 주고 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답장을 지체하고 있었으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학증해(小學增解)는 모든 물가가 뛰는 바람에 값이 80, 90꿰미나 가므로 구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루 찾아보고 있는데, 그곳의 책자는 간행되었는지 아직 간행되지 않았는지, 값은 얼마나 되는지를 책을 보고 나서 자세하게 가르쳐 주신다면 얼마가 되건 즉시 돈을 마련해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마음을 써서 나를 위해 꼭 구해서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초여름에 정양하시는 중에 기체후 평안하신지요. 그리고 여러 곳의 사우(士友)들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지요. 멀리에서 간절히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별탈이 없습니다만, 금계선생(錦溪先生 - 이근원(李根元))께서 2월 8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어 애통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 밖의 일들은 편지에 다 쓰지 못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무오(1918)년 4월
성남 박기권에게 주다
이곳 저곳으로 떠돌다 보니 그리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른 가을이라고는 하나 아직 날씨는 찌는 듯한데, 정양하시는 중에 기체후 여전히 좋으신지요. 그곳의 사우(士友)들도 다 별고 없는지요. 그리운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노쇠한 저는 여전합니다만, 아들 녀석이 5월 초순경부터 큰 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겨우 죽음은 면한 정도이지만 걱정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4월에 보내주신 편지는 즉시 받아 보았습니다만,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지금까지 답장을 드리지 못했으니 송구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습니까.
책을 간행하는 일은, 주신 편지를 받고서야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고, 돈도 다시 빚을 내기로 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해(學解) 한 질을 보내드리는 바이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애춘(藹春) 현장(玄丈)이 작고했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통탄하였습니다.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자 하여 돕지 않는 것일까요? 아!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담상(潭上)의 사우들이 감옥에 갇힌 지 이미 3개월이 지났군요. 그저 죽은 사람이나 없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운강[雲崗 - 이강년(李康秊)] 문고(文稿)에 관한 일은, 간행된 책을 조속히 부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을 바람이 점차 서늘해지는 이때에 정도(正道)를 호위하시는 몸 보중하시어 세상의 악과 맞서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성남 박기권에게 주다
오랫동안 소식이 막히다 보니 날이 갈수록 회포가 쌓이고 그리움 또한 깊어가고 있습니다. 요사이 삼가 기체후 안녕하신지요. 용렬한 저는 말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선사(先師)의 문집을 교환하기로 약조한 지 이미 오래인데, 존궤(尊几)에 도착해 있다고는 하는데 아직 부쳤다는 소식이 없으니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약속을 지킬 수 없으시다면 본 책자를 되돌려주라고 말씀하셔도 상관이 없겠습니다.
마침 김정업(金鼎業)이 돌아가는 편에 생각을 말씀드렸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만약 편지를 부칠 인편이 없으면 경성 종로 김윤황(金潤晃)의 백상점(栢商店)에 부탁하십시오. 그러면 지체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양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진사(吳進士)에게 주다
한 번 이별한 이후로 어느덧 4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리운 마음 더욱 깊습니다.
날씨가 차가운 요사이 시하(侍下)의 체도(體度) 강녕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자손들도 잘 지내고 가내에도 만복이 깃들으셨는지요. 앙모(仰慕)하는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늙고 용렬할 저는 분수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금계선사(錦溪先師) 이근원(李根元)의 문집에 관한 일은,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일치되어 다가오는 봄에 판각(板刻)에 들어가기로 하였기에 알려드리는 바이니, 지난번에 부탁드렸던 석판(石板)을 아끼지 말고 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빌려주시지 않으시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닙니다. 또 전에 약속하신대로 5천 꿰미 돈을 빌려주시면 일을 마친 후에 전부 갚아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유문(儒門)에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니 부디 범연히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선사께서 지으신 송서략선(宋書略選)도 차례로 간행하기로 결정했으니, 이점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다소의 깊은 생각은 글로 다 쓸 수 없습니다. 그 밖의 일은 다음 번 편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임술년(1922년) 12월 1일
오진사에게 주다
지난 섣달에 작별한 뒤로 해가 바뀌어 그리운 마음 깊어만 갑니다. 요사이 체도(體度) 만안하신지요. 저는 전이나 다름없이 용렬할 뿐입니다.
지난번에 선대인(先大人)에 관하여 통장(通狀)하셨던 일은, - 찬근(瓚根)이 대인(大人) 금초(錦樵) 오공(吳公)을 장차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사당에 배향하고자 하는 일로 통장을 보내온 것 - 일이 지극히 중대한 것인만큼 한 두 사람이 가부를 논해 배향하거나 말거나 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부득이 공론을 수합하여 백세의 안목을 현혹시키지 않아야 할 것이니 우선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리(錦里)의 영당(影堂)에 관한 일은 이미 전에 갖추어 아뢰었으나, 일은 크고 힘은 부족하여 시일을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재 모든 사람들이 믿는 바는 단지 전에 족하께서 중요한 약속이 계셨으니 순조롭게 일이 성취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지럽게 대략 써서 올립니다.
가정(柯亭) 유씨(柳氏)에게 주다
김태원은 여쭙습니다.
신정을 맞이하여 사문(斯文)들 모두 건강하시며 차근차근 진덕수업(進德修業)하고 계시겠지요. 시대를 염려하고 도를 걱정하시느라 건강을 해치지나 않으셨는지요. 항상 공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으로 꿈속에서도 태산과 북두처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골 구석에 처박혀서 글을 읽지도, 논의를 강론하지도 못하다 보니 무리를 벗어나 과실을 범하는 잘못만 있을 뿐 아니라 영당(影堂)을 참배하는 의식에까지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워하며 탄식한 지 몇 년이나 되었으니, 그 죄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우리 성재선생(省齋先生 - 유중교(柳重敎))의 묘물(墓物)에 관한 일을 사우(士友)들과 의논한 지 이미 오랜데, 이제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일치되어 새기는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삼가 존문(尊門)에 알리는 바이니, 존경하는 마음이 실로 다른 사람의 배나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모든 군자들은 하찮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함께 아름다운 일을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잘 살펴주시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경신년(1920년) 정월
송와(松窩) 배진환(裵縉煥)에게 주다
체신부가 와서 보내주신 답장을 전해주길래 손을 씻고 큰 소리로 읽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편지지가 다 피었습니다.
봄 추위가 아직도 매서운데, 어른을 모시는 중의 기체후와 도를 행하는 데에 신의 도움이 있으며, 어른께 올릴 반찬을 보살피시는 사이에 만복이 있으신지요. 존경하는 나머지 사모하는 마음 더욱 깊어만 갑니다.
저는 쇠약하고 용렬함이 여전하여 여타의 일로 골몰하니 번거롭게 말씀 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이가 오랫동안 건강하지 못하여 공부를 전폐하고 있으니 어찌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형께서 제 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하여 더할 수 없이 엄하게 가르쳐주시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성재(省齋) 유중교 묘의(墓儀)에 쓸 돈 30꿰미는 분부하신 대로 받았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저에게 분수를 다하도록 면려하신 것은 바로 저로 하여금 겸손히 행동하게 하고자 하신 뜻이었습니다. 놀라움에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훌륭한 덕의 광채가 말 밖에 흘러넘치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었으니, 이런 뜻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밖에 드릴 말씀은, 시하의 기체후 도를 보위하기 위해 보중하시어 큰 바램에 부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문(斯文) 강복선(姜復善)에게 주다
평소에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높으신 풍도를 흠모해 온 지는 오래입니다. 근래에 기체후 여전히 강녕하시며 학업은 높은 경지에까지 진보하셨겠지요. 항상 우러러 축원하는 정성 간절합니다.
저는 일찍이 의암(毅庵) 유인석, 금계(錦溪) 이근원 두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으나 육순의 나이가 되도록 투철한 식견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항상 가슴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했습니다.
성재 유중교선생께서는 좋은 옥, 정련된 금과 같은 자질에다 훈훈한 바람과 부드러운 비와 같은 덕을 갖추셨으니, 비단 한 시대의 유현(儒賢)일 뿐만 아니라 실로 만세의 종사(宗師)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덕과 큰 공업을 갖추신 분인데도 두어 척의 무덤 앞에 아직까지 제수(祭需)을 올려놓을 돌과 묘표(墓表)나 묘지(墓誌)와 같은 갈문(碣文)마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히 제 분수를 생각하지 않고 외람되게 동문의 제우(儕友)들과 원근의 선비들에게 통문을 보내게 되었던바, 힘을 합하고 재물을 모아 석상(石床)과 석비(石碑)를 만드는 일이 거의 완성 되어서 다음달 10일에서 15일 사이에 상석과 비석을 세우려고 합니다.
더구나 형께서는 스승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신 고제(高弟)이므로 알려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편지로 몇 글자 부치는 바입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경신년(1920년) 4월
도 사문(都斯文)에게 주다
동문(同門) 연원(淵源)의 정의(情誼)가 있는데 늙어 머리가 세도록 한 번도 함장(函丈)께서 나오고 물러나시던 자리와 제우들이 강론하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함께 읍하고 사양하지를 못했으므로 더 늙기 전에 한 번 뵙고 싶은 마음 간절할 뿐입니다.
근래에 기체후 여전히 좋으시며, 공부는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이미 고명(高明)하고 광대한 경지에 이르셨겠지요.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저는 수십 년 동안 외람되게 의암(毅庵) 유인석, 금계(錦溪) 이근원 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나 한 가지도 체험해 실천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항상 부끄러워 하고 탄식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성재 유중교선생의 묘소 앞에 아직까지 석의(石儀)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자신의 비루함을 잊고 사우들에게 통문을 보냅니다. 다음달 10일에서 15일 사이에 비석을 세우고 석상(石床)을 놓게 되었으므로 글을 부쳐 고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종제(從弟) 태희(泰喜)에게 답하다
그간 편지가 지체되고 인편이 막혀 가슴이 온통 그리움으로 가득했었는데, 방금 수서(手書)를 받고 보니 안도와 기쁜 마음 진실로 깊다네. 더구나 집안을 다스려 조상을 받드는 자네인데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소식을 듣고는 한 번 큰 감회가 일었다네.
매미 우는 이 계절에 상중에 있는 몸 편안하며 모든 일들도 다 태평한가. 간절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간다네.
늙고 용렬한 이 종형은 여전하고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잘 있다네.
자네의 편지에 6백 꿰미의 돈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마련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하였으니 어쩌겠나. 석리(石里) 선산에 있는 약간 그루의 묘목(墓木)을 베어서 급한 불을 끈 후에 천천히 가을이 오기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요량할 방도가 나올 것으로 생각되네.
이미 바꾼 가옥은 절대로 요동시키지 않아야 할 것이네. 모든 일은 큰집의 대이(大而) 조카와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일세.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만 줄이네.
경신년(1920년) 5월
정로(正路) 이병대(李秉大)에게 주다
가라지 피는 4월을 맞아 먼곳에서 어른을 모시는 기체후 만안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춘부장께는 기력이 어떠신지요. 그곳을 바라보며 그리는 생각으로 마음이 괴롭습니다.
늙고 용렬한 저는 여전히 지낼 뿐입니다. 지난 봄에 만났을 적에 말씀하셨던 유문(儒門)에 통고하는 일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공정하지 않다고들 했습니다. 또 숙재(肅齋) 유공(柳公)과 광암(廣庵) 이공(李公)도 이 일은 덕에 누가 될 것이다 하였고, 제 생각도 마찬가지이니, 성사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좌하(座下)께서 먼 앞날을 내다보시고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머지는 어지러워 이만 줄입니다.
신유년(1921년) 4월
아들 성모(性模)에게 주다
떠나온 후 소식이 막혀 매우 답답하였다. 그 사이 너의 몸에 탈이 없고 네 처도 잘 있느냐. 멀리에서 염려되는 마음 끝이 없구나.
이곳에는 이달 16일에 도착했는데, 각처의 사우(士友)들에게 특별히 크게 놀랄 만한 일들이 없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6일간 머무르고 22일에 길을 돌려 이달 27일에 안동현(安東縣)에 도착했다. 오는 그믐날 차를 타고 선천(宣川)에 있는 박씨(朴氏) - 봉동(鳳洞) - 를 방문하고 길을 돌려 안주(安州)로 갈 계획이다. 해서(海西)는 길이 바빠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곧장 풍덕(豊德)으로 가서 3일간 머무른 후 경성에 들어가 일을 보고는 하루 동안 쉬었다가 즉시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러나 여러 날 동안의 여행 일정이라서 틀림없이 그대로 될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알고 있거라. 나머지는 이만 줄인다.
병진년(1916년) 11월
아들에게 주다
이달 6일에 부친 편지를 14일에 받아보고서 기쁜 마음 가눌 길 없었다. 근래에 몸은 어떠하며 집안은 두루 무고하냐. 멀리 떨어져서 염려스러운 마음 간절하다.
객지에 나와 있는 나는 몸이 늘 좋지 못하여 하루에 40,50리도 걷지 못하며 어느 한 군데도 쑤시지 않는 곳이 없구나. 생각처럼 걸을 수가 없고 보니 매우 걱정스럽다.
사초(莎草)하는 일은 올해를 넘기게 되면 산소에 필시 물이 들 염려가 있을 것이므로 올 봄에는 사초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三十緍의 열 꿰미 돈을 보태게 되었는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이미 주선해서 결정하였다.
금리(錦里)의 강회(講會)는 3월 15일로 날짜를 미루었는데, 이천(利川) 이광암(李廣庵) 근처로 장소를 옮길 것이 분명하다.
박회당(朴悔堂)의 문자(文字)에 관한 일은 좋은 것 같구나. 그러나 너 마저 나가서 있게 되면 땔나무에 관한 일이 대단히 곤란해질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초하는 일이 마무리 지어지면 이달 그믐께나 돌아갈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나머지는 이만 줄인다.
무오년(1918년) 2월
아들에게 주다
집을 떠난 지 두어 달이나 되어가도록 소식이 격조하니 매우 답답하다. 그간 몸은 별 탈이 없으며 네 안사람의 병은 지금쯤은 쾌차했는지. 멀리에서 염려스러운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객지에 나와 있는 나는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별 탈이 없으며, 관곡(官谷)의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순조로와서 근처 산소의 세사(歲祀)를 잘 올렸다.
양주(楊州) 광암(廣庵)에 사는 딸 아이는 잘 있으나 인천(仁川)에 사는 딸 아이는 필시 괴로운 일이 있는 듯하다.
지난달 올라오던 때에 즉시 수원으로 가려 했지만 맡은 일을 상원(祥原) 노인이 주선하였기 때문에 그저께 광주로 왔다가 그날 수원으로 출발하였다.
세상 일은 번거로움이 많아서 들고 나는 데에 날짜를 정할 수가 없는 법이다. 나아가게 되면 나아가고 물러나게 되면 물러나고 머무르게 되면 머무르는 것이라서 미리 예정을 할 수 없다. 돌아갈 날은 빠르면 동짓달 20일 경이 될 것이고 늦으면 설날 전후가 될 것이지만 기약은 할 수 없다.
혹시 틈이 나면 화동강목(華東綱目)을 인쇄할 계획이다. 날이 갈수록 돈은 점점 고갈되고 곡식 값은 날로 떨어져 정조(正租) 1석의 값이 27,28냥까지 되었다. 그렇게 알고 있거라. 이만 줄인다.
무오년(1918년) 10월
화남 좌익장(華南左翼將) 이창식(李昌植)에게 주다
아, 애통하구려! 세상의 변천이 끝이 없어서 4천 년간 전수되어온 요순(堯舜)의 도(道)와 2천 년간 이어져온 공맹(孔孟)의 학문이 이제 영원히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5백 년 동안 유지해온 종묘 사직이 물거품이 되고 우리의 국토가 똥 밭이 되고 인류가 금수가 된 이때에, 하늘을 향해 서서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자들은 모두 다 통분해 하여 곳곳에서 봉기하였습니다.
족하께서도 충성과 의리에 격분되어 관동에서 군대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습니다. 나는 족하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 세상의 도덕을 붙들어 유지시켜 백성들을 구제해 주기를 바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재물을 탐하고 간사한 짓을 하는 꼬투리가 더러 있다고 하니, 이는 무슨 연고입니까. 만약 각 진영의 의병장들이 죄를 성토하고 나선다면 장차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또 주장(主將) 화남(華南) 이창식(李昌植)은 화서선생[華西先生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로서 덕과 의리와 명성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난 분입니다. 귀하께서는 의리로써 지휘를 받고 있으면서, 지금 재물과 이익 때문에 주장에게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입신(立身)하겠습니까. 족하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에 말했던 일을 그 사이에 혹 잊어버리지는 않으셨는지요. 한밤중에 해안(亥安) 등지로 군대를 돌려서 저와 합세한 후에 본 진영으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귀하의 형세가 별안간 어떤 지경에 이르게될지 모를 것입니다.
옛 역사책에 전쟁터에서 사람을 쓰는 데에는 남의 계란 두 개를 가로챈 사람조차도 쓸 수 없다 하였는데, 더구나 재물과 이익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어찌 족하가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아마도 막하에서 간사한 짓을 한 것일 것입니다.
지금이 어떠한 때입니까.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순간입니다. 어찌 원통하지 않으며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정미(1907)년 9월 28일 김태원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씁니다.
정미년(1907년) 9월
술헌(述軒) 이배인(李培仁)에게 주다
혹독한 더위가 찌는 듯한 이때 기체후 강녕하시며 수하(手下)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별 탈 없이 잘 있는지요. 멀리에서 앙모하는 마음 실로 괴롭습니다.
저는 늙은이의 병이 여전한 탓으로 스스로 떨치기 어려워 괴롭게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홍주(洪州)로 가는 일은,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더위속에 길을 걸을 자신이 없어서 몇 달을 주저하며 아직도 짐을 꾸리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게으름 피우는 것을 용서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날짜에 여유를 주신다면 7월 초에 떠나려고 하는데, 우리 형과 사론(士論)은 어떻게 계획을 잡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도 두려운 마음에 송구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면대해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계해년(1923년) 5월
을미(1895)·병신(1896)년 사략(事略)
고종(高宗) 32년 을미년(1895) 8월에 국가에 변란이 일어나 왕후께서 시해를 당하셨고, 11월에 조정에서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으므로 전국이 흉흉하였다. 나는 이때 서울에 있었는데, 변란 소식을 듣고는 바로 일어나 밤을 틈타서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천(利川)에 도착해서 서명심(徐明心)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곳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연안인(延安人) 이덕승(李悳升)을 만나 상의하게 되었는데, 내가 수심에 잠겨서 탄식하기를, 오늘의 화변(禍變)은 역사가 있은 이래 한 번도 없었던 것일세. 내가 의병을 일으켜 복수를 할 생각이지만 적절한 방법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이덕승이 말하기를, 전국이 놀라 들끓고 있는 마당이니 의병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화를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 생각이 이미 정해졌으니 자네는 잘 주선하여 뜻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그리하여 함께 큰 일을 이루어 우리 종묘 사직을 영원히 보존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하네. 우리 나라에 오랑캐 종자가 뿌리를 내리게 해서는 안 되네 하니, 이덕승이 말하기를, 심상희(沈相喜)가 여주(驪州)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리로 사람을 보내어 기회를 보아 일어나고 형세를 보아 도모해야 합니다. 저들은 여주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우리는 이천에서 군대를 일으켜,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진격을 할 경우에는 함께 공격하고 후퇴할 경우에는 함께 수비를 한다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심상희(沈相禧)와 가까운 이겸승(李兼升)을 뽑아 보냈다.
이날 이덕승과 함께 양지(陽智)·안성(安城)·죽산(竹山)·광주(廣州) 등 고을을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함께 의논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기를,
하늘이 나를 돕지 않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오랑캐가 되고 말려는가 보다 하니, 이덕승이 말하기를, 모든 성의를 다해서 하다 보면 종국에는 뜻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니 공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온 세상이 모두 오랑캐요 짐승인 마당에 우리 나라만이 지금껏 의관(衣冠)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데, 어찌 완전히 멸망시킬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어언간에 동짓달이 지나가고 섣달 초순이 되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다시 이천으로 가서 강재능(姜在能)을 찾아가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서명심(徐明心)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본군(本郡) 적고현(赤高峴)에 전주석(全周錫)의 수하(手下)에 있는 포병 50, 60 명이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을 이용하여 일을 성사시켜 볼 만합니다 하기에, 해볼 만 하겠다고 하고는 이날 밤에 이덕승과 함께 전 지사(全知事)를 방문하였는데, 오경(五更)이 되어서야 만나볼 수 있었다.
현재 나랏일이 매우 위급한 상황이므로 하늘을 향해 서서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자 쳐놓고 저 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어떻게 앉아서 구경만 하며 태연하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뜻을 좀 알고 싶네 하였더니, 지사가 말하기를,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앉아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고 먹어도 음식 맛을 모르는 채로 오늘까지 지내왔습니다. 지금 공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기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충청도에 의병들이 매우 많다고 들었네. 여주(驪州)의 심상희(沈相禧)도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군대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네. 내가 그곳의 형편을 분명히 알고 있어서 호응하여 일을 해볼 만 하니, 자네는 나를 따라 속히 일어나도록 하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네의 목을 베겠네 하였더니, 지사가 말하기를, 저는 본래 출신이 한미하기 때문에 앞장서서 창의(倡義)할 수가 없으니 공께서 먼저 일어나십시오. 저는 뒤에서 호응하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되네. 나는 죽산(竹山)으로 들어가서 거사할 터이니 자네는 여기에서 얼마간의 병사를 보내주게 하였다.
섣달 12일에 먼저 배감시(倍甘市)에 도착하여 병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을 틈타서 전씨(全氏)가 보낸 방경옥(方敬玉)이 포병(砲兵) 7명을 거느리고 우리에게로 왔다. 이날 밤 촌락에 숨어 있다 보니 사방의 의사(義士)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내가 맹세하고 명을 내리기를, 군대에서는 사사로움이 없는 법이니 모든 일을 군율에 따라서 할 것이다. 명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어기는 자는 가차없이 처벌할 것이다. 각자 정신을 차려 염두에 두도록 하라 하고는, 방경옥(敬玉) 등을 불러 동쪽 어귀로 나가 경비하게 하고, 이덕승은 서쪽 어귀를, 박제익(朴濟益)은 남쪽 어귀를 지키게 하였다. 각 방면의 길이 험준하여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북쪽으로 난 갈랫길로 시중(市中)으로 들어가서는 은밀하게 계책을 세워 명령을 퍼뜨리기를, 대진(大陣)이 오늘 내일 사이에 도착할 것인데, 우리는 전도(前導)로서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먼저 온 것이니, 너희들은 놀라거나 동요하지 말라 하고 전령(傳令)하였다. 그래서 민군(民軍) 3백여 명을 얻었다.
하루 이틀을 지내는 사이에 운량장(運糧將) 박제우(朴濟禹)가 사사로이 군량미를 감추는 사건이 발생하자 군대의 분위기가 흉흉해져서 오합지졸이 대오를 이루지 못했다. 나는 처음 의병의 기치를 세운 마당에 재물을 사사로이 차지하려 들고 제 일신이나 생각하려 들다니,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병사들을 해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에 정예병인 기병 몇 명을 뽑아서 즉시 출발하였다. 이천에 도착하여 강재능의 집에 머물면서 전주석을 만나보고 사과하기를, 일을 제대로 도모하지 못하여 끝내 낭패를 보고 말았으니, 자네가 나를 위해 계책을 내어주게나 하자, 주석이 말하기를, 광주(廣州) 고응선(高應善) 수하의 포병이 현재 50, 60명인데 춘천(春川)으로 향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들을 불러들일 수 있다면 세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렇겠다고 하고는, 밤에 그의 집에 도착하여 의리를 끌어대어 설득하기를, 이같은 변란을 당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으니 의병들이 일어난 것은 모두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섰다가 이 지경으로 곤궁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는지 . 모든 신하와 백성이 된 자가 수수방관하며 마치 남의 나라 일을 구경하듯이 해야 되겠는가,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그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겠는가? 하자, 고응선이 말하기를, 일로 보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은 귀하고 저는 천하니 뜻과 기상이 맞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하고 천한 것이 의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에 유 황숙(劉皇叔 - 유비(劉備))은 관우(關羽)·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어서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니 그 당시에 귀천이 어디 있었는가.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오늘 마땅히 유비·관우·장비가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고사(故事)를 본따서 사생(死生)을 함께 하도록 해야겠네 하고는, 하늘에 맹서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고응선이 말하기를, 의병들은 힘이 약하고 적의 세력은 한창 강성하니 일이 매우 위급합니다. 형께서는 계획을 잘 세우십시오. 저도 병사들을 수합하겠습니다 하기에, 그날 밤으로 즉시 전씨 집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고 있자니 고응선 등이 밤에 포병 50명을 거느리고서 왔고, 방경옥도 포병 40명을 거느리고 도착하였다. 이에 군대가 조금 위세를 떨칠 수 있게 되었다. 고응선이 말하기를, 무기는 제법 모였지만 탄약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요?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여주로 가서 심 아무개를 만나보아야 하겠네 하고는 종사(從士) 몇 명과 함께 즉시 심상희(沈相禧)의 진영으로 달려들어가서 많은 양의 탄약을 요구하였다.
저물녘에 이천읍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밤은 깊고 사람은 주리고 말은 지쳐서 계속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언덕 위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마침 왜병 5, 6명과 마주쳤다. 한참 동안 서로 욕을 하다가 꾀를 써서 벗어나서는 남쪽으로 도주하여 강씨 집으로 들어오니 5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덕승이 진영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군졸 중에 김 아무개는 본디 서울 사람이니 그 마음을 알 수 없다고 떠들어대는 자가 있자 서로들 의아해하며 각자 해산하기를 고집하는데,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도 광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주공께서 오셨으니 잘 생각해서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군졸들 중에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는 것도 그럴 법한 일이다 하고서 이덕승 등에게 화약을 지급해 주고서 위로하고 달래 보라고 하였으나, 군졸 중에 배반하고 흩어진 자들이 태반이었으므로 그 즉시 대포를 쏘아대며 추격하였다.
얼마 뒤에 날이 밝았는데 적 50명이 습격해 왔다. 우리 군사는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 남은 병졸들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적병이 사방으로 둘러싸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석양 무렵이 되었다. 배회하고 있는 사이에 어떤 노인 하나가 산골짜기에서 내려와서 말하기를, 지금 이천(利川) 의병이 여주에 머물고 있다고 하니 공은 그리로 가도록 하시오 하였다. 내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노인은 무척 신통하고 이상하다 하고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 부분의 열두 글자는 해독이 불가함.) 그 의심을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고응선(高應善) 등이 모두 환영하였다.
이날 병사들에게 맹서하고 단(壇)에 올라가서 고응선(高應善)을 중군(中軍)으로, 이덕승을 운량장(運粮將)으로 삼았는데, 이날은 바로 을미년(1895년) 12월 25일이었다.
한밤중에 왜병 3백 명이 우리 군대를 공격해 왔다. 새벽에 심상희(沈相禧) 진영과 함께 동쪽과 서쪽으로 협공하여 적병 2백 명의 머리를 베고 적 2명을 사로잡고는 40리를 추격하다가 돌아와서 여주읍(驪州邑)에 머물렀다.
심상희(沈相喜)와 이천읍의 적을 치기로 약속하고 날짜를 정했으나 심상희의 진영에서 약속 날짜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행군하다가 덕치현(德峙峴) - 이천읍의 뒤에 있음. - 에 이르렀을 때 혼자서 적과 마주쳤는데, 동리에 사는 김귀성(金龜性)이 탄약을 공급하고 싸움을 도와서 적 1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 왜병이 불을 지른데다가 눈까지 내리는 바람에 적을 당해내지 못하여 우리 군사가 싸움에 지고 말았다. 이날은 바로 섣달 그믐날이었다.
병신년(1896년) 정월 3일에 흩어졌던 병졸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양지읍(陽智邑)에 이르렀다가 용인(龍仁)으로 진영을 옮겼다. 금양시(金陽市)에 들어가 병사들을 불러 모았는데, 여기에서 유영순(柳永淳)의 군사 5백여 명을 얻었다. 유영순을 후장군(後將軍)으로, 김귀성을 좌익장(左翼將)으로 삼아 무기를 수합하였는데, 지나는 고을에서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섰다. 행군하여 안성에 이르렀을 때는 병졸이 3천, 참모가 수백 명이 되는 등 군대가 비로소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그 군사로 아산(牙山) 둔포(屯浦)의 적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쌀 3천 섬을 빼앗아서 안성(安城)으로 수송하였다.
광주(廣州)의 의병장 심진원(沈鎭元)이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격문을 보내오기를, 이달 10일에 산성으로 들어와서 주둔하고 있는데,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이 병사 8백 명을 거느리고서 몇 겹으로 포위하고 있다. 지역은 더할 수 없는 요해처인데 병사의 수가 많지 않으므로 성이 함락될까 염려스러운 상황이다 하면서 하루에 세 차례나 급한 상황을 알려왔다. 이에 친히 정예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서 즉시 포위를 뚫고 진격하여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 물리치고는 성으로 들어갔다. 이날의 전투에서 운량장 이덕승이 전사하고 병졸 수십 명이 죽었으며, 나도 여러 군데에 탄환을 맞았다. 이날은 정월 15일이었다. 이에 병사들을 정돈하고는 말하기를, 아, 이덕승이 죽다니! 강개하고 지혜로운 자였는데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먼저 죽었구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들 죽지 않겠는가마는 이덕승은 참으로 가치있게 죽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심진원이 성에 들어온 이후로 음란하고 포학하고 무도한 행위를 일삼는가 하면 날마다 기생들과 술을 마시며 패만스럽게 행동하였으며,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들여 제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군인들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병사들은 사나워지고 백성들은 배반하여 안팎으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성을 지키는 군사 수백 명을 급히 불러 음식물을 나누어 주며 위로하니 사졸들이 모두 다 크게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적과 대치하여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이 봉화가 서로 이어졌으며, 밤에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낮에는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지역은 요해처이고 책임은 막중한데 그 중요한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의논하기를, 나는 장수의 재목이 못 되는 사람이므로 큰 일을 그르칠까 염려스럽다. 그러니 제군들은 대중의 뜻에 따라 인재를 뽑아서 나를 대신해서 군대를 다스리게 하라 하였더니, 구연영(具然英)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장군께서 이렇게 큰 일을 당하여 비록 겸양을 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병사들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고 있는 마당에 별안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겸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의 마음에 부응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사람들의 바램을 만족시켜줄 수가 있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내가 누누이 의논을 하고는 이러한 뜻을 심진원의 진영에 알렸더니, 그곳에서 박주영(朴周英)이라는 자를 보내왔다. 군영에 도착했길래 그와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수작이 영민하고 빈틈이 없으며 고금을 두루 꿰뚫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믿을 만하다고 말하기에 그를 추대하여 대장군으로 삼고, 나는 선봉장이 되어 군중(軍中)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그에게 물어서 결정하였다. 구연영을 중군(中軍)으로 삼았다.
하루는 장기렴(張基濂)이 비밀리에 박주영에게 글을 보내기를, 만약 의병을 쳐부수고 우리에게 귀순한다면 광주군수(廣州郡守) 자리를 주겠다 하고, 좌익장 김귀성에게도 그런 내용의 글을 보내었다. 박주영이 그 말을 그럴 듯하게 여겨 병사들을 이끌고 달아나려던 차에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박주영을 묶어서 심진원의 진영으로 보내어 목을 베게 하였다. 그러자 김귀성이 크게 겁을 먹고는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달아나서 성안이 온통 소란스러웠다. 내가 다시 군중(軍衆)을 정돈하니, 군중이 말하기를, 군대에는 하루라도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면서 다시 나를 장수로 추대하였다. 나는 사졸들을 배불리 먹이고는 성을 순시하였다. 이렇게 몇 달 동안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 적의 형세가 더욱 강성해졌지만 우리 병사들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김귀성이 장기렴을 만나서 의병의 허실(虛實)에 대하여 갖추어 말하고는 그가 온 뜻을 말하였으나 장기렴은 믿지 않았다. 김귀성이 삭발을 하면서까지 다짐을 하자 장기렴이 그제서야 믿고 계책을 세웠다.
처음에 성에 들어가 순시를 할 때에 못 북쪽의 장대(將臺) 부근의 성가퀴가 파괴되어 있기에 잘 지키라고 주의를 주었었는데, 적은 그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김귀성이 우리를 배반하고 장기렴에게 들어간 후에 얼마간의 병사를 얻어가지고 앞장서서 인도하여 성의 허물어진 곳을 통하여 우리 군대를 습격해왔다. 적병이 일제히 그곳으로 올라와서 양 진영이 서로 공격하였는데,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어서 방향을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3경부터 새벽까지 교전하는 불빛이 끊어지지 않아 시체가 쌓이고 피가 땅에 흥건하게 고였다. 우리 쪽에서 전사한 병사와 말이 5백 가량이었고, 적병은 3백여 명이 죽었다.
이에 포위를 뚫고 동쪽으로 나와 싸우면서 행군하였다. 처음 성을 나올 때에 따르는 병사가 4백여 명이던 것이 분원역(粉院驛)에 이르렀을 때는 겨우 8십여 명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고응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천시(天時)가 지형(地形)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형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고는 갑자기 기침을 몇 번 하고 피를 토하며 기절하여 땅에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부축해서 간호한 지 반 식경만에 호흡이 비로소 통하였다.
이때부터 절대로 교전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었다. 고응선을 보고 말하기를,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제천(堤川)의 대장 의암 유인석 군대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니, 그리로 가서 의지하여 뒷일을 도모해야겠네. 그랬다가 만약 뜻이 맞지 않으면 그대로 영남으로 가야겠네 하고는 출발하였다. 양근(楊根)으로부터 지평(砥平)·여주·원주를 거쳐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는 걸어서 수십 일만에 제천 경계에 도착했다. 읍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군사들을 정지시키고 장군에게 명을 전하였는데, 제천 진영 내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의암 유인석이 특명을 내려 받아들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8백 명의 군사를 나눠주어 원주 수성장(原州守城將)으로 삼는 바이니 잘 해보도록 하라 하였으나, 나는 처음 들어갔을 때에 여러 사람들이 논의하는 중에 헐뜯으며 배척하는 자가 있었던 것 때문에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실대로 그 이유를 말하고 영남으로 떠나려 하였는데, 의암 유인석이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부득이하여 소토장(召討將) 경암(敬庵) 서상렬(徐相烈)에게 먼저 통보하였다.
4월에 내가 단양에서 죽령(竹嶺)을 넘어 예천읍(醴泉邑)에 이르자 소토장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친히 맞아주었다. 매우 너그럽고 두텁게 대해주고 자상하게 깨우쳐 주었는데, 의리를 끌어대는 것이 매우 정밀하고 절실하였으므로 그 말에 감동하고 그 마음을 인정하여 군사를 합치고 세력을 합하였다.
적을 만나 패배함에 미쳐서 군대를 단양으로 돌렸는데, 이때 장기렴(張基濂)이 남한산성으로부터 승승장구하여 대진(大陣)과 며칠을 대치하던 중 우리 군대가 패하였기 때문에 의암 유인석도 단양으로 합류하였다. 다시 풍기(豊基)로 갔으나 또 패하여 경성으로 향하였다. 영춘(永春)을 출발하여 음성(陰城)에 이르렀을 때 또 적을 만나는 바람에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군대를 원주로 돌렸다가 정선(旌善)에 이르러서 10일 동안 머물렀다.
의암 유인석이 상소하여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진달하여 화이(華夷)의 큰 한계를 밝혔으나 비답(批答)을 내려주지 않았다. 이에 다시 의리에 입각하여 압록강을 건너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하고는 경암 서상렬을 도로장(道路將)으로, 나를 선봉장으로 삼았다. 행군해 가다가 6월에 낭천읍(狼川邑)에 이르러서 또 적을 만났다. 대진(大陣)과 길이 어긋나 구원의 손길이 비치지 않자, 전군(前軍) 엄기섭(嚴基燮)이 적이 다가왔다는 말을 듣고는 3백 명의 군인을 데리고 밤을 이용해 달아났다. 여러 군사들도 적병에게 겁을 먹고 달아나 흩어진 자가 태반이었으므로 겨우 휘하에 2백 50여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와 경암 서상렬이 닭이 울 무렵부터 사시(巳時)가 될 때까지 힘을 다해 싸웠으나, 병사들이 먹지 못하고 길이 막혀 통하지 않는 바람에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낭천이 적에게 함락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10여 명의 졸개를 거느리고서 몸을 숨기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갔는데, 경암 서상렬이 앞장서서 가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1리도 채 못가서 적병이 사방으로 추격해 왔다. 경암 서상렬이 앞에서 꺼꾸러졌으나 황급하여 구하지 못하고 혼자서 산으로 올라갔다. 패잔병 5,6 명을 거두어 대진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탐지해 보았으나 3,4 일이 되어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들으니 대진이 이미 양구(楊口)의 적을 격파하고 서둘러 3, 4백여 리 밖으로 떠났다고 하였다. 뒤따랐으나 미치지 못하여 약간 남아있던 병사를 버리고 부득이 망명의 계획을 정하고는 평복 차림으로 골짜기로 들어가 투식(投食)하였다.
아, 애통하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목숨을 바치지 못하고 장수가 죽었는데도 뒤따라 죽지 못하여 먼저 했던 약속을 저버리고 또 나중에 한 기약마저도 지키지 못하였으니, 아득한 푸른 하늘이시여, 이 무슨 사람의 꼴입니까.
처음에 안재(安齋) 채순묵(蔡純黙)이 경암 서상렬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의병을 일으킨 이후로는 마음속 깊이 감복하였다. 경암 서상렬이 순절했다는 말을 듣고는 천릿길을 달려가 적의 화란을 두려워 하지 않고 경암 서상렬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와 제천에서 장사지냈다.
무술년(1896) 정월에 요동에서 돌아온 홍선표(洪選杓)를 통하여 의암 유인석의 거처를 알아보았더니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의리로 보아 정밀하지 못하고, 또 일의 체모마저 구애되어 아이성(阿伊城)에 이르러서 역시 군사들을 해산하였다. 문하의 훌륭한 제자 50,60명을 데리고 요상(遼上)에다가 공자의 사당을 세워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부치고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갖은 고생을 하며 도보로 달려가 몇 달만에 요동에 도착하여 의암 유인석을 뵙고 대학과 맹자 두 책을 배웠다. 그리고는 가을인 8월에 요동을 떠나 9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의암 유인석선생 제문(毅庵先生祭文)
명나라 영력(永曆) 2백 70년(1916) 병진 11월 초하루에 문인 해풍(海豊) 김태원(金泰元)은 삼가 변변치 못한 제수를 갖춰 놓고서 의암 유인석선생의 영전에 재배하고 고합니다.
아, 국가에 화란이 생기는 일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어찌 우리 동방처럼 참혹한 경우가 있었습니까. 의(義)를 행동 강령으로 삼고 도(道)를 부지한 분이 옛날에 한정도 없이 많았지만 선생처럼 큰 의와 공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문하에서 은혜를 입은 자가 소자 한 사람만이 아니지만 소자가 입은 망극한 은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피맺힌 한과 뼈에 사무친 고통으로 모든 잘못과 죄를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을미년(1905년)의 변고 때에 저들이 우리 임금을 욕보이고 우리 국모(國母)를 시해하고 우리 백성들을 금수로 만들어, 4천 년 유구한 역사와 5백 년 종묘 사직이 다시는 발 붙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 여염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적개하여 나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선생께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꾀하지 아니하고, 관직에 있는 몸이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상규(常規)만을 지키고, 군부(君父)를 시해한 적은 평범한 지아비라도 죽일 수 있으며 굳이 법관만이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춘추(春秋) 의 시의(時宜)의 대권(大權)을 행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높여야 하고 오랑캐는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으며, 국가가 차라리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도는 망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으며,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으며 적(賊)은 주벌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으며, 우리 나라의 여러 성왕들이 배양한 공과 선정(先正)들께서 수십 대 동안 전수해온 심법(心法)이 어떻게 천하 후세에 발명될 수 있었겠습니까. 의관(衣冠)을 차려입은 선비들이 경서(經書)를 읽고 예(禮)를 논하는 곳을 저들도 기탄함이 있도록 하여 우리에게 의지할 곳이 있게 한 것이 누가 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선생의 큰 의리와 큰 공은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고 무왕(武王)이 이적(夷狄)을 몰아낸 것 보다 앞서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소자(小子)는 자질도 형편없고 학문도 보잘것 없으나 다행히 병이(秉彛)만은 지니고 있어서 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한산성에서 무기를 모집하고 서호(西湖)에서 칼을 잡는가 하면 동쪽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북쪽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전후 3,4년 동안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온갖 고난을 다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소자 일신과 하나 있는 자식이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는 배처럼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에 소자를 자식처럼 대해 주시고 소자의 아들을 자식의 아들처럼 대해 주셨기 때문이니, 소자가 지금까지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던 것도 선생의 덕분이었고, 소자의 아들이 세속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고 유학이 좋은 것임을 알게 된 것도 선생의 덕분이었습니다.
선생께 받은 망극한 그 은혜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몸이 백 개라 하더라도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역(異域) 멀리 떨어진 채 소식을 전해듣지 못하여 돌아가신 때에 반함(飯含)도 하지 못하고 장례 때에 상여줄도 잡지 못했다가 무덤에 봉분을 하고 난 뒤에 찾아와서 곡을 하게 되었단 말입니까. 전형(典刑)이 아득히 멀기만 한 곳에서 피맺힌 한과 뼈에 사무치는 고통으로 모든 잘못과 죄를 자신에게로 돌리는 지극한 심정을 어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만약 혼령이 계신다면 아마도 형편상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을 통촉하시어 가까이 있지 않았다고 하여 꾸짖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 대들보가 한 번 꺾여지자 우러러 존경할 대상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민멸되어 가는 사문(斯文)을 누구로 하여금 밝히게 하며, 쓰러져 가는 세도(世道)를 누구로 하여금 부지하게 하며, 어리석은 후학(後學)을 누구로 하여금 계도하게 한단 말입니까.
남기신 문자(文字)를 그대로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책으로 간행했으니, 이는 공자(孔子)·주자(朱子)·송자(宋子) 세 선생의 연원을 계승하는 바이고 화서(華西 - 이항로)·중암(重庵 - 김평묵(金平黙))·성재(省齋 - 유중교(柳重敎)) 세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표준이 되게 하고 한편으로는 후세의 거울이 되게 한다면 어찌 조금 보탬이 된다고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처음 먹었던 마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아, 우주가 끝이 난다 하더라도 그리움은 다함이 없고, 바닷물이 마른다 하더라도 눈물이 마를 날은 없을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흠향하소서.
운강 이강년 제문(雲崗李公康年祭文)
영력(永曆) 2백 62년(1908) 무신 11월 20일에 동문의 벗 해풍 김태원은 삼가 포 한 마리와 술 한 잔을 마련해 놓고 제문을 지어서 고 의사(義士) 운강 이강년의 상생(象生) 앞에 고합니다.
공은 하늘의 바른 기상을 받아 세상의 대인(大人)이 되셨습니다. 하늘 높이 나르는 기러기인 듯, 천 길의 하늘 위로 비상(飛翔)하는 봉황인 듯 했으며, 높은 산에서 내려온 신령인 듯, 우뚝 솟아 빼어난 선리[仙李 - 이백(李白)]인 듯 하셨습니다. 벼슬길에 남달리 빨리 나아간 것은 송 나라의 소곡(巢谷)과 유사하였으나, 세상과 뜻이 맞지 않자 초지(初志)를 이루고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는 만물을 초월하여 우뚝 서고 세상 밖에서 깨끗하게 사셨습니다.
지난 을미·병신년(1895·1896년)에 남쪽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바람처럼 움직이고 구름처럼 치달리니 호남과 영남 지방이 온통 진동하였습니다. 몇 명의 적의 괴수를 처단하여 천토(天討)를 비로소 행하였으나, 계속해 나가기가 어려워 몸을 빼내어 제천(堤川)으로 들어갔습니다. 기국(器局)에 따라 사람을 부리는 것이 더욱 훌륭하여 유격병(遊擊兵)으로 계책을 쓰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단발령이 잠시 늦추어지자 의병의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그후 1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의 화란이 더욱 극심해져서 국가가 망하고 사람들이 금수나 다름이 없어졌으며 중국이 망하고 도의가 추락했는데, 국가의 주권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 마당에 물이 새기 시작한 배로는 버텨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 또 뜻하지 않았던 변이 생겨 우리 임금을 협박하여 항해할 날짜가 임박해 왔으므로 온 나라가 놀라 들끓었는데, 이때 의사(義士)가 누구였습니까. 공은 지난 봄부터 두루 경륜한 것이 실로 깊었는데, 자성(子城 즉 영춘(永春))의 야경(夜驚) 때 눈물을 흘리면서 백 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는 정신으로 노하여 머리카락이 전부 치솟았습니다.
제가 이때 실로 참여해 함께 들었었는데, 사문(師門)의 뜻인데 시의(時義)가 아니겠는가. 전후에 차이가 있는 것은 고명한 견해가 있어서이니, 분수를 헤아리고 형세를 파악하여 사문의 마음을 본받고 천지의 마음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거의 나라가 망하기 전,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충성과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공이 나를 버리지 않는 데에 감격하여 목숨을 바쳐 따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아 뜻대로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눈보라 치는 관동(關東)과 된서리 내리는 기해(畿海)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어 주신 덕분에 우리들은 더욱 빛이 났지만, 그 노고를 생각하면 늘 마음에 걸려 밥도 목에 넘어가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천지신명이 보우하사 단발령은 철회되었으나, 백석(白石)에서 길이 막혀 왜적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장향(章鄕)에서 수정후(壽亭侯 - 관우(關羽))가 했던 것처럼, 오파(五坡)에서 문산(文山 - 문천상(文天祥))이 했던 것처럼 늠름하게 적을 꾸짖으며 태연자약 행동하니, 머리를 깎은 교활한 왜놈조차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습니다. 적이 준 물건이라면 지푸라기 하나도 받지 않았고, 각 관(館)에서 담판을 지을 때에는 물이 흐르는 듯이 변론을 하니, 잡다한 종자가 섞인 오랑캐가 서로 돌아보며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러한 기풍과 논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듣는 자들이 모두 기운이 솟았습니다. 사형 집행일이 곧 닥쳐오는데도 온화하게 담소하였으며, 집안 일을 처리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평소나 다름없이 빈틈이 없으셨습니다. 또 사우(士友)들과 두루 영결(永訣)을 함에 있어서도 말은 엄하였으나 기상이 온유하셨고 필획이 단정하고 신중하셨습니다. 이 몇 가지를 가지고 보면 평소 모든 것이 바로잡혀 있었음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조용히 의리에 나아간 것으로 말하자면 공과 같은 분이 없으며, 시종일관 의리에 따라 행동한 그 절개는 높이 받들 만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공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과거의 공로보다 배나 더 장한 일이었으니, 그 빛은 일월(日月)과 같고 그 공은 바다와 같았습니다. 열성(列聖)께서 5백여 년 동안 배양했던 것이 우리 공을 힘 입어 그 보답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셔서도 할 말이 있어 공은 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나라의 운도 새로워져 누린내가 깨끗이 씻겨질 것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거센 물결에 지주(砥柱)가 꺾여버렸으니 그 누가 광란의 물결을 막을 것이며, 천지가 깜깜해졌으니 그 누가 한 줄기 빛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죽음과 삶을 비교한다면 그것은 하늘과 땅, 용과 돼지의 차이와 같습니다. 아득히 저세상으로 가신 분은 아무리 사랑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부끄럽게도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한 사람은 살아 있고 한 사람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감히 만년의 절개를 더욱 가다듬어 시의(時義)를 더욱더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취는 다르지만 의리는 똑같으니, 영혼이 있다면 이 마음을 잘 살피시고 작은 충심을 돌아보아 혼미한 길을 보우해 주소서.
아! 슬픕니다. 흠향하소서.
금계 이근원선생 제문(錦溪先生祭文)
아, 선생께서는 묵묵히 포용하시는 자태와 깊은 학문으로 일찍이 화서(華西) 이항로를 스승으로 삼아 이미 대의(大意)를 깨달으셨고, 중암(重菴) 김평묵과 성재(省齋) 유중교를 섬김에 미쳐서는 진실로 크게 성취하셨습니다. 규모는 크고 원대하며 덕업은 높고 광대하였고, 명철함과 성실함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이론과 실제가 일치했습니다. 학문은 주자(朱子)에게 근원을 두었고 그 맥락은 우암(尤庵) 송시열을 따랐으며, 의암(毅庵) 유인석을 옆에서 모셨고 항옹(恒翁)과 형제 사이였습니다. 마음이 곧은 것은 저울과 같았고 도리에 두루 통하고 정리(情理)에 거스름이 없었으며, 깊고 은미한 이치를 탐구하고 천명하여 다른 사람의 표준이 되어 법도를 제시하셨습니다.
음(陰)이 천지를 지배하는 때를 당하여 마지막으로 남았던 양(陽) 하나마저 없어져 버리자 예악은 똥덩이가 되고 온 세상에 나쁜 무리들이 독을 퍼뜨려 인류의 곧은 기상이 없어졌으니, 기수(氣數)의 변과 세도(世道)의 화가 옛날 그 어느 때와 비교해 보아도 혹독하고도 혹독합니다.
열국(列國)이 윤리를 어지럽힐 때를 당하자 춘추(春秋) 가 지어졌고, 중국이 침략을 당하자 강목(綱目) 이 정리되었고, 건주(建州) 오랑캐가 천자를 참칭(僭稱)하자 화양(華陽 - 송시열(宋時烈))이 그들을 몰아내었고, 양화(洋禍)가 절박해지자 화동합편강목(華東合編綱目) 이 편수되었으니, 삼강이 이로 인해 밝혀지고 오륜이 이로 인해 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에는 주(周) 나라 왕실이 미약하긴 했지만 아직도 왕기(王器)를 지니고 있었고, 주자의 시대에는 강남(江南)이 미약하긴 했지만 한 모퉁이는 보전하고 있었으며, 송자(宋子)의 시대에는 명(明) 나라는 망했지만 우리 동방이 의리를 지키고 있었고, 화서(華西)의 시대에는 사방의 오랑캐가 누린내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으니, 이렇게 큰 변란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없었던 바입니다. 그리하여 한 가닥의 양맥(陽脈)을 보전할 땅이 없고 일통(一統)의 대의를 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의 마음은 여전히 잊지 못해 하시며 천지의 마음을 본받고 성현의 법을 받들어서 명분을 바로잡고 의를 행하여 양을 부지하고 음을 억제하여 광란의 물결을 막아 떠내려가는 것을 방비하셨습니다.
여강(驪江)으로 가던 때에는 백 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았고 저들이 주는 더러운 돈은 죽어도 받지 않았으니, 큰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지필(紙筆)을 받듦에 문장이 넓디 넓고, 말씀을 하실 때에는 언론이 웅대하고 순탄하셨으며, 사람을 가르치시는 데에는 배우는 자의 수준에 맞추어 차근차근 하셨으므로 똑똑한 자나 어리석은 자가 모두 터득함이 있었고, 자신을 지키는 데에는 성심을 다하여 모든 일이 볼 만하였으며, 사악함을 막고 도를 지켜 만세에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아, 선생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세상에 태어나셔서 여든이 될 때까지 궁박한 시골에서 생활하셨습니다. 나아가서 백성들에게 은택을 줄 수 없자 물러나 스스로 계발하였으니, 이는 시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소자는 국가에 변란이 처음 생겼을 때에 남한산성에서 의병을 모집했으나, 끝내 싸움에 지고 중국으로 들어가 1년이 넘게 그곳에 있었습니다. 온갖 고난을 다 겪은데다 굶주림까지 겹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인하여 이시명로부터 책을 들고 문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외람되게 가르침을 받았으나 자신을 돌아보면 스스로 두려워 몸을 어루만지며 감회에 젖습니다.
아! 이제 어느 곳으로 향하시렵니까. 한 줄기 눈물로 작별을 대신하고 영결을 해야 합니다. 저 개인을 위해 통곡하고 이 세상을 위해 통곡하자니 산하(山河)도 슬퍼하고 초목도 비통해 합니다.
삼가 바람건대 영혼께서는 밝게 강림하소서. 아! 슬픕니다. 흠향하소서.
성재 유중교선생 묘의 통문(省齋先生墓儀通文)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재(省齋) 유중교 선생은 화서(華西) 이항로 문하의 적전(嫡傳)으로서 살아계실 때에는 영광을 누리셨고 돌아가시자 모두들 슬퍼하여 우뚝이 백세의 스승이 되셨으니,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은 덕(德)을 아는 모든 자들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의 나무가 이미 크게 자란 지금까지도 무덤에 석물(石物)을 갖추지 못했으니, 비록 세상 일이 소란스러워 경황이 없었던 때문이긴 하지만, 존경하고 친애하는 사림(士林)의 입장에서는 어찌 마음속으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이 변란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하고 있으니, 인순하며 방과하다가는 끝내 우리의 정성을 바치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석인(石人)과 석수(石獸)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겠지만, 희생을 묶어놓을 묘갈(墓碣)과 제수를 올려놓을 반석(磐石)은 없어서는 안 되겠다는 쪽으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일치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모든 집사들께 통지하는 바이니, 그 일에 관한 책임을 거절하지는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형편에 따라 도우셔서 일을 마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미년(1919년) 10월
금계 이근원선생 묘의 통문(錦溪先生墓儀通文)
삼가 생각건대, 우리 금계 이근원 선사(錦溪先師)의 묘의(墓儀)가 대략 이루어지긴 했습니다만, 선사가 일생 동안 덕을 지극히 하여 세상에 항거하고 도를 지켜 후학을 열어 주신 그 불후의 공업은 옥돌에 새겨겨 영원히 전해져야 마땅한데 아직 갖추지 못하였으니, 한결같이 섬겨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희들은 형세가 외롭고 힘이 부족하여 자력으로 마련할 수 없으므로 여러 군자들이 형편껏 도와주시는 도움을 받아야만 일을 마칠 수 있겠기에 이에 삼가 알리는 바입니다. 이 글을 받는 날에 반드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먼저 생각해 냈구나. 하시고 함께 정성을 바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集義堂遺稿 終
갑자년(1924년) 2월
集義堂遺稿附錄
유사(遺事)
명 나라 영력(永曆) 2백 17년(1823) 계해 철종대왕 14년 9월 15일에 부군께서 서울의 집에서 태어나셨다.
고종 을미년(1895년) 11월에 조정에서 중대한 명령을 내렸는데,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를 깎고 복장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온 나라가 놀라 들끓고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부군께서는 광주(廣州)에서 의병을 일으키셨다. 병신년(1896년) 정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웅거하시다가, 2월에 장기렴(張基濂)에게 패하자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제천(堤川)으로 가서 의암 유인석선생을 뵈었다.
을미년·병신년(1895년·1896년)의 극심한 화란을 겪은 나머지 살림살이가 완전히 거덜이 났으므로 정유년(1897년) 가을에 양주(楊州)의 새집으로부터 부원군(府院君) 묘의 재실로 거처를 옮겼다. 무술년(1898년) 정월에 이곳을 떠나 요동으로 들어가 의암 유인석 선생에게 대학과 맹자를 배우고 가을에 돌아오셨다.
원래 술을 좋아하여 두어 말 정도는 거뜬히 드셨는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부터는 일체 끊고 입에 대지 않으셨다. 큰 갓에 소매가 넓은 도포를 입고 평소 유유자적하셨고, 질병이 있을 때라도 두건·버선·행전을 벗는 법이 없으셨다.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예를 갖추셨으며, 의를 숭상하고 옛 것을 좋아하셨다. 비록 당신보다 나이가 수십 세 아래라 할지라도 덕이 있는 자에게는 마치 수업(受業)하는 자처럼 자신을 낮추셨다.
천성적으로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시배(時輩)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대면조차도 하지 않으셨다. 중국과 오랑캐를 크게 분별하고 사람과 짐승을 크게 나누어, 막기를 특별히 엄하게 하여 집안에서는 서양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몸에는 서양 물건을 착용하지 않으셨다. 늘 반복해 말씀하기를,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천지의 큰 상도(常道)이며, 자기의 사심을 버리고 하늘이 준 양심을 갖는 것은 성인의 중요한 법이다. 지금 세상의 학자들이 이것을 버린다면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셨다.
신축년(1901년) 3월에 내가 어머니 이씨(李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임인년(1902년) 정월에 집안 살림을 꾸려갈 사람이 없음으로 인하여 파산하자, 부군께서 나에게 원주 (原州)에 있는 재종숙 댁으로 가서 글을 읽으라고 명하셨다.
삼융당(三戎堂) 원공[元公 - 원용팔(元容八)]이 의병을 일으키던 때에 부군께서 이미 동참하고 계셨는데, 마침 스승의 명이 있어서 남쪽으로 갔다가 한 달여 만에 돌아와보니 원공(원용팔)이 이미 서울로 잡혀간 뒤였다. 이에 부군께서 자수하기를, 나도 함께 모의하였으니 의리상 혼자 살아있을 수 없다. 나도 함께 엄중한 법률로 처벌해 달라 하였으나, 하루 낮과 밤이 지나도록 가부간의 대답이 없이 감감소식이었다. 그러자 문을 밀치고 그대로 들어가 원공(원용팔)을 만나서 평상시처럼 안부를 물으니 원공(원용팔)이 속히 나가라고 권하였다. 부군께서는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어서 의분에 복받쳐 말하다가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원공(원용팔)이 이에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적의 칼날에 다 죽는다면 마음이 통쾌하겠는가. 뒷일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 하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쫓겨났는데, 연초(煙草) 한 근과 밥 한상을 원공(원용팔)에게 보내니 원공(원용팔)이 사람을 시켜 감사를 표하였다.
을사년(1905년) 겨울에 의암(毅庵) 유인석이 나라를 떠나려고 하셨으므로 내가 부군을 모시고 서쪽으로 곡산(谷山)까지 갔었으나, 끝내 결행하지 못하셨다. 의암 유인석을 따라 춘천(春川) 가정(柯亭)으로 들어가서 화동사(華東史) 간행하는 일을 옆에서 도우셨다.
면암(勉庵) 최익현(崔先生)이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키고서 의암 유인석에게 사람을 요청하자 의암 유인석이 부군에게 가서 보라고 명하셨다. 그곳에 도착하자 면암 최익현이 소토장(召討將)으로 삼으셨다. 한 달여 만에 면암 최익현이 잡혀서 전주감영(全州監營)에 갇혔는데, 3개월 동안 입에서 욕이 끊기지 않고 말과 기색이 매우 엄하니 저들도 차마 해치지 못하였다. 풀려난 후에 돌아와서 개천(价川) 숭화재(崇華齋)에서 의암 유인석을 만났는데, 기색과 말투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으니 의암 유인석이 감탄하였다.
운강(雲崗) 이공 이강년(李公)이 지평(砥平)의 안기영(安基榮) 집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 부군도 함께 모의하였었다. 의암 유인석이 부군으로 하여금 강릉(江陵)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확장하게 하였는데, 강릉에 도착해서 미처 거사하기도 전에 이공(이강년)이 싸움에 졌으므로 그만두셨다.
병오년(1906년) 12월에 면암 최익현선생의 상여가 일본 대마도로부터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는 포천(抱川)으로 달려가 문상하였다. 제문(祭文)을 짓고 3개월 동안 상복을 입으셨다.
정미년(1907년) 정월에 가평(加平) 조종암(朝宗巖)으로 가서 대통단(大統壇)에 참배하셨다.
의암 유인석의 명을 받들고 강릉 봉평(蓬坪)으로 가서 율곡 이이선생(栗谷先生)의 초상을 봉안하셨다.
살림살이가 군색하여 간혹 끼니를 잇지 못하는 적도 있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여겨 한 번도 남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셨다. 간혹 위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것이 내 분수이다 라고 하셨다.
6월에 의암 유인석이 나라를 떠났는데, 일이 매우 공교롭게 되어 모시고 갈 수 없었다. 적도들이 나라를 팔아먹어 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부군께서 홍천(洪川)에서 의병을 일으키셨다.
집안에 광패한 자가 있어서 까닭 없이 욕을 보였는데 부군께서는 듣고도 못들은 척하셨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어른을 능욕하는 것을 보니 필시 죽을 사람이다 하시면서 평소보다 더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두어 달도 채 못 되어서 그 사람이 과연 죽었다. 그러자 직접 염(殮)을 하고 장례를 치뤄주셨다.
선대(先代)의 분묘가 경기 지방에 있어서 거리가 4백, 5백 리나 되는데도 봄 가을로 반드시 가서 성묘하셨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다.
집에 계실 때에 자식들과 조카들을 가르치시기를, 사람이 학문에 종사하지 않아서 도리를 알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하시고, 종질 학모(學模) 무리로 하여금 금계 이근원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게 하셨다.
선대의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매우 애통해 하셨으며, 어쩌다가 객지에 나가 있는 관계로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반드시 날이 밝을 때까지 앉은 채로 계셨다.
일에 임해서는 조금도 피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었으며,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으셨다.
을묘년(1915년) 11월에 요동(遼東)으로 달려가 의암 유인석의 빈소에 조문하였다. 이때 한창 혹한의 날씨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서 갔으므로 금계 이근원선생(錦溪先生)께서 시를 지어 찬미하였다.
기미년(1919년) 겨울에 사우(士友)들과 의논하여 경비를 모아 성재 유중교선생의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경신년(1920년) 8월 15일에 준공하였다.
11월 7일에 금계 이근원선생의 사판(祠板)에 참배하고, 금초(錦樵) 오진사(吳進士)를 면암 최익현 사당에 배향하는 일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신유년(1921년) 봄에 양식이 부족하여 하루에 한끼 밖에 들지 못하셨다. 내가 걱정하였더니 부군께서 경계하시기를, 굶어 죽는 일은 매우 작고 절개를 잃는 일은 매우 크다 하시고는, 필사(筆師) 이명구(李明求)을 시켜 쓰게 한 후에 앉아 계시는 방의 벽에 걸어두셨다.
사람을 접하고 일을 처리함에 곧고 거짓이 없으셨고, 상대의 말에 합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다시는 그와 시비를 따지지 않으셨다. 그러나 큰일에 임하여서는 끓는 물로 달려가거나 불속으로 뛰어드는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임무로 여기셨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는 낭패스럽다고 할 만한 점이 많았었는데, 의암 유인석선생을 만난 이후로 사람의 도리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학문하는 선비에 대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공경함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셨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마음이 항상 편안하여 가슴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매서운 기상이 눈빛이나 얼굴에 나타났다.
평소에 육도(六韜) 와 삼략(三略) 읽기를 좋아하여 그것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의암 유인석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병을 일으켰던 때에 많은 사람을 썼지만 김 아무개만이 용병술을 조금 알고 있었다 하셨다.
스승의 명으로 사방에 심부름을 다녔는데, 여관에서 간혹 아무개 아무개는 인품과 학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길이 가깝고 먼 것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방문하고야 말았다.
집안에 의암 유인석, 금계 이근원 두 선생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놓고는 매달 초하루마다 심의(深衣)를 입고 큰 띠를 띠고서 배알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집의당행장(集義堂行狀)
공의 성은 김씨고, 휘(諱)는 태원(泰元), 자는 춘백(春伯), 호는 집의당(集義堂)이니, 선조는 해풍(海豊) 사람이다. 고려 예부 상서(禮部尙書) 휘숭선(崇善)이 시조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휘 니(泥)는 현감 벼슬을 지냈고, 휘 택추(宅秋)는 북우후(北虞候)로서 임진 왜란을 당하여 장단(長湍)에서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휘 귀건(龜建)은 통제사(統制使)였다. 그 뒤로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는데, 휘 상렬(相烈)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이가 휘 경(熲)을 낳았으니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이가 휘 낙철(樂喆)을 낳았는데, 공의 고조와 증조, 조부이다.
공은 성균관 진사인 아버지 휘 집(鏶)과 어머니 재령(載寧) 이씨의 사이에서 철종 14년 계해(1863) 9월 15일에 서울 주자동(朱子洞) 사저에서 태어나서, 임신년(1932) 3월 5일 정오에 원주(原州: 지금의 寧越)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70세였다. 원주 공순원(公順院) 한남산(漢南山) 유좌(酉坐 :동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뜻과 기개가 크게 뛰어났고 위풍이 당당했으며, 목소리는 크고 맑았다. 관례를 올리고나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별군직(別軍職)으로 첫 벼슬에 올랐고, 출육(出六)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는데, 동료들이 기개와 절조가 있다고 칭찬하고 허여하였다.
고종 을미년(1895)에 조정에서 단발하고 변복하라는 명을 내리자 온 나라 사람들이 놀라 들끓었고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공은 이 해 11월에 광주(廣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병신년(1896) 1월에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2월에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배당하여 군사를 이끌고 제천(堤川)에 이르렀다. 이때에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선생이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전한다는 기치를 세우고 온 나라 고무시키면서 제천에 머물러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공은 휘하의 장수가 되어 백성과 군사를 모집하여 이리저리 돌격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술년(1898) 1월 요동(遼東)으로 들어가 의암 유인석선생에게 [대학(大學)]과 [맹자(孟子)]를 배웠다. 가을에 돌아와 지평(砥平) 금리(錦里)에서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선생이 일찍이 공이 의지가 굳세고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한다고 칭찬하였다.
신축년(1901) 3월에 부인 공인(恭人) 이씨가 죽으니, 안살림 살이를 할 사람이 없어 끼니를 잇기 어려워져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며 고생을 하였으나 조금도 근심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이 없었다. 오직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일에 뜻을 세워 매양 자식과 조카들에게 경계하기를, 오늘날의 의리는 사람과 금수의 큰 한계보다 더욱 엄하니, 머리를 깎은 사람들과는 절대로 대면하지 말라고 하였다.
을사년(1905) 9월에 삼계당(三戒堂) 원용팔(元容八)이 의병장으로서 서울 감옥에 갇히자, 공은 혼자만 살수는 없다는 의리로 함께 중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저들은 가부간에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공은 밀어제치고 곧장 들어가 원공(원용팔)을 만났는데 말이 강개하였다. 얼마 뒤에 저들에게 쫓겨났다.
병오년(1906) 3월에 의암 유인석선생의 명으로 홍주(洪州)에 가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을 만나 소토장(召討將)이 되었는데, 한 달 남짓 만에 전주(全州) 감영에 갇혔다. 그런데 갇힌 3개월 동안 준엄한 어조와 얼굴빛으로 계속 꾸짖었다. 풀려나자 다시 개천(价川) 숭화재(崇華齋)에서 의암 유인석선생을 보이니 의암 유인석선생은, 공이 의를 굳게 지켜 꺾이지 않은 것을 칭찬하면서 집의(集義) 두 자를 써서 주어, 그 당(堂)에 현판으로 걸게 하었다. 이 해 12월에 면암 최익현선생이 일본 대마도(對馬島)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달려 갔다.
정미년(1907) 1월에 가평(加平) 조종암(朝宗岩)에 가서 대보단(大報壇)에 참배하고서, 춘천(春川) 가정(柯亭)으로 들어가 (화동사(華東史)) 간행하는 일을 도와 6월에 끝마쳤다. 고종께서 안팎의 적이 침범하고 핍박하는 치욕을 당하다가 마침내 왕위를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자, 공은 거듭 의병을 일으켜 홍주(洪州)를 격파하였으나 세력이 약하여 떨치지 못하였다. 이에 단기(單騎)로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의 진영에 들어가 일을 이룰 것을 기약했으나 이강년이 붙잡혀 살해당하자 일이 모두 와해되었다.
을묘년(1915) 11월 의암 유인석선생이 요양(遼陽: 서간도) 회인(懷仁)에서 돌아가시니, 공은 도보로 달려가서 조곡(弔哭)하였다. 돌아와 몇 년도 채 안되어 또 금계 이근원선생의 상사에 달려 갔으니, 바로 무오년(1918) 2월이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비록 쌀이 떨어진 때라 할지라도 편히 처하였으며, 선대의 묘소가 4백, 5백 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한 평생 봄 가을로 빠지지 않고 반드시 가서 성묘하였다. 더러 여관에서 선대의 기일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옷과 갓을 차려입고 앉아 밤을 새웠다. 사문(師門)의 일로 군현(郡縣)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조금도 괴로워 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나라 안에 덕망과 학문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원근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찾아가서 만났다.
젊어서는 일찍이 술을 좋아하여 몇 말의 술을 사양하지 않았으나 의암 유인석선생에게 경계의 말씀을 듣고부터는 곧바로 술을 끊고 늙기까지 조금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의관을 매우 거룩하게 하여 아무리 심하게 병이 들어도 일찍이 두건과 버선, 행전을 벗은 적이 없었다.
서사(書社)에 의암 유인석, 금계 이근원 두 선생의 화상을 봉안하고 매달 초하루에 심의(深衣)와 대대(大帶) 차림으로 봉심(奉審)하고 참배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학문에 종사하지 않아 도리를 모른다면 곧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덕을 좋아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도량이 천성에서 나왔으므로, 수십 년 연하 사람이라 하더라도 높일만한 학업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무릎을 꿇었으니,아! 공에게는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심과 선조를 받드는 효성, 스승을 위하는 정성과 가난에 처하는 편안함,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겉을 꾸미는 일이 없었고 좋지 못한 풍속을 바로잡는 기풍은 있었는데, 고금에서 찾아봐도 공과 짝할 만한 자가 아마 드물 것이다.
세상에 이른바 학식이 넓고 잘 기억하여 변려문(騈儷文)에 능숙한 문사로서 진실로 실천의 공을 터득함이 없는 자는 공의 죄인이라 하겠다. 공이 한가할 때에는 높은 관을 쓰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흰머리에 지팡이를 집고서 많은 선비들의 모임이나 예장(禮場)의 뒤를 배회했는데, 바라보면 늠름한 대장부임을 알 수 있었다. 또 사람의 아버지와 형이 된 자의 표준이 될 만한 큰 공적이 있었다.
대를 이을 자식으로는 성모(性模)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기질이 약하여 병에 잘 걸렸으니 으레 사랑에 빠져 제멋대로 하게 놔두었을 듯하다. 그러나 의식 걱정도 논하지 않고, 생사의 염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이 먼 것도 따지지 않고 성모로 하여금 궤장(궤杖)을 들고서 해서(海西)와 관북(關北)에서 의암 유인석선생을 시종하게 하였으므로, 십 년을 한결 같이 경서를 연구하고 예(禮)를 강론하였다. 의암 유인석선생이 나라를 떠나자 금계 이근원선생에게 사사하면서 나라 안에 덕 있는 선비와 두루 교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식견이 높아지고 지조가 굳건해졌다. 나는 온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금방 죽게될 상황이라도 지조가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예천(醴泉)에는 근원이 있고 영지(靈芝)에는 뿌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여형공(呂滎公: 송 나라 사람. 이름은 希哲, 자는 原明으로 正獻公의 큰 아들이다)의 기국(器局)이 이루어진 데에는 그 아버지 정헌공(正獻公: 송나라 재상. 이름은 公著, 자는 晦叔이며, 정헌은 그 시호이다)의 힘이 어찌 적다고 말하겠는가.
큰 사위는 박원양(朴源陽)이고, 막내 사위는 이돈회(李敦會)이다. 승순(勝順)과 승완(勝完)은 원양이 낳았고, 병일(秉一)과 병삼(秉三)은 돈회가 낳았다. 친손자의 재롱을 보지 못했으니, 또한 공에게 닥친 불행 중의 하나이다.
주자(朱子)가 말씀하시기를, 학문이 없으면서 기개와 절조가 있는 사람은 괜찮지만, 학문이 있으면서 기개와 절조가 없는 사람은 볼 것 없다라고 하셨다. 내가 공을 30년 동안 형처럼 섬긴 정의(情誼)라서 감히 좋은 사이라 하여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기개와 절조는 백대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 수있다.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선생이 스스로 지은 지(誌)에 이르기를, 온 천하가 오랑캐인데 나만이 홀로 중화이고, 온 천하가 금수인데 나만이 홀로 사람이다 라고 하였는데, 나는 공의 일생의 단안(斷案)이 이 말에 있어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삼가 이상과 같이 차례대로 엮어 후세의 지언(知言) 군자를 기다린다.
영력(永曆) 기원 오계축(1933) 4월 임오일에 동문 덕수(德水) 이규현(李奎顯)이 삼가 짓다.
묘표 (墓表)
여기 원주(原州: 지금의 寧越) 금마둔(金馬屯) 국사봉(國士峯)의 동쪽 기슭 사상포(泗上浦)의 갑좌(甲坐: 서향) 언덕은 집의당(集義堂) 김공(金公) 휘(諱) 태원(泰元), 자 춘백(春伯)의 묘소이다. 공은 해풍(海豊) 사람으로, 예부 상서(禮部尙書) 휘 숭선(崇善)이 시조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휘 택추(宅秋)는 북우후(北虞候)로서 임진 왜란을 당하여 장단(長湍)에서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휘 귀건(龜建)은 통제사(統制使)였다. 그 뒤로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는데 휘 상렬(相烈)은 통덕랑(通德郞)을, 휘 경(熲)은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휘 낙철(樂哲)이 공의 고조와 증조, 조부이다. 아버지는 휘 집(鏶)인데 성균관 진사였고 어머니는 재령(載寧) 이씨로서, 철종 14년 계해(1863) 9월 15일에 서울의 사저에서 공을 낳았다. 관례를 올리고 나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별군직(別軍職)으로 첫벼슬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아, 을미 사변은 천지가 생긴 뒤로 일찍이 없었던 큰 변괴였다. 국모는 피살되고 임금은 모욕을 당했으며, 신하와 백성들은 형체를 훼손하여 우리 나라에 부쳐 있던 중화의 문명과 성현의 큰 도가 따라서 끊어졌으니, 난적과 오랑캐의 화가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는데도 온 나라가 고요하였으되 오직 산림에 은둔해 있던 선비들이 예(禮)를 버리고 의병을 조직하여,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으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 [춘추(春秋)] 의리를 행하였다. 그러나 운수가 궁하여 일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의(大義)가 세상에 환하게 드러나니, 해와 달과 빛을 다투고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으니 그 성패는 논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을 16년 간 연장시키고 2천 만의 의발(衣髮)을 보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난적은 주벌해야 하고 오랑캐는 물리쳐야 하며, 중국은 높여야 하고 성현의 도는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 누구의 공인가. 당시에 우리 선인 의암(毅菴) 유인석(柳麟碩) 선생이 실로 주장을 하였고, 사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이 곳곳에서 기치를 세우고 일어나 간과 뇌가 흙에 범벅이 되도 돌보지 않았으니, 5백 년 열성조(列聖朝)에서 배배양한 덕택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
공은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에 들어가 웅거하였다가 군대를 이끌고 선생께 귀의하여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위험과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았다. 선생이 요동(遼東: 서간도)으로 들어가서 돌와아서 회복할 터전을 닦으며 기다리고 있을 때에 미쳐 공은 또 의암 유인석선생을 모시고 주선하며 지성으로 힘쓰니, 선생이 집의(集義) 두 자를 써주어 면려하였다. 뒤에 귀국하여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니, 선생은, 공이 의지가 굳세고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 한다고 칭찬하였다.
을사년(1905)에 삼계당(三戒堂) 원공[(元公), 원용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와 함께 거사를 도모하였고, 병오년(1906)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소토장(召討將)으로 기용하였는데, 적에게 잡히자 준엄한 어조와 얼굴빛으로 저들을 크게 꾸짖었다. 정미년(1907)에 또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과 함께 거사하였으나 이공이 해를 당하여 일이 다시 와해되었다.
공은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과 사람과 금수의 구별에 엄격하여, 항상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며, 천지의 큰 법을 궁구하여 자기의 사심을 없애고, 상재의 뜻을 받드는 것이 성현의 요법(要法)이다 라고 한 훈계를 암송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에 종사하지 않아서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곧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고 하였다.
임신년(1932) 3월 5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0세다.
공은 풍체가 뛰어난 장부이며,용모가 수려했고 의기가 당당했으며, 목소리가 크고 맑았다.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고 굳세어 굽힐 수 없는 기개가 있었다. 선조를 받드는 효성과 스승을 위한는 정성, 선현(先賢)을 사모하는 돈실함과 가난에 처하는 편안함,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기풍과 자식을 가르치는 데 엄격함은 모두 다 사람들이 경탄하고 감복하였다. 공이 군신간의 큰 의리와 중화와 오랑캐의 큰 한계에 대해서는,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돌아보지 않고 만번의 죽음도 불사하면서 성토하였으니, 이것이 공이 위대함이 되는 이유이다. 공의 기술할 만한 수행은 가장(家狀)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이상과 같이 그 대략만을 들었으나 후세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공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은 공인(恭人) 이씨이다. 외아들 성모(性模)는 의암 유인석과 금계 이근원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했는데, 학문에 종사한 수십 년 동안 몹시 힘들고 어렵다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식견이 탁월하고 지조가 꿋꿋하여 스승과 벗에게 사랑과 존중을 받았으니, 공은 자식을 잘 두었다고 할 만하다. 두 명의 사위는 박원양(朴源陽)과 이돈회(李敦會) 이다. 승순(勝順)과 승완(勝完)은 박씨가 낳았고, 병일(秉一)과 병삼(秉三)은 이씨가 낳았다.
성모가 나 제함(濟咸)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짓게 하니,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부득이 하여 삼가 이 글을 묘표 뒤에 쓴다. 아, 지금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금수와 도깨비로 화하여 도리를 운운하고 삼강 오륜을 운운할 곳 조차 없게 되었으며, 다시 장차 다 어육(魚肉)이 되려하니, 비통하고 비통해서 차마 말할 수 없조차 없다. 만약 공이 살아 있었다면 어떤 심정이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목숨을 버리고 춘추의 의리에 종사하였으니 막대한 변괴에 막대한 의리로다.
영력(永曆) 기원 후 육갑자(1954년) 3월 중휴(中休)에 후생 고흥(高興) 유제함(柳濟咸)이 삼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