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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吏曹)에서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석우(趙錫雨)의 진휼(賑恤)을 마친 장계(狀啓)로써 복계(覆啓)하여, 비안 현감(比安縣監) 조영화(趙永和)·함안 군수(咸安郡守) 이지민(李志敏)에게 승서(陞敍)의 은전(恩典)을 베풀고, 원납인(願納人) 청하(淸河)의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동신(李東信)은 실직(實職)을 제수하며, 경주(慶州) 유학(幼學) 홍인섭(洪寅燮)은 사인(士人)이므로 전례에 의하여 7품직(七品職)을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하고, 기장(機張)의 전 인의(引儀) 김종렴(金宗濂)과 장기(長鬐) 유학(幼學) 송동한(宋東翰)은 우선 참하(參下)의 군함(軍銜)에 붙이었다.
자료 4: 청하면 유치리 지명 유래 발원지인 삿갓봉과 호학산이 이루는 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유치이[柳川], 황배이, 서계리(西溪里)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최근 황배이 마을에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유천과 황배이는 마을이 없어졌습니다. 상옥, 청송으로 가는 도로가 이 마을을 지납니다. 유치이는 제일 안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던 곳입니다. 최근 아래쪽 황배이를 가로지르는 유계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자 덕성리, 미남리 등지에 마련된 이주단지로 떠났습니다.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스님이 이 마을 출신입니다. (* 참고로 지관스님은 판윤공후 청와공 후손으로기억됩니다. 아마 제가올린 자료중 지관스님에 대한 자료를 보시면 도움이되실듯 합니다. 또 인터넷 검색창에 청아면 유계리 지관스님을 검색해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이 마을은 예부터 조홍감이라는 감이 유명합니다. 조홍감은 9월에 홍시가 되는데, 청도반시처럼 씨가 없습니다. 황배이는 황배이골 입구에 있는 마을로 누런색을 띤 바위에서 따 온 이름입니다. 월성최씨 집성촌으로 15가구 정도 살았으나 유계저수지 둑이 이 마을 중앙을 지나면서 5년 전에 모두 이주하였습니다. 황배이골 바위에는 가선대부오위장(嘉善大夫五衛將) 이동신(李東信) 공이 이 골짜기에 머물면서 새긴 ‘李東信’, ‘愼溪’, ‘遯跡洞’ 등의 글씨가 있습니다. ‘신계(愼溪)’는 이동신의 아호(雅號)이고, ‘둔적동(遯跡洞)’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한 곳’이란 뜻으로 새긴 글씨입니다. 황배이골에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비스무스 광산이 있었는데, 폐광 속이 시원하여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입니다.
서계리는 파평윤씨 집성촌으로서, 조선 명종 원년(1545) 을사사화 때 황해감사로 있던 윤상문(尹尙文)이 이 고을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이름이라 합니다.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명문거족답게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마을에는 숙종~영조 때의 무신인 윤백주(尹百冑)와 그의 아들 윤빈(尹殯)을 모신 사당인 상덕사(尙德祀)와 죽림사(竹林祀)가 있습니다. 윤백주는 1692년 이 마을에서 태어나 29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영조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면서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이 되었습니다. 재임 중에 양친을 여의었는데, 귀향 후 3년 동안 피눈물로 예를 다하니 사람들이 우러러 칭송하였다 합니다. 그가 죽은 후1758년 영조는 교지를 내려 그를 위하여 사당을 짓게 하고, 병조참의에 추증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윤빈은, 1755년 함경도 일원에서 혜적(惠賊)이란 도적떼가 일어나 변방을 어지럽히자, 병조의 천거에 의해 원수(元帥)로 출정, 도적떼를 토벌한 후 개선하니, 영조가 친히 장군의 손을 잡고 “경은 정히 아버지의 용맹을 닮았도다.”하며 칭찬하고 추충양무원종공신(推忠揚武原從功臣)에 제수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정조는 1798년에 교지를 내려 사당을 짓게 하고 장군의 공을 기렸습니다.
자료 4 : 유계리 마을을 기억하신 분들의 마을회상과 옛 마을 모습
관송전 08.08.24. 23:22
마지막 사진 2장은 저수지가 들어서기 전(10년 전)에 제가 찍어 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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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08.08.25. 08:06
유계리의 옛모과 오늘날의 풍성함이 넘치는 유계리의 모습 과 전례를 잘 봅니다..옛날 부터 소장하신 귀한사진..정말 감탄합니다..교감선생님의 모든 사물의 예리함 덕분에 정말 고향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수있어 참 좋습니다..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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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co 08.08.25. 11:51
황베이,유치이.서계리 등 어릴적 불렀던 친숙한 단어들 입니다.친한친구의 원고향이 유천이라 친구고향집 감나무에 감따던 옛날이 문득 생각나네요.아름다운 사진과 내력의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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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총장 08.08.25. 12:45
제가 중학교때는 황배이까지 나무 마짐을 간적도 있고, 때론 나무를 하는데 따라간적도 있는데,황배이, 유치이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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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08.08.27. 12:08
서부 초등학교 졸업생이라 유계리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황배이 골짜기도 오랜 추억 속에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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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08.08.27. 17:24
마을을 수몰하여 저수지를 만드는것이 실리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고향이 물에 잠긴 마을사람들은 착잡할것 같네요. 재경동문들중에 가끔 모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을때, 유계리가 고향인 동문은 아쉬워하며 근처를 한번 둘러보고 오는것을 보았습니다. 항상 곁에 있을때는 몰랐던게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나면 소중함이 더한것같습니다. 고향의 푸른들판을 바라보니 마음이 푸근해지네요. 젊은이들이 떠난 고향에 남아계신 나이든 어른들의 삶이 너무 고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유계리 마을뒤로 보니는 저 둑이 유계저수지 둑이라고 하네요
자료 5: 신계공이 사셨던 마을로 보이는 황배이 마을 유래
황배이·황암리 황배이골 어귀의 바위가 누른색인데 연유한 지명이다. 월성최씨 집성촌이다. 광산골에는 조선조에 이동신공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서 한때 비스무스 광산이 있었다. 여기서 골짝 깊이 들어가면 상사바위 입구 기암절벽 사이에 성문과 같이 틔어진 곳이 있어 위명동이라 부른다. 임란 때 이 안골에 피난하고 있던 주민들이 이곳에는 위병을 돌과 바위로 무찔러 쫓으니 울며 달아났다고 하여 위명동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이 안골 깊은 곳에 1943년 법성사가 건립되어 있는데, 이 절터에는 나대의 절 황방사가 있었다 한다. 청하면의 농업용수 학보를 위한 유계저수지가 축조중인데 완공되면 유천·황암은 수몰지구가 된다.
자료 6: 다음지도 청하면 유계리 지역 모습
지도에 보시면 아직 물은 채워지지 않았지만 유계저수지 모습을 보실수 있을것 입니다. 아마도 유천리 황배미 마을등이 유계저수지 축조로 인하여 수몰되었지 않았나 생각되구요 수몰로 인하여 마을과 터전을 잃었던 많은 주민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리며 다시한번 보내주신 질문으로 인하여 청하면 유계리 지역을 잘 살펴 볼수 있었답니다.
질문을 보내주신 종친님에게 다시한번 감사 말씀 드립니다. 부족한 자료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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