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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임시정부의 노선 갈등>
임시정부 내의 갈등은 이념적으로 보면 독립의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은 크게 세 갈래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외교론, 실력 양성론, 무장투쟁론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크게 갈등을 빚은 것은 외교론과 무장투쟁론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구한말 국내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맞선 의병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일제에 밀려 점점 국외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의병 운동의 구심점은 조선 후기 유학의 거두인 이항로의 제자 유인석이었습니다. 유인석은 친일내각의 단발령 등에 맞서 을미의병을 거병하였으며, 일제의 군대해산 후에는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였으며, 1908년 결국 연해주로 이동하여서는 이상설, 이범윤과 함께 대한13도의군을 이끌었습니다. 이 때 안중근 의사도 그 일원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반격에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연해주 한인들의 후원으로 무장투쟁은 지속되었습니다. 최재형, 문창범 등이 주된 후원자였으며, 독립군의 지도자는 바로 이동휘였습니다. 이동휘는 그 자신 구한말 군인 출신으로 독립의 방략은 오직 무장 투쟁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에 크게 감화를 받고, 레닌 정부로부터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당시 식민지 국가의 해방을 공약하고 실질적 지원에 나선 서구 제국으로는 러시아가 유일하였습니다. 더욱이 일본은 러시아 혁명을 방해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병하기도 하였듯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동휘는 다른 노령 한인들이 주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찍이 사회당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동휘는 소련과 동맹하여 일본과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 레닌 정부와 사회당은 1918년 ‘한로동맹’을 체결합니다. 세계사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최초로 동맹을 체결한 사례라고 합니다. 나아가 이동휘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라는 지위를 활용하여 임시정부를 사회당 정부로 만들 희망도 품었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임시정부라는 간판을 이용하여 소련으로부터 가능한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외교론의 대표는 이승만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당시 우리의 역량이 무력 투쟁을 감행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비록 나중 일이긴 하지만, 청산리 대첩의 성과가 이후 만주의 경신참변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룬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무장투쟁이란 민족의 희생만 가중시키는 처사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신 이승만은 미국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태평양의 패권을 두고 일본은 미국과 충돌하게 될 수밖에 없고, 미일 전쟁이 개시되면 독립의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승만은 원래 고종의 전제적 통치에 반기를 든 독립협회의 소장 급진 애국자였습니다. 고종을 몰아내고 입헌군주제 혁명을 도모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도움과 당시 한성재판소 담당 사법관이었던 함태영의 선처로 이승만은 감형될 수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제3대 부통령으로 함태영을 지명함으로써 그에 보은합니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서, 집필, 영어 학습에 열중하였습니다. 그 당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러시아에 의존하였던 고종은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마침 미국이 러일 강화회담인 포츠머스 회담을 주재하게 되자, 고종은 미국의 도움을 청하고자 특사를 파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그 특사가 됩니다.
이승만은 큰 기대를 품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에서 국무장관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대통령의 특사인 태프트(William Taft)를 만나 대통령에 대한 소개장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도 만납니다. 이들은 모두 이승만 일행에게 좋은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이승만은 감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태프트는 일본의 외상 카쓰라와 필리핀에 대해서는 미국의 권리를 한국에 대하여는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는 밀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승만의 방미는 성과가 없었고, 대신 미국에 머물러 공부를 더 하기로 하였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차례로 공부하며 ‘국제 공법’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 총장은 국제정치학 교수 윌슨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이렇게 윌슨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한인들이 많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이 함께하였습니다. 박용만은 열혈 민족지사로서 구한말 일본의 토지 침탈에 저항하다가 수감되었고, 감옥에서 이승만을 만났던 것입니다. 둘은 옥중에서 의형제를 맺었고, 박용만은 이승만을 따라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박용만은 이승만과 달리 무장투쟁론자였습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결국 결별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과 박용만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주도권을 두고 격렬히 대립합니다. 결국 이승만이 박용만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형국이 됩니다.(최영호, “이승만의 하와이에서의 초기활동”, 유영익, 이승만 연구, 63-98쪽), 이후 박용만은 중국 북경으로 가서 신채호와 함께 무장투쟁을 도모하며 이승만 비난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교육 사업을 하며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아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미국 감리교단 소속으로 출발하였으나, 이후 교단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볼 때, 미국은 세계 최강이었을 뿐 아니라 최고의 문명국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신하였습니다. 또한 아직 카스라-태프트 밀약의 ‘배신’에 대하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44쪽). 105인 사건 때에는 미국에 호소하여 동지들을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파리 평화 회의에의 참석코자 하였으나 윌슨 행정부는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할 정도로 미국을 신뢰하였습니다.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서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의 대립은 어쩌면 당시 떠오르는 두 열강 소련과 미국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 홀로 독립할 역량이 없었고, 우방의 도움이 절실하였습니다. 마침 소비에트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한 레닌은 국제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모든 식민지의 해방을 공약하였고, 러시아 자신의 식민지를 해방시키고 불평등조약을 해소하였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건국 이념인 자유의 정신에 입각하여 유럽의 구 제국주의와의 차별화를 추구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선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동북 아시아에서,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지사들이 러시아 아니면 미국에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세계적 차원의 두 패권 국가의 자기장이 한반도에서 이미 충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동휘 계열과 이승만 계열 사이에서 양자를 절충 통합하려는 시도는 안창호의 몫이었습니다. 안창호는 보통 실력양성론으로 얘기됩니다만, 선 실력 양성 후 무장투쟁론으로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외교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았으니 안창호의 노선은 절충이자 종합이라 할 것입니다. 3-4월 노령, 상해, 한성의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이제 통합 임시정부를 구성해야 할 시기에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사실 상해에 없었습니다. 이동휘는 9월에야 도착하고, 이승만은 1921년 초에나 오게 됩니다. 안창호는 5월에 상해에 도착하여 9월 통합임시정부를 출범시키는 작업을 홀로 책임졌습니다. 이후에도 분란과 불신이 끊이지 않은 임시정부내의 분파주의를 극복하여 통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한한 인내로써 헌신하였습니다.
안창호는 일찍이 국운이 다한 까닭은 우리에게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정규 학업을 이수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안창호가 목도한 샌프란시코의 미국 동포들의 생활이란 저열하고 비참하고 무기력한 것이었습니다. 안창호는 미국 한인 사회의 기풍과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 진력하였습니다. 직접 화장실 청소까지 나섰다고 합니다. 안창호의 진심과 노력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광수에 따르면 한 미국인이 한인들에게 “한국에서 어떤 위대한 지도자가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하니까, 한인 사회가 이렇게 일신한 것을 보고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이광수 외, 안창호 평전, 99쪽)
마침내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은 ‘공립협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동족상애, 환란상부, 항일운동’이 그 설립 목적이었습니다. 이 공립협회는 미주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 됩니다. 공립협회를 토대로 신민회가 만들어졌는데, 신민회는 단순한 한인 자치기구를 넘어 독립운동의 모태가 됩니다. “우리 한국의 부패한 사상과 관습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패한 교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여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77쪽) 이는 평소 안창호의 지론이자 웅변 그대로인 것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한국 국내에도 설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07년 스스로 미주 신민회 본부의 전권위원의 자격으로 귀국합니다. 안창호는 양기탁, 이승훈 등과 함께 신민회를 발족합니다. 국내 신민회는 비밀결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비밀리에 수행된 까닭에 성립 일자도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강제합방 전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 단체이자,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신민회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안창호는 측근 이강을 블라디보스톡으로 파견하여 연해주에도 지부를 만들게 합니다. 1911년까지 연해주 16개 지역, 만주 8개의 지역에 신민회 지부가 설립됩니다. 그러나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사살 사건이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고, 마침내 1910년 강제 병합이 이루어지고, 1911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를 빌미로 한 ‘105인 사건’으로 국내 신민회 조직은 와해되고 맙니다.(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78-84쪽)
안창호는 망국의 한과 신민회 와해의 서러움을 안고, 중국, 연해주와 유럽을 거쳐 미주로 돌아갑니다. 한편 미주에서 공립협회는 하와이 및 본토의 다른 조직들과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해 갔습니다. 안창호는 이렇게 이미 미주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한민족 동포들의 사회를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민족 정신을 갱신하려는 기획을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은 안창호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령 정부와 상해 정부를 화합시키는 과제, 이승만의 대통령으로서의 지위를 추인하는 과제 그리고 임시정부 집세 등 임시정부 운영을 위한 자금 제공 그리고 서간도 북간도 등의 무장 조직들과의 연락, 임시정부 국내 조직을 위한 연통제 등 거의 모든 과업들을 안창호가 담당하였습니다. 상해 통합 임시정부의 3대 인물인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헌신을 한 이는 안창호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보다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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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외, 안창호 평전, 개정 3판, 청포도, 2007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역사비평사, 초판 4쇄, 2018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 세계, 지영사, 2003
윤대원, 상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초판 2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역,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돌베개, 2015
박영석, 일제하 독립운동사연구, 중판, 일조각, 1997
김소진, 한국 독립선언서연구, 국학자료원, 1999
김병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이학사, 2019
한시준, 홍진, 탐구당, 2006
신우철, “중국의 제헌운동이 상해 임시정부 헌법제정에 미친 영향”, 법사학연구 제29호, 2004
반병률, “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조직”, 한국학보, 제13권 제1호,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