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다이빙 경기의 발전
다이빙 경기가 한국에 최초로 유입된 시기는 개화기로 알려져 있다. 개화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양의 근대적 문물이 도입되고 봉건적 체제를 탈피하려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함께 선교사와 민간인에 의한 스포츠 활동으로 인해 한국 다이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다이빙 경기가 활발히 발전하기는 힘들었다.
1934년 7월 경성 운동장 수영장이 건립되었는데, 이때 다이빙 경기대가 설치되었고, 비로소 이 시기부터 한국 다이빙 경기가 근대 스포츠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53년과 1954년에 제14회 런던 올림픽과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에서 2연패를 차지한 한국계 미국인 새미리의 시범경기가 경성 운동장 수영장에서 열림으로써 국민들은 다이빙 경기의 매력에 도취되었고, 선수들에게는 선진 다이빙 경기 기술의 보급과 전반적인 발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국제수영연맹(FINA)는 1908년 창립되어 모든 수영 경기의 규칙을 제정하고 수영의 세계기록 수립과 승인에 관한 규정을 통일하였다. 올림픽, 세계선수권을 비롯한 각종 국제대회가 국제수영연맹의 규정에 따라 개최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조선체육 대한체육회로 명칭을 개명한 후 1948년에 가입하였다.
한국이 국제수영연맹에 가입한 후 한국 선수가 국제대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이다. 당시 이필중 선수가 출전하여 입상은 하지 못했으나, 이때부터 해외원정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60년대 이전까지 활동이 극히 미약했던 한국 다이빙 경기는 제3회 도쿄 아시안 게임을 시작으로 1960년 이필중 선수의 로마 올림픽 출전을 통하여 조금씩 국제대회 출전을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는 조창제 선수가 플랫폼에서 3위에 올라 첫 국제대회 메달을 획득하였으며, 1964년에는 조창제, 송재웅, 정순자 선수가 제18회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또한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송재웅 선수가 남자 플랫폼 경기에서, 김영채 선수가 여자 플랫폼 경기에서 각각 3위에 올랐다. 이후 송재웅 선수와 박정자 선수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하였지만, 모두저조한 성적으로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만 했다.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다이빙 경기 사상 처음으로 송재웅 선수가 남자 플랫폼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김영채 선수는 여자 플랫폼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또한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고호석 선수가 남자 3m 스프링보드 경기 은메달을 차지하면서 한국 다이빙 경기는 국제화와 더불어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1980년대 들어서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88 꿈나무 선발과 국가 상비군 선발로 전국에서 다이빙 선수를 발굴하는데 있어 저변을 확대한 결과,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이선기 선수가 남자 3m 스프링보드
경기 동메달을 획득하게 되었고, 권경민 선수는 1997년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열렸던 제11회 세계 주니어 선수권대회 남자 3m 스프링보드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에 씽크로 다이빙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2002년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권경민, 조관훈 선수가 남자 플랫폼 싱크로 다이빙 경기에서 동메달을, 남자 3m싱크로 다이빙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또한 강민경, 임선영 선수는 여자 3m 싱크로 다이빙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는데, 남자선수들의 성적은 1986년 제10회 아시안게임 이후 16년 만에 획득한 메달이며, 여자 선수들의 성적은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 이후 32년 만의 쾌거였다.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경기에서 권경민, 조관훈 선수가 남자 플랫폼 싱크로 다이빙 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으며, 2005년 제4회 동아시안게임(마카오, 중국)에서는 남자 3M 싱크로 다이빙 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2005년 중국 창수에서 개최되었던 제15회 FINA다이빙 경기 월드컵에서는 권경민, 조관훈 선수가 남자 플랫폼 싱크로 다이빙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FINA 다이빙 월드컵은 올림픽, 세계선수권과 더불어 가장 크고 권위 있는 대회이기에 이들의 성적은 매우 값진 결과이다.
권경민, 조관훈 선수는 2005년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3m 싱크로 다이빙 경기에서 동메달과 남자 플랫폼 싱크로 다이빙 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으며, 2009년 제13회 세계선수권에서는 남자 플랫폼 싱크로 다이빙 경기 결승에 진출하여 6위에 올라 세계선수권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같은 해 홍콩에서 개최된 제5회 동아시안게임에서도 남자 3m 싱크로 다이빙 은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조관훈 선수는 박지호 선수와 짝을 이뤄 출전한 남자 플랫폼 싱크로 다이빙 경기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한국 다이빙 경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1998년 다이빙 경기가 소년체전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초등부와 중등부 선수의 증가로 한국 다이빙 저변이 조금씩 확대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 시도의 시청, 도청 등에서 실업팀을 운영하면서 선수활동 기간도 증가 하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까지 트위스팅 벨트 시설이나, 트램펄린, 드라이보드 등의 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지상훈련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 등의 해외 전지훈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조금씩 훈련 시설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2010년 2월 경북 김천시에 모든 훈련시설이 갖추어진 세계 최고 수준의 지상훈련장이 건립되면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이 가능해졌다. 이는 선수들의 기량향상과 자신감은 물론, 안전한 다이빙 경기 준비를 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며, 앞으로 한국 다이빙 경기의 발전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출처 : 체육지도자 훈련지도서(다이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