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봉(水晶峰 805m)
구룡폭포에 서린 기상을 받고
춘향묘의 아름다운 사랑의 메시지를
현실세계에 접목해 보자 !
♣ 소개 / 특징 / 볼거리
◉ 수정봉 [ 水晶峰 ]
높 이 : 805m
위 치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주천면·이백면
♣ 수정봉
수정봉은 전북 남원 높이 804.7m로 운봉과 주천, 이백의 삼개 읍면에 걸쳐 있다. 백두대간의 맥에서 가장 극적인 분수계를 만나는 봉우리로 남원에 들어선 백두대간은 매요리-고남산-여원치-입망치를 지나면 수정봉에 다다른다.
수정봉에서 바라보면 벌판 너머에 지리산 자락이 펼쳐진다. 또한 운봉분지를 에워싸는 북서산릉의 한 봉우리로 화강암이 변성받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심층풍화된 남원화강암의 운봉분지에 비해 풍화에 강한 암질 산으로 남아있다.
옛날에 산에 수정 광산이 있었다 하여 수정봉(水晶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산의 9부 능선을 둘러싸고 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테뫼식 산성인 노치산성(蘆峙山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주천면 호경리에 있는 육모정(六茅亭)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면 구룡폭포와 구룡계곡을 거쳐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수정봉" 산행은 "주지봉(住智峰 일명:신선봉 630m)"이 백미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종주하면서 지리산 반야봉을 구경 못 하듯 신선이 노닐었다는 주지봉 비경을 잘 모르거나 갈 길이 바빠서 그냥 지나치는데 두고두고 후회로 남게 된다.
여원치(女寃峙 해발:470m)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20분쯤에서 대간을 버리고 서쪽으로 10분쯤 송림을 걸으면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주지봉 바위가 눈앞을 가로 막는다.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철옹성처럼 보이나 서쪽으로 돌아가면 밧줄과 쇠다리가 있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 조망도 뛰어나 서쪽의 남원시 주변의 명산들이 하늘금을 이루며 "구룡사"까지 는 동화 속 같은 환상의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지리적으로 주지봉은 백두대간에서 서쪽으로 0.6km정도 벗어나 있고 수정봉은 백두대간상에 있다.
- 전설,풍물 한마당 -
■ 고남산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물리친 곳이다.
이성계가 고려 말 우왕 때(1380년) 무학대사와 고남산에 올라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낸 뒤, 1천의 군사를 이끌고 황산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뒤 이 산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
■ 여원치
여원치는 영호남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요, 임진왜란을 비롯한 수많은 전란 때마다 접전지로 쟁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리산과 백두산을 이어주는 백두대간이자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한 여인이 이성계를 운봉의 황산으로 안내해 왜장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죽이고 왜적을 물리치게 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왜적들에게 노략질 당한 여인들과 경상도 진격이 좌절된 동학혁명군들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조선환여승람에는 이성계가 왜적과의 싸움에서 대승한 황산(일명 화수산)은 운봉 동쪽 10리에 있는데 높이가 수백 장이나 되는 석산으로 정상에 높은 바위가 있다고 했다. 황산 근처에는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 죽였을 때 흘린 피로 물든 피바위와 황산대첩비가 그 전황을 말해주고 있다.
■ 구룡계곡
"구룡계곡(九龍溪谷)"은 "육모정"에서 북쪽으로 2.8km의 계곡으로 옛날 사월초파일이면 아홉마리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군데 폭포에서 한마리씩 놀다 다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일명 "용호구곡" "구룡폭포"라고 하며 우리나라 삼신산(백두산, 한라산, 지리산)의 하나인 지리산에서 경치가 제일 좋다는 의미로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이란 글씨가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 석녀곡의 여궁석
"구룡계곡(九龍溪谷) 석녀곡(石女谷)"의 여궁석(女宮石)은 일인용 욕조같이 생긴 작은 석탕(石湯) 위로 움폭 들어간 자리하며 바위 색깔까지 불그스름해 누가 보아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묘하게 생겼다.
게다가 풍수지리상으로도 이 마을을 향해 음기를 뿜어내고 있다고 했다. 만약 소나무나 석벽으로 막지 않았다면 마을에서 계곡을 볼 때 이 바위가 바로 눈에 들어오게 되어 아침에 해가 뜨면서 이 여궁석 위로 흐르는 물에 반사된 물빛이 보이면 마을이 쑥대밭이 된다는 전설이다.
마을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고 심지어 상피까지 난다고 했다. 처음에는 소나무를 심어 시야를 차단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소나무가 자라면서 나무 사이로 또 물빛이 비쳐 이번에는 석벽(石壁)을 쌓아 철처하게 물빛을 차단해 버렸다.
그 뒤로 이 마을 아녀자들은 바람난 적이 없고 마을은 평온했다고 한다. 소나무 크기나 석벽에 낀 이끼로 보아 수백년은 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내가 이 물로 얼굴을 씻으면 여자가 잘 따르고, 여자가 목욕을 하면 질병이 없어진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안내판에는 부녀자들이 이 물을 마시고 목욕하면 갖가지 질병을 고칠수 있다고 쓰여 있다. 마을에서 여궁석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모르고, 여자의 성기 이름을 붙여 물으면 바로 저기 라고 가리킨다. 석녀곡은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00골이라고 했다.
신비의 "석녀곡 여궁석" 전설은 전설이 아닌 우리 민중 역사의 삶의 현장이며, "구룡계곡 여궁석"에서 알탕은 "수정봉" 산행의 최고의 백미(白眉)이다. "육모정"에서 걸어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여 "여궁석"을 관찰할 수 있다.
■ 여원재 마애여래불상(女院峙)
해발 470m의 여원재(여원치 女院峙) 정상 암벽에 여신상(女神像)이 있으며,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고남산(古南山)이 있다. 그 고남산의 해발 약 850m 정상에 있는 산신제단은 600년 전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왜구를 정벌할 때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왜구의 부장에는 당시 나이 15세에 불과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선봉장이 되어 닥치는 곳마다 살인·방화·약탈·파괴 등 갖가지 만행을 부리며 이 땅을 짓밟고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이성계 장군과 변안열(邊安烈)·퉁두란(퉁豆蘭) 등이 왕의 명을 받고, 전주·남원을 거쳐 운봉(雲峰)을 향해 진군하던 중 아흔아홉 구비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성계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가 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가리더니 비몽사몽간에 도고(道姑)라는 노파(老婆)가 이성계 장군 앞에 나타나 왜구와 싸울 시기와 장소 방법을 일러 주었다.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지방의 미모 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자기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한 원신(怨神)으로서 노파로 변신하여 이성계 장군께 전략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여원재 여신상은 왼쪽 젖가슴이 없으며 그 노파가 지적하여 준 결전의 장(場)이 곧 운봉 황산(荒山)이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왜적이 함양을 유린하고 남원성을 향하는 도중 여원재 주막에서 술을 청하여 진탕 마시다 얌전한 주모를 위협하여 주모의 손목과 젖가슴을 만지며 방자한 행동을 하였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난 주모는 비분하여 부엌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후 이런 주모에 대한 소문이 퍼져 이곳 주민들은 그 주모의 절개를 높이 기리기 위하여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그녀의 제각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그 여인의 몸에서 물이 흘러 그 아래 마을 밭에서 자라는 풀이 쪽(藍)빛으로 변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그곳 지명이 남평리(藍坪里)로 되어 있다. 그 사연이 있은 뒤부터 이 고개 이름을 여(女) 자(字)를 붙여 여원재(여원치 女院峙)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여인의 원혼이 산신 할머니로 변하여 이성계 장군의 꿈에 나타나 전승을 계시하였다고도 전한다. 이성계 장군은 노파의 전략에 따라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그래서 이성계 장군은 정성을 다해 노파를 만났던 여원재 석벽에다 왼쪽 젖가슴이 잘린 여상(女像)을 새기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여상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산신각(山神閣)을 지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신각은 허물어지고 여상만 남아서 풍우에 시달리고 이끼가 끼어서 그 형상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이러한 사실을 옛 노인들의 전언(傳言)에 의해 알게 된 운봉현감 박귀진(朴貴鎭)이 광무 5년(1901) 7월, 산신각과 여상을 복원한 그 옆에 이 여상의 연유에 대한 비문을 새겨 놓았으니, 그 비문은 오늘까지도 그 곳에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산신각은 허물어져 그 흔적만 남았고 여신상은 풍우에 시달린 채 600년 전 호국의 얼을 상징하고 있다. 다만 비문의 어떤 부분은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음이 안타깝다.
■ 구룡계곡(九龍溪谷)
4.5Km에 이르며, 약수터, 용소, 학서암, 구시소, 유선대, 구룡폭포 등이 있다.구룡계곡은 육모정에서 주천면 고기리까지 이어지는 계곡을 말한다. 수려한 산세와 깍아 세운 듯한 기암절벽이고, 멀리 만복대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한여름의 더위를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다.
● 제1곡: 송력동 폭포
주천쪽 지리산 국립공원 매표소에 조금 못미쳐 있는 송력동폭포를 1곡이라 하며, 이 곳을 흔히 약수터라 불린다.
● 제 2곡: 불영추
매표소를 조금 오르면 높이 5m의 암벽에 이삼만이 썼다는 용호석문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는 절벽 아래 흰바위로 둘러쌓인 못이 2곡으로 불영추라 한다.
● 제 3곡: 학서암
육모정에서 300m 지점에 있는 황학산 북쪽에 암석층이 있는데 이 암벽 서쪽에 조대암이 있다. 이 조대암 밑에 조그마한 소가 바로 3곡인데, 학들이 이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 해서 학서암이라 한다.
● 제 4곡: 서암
학서암에서 300m쯤 오르면 유난히도 흰 바위가 물에 닳고 깎여 반들거리고, 구시처럼 바위가 물살에 패여 있다. 또 거대한 바위가 물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건너편 작은 바위는 중이 꿇어 앉아 독경하는 모습같다 하여 서암이라고 하며, 일명 구시소로 더 알려져 있다.
● 제 5곡: 유선대
구시소에서 1km 지점에 45도 각도로 급경사를 이룬 암반을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곳에 깊은 못이 5곡인 유선대이다. 유선대 가운데에 바위가 있는데 금이 많이 그어져 있기 때문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 신선들이 속세의 인간들에게 띄지 않기 위해서 병풍을 치고 놀았다 하여 은선병이라고도 한다.
● 제 6곡: 지주대
유선대로부터 500-600m쯤 거리에 구룡산과 그 밖의 여러 갈래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계곡 물이 여기에서 모두 합류한다. 그 둘레에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뾰족한 봉우리가 계곡물을 내지르는 듯 하여 그 봉우리 이름을 지주대라 하고, 이 곳을 6곡이라 한다.
● 제 7곡: 비폭동
지주대로부터 왼쪽으로 꺾이면서 북쪽으로 1km 지점에 거의 90도 각도로 깎아지른 듯한 문암이라는 암석층이 있는데, 이에 속한 산이 반월봉이고 여기서 흘러내린 물은 층층암벽을 타고 포말려 비폭동이라 하며 이를 7곡이라 한다.
● 제 8곡: 석문추
비폭동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 곳을 통과한다 해서 석문추라 하는데, 바로 이 곳이 8곡이다. 경천벽이라고도 부른다.
● 제 9곡: 교룡담
경천벽에서 500m 상류 골짜기 양켠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있다. 멀리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 갈래 폭포를 이루고, 폭포 밑에 각각 조그마한 못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 두 마리가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 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서로 꿈틀거린 듯하므로 교룡담이라 하고, 이 곳이 바로 9곡이다. 아홉 마리 용이 살다가 승천 했다는 전설과 함께 일명 구룡폭포라 한다.
☞ 산행코스
코스 : 여원재 - 입망치 - 수정봉 - 남악산성터 - 구룡폭포 - 삼곡교 - 육모정 ( 약 5시간 )
☞ 산행지도
■ 수정봉의 풍경,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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