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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처럼 시편 27편 1-6절
미국의 한 가정에 치피(Chippie)란 이름의 한 작은 앵무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치피는 아주 힘든 날을 보냈습니다. 그 힘든 상황은 치피 주인이 진공청소기로 새장을 청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주인이 청소를 거의 끝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으려고 몸을 돌리자 곧 주인은 치피가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 그녀는 진공청소기의 백을 열었습니다. 거기에 치피가 먼지 속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곧 욕조로 가서 수돗물로 치피를 닦았습니다. 그러자 치피는 찬 물에 젖어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시 드라이 기계로 치피를 말렸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치피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치피는 거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 그냥 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지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치피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한참 휘파람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고난의 소용돌이가 닥쳐서 영혼이 매몰되는 것 같고, 간신히 그 상황을 극복하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역경이 찾아와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성도는 노래를 잃은 치피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노래를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에 초점을 맞추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대적도 우리의 구원을 빼앗을 수 없고, 우리는 더 이상 근심과 두려움에 젖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울 때 무엇보다 물리쳐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자체입니다. 요새 ‘범죄와의 전쟁, 부패와의 전쟁’ 등 전쟁을 선포한다는 말이 많은데 성도는 두려움과 전쟁을 선포하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초라한 존재로 만들고, 스스로를 비겁한 실패자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루어내려면 ‘어려움’을 물리치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두려움’을 물리치는 것은 더욱 잘해야 합니다.
< 성공적인 삶을 위한 태도 >
본문에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 고백을 보면 성도가 고난을 이기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담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다윗의 고백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다윗은 수많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은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살다 보면 수시로 문제가 생기지만 그때 빛과 구원과 능력이 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나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왕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절망 중에도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처럼 절망과 두려움이 있다가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살맛이 나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을 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강한 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 넘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로 있을 때는 양떼를 공격하는 사자와 곰의 입을 찢었고, 키가 2m 90cm나 되는 골리앗을 물맷돌 한 방으로 쓰러뜨렸고, 사울의 끊임없는 살해위협을 받았지만 도리어 사울이 죽었습니다.
그런 수많은 구원체험을 했기에 다윗은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체험이 많습니다. 때로는 절박하고 기막힌 상황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상황을 잘 이겨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우리를 지켜주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지켜주시고, 때로 고난이 있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이 와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뛰고 힘이 솟아납니다. 얼마나 담대한 고백이고, 승리의 확신으로 가득 찬 노래입니까? 그처럼 우리도 항상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어린이가 뒤뜰에서 혼자 야구를 하면서 야구공을 공중으로 던져서 배트로 때리는 놀이를 했습니다. 그는 공을 던질 때 소리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야구선수다.” 그리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헛스윙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심판 역할도 했기 때문에 아쉽게 소리쳤습니다. “원 스트라이크!”
그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야구공을 집고 공중으로 던지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가장 위대한 야구타자다.” 그리고 전보다 더욱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두 번째도 헛스윙을 했습니다. 그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투 스트라이크!”
그 아이는 잠시 배트와 볼을 자세히 살펴본 후에 세 번째로 공을 던지며 소리쳤습니다. “나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타자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지만 세 번째도 볼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쉬워하며 소리쳤습니다.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그 아이는 잠시 앉아서 조금 전의 일을 찬찬히 생각하다가 약 1분쯤 후에 부모에게 달려가면서 기쁜 음성으로 소리쳤습니다. “엄마 아빠! 제가 조금 전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야구타자를 아웃시켰어요. 저는 최고 투수가 되었어요.”
이 장면을 보면 어려운 상황을 어떤 태도로 맞이하고 반응하느냐에 대한 태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인생은 일어나는 일이 10%,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반응이 90%를 좌우한다.”고 했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좋은 날과 나쁜 날의 차이가 생기고, 좋은 결혼과 나쁜 결혼의 차이가 생기고, 심지어는 좋은 인생과 나쁜 인생의 차이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항상 다윗처럼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2.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에게 빛과 구원과 요새가 되어 주셨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삶의 전부로 알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겐 평생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 구절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을 구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지나면서 수많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었지만 어떤 기도보다 그가 더 원했던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생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여호와를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애틋한 교회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요새 새벽기도 인원이 많이 줄었습니다. 꽤 많던 외부 교인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공사한다고 입구 쪽이 지저분하고 기도환경도 좋지 않으니까 기도처소를 옮긴 분들도 있겠지만 헌신하지 못하는 부담 때문에 기도처소를 옮긴 분도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기도 처소로 삼고 있는데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모른 척 하면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드니까 미안해서 더 이상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기도 처소까지 멀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대개 그런 심리가 있습니다. 요새 인터넷을 통해 은혜 받은 분들 중에 이번 선교센터 공사에 보태라고 선교후원에 동참하는 심령으로 십시일반으로 헌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 교회 교인이 헌신하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스스로 위축되어서 중심에 서지 못하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집니다.
히브리서 10장 38-3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지을 때 금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지만 형편을 따라 놋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성막 건축에 참여하고 매일 연이어서 백성들이 헌물을 가져와서 너무 쓰기에 남아서 모세가 “이제 그만 가져오세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출 36:4-5). 그런 감동이 있어야 하나님도 감동하십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나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영혼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면서 성전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사는 것을 인생 최대의 과제와 기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은 결코 비켜가지 않을 것입니다.
3.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4절에서 다윗은 평생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성전에서 여호와를 사모하는 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알고 보니 다윗의 소원은 이스라엘 왕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한 마리의 사슴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다윗의 고백은 예배의 중요성을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여호와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생전에’라는 말은 ‘내 전 생애에 걸쳐서.’라는 말입니다. 그는 기도제목이 생기고 위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겠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과 끊임없이 성전에서 교제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순간적인 체험이 아니라 꾸준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예배란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처음으로 ‘경배’란 말이 나오는 부분은 창세기 22장 4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삭을 얻었을 때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꿈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은 자기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식으로 소중하게 키웠을 것입니다. 그런 소중한 자녀를 바치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모리아산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참 예배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이고,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너무 귀한 하나님 앞에 넋을 잃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아무런 기도도 하지 못하고 그냥 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참된 예배자가 될 때 삶에 결코 공허함이 없습니다.
저는 무엇인가에 잘 빠졌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만화에 빠졌습니다. 중학교 때는 바둑에 빠졌습니다. 어머니가 먹을 것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면 밥을 안 먹고 그 돈으로 기원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키가 자랄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기타와 무협지에 빠졌습니다. 그때도 먹지 않고 굶으면서 무협지를 봤습니다.
대학교 때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 클래식 기타였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MT에 가서 친구가 클래식 기타를 치는 것에 반해서 그때 통기타 치는 것을 포기하고 클래식 기타를 맹렬히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숭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마스터하고 클래식 기타의 최고봉이라는 ‘화려한 과제곡’까지 연주했었습니다.
대학 졸업할 때쯤에 헛바람이 들어서 국비유학생이 되겠다고 영어공부도 엄청나게 했지만 방법이나 원리를 모른 채 무식하게 했습니다. 만약 제가 개발한 네트 영어방식으로 그때 그렇게 공부했다면 저는 엄청난 영어의 대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영어공부를 하지 않고 그냥 네트 영어 방식으로 편하게 영문설교를 보는데 대학 때나 유학생 때보다도 훨씬 실력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네트 영어에 대해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여러 가지에 빠지다가 1984년에 은혜 체험을 했습니다. 그 전까지도 교회는 다녔지만 그때부터 하나님을 앙망하고 사모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길고 긴 허상을 쫓는 삶이 마감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리 무엇인가를 성취해도 만족이 없고 공허했습니다. 그러나 예배 대상을 진정으로 발견한 후로는 비로소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인생의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참된 예배의 대상을 발견해야 진정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무리 성공해도 곧 허무해지고,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거워도 그 즐거움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까지 생각이 미칠 때 진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가끔 보면 명장의 작품 하나 때문에 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명장의 작품은 그처럼 중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작품입니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전에 그런 생각을 못할 때는 우리 모습이 싫을 때도 많았고, 열등감을 감추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임을 발견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있음을 깨달으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과 시야를 가지고 감사할 때가 가장 참된 예배자가 될 때입니다. 때로 고난 중에 낙심과 두려움이 찾아올 때도 예배의 끈을 놓지 말고, 그때 더욱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예배가 있는 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참된 예배자가 될 때 얻는 엄청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교만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예배하면 자기의 죄가 보이고, 자기의 불충성이 보이고, 자기의 부족한 부분이 보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는 결코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낳는 7대 자식이 있습니다. 불순종, 질투, 지나친 호기심, 비판과 불평, 우월감과 열등감, 영성자랑과 이단옹호, 그리고 편견입니다. 참 예배는 그런 교만의 자식들을 낳지 않게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행복한 삶의 최대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
사람들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흔한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나님을 추구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을 더욱 알고 사랑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최선을 다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다른 모든 필요도 따라오게 됩니다. 축복의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미국에 점점 기억을 잃어버리는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그분은 항상 말씀을 품고 말씀에 의지해서 살았기 때문에 많은 구절을 기억했습니다.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은 디모데후서 1장 12절 말씀이었습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점점 기억력을 잃으면서 그분은 양로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점점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디모데후서 1장 12절 말씀도 일부밖에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는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라는 구절밖에 기억하지 못했고, 돌아가시는 날에는 오직 한 단어밖에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시던 날 할머니는 그 한 단어만 끊임없이 속삭이듯이 말했습니다. 그 한 단어는 바로 ‘저가(Him)’라는 단어였습니다.
바로 그 ‘저가’, 즉 ‘예수님’이란 단어 한 마디가 그 할머니에게 남은 모든 것이었고, 필요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한분이면 족한 줄 알고, 예수님께 우리의 전 생애를 걸고, ‘내 평생 소원 이것뿐’이라고 고백하면서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예수님만 추구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담대한 믿음도 주시고, 사는 길도 열어주실 것입니다.
작가 윌리엄 랑게비체(William Langewiesche)가 쓴 ‘베일을 벗은 사하라(Sahara Unveiled)’란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알제리 사람과 그의 동료들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도중에 트럭이 고장 났습니다. 그들은 구조대를 기다리면서 3주 동안 거의 죽음 문턱까지 갔습니다.
그들은 태양을 피해서 트럭 밑에 파 놓은 참호로 들어가서 지냈습니다. 점점 탈수증세가 심해졌습니다. 그들은 음식이 있어도 목마름이 더 심해질까 봐 먹지 않았습니다. 사막에서는 기근보다 탈수가 무섭습니다. 점점 심해지는 타는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그들은 어떤 것도 마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실상 거의 독에 가까운 녹슨 라디에이터의 물을 마시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부동액과 엔진 찌꺼기가 섞인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까? 타는 목마름을 해결하고 살아보겠다는 무서운 욕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까?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제 성탄절이 가까이 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몸 된 전을 섬기고, 주의 전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함으로 다윗에게 주어진 축복을 공유할 수 있는 복된 심령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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