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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과 청의 대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이어서 유길준을 비롯한 개화들의 입장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보았듯이 임오군란 발발 당시 유길준 그리고 윤치호 등은 개화 정책의 하나인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와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1882년 조선 개화파의 영수인 김옥균이 서광범, 강위, 변수 등 개화파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 옵니다. 1882년 3월부터 8월까지 유길준과 윤치호는 이들을 보좌하였습니다. 김옥균 일행의 일본 체류는 짧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보통 김옥균이 일본 문물을 보고 배우려고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옥균의 도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조선신보朝鮮新報> 등은 김옥균의 방문 목적이 일본에서 ‘국채(國債)’를 모집하는 데에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1879-1884,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학위 논문, 71쪽). 1881년 부산 주재 곤도 마스키(近藤眞鋤) 영사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공사에게 조만간 김옥균이 도일하고 그 목적이 일본 정부로부터 50만엔을 빌리는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일본군 3-4천명을 고용할 수 있는 자금이었던 것입니다.(김흥수, “임오군란 시기 유길준/윤친호 연명 상서”, 개념과 소통 제21호, 2018, 303쪽).
물론 김옥균은 이를 공식 부인하였습니다.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에 자신들이 일본에 온 것은 한편으로는 반대당의 기염(氣焰: 위협)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정황을 시찰해서 외교와 내정에 참고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였습니다(동경일일신문 1881년 4월 13일, 김종학, 앞의 논문, 71쪽 재인용). 김옥균이 이렇게 부인한 까닭은 그의 미션이 공개적으로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특명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히려 김옥균의 해명의 행간에는 그의 비상한 기획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반대당의 위협을 언급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보았듯이 조선에서는 고종이 친정을 개시하고 개화에 나섰지만, 구세력과 대원군의 막강한 진영은 이에 맞섰습니다. 대원군은 민씨 척족들을 살해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구 세력은 대원군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습니다. 1881년 이재선 역모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재선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대원군과 구세력은 계속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미국 공사관의 무관 포크(George C. Foulk)에 따르면 임오군란 이전에 김옥균과 서광범은 밤마다 개화(civilization problem)을 논의하고 민영익을 비롯한 젊은 사대부들을 포섭하려고 시도하였고, 광신적인 대원군은 이를 조선에 기독교를 수입하려는 시도로 비난하며 김옥균과 서광범은 거의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김종학, 앞의 논문, 72쪽, 번역은 필자 수정).
조선은 임오군란 이전에 이미 김옥균의 개화당과 대원군의 수구당의 대결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까지 고종은 개화정책을 추진하였고 김옥균을 가까이 하였으며 따라서 김옥균은 고종의 허락을 받고 도일하여 수구당을 제압할 수 있는 물리력을 마련코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군란이 발생하였고 그 배후세력인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개화정책을 지워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개화 정책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일본인들이 희생되었고, 일본이 조선 정국에 개입할 근거가 생겼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 희생에 대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긴급 내각회의를 열어, 보병 일개 대대(1500명)과 4척의 군함을 파견하고 조선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거제와 울릉도 분할 점거 나아가 인천까지 점령할 기획까지 논의하였습니다. 하나부사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귀환하였습니다. 추가로 함흥, 대구, 서울 부근의 양화진 등 내지를 개방하고 일본 외교관의 내지 여행권에 대한 승인권에 대한 협상도 지시받았습니다(쉬완민, 전홍석/진전바오 역, 중한관계사, 일조각, 2009, 55-56쪽). 김옥균은 그 중 한 척의 배를 타고 일본인들과 같이 귀국합니다. 김옥균은 일본 군대와 함께 귀국하면서 새로운 반전의 기회를 엿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오군란에 대한 청의 대응이 더욱 단호했습니다. 일본 파병 소식은 청을 긴장케 하였습니다. 청은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군함 3척을 신속하게 파견하였고, 우장칭(오장경: 吳長慶) 휘하에 3000명의 군인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때 같이 온 우장칭의 막료(幕僚: 특임 보좌관) 중에는 위안 스카이(원세개: 袁世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조선 권부에서도 청에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충주에 피신한 왕후가 청에 원군 요청의 착상을 냈고, 고종은 조영하에게 연락하여 청에 와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였습니다. 청의 대표자 마젠중과 어윤중은 필담을 나누었으며 사태의 원흉으로 대원군이 지목되었습니다.
청 진영은 대원군을 유인하여 체포하고 청으로 압송하여 유폐하였습니다. 마젠중은 대원군의 면전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군(君)은 6월 9일 사변이 일어나자 대권을 함부로 훔쳐 ... 황제의 책봉을 받은 국왕을 몰아냈으니 황제를 경시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국왕의 사친(私親: 친부모)이므로 관용을 베푸는 바이니 빨리 수레에 올라 마산포를 거쳐 텐진으로 가서 조정(朝廷: 청나라 조정을 뜻함)의 처치를 기다려라”(이양자, 감국대신, 위안 스카이, 36-37쪽)
청의 개입은 종주국으로서의 그 권한을 행사하고, 봉신국의 통치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취지가 되겠습니다. 마젠중의 문장은 청과 조선의 이른바 ‘사대자소(事大字小: 소국은 대국을 받들고, 대국은 소국을 보살핀다)’의 관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중국 지휘관 우장칭의 막료인 저우자루(주가록: 周家祿)의 <조선악부> "南壇山"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대원군 체포 당시의 엄중하고도 긴박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조선악부>란 조선에서의 일을 ‘악부’ 형식의 시문으로 기록한 것을 의미하고, 남단산(南壇山)이란 아마도 청군이 진영을 둔 서울 남산 부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전략....)(... 전략...)
이 때 군영의 문을 열어 그 시종들을 들어오게 하고 斯時營門納從騎,
천 사람의 음식을 창졸간에 준비했다네. 千人饌具倉卒間.
태공[주: 대원군]이 놀라 의아해하며 물으려고 太公驚疑欲有問,
고개를 돌려보니 시종관이 보이질 않네. 回顧不見所從官.
남산의 떨어지는 해는 옷소매를 비추는데, 南山日落照衣袂,
씁쓸히 비단 옷을 가져와 달라고 말하며 돌아가려 하네. 欲去苦辭紗縠禪.
연릉[주: 청의 대표 마젠중]은 소매에서 공문을 꺼내며 말했네. 延陵褎中出片紙,
죄상이 이와 같으니 어찌 관대하게 대할 수 있겠소. 罪狀若此何能寬.
시시비비와 공과 죄는 정해진 것인즉, 是非功罪有一定,
거리가 멀지 않으니 직접 가서 황제[주: 청의 황제]를 알현하시오. 咫尺自去朝天顔.
삼척이나 되는 긴 끈을 목에 묶지 않고, 長纓三尺不係頸,
공손히 마차에 모셔지나 어찌 평안할 것인가. 登車肅揖何閑閑.
출병한 지 십 일만에, 自從出師甫十日,
침착하게 술 마시며 큰 죄인 사로잡았다네. 從容杯酒禽渠姦.
지금은 삼엄한 진영에 갇혀 있고, 至今壁壘尙嚴整,
푸른 솔과 잣나무 가지만이 부딪히누나. 蒼松翠柏柯交攢.
높이 올라 태공의 저택을 바라보니, 登高却望太公宅,
운현궁[주: 대원군의 저택]이 파란 구름 끝에 남아있구나. 雲峴宮在靑雲端.
(이동연/양귀숙, 周家祿 朝鮮樂府, 중국인문과학, 제34호, 중국인문학회, 2006, 11-12쪽)
대원군은 다시 실각하고, 고종은 왕권을 회복하였습니다. 고종은 청에게 임오군란 잔존 세력을 소탕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청 군대는 군졸들의 주거지였던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를 작전 대상으로 하여 170명을 체포하고 10명을 참수하였다고 합니다(쉬완민, 중한관계사, 58쪽). 청군은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총을 난사하면서 마구잡이로 체포하였으며, 위안 스카이가 지휘한 왕십리 지역에서 그 참상은 가장 심했다고 합니다(이양자, 앞의 책, 38쪽).
이렇게 임오군란 직후 조선에는 일본과 청의 병력이 대립하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병력에서 열세였고, 또 청과의 전면전에 대한 준비가 미비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은 청의 군사 작전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고, 인천을 점령하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도 역시 일본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청은 조선 조정에 일본과 조약 체결을 지시하였고, 조선과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일본은 가해자 처벌, 손해배상 50만원, 일본 공사관 보호를 위한 병력 배치, 대관을특파하고 국서를 보내 사죄할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아울러 조일수호조규 속약(續約)도 체결하여 부산, 원산, 인천에서 일본인들의 통행 구역을 확대하고, 1년 뒤 양화진을 개방하고, 일본 외교관들의 조선 내지 통행권을 보장토록 하였습니다(이상 조약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 제물포조약과 조일수호조규 속약, 사료로 본 한국사,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115_0030)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 정책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일각에서는 조선을 아예 병합하여 청의 내지(內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한나라 시절 고조선을 멸하고 한 사군을 설치한 예가 거론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감국(監國: 중국 황제가 일시적으로 권한을 대행시키던 기관)을 설치할 것이 주장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훙장은 단지 기존의 사대관계 즉 종번(宗藩: 종주국과 번속국, 번속국이란 종주국의 울타리가 되는 봉신국을 말합니다)의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하였습니다. 대등한 국가 사이의 외교적 협약인 조약의 형식이 아니라 장정의 형식을 취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장정은 그 첫머리에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 국가간의 일체 균점(均霑)하는 예와는 다르다.”고 하여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규정하고 청 우월의 불평등 협약임을 밝혔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637).
또한 외아문과 내아문 설치 등 조선의 관제도 중국식으로 바꾸고, 조선을 사실상 통치하였습니다. 마젠창(마건상: 馬建常, 앞서 보았던 마젠중의 친형)을 파견하여 내치를 담당케하고,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를 파견하여 외치와 세관을 담당케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군을 훈련시켜 근위병 2개 대대 각 500명의 친군(親軍) 좌우영을 조직하였습니다. 그 훈련과 지휘는 위안 스카이가 담당하였습니다(쉬완민, 중한관계사, 64쪽). 또한 개항 이후 일본의 무역 선점 그리고 군제 개편의 일본 주도권이 상실되었고, 청의 우세가 확립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임오군란에 대한 유길준의 입장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당시 유길준은 김옥균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김옥균이 일본에서 밀명을 수행할 당시 그를 보좌하였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김옥균은 원래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빌리고 그것으로 일본군을 고용하여 조선 정국의 변혁을 꾀하였습니다. 유길준은 김옥균의 기획을 공유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임오군란 발발 직후 유길준이 당시 일본 태정대신(太政大臣: 일본 근대 내각제 도입 이전 가장 높은 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에게 보낸 상서에서도 확인됩니다.
유길준은 임오군란 발발 직후 8월 6일 그리고 8월 13일 두 차례 걸쳐 상서를 상신하였습니다. 두 문서 모두 본문의 말미에 ‘兪吉濬·尹致昊 上書’라고 기재하고 있지만, 집필 책임자는 유길준으로 생각됩니다. 전자의 본문 첫머리에 ‘朝鮮人兪吉濬上書’라고 하고 있고, 후자의 겉봉 뒷면에 ‘朝鮮兪 吉濬 謹封’이라 되어 있습니다. 또 당시 유길준 27세, 윤치호 17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유길준이 주도한 상서가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 상서는 당시 임오군란의 상황 그리고 개화파의 정세판단과 사명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 주요 내용들을 옮겨 보겠습니다(김흥수, 앞의 글, 302쪽 이하에 의존합니다).
먼저 8월 6일 자 상서입니다. 임오군란의 난을 대원군 역적 소행으로 규정하고 대방(大邦)인 일본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희생과 조선인의 원수를 문죄하기 위한 거병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이 직접 군사를 일으키면 이는 동양의 정세를 소란케 하는 것이니, 뜻있는 조선인들에게 군대를 빌려주어 사명을 수행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김옥균 등과 연락이 없이 급하게 상서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는 김옥균의 뜻과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8월 9일 김옥균은 일본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 외무대보(外務大輔)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과 비슷하다고 합니다(이광린, 근대인물한국사: 유길준, 25쪽).
① ‘역적’ 대원군이 조선의 ‘국모’와 윤치호의 부친(윤웅렬)을 죽이고 더욱이 일본의 ‘공사’에게까지 해가 파급되었다. 이 때문에 대원군은 불구대천의 원수이나 자신들은 원수를 갚기에 역부족이라서 ‘대방’(大邦)에 도움을 청한다.
② 대원군의 성격은 ‘잔혹’하고, 이전에 정권을 잡았던 때에 “사람 죽이기를 삼 베듯이” 하였으며, 국왕에게 정권을 반환한 후에도 난폭한 무리를 끌어들여 인민을 소요케 했지만, 정부는 국왕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금제(禁制)할 수 없었다. 1881년에 이재선 사건이 실패하자 그 책임을 모두 아들인 이재선에게 돌렸으며 이번 사건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오래된 모의가 발동된 것이다.
③ 대원군은 조선 인민의 원수이고 일본이 토벌할 적이기 때문에 마땅히‘문죄(問罪)의 군대’를 내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일은 대원군에게 관계된 것이고 조선 정부와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죄’를 명분으로 하면 조선인민이 당혹하여 일본을 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거’(大擧), 곧 대규모 출병 이후에나 성공할 수 있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이는 동양을 소란케 하는 시작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군대를 조선인에게 빌려주어 복수를 하도록 해야 한다. 조선의 뜻있는 인사들이 이에 호응하면 ‘대거’ 없이 일본의 문죄와 조선 인민의 복수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이다.
④ ‘문죄’와 ‘복수’를 역적들에게 고하면 다급한 그들은 국왕과 왕세자에게 화를 끼칠 우려가 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먼저 산조 태정대신이 글을 보내 ‘화의’(和意)를 표하고, 군함을 인천 근해에 파견하고 사태의 추이를 보아 국왕과 왕세자를 구출한 후 대원군의 죄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⑤ 시모노세키에 가서 그곳의 김옥균·서광범과 상담한 다음 상서해야 하나 일본 정부의 방침을 알지 못해서 먼저 아뢰니 회답을 바란다.
다음은 8월 13일 상서입니다. 청나라의 간섭 소식을 접하고 다시 올린 상서입니다. 앞의 상서와 같이 청의 조선 지배를 우려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한 일본의 원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역시 앞의 상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직접 개입하면 동양의 평지풍파를 야기할 수 있으니, 대신 차병(借兵)의 형태로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① 일본이 조선의 내란에 간섭하는 것을 꺼려야 하나 부득이하여 일본과 함께 도모하려 한다.
② 대원군이 일본의 신식 군대와 맞설 수 없음을 알고 보상할 것은 보상하고, 사죄할 것은 사죄하여 거짓으로 전날의 ‘부지’(不知)를 후회한다고 하면서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③ 청국이 이 기회에 대원군을 문죄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하고 조선인이 그 지휘를 받으면 조선은 ‘독립’을 다시 도모할 수 없으며 조선의 모든 권리가 청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더라도 일본에 적의가 있는 대원군이 청정(淸廷)에 조선의 모든 외교를 맡기면 청정이 이 사건을 대신 담판하려 할 것이다. 일본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청인이 “조선은 우리의 속방이다. 그리고 그 외교는 모두 우리가 처리한다”고 할 것인데 그때는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④ 이렇게 되면 조선의 전국 인민이 안으로는 국모의 원수를 갚을 수 없고 밖으로는 타인의 기반(羈絆)을 받아 마침내 조선은 ‘자유지권’(自由之權)을 잃게 된다. 만약 일본이 개전하게 되면, 일본 스스로 이를 수행하여 동양의 풍파를 일으키지 말고[풍파를 일으키게 될 것이니, 그러지 말고: 필자 주] 조선인에게 빌려주면 양국 모두에게 이로운 방법이 된다.
⑤ 이 차병(借兵) 요청은 대원군의 복수와 조선의 독립을 위한 것이지 자신들이[유길준과 김옥균 등 개화파] 이를 이용하여 사욕을 채우려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유길준의 구상은 김옥균 등 개화파의 구상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디 수구당과의 대결을 위해 일본에 차병(借兵)을 기획하였던 것입니다. 마침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 등 수구세력에 다시 집권하면서 김옥균과 유길준은 일본이 추진하는 군사적 개입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의 단호한 개입이 현실화되면서 청과의 전쟁을 아직 준비하지 못한 일본은 군사작전을 유보하였고, 개화파의 기도도 유예되었습니다.
일본은 일단 청나라에 밀렸지만, 공사관 보호의 명목으로 일본군을 주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조선에는 청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일본 육군 실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청일전쟁을 대비한 군비 증강을 관철시켰습니다. 청과 일본은 대결 국면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고종의 정권은 회복되었지만, 청의 보호국과 같은 상황이었고, 대신들은 청에 의존하였습니다. 김옥균 등 개화파는 계속하여 일본을 통한 정국의 반전을 꾀하였습니다. 1882년 10월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하여 조선의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정사 박영효를 비롯하여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가 주축이었고, 민영익도 참가하였습니다. 당시까지는 민영익이 개화파 인사들의 후원자였으며, 개화파의 희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들 개화파에는 고종의 의지가 실려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들 수신사 일행은 태극기를 달고 일본을 향했고, 일본 천황을 알현할 때에도 김옥균과 민영익도 배석을 요청받았습니다. 이들 수신사의 사명은 일본으로부터 원조를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외상 이노우에 카오루는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이는 국왕, 박영효, 김옥균 등 극히 소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그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실세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에 가 있었으며, 그 절친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김옥균]의 말에 따르면, 조선에서 참으로 그 나라의 독립을 기도(企圖)해서 그 정신을 충분히 가진 자는 오직 국왕과 박영효 김옥균의 3명뿐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청국에 기대어 안전을 꾀하려는 자들입니다. 그 나라[조선] 정부의 기무아문(機務衙門)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내각집회소(內閣集會所)와 같은 것으로, 그 구성원은 어윤중, 조영하, 김굉집[김홍집], 김병시 등인데 모두 장래의 원모(遠謀) 없이 단지 청국에 의뢰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완전히 독립의 정신이 없는 자들이이라고 했습니다. .... 그러므로 급히 조선을 원조해서 억지로 그 독립을 성취하게 하는 것은 득책(得策)이 아닙니다.”(伊藤博文關係文書』第1卷, p.180, 김종학, 앞의 글, 101쪽 재인용)
반면에 청국에 파견된 조영하, 김홍집, 어윤중은 차관 도입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들은 청의 외교 실세 리훙장을 방문하여 내정개혁을 위한 선후6조(善後六條)를 제시하고 50만냥의 차관을 허용받았습니다(김종학, 앞의 글, 106쪽). 그 소식은 일본에 전해졌고, 수신사 박영효는 마침내 일본 요코하마 정금은행과 17만엔 차관협정을 체결케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수신사 일행이 차관을 조선에 들여가지는 못했습니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17만 엔의 차관 중 5만 엔은 제물포조약 제3관에 의거한 조난 일본인 유족 및 부상자에 대한 위로금으로 일본 정부에 지불하고, 나머지 12만 엔은 수신사 및 조선인 유학생 비용 등 ‘제반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김종학, 앞의 글, 107쪽). 여기에는 유길준의 유학비용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수신사 박영효 그리고 민영익은 1883년 1월 귀임했고, 김옥균은 계속 남아 추가적인 차관(일본군 차병(借兵)을 위한) 도입의 가능성을 타진하였습니다. 유길준은 박영효, 민영익 일행과 같이 귀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