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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8경 제2경 신창지정(萬頃八景 第二景 新倉之情)
신창진(新倉津)새챙이다리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는 (구)만경교는 예전부터 새챙이다리라 불리었고 군산과 김제를 이어주던 과거의 다리이며 신창진(新倉津)은 일제강점기하에 일본인이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나루터로 군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본래 이름은 신창진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오다가 일제강점기때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만경강의 하류는 신창진 상류에는 안천(현재의 고산천)과 남천(현재의 삼천천과 전주천)이 있다 했다
1933년에 완공된 새창이 다리는 6.25전쟁때 폭격을 당했지만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그 역사성이 매우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콘크리트다리는 전주 남부시장에 위치하고 있는 싸전다리(1922년준공)였으나 지금은 원형은 상실되고 없다
한때는 새챙이다리 위에서 망둥어나 숭어낚시를 하고 다리 아래에서는 실뱀장어 잡이를 통해 주민들의 큰 소득을 올렸지만 새만금으로 인하여 해수유통이 막혀서 지금은 어렴풋한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풍요로운 강 만경강의 어류를 살펴보면 뱀장어 망둥어 돌고기 참마자 붕어 버들매치 감돌고기 참종개 동자개 버들붕어 금개구리 치리등 다양한 민물어종이 살고있다
[옮긴 글]
방랑시인김샷갓(차차차연주곡)
아직은 낮설은 허허벌판에 옛 지명을 찾아 만경강변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고을 주민들의 생생한 의견을 모아 국토부 익산국토관리청에서 하천정비를 하면서 그 특성을 자문하여 설치한것이 만경8경이다
동상면화평천을 만난 만경강 물줄기 고산천은 봉동에서 주치천 용진에서 소양천 전주에서 삼천과 하나가 된 전주천과 합류하여 비로소 강의 면모를 갗추어 삼례 비비정을 지나 익산에서 익산천과 합류하여 강유역을 넓힌 후 김제 청하 진봉 심포항으로 흘러 새만금방조제 안으로 유입되었다가 서해바다로 빠져나간다
오늘은 만경8경 제2경 신창지정(萬頃八景 第二景 新倉之情) 신창진(新倉津)새챙이다리를 소개한다
1경 만경낙조(萬頃落潮)
2경 신창지정(新倉之情)
3경 사수곡류(泗水曲流)
4경 백구풍월(白鷗風月)
5경 비비낙안(飛費落雁)
6경 신천옥결(新川玉潔)
7경 봉동인락(鳳東人樂)
8경 세심청류(洗心淸流)
신창정(新倉停) 정자
신창정(新倉停) 정자
목백일홍과 새챙이다리 전경(전)
목백일홍과 새챙이다리 전경(후)
분홍접시꽃과 새챙이다리 전경(전)
빨간접시꽃과 새챙이다리 전경
코스모스꽃과 새챙이다리 전경
달맞이꽃과 새챙이다리 전경
신창진(新倉津) 옛그림
새챙이나루와 새챙이다리
만경강을 옛지리지에는 신창진(新昌津) 또는 사수(泗水)라 했다
그리고 지금도 김제군 청하면에서 옥구군 대야면으로 건너오는 다리를 소위 새챙이다리라 부른다
이 다리가 놓여지기 전에는 나룻배로 이 강을 건넜다
곧 이 나루가 새챙이나루이며 이걸 한자로 표기하면 신창진이 되는 것이다
1928년부터 1933년까지 총공사 기간 5년에 걸쳐 만들어진 '새창이 다리'는 일제가 공사비 28만환을 들여, 쌀 침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건립한 근대적인 다리다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에서 청하면 동지산리로 이어진 이 다리는 길이 530m, 폭 왕복 2차선 도로로 이뤄졌다
대야면에서 김제시 쪽으로 향한 첫 마을이 신창마을이다
이 마을은 약 200년 전 조선후기에 마을이 형성, 즉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 하여 '신창'이라 불렸다
이 다리가 만들어진 배경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김제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월하게 수송하기 위해 만든 나루터였지만 교통량과 쌀 이동량 등이 늘면서 다리를 건립한 것이다
이 다리를 새창이(일명 새챙이)다리 또는 만경교라고 했다
지금은 새챙이다리가 노후화되어 통행금지되여, 바로옆에 새로운 만경대교를 1998년 설치 운용하고 있으며 옛 새챙이다리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
김제는 해안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백제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와 군현의 치소(治所)에 군사적 방어를 위하여 테뫼식 산성을 많이 쌓았는데, 성산성(城山城), 월성토성(月城土城), 난산성(卵山城), 사창산성(社倉山城), 만경읍성(萬頃邑城), 성덕산토성(聖德山土城), 동지산리토성(東之山里土城), 금구산성(金溝山城), 상두산성(象頭山城), 명금산토성(鳴琴山土城), 금산사성(金山寺城)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제의 주성(主城)인 성산성과 크고 작은 전초호(前哨濠), 그리고 황산(凰山)을 중심으로 한 난산성 및 월성 등은 서해안 일대의 해적들을 방어하여 내륙 지방의 안전을 지킨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들입니다.
성산성은 김제의 주성으로 백제 때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곽은 원래는 토성과 석성의 이중성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담장의 원형은 상실되고 성터만 남아있습니다. 성채는 옹성이 넷, 샘이 여섯이 있었다고 하며 산성에서 동쪽인 시내 쪽은 성곽이 보이지 않고 남쪽, 서쪽, 북쪽은 지금도 성곽의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성산성이 피지산(避支山) 또는 피성(避城)으로 기록되고 있어 이 피성이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며 또한 백제 풍장왕(豊璋王)이 한때 주류성(周留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던 곳이라는 견해도 있어 이곳 성산성은 백제 주류성의 위치를 파악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월성토성은 원평천과 금구천이 합류되는 동쪽의 월성평야, 즉 옛 금구천 유역 가운데에 있는 구릉지대의 해발 약 20m 정도의 낮은 언덕에 위치하는데, 월성평야를 수호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진지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월성토성 터에서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토성은 원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축조 경위는 밝혀진 것이 없으며 토성은 논으로 개간되면서 구릉을 모두 깎아버려 그 원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난산성은 난봉동에 있는 황산(121m)을 중심으로 백제가 쌓은 원형의 석성으로 그 둘레가 2㎞나 되었다고 합니다. 김제의 주성인 성산성을 보호하는 호익역(護翼域)이 월성(月城)과 난산성이었는데 월성은 거의 사라져 마을이 되었고 난산성도 터만 남아 있으며 달리 도리봉성터로도 불립니다.
사창산성은 백제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용지면사무소 뒷산(55.7m)의 산 정상을 테뫼식으로 둘렀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으며, 사창이 있었다고 사창산이라 합니다. 사창(社倉)은 조선시대 지방의 각 촌락에 설치된 일종의 곡물 대여기관으로 의창(義倉)과 같은 성격이나 의창은 국영이고 사창은 사(社, 행정단위로 지금의 면)에서 경영하는 것입니다. 고곡(古穀)을 대출하고 무이자로 신곡(新穀)을 받기도 하고, 곡물을 대여하여 이자만 받기도 하며, 춘궁기에 대출하여 가을에 이식과 함께 받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사창산 등성이에선 썩은 쌀알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만경읍성은 삼국시대의 읍성으로 북서쪽으로는 비옥한 농토가, 남쪽으로는 호수가, 동쪽으로는 멀리 모악산 기슭에서 잔잔히 뻗어 내려온 평원지대가 두산(杜山)과 연결되어 있는 후록산(後麓山)에 자리잡고 있는데 후록산은 백제시대에 두내산(豆內山), 두릉(杜陵)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870년대 편찬된 <읍지(邑誌)>에는 “성첩은 삼리에 걸쳐 둘러 있고, 높이 5척, 옹성은 네 곳, 성문세 곳이다”라고 했으며 만경읍성의 성곽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것은 만경읍이 서해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만 일제강점기 초에 허물어져 이제는 그 원형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금구산성은 봉두산(130m)의 정상을 둘러친 테뫼식 토성으로, 산의 동쪽 부분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한 석축이 100m 이상 남아 있으며 이같은 석축의 흔적이 200m 가량 추가로 확인되었고 서, 북, 남쪽은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였는데 이러한 자연 성벽을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900m에 이릅니다. 봉두산의 정상에는 기와 조각이 도처에 보일뿐만 아니라 제법 큰 초석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석재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묻혀 있으며 <금구읍지(金溝邑誌)>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백제시대의 산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산사성지(金山寺城址)는 삼국시대에 금산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절 입구에 쌓은 석성으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아치형의 석조물인 성문 주변에 남북 방향으로 성벽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습니다. 이 석성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예부터 금산사를 수호하는 성문이었으며 달리 ‘견훤성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문의 북쪽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개천 건너에는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일대에 축대를 쌓으면서 성벽을 쌓았던 석재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성문 주변에는 아직 성벽의 기단석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제의 봉수대는 심포리와 선암리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에도 이 두 곳에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심포리 길곶봉수대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 사이로 서해에 고개를 내민 진봉면의 끝자락 봉화산(84m) 정상에 있는데 지금은 원형이 남아있지 않지만 봉수대 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연 석재들이 직경 10m에 걸쳐 무덤처럼 쌓여 있으며 그 중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돌들이 상당수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전기부터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암리 봉두산봉수대는 금구면 선암리 봉두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로 <금구읍지>에는 단지 “남산에 불을 피웠다”고만 전해지고 있는데, 금구현이었을 때 현의 중심이 당월마을이었고 당월마을의 남쪽에 봉두산이 있기 때문에 읍지에서 말하는 ‘남산’이 지금의 봉두산일 가능성이 높아 읍지에서 말하는 ‘남산 봉수’가 선암리 봉두산봉수대일 개연성이 무척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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