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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145년
외규장각의궤의귀환
(外奎章閣儀軌145年歸還)
1866년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사건을 구실로 병인양요 (丙寅洋擾)를 일으키고 강화도를 점령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분전으로 수세에 몰린 프랑스군은 대량의 은괴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있던 의궤를 비롯한 189종 340여책 기타 자료등을 약탈하고 강화도 장녕전,외규장각등 모든 관야에 불을 지르고 퇴각 하였다. 과거속에 묻혀졌던 외규장각 의궤는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와 행방이 알려졌다. 이후 국내 학술단체와 정부가 중심이되어 의궤의 반환을 추진하였고 1993년에는 1권이 먼저 돌아오게 되었다.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중 대한민국,프랑스 양국 정상의 합의와 이후 후속조치에 따라 외규장각 의궤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 의궤 297권은 145년 만에 모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된 어람용 (御覽用)이다. 고급 종이에 해서채 (楷書體)로 정성껏 내용을 쓰고 안료로 곱게 채색한후 고급 비단과 놋쇠물림으로 장정하여 그 예술적 품격이 매우 높다 특히 외규장각의궤 중에는 세상에 단 한! 점뿐인 유일본 30책이 포함되어 중요성이 매우 크다.
儀軌非但行之一時實萬世通行之制也
의궤는 단지 한 때만 행해지도록 하는것이 아니라
실로 만세에 걸쳐 행해지도록 만든것이다.
세종실록에서
외규장각 [外奎章閣]
세조때에 양성지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할 규장각을 두기를 청하였으나, 실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숙종 때에는 작은 전각을 마련하여 ‘규장각’이라 이름하였으나, 직제는 갖추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한 뒤 1776년(정조 1년) 음력 9월 25일에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직제학·직각(直閣)·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 등의 관리를 두었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규장각은 그 이름대로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역할을 하였다.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文翰)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의 � �樗�불러일으킨 중심기관으로 많은 책을 편찬했으며, 여기에는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들도 채용되었다.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으며, 규장각은 1910년 일제 강점기에 폐지되었다가, 해방 이후에 일부 남아 있는 도서가 서울대학교 규장각(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동일한 내용의 분상용 의궤다 종이는 어람본의 경우 고급 초주지 (草注紙)를 분상용은 초주지 보다 질이낮은 저주지 (楮注紙)를 사용하였다. 인찰선(印札線)은 어람본의 경우 붉은 선을 직접 그었는데 분상용에서는 검정선이 판으로 찍혀 구획되었다. 어람용은 붓으로 직접형태를 그린후 다양한 안료로 칠하였으나 분상용은 도장을 찍어 인물을 배치하고 색상도 단조롭다.
풍정도감의궤 (豊呈都監儀軌)
인목대비 (仁穆大妃)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 인경궁 (仁慶宮)에서 열린잔치행사를 기록한 분상용 의궤다. 당시 후금 (後金)과의 관계가 긴박하고 흉년이들어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인조는 자신의 반정 (反正)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준 대비에 대한 고마움으로 풍정(잔치)을 올렸다. 한책만 남아 있는 유일본으로 외규장각 의궤중 그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이다.
강화부외규장각형지안 (江華府外奎章閣形止案)
강화부 외규장각에 보관된 책보 (冊寶)왕실족보 왕의글과 글씨 및 서적의 수량과 위치를 적은 형지안 (形止案)이다 형지안 이란 현재의 상황을 밝힌 장부란 뜻으로 의궤는 아니다. 1875년 9월에 작성한 것으로 의궤는 주로 북쪽과 서쪽의 벽면에 있는 서가에 보관되었다.
강도부지도 (江都府地圖)
강화도 북쪽에 위치한 강화부 내에 행궁 (行宮)이 그려있지 않아 프랑스 군대가 행궁을 파괴한 1866년의 병인양요 이후에 제작된 지도로 생각된다. 강화도해안에 설치한 포대 (砲臺)와 혈수 (穴數) 돈 (墩)의 위치를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오른쪽에는 한강입구로 오르는 해안을 따라 산성 (山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수있다.
강화부궁전도 (江華府宮殿圖)
4면의 건물도가 수록된 화첩중 외규장각 모양이다. 서쪽의 건물부터 차례로 제1면에는 강화부 행궁 제2면에는 외규장각 제3면에는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 장녕전 (長寧殿) 제4면에는 만녕전 과 봉선전 (奉先殿)이 그려져 있다. 병인양요로 소실된 건물들을 복원하기 위해 고종이 1881년에 그리도록 하였다는 의견과 1858년에 봉선전을 복건 (復建)한후 병인양요로 소실되기 전의 모습을 그린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정종정안왕후시호도감의궤 (定宗定安王后諡號都監儀軌)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각종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우선 임시 기구인 도감 (都監)을 설치 하였다. 도감은 여러관청의 관리들을 망라하여 조직하였으며 총책임자인 도제조 (都提調)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하였다. 조선의 제2대 오아에게 정종 (定宗)의 묘호 (廟號)를 올리는 의궤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향 (金壽恒)이 도제조를 맡았다.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 (憲宗景陵山陵都監儀軌)
헌종 (憲宗)이 승하한후 6월부터 11월까지 경릉 (景陵)의 조성 과정을 정리한 어람용 의궤다 원표지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람본 의궤 표지의 재료와 장정 방법을 알수있다. 초록색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을 대고 5개의 박을못 (朴乙釘)으로 고정시키고 박을못 밑에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제본을 했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의궤사목 (儀軌事目)
의궤편찬에 관한규칙.
1.의궤는 당상 세명과 도청 두명이 이어서 관리감독한다.
1.낭청 두명은 호조정광 임세집 부사과 이수보가 이어서 관리감독한다.
1.당상 도청 낭청은 본사에 숙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화에 참석하지 않으며 제례에도 차출하지 않는다.
1.당상 도청의 도장 각1 과는 그대로 사용한다.
1.의궤 5건중 어람용은 1건이고 춘추관에 1건 의정부에1건 예조에 1건 강화부에 1건씩 나누어 보관한다.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 (仁祖長陵遷陵都監儀軌)
1731년 3월 16일 에서 9월 초까지 조선제 16대 왕 인조와 그의비 인열왕후 한씨 (仁烈王后韓氏)의 장릉 (長陵)을 옮겨 새로 무덤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총 7책이나 되는 방대한 의궤의 제 1.2책으로서 도청 이하 여러부서에서 업무를 세밀하게 분장한 사항과 의궤의 구체적인 체제와 구성을 알수있다.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 (宗廟永寧殿增修都監儀軌)
1835년 (헌종1년)10월부터 1836년 3월까지 종묘의 정전 과 영녕전을 확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분상용의궤다. 이 공사를 위해 1836년 1월에 종묘와 영녕전에 모셔져 있던 신위를 경희궁으로 옮겼고 3월 27일 제자리로 이안했다. 이 공사로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이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진도사도감의궤 (御眞圖寫都監儀軌)
고종 황제 어진 과 황태자 예진의 제작과정을 기록한 황태자용 즉 예람용 의궤로서 붉은 비단을 표지로 하였다. 이 행사는 고종이 평양에 지은 황실 이궁인 풍경궁의 태극전과 중화전에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기 위해 열린것이었다.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顯宗明聖王后嘉禮都監儀軌)
현종이 왕세자시 세자빈(후의명성왕후)을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동뢰연을 치르기 위해 별궁에서 궁궐로 가는 세자빈의 연 (輦)과 이를 호위하는 행렬을 그린 반차도이다. 왕세자가 사신을보내 신부를 모셔오도록 하였기 때문에 행렬에 왕세자는 그려지지 않았다.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純祖純元王后嘉禮都監儀軌)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친영 (親營)의식을 마친후 국왕이 친히 왕비를 궁궐로 모셔오는 장면을 담은 반차도로 왕의 연 (輦)이 그려졌다. 순원왕후는 19세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형성에 중요한 역활을 한 인물로서 현종.철종대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납체의 (納采儀)
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
헌종효헌왕후혼례가례도감의궤 (憲宗孝憲王后婚禮嘉禮都監儀軌)
현종이 효헌왕후를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왕과 대궐로 들어온 왕비가 서로 절하는 자리와 술과 음식을 나누는 기물 배치도가 그려져 있다.
인선왕후책례도감의궤 (仁宣王后冊禮都監儀軌)
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를 세자빈에서 왕비 즉 중궁전으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금보와 보통의 규격과 제작에든 재료를 기록하였다. 조제조는 영의정 김육이 담당하고 일방에서는 옥색을 제작하고 이방에서는 금보를 삼방에서는 옥책과 금보를 싣고 갈 어련의 제작을 담당하였다.
영조왕세제책례도감의궤 (英祖王世第冊禮都監儀軌)
연잉군 (英祖)을 왕세제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당시 후사가 없었던 경종 임금은 모후인 인원왕후 김씨의 뜻을 받들어 당시 28세인 이복 아우 영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정조왕세손책봉교명 (正祖王世孫冊封敎命)
영조가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할때 내린 교명이다. 교명은 임명받는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것을 훈육하는 글로서 직초하여 화려하게 만들었다.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내는 상징물로서 하사되었으며 이것은 나중에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셔 보관되었다.
정조왕세손책봉옥인 (正祖王世孫冊封玉印)
영조가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할때 내린 옥인이다. 옥인의 인면에는 왕세손인 (王世孫印)이아고 새겨져 있다.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의 책봉래가 거행될때 교명 (敎命)과 함께 줄책 (竹冊),옥인 (玉印)이 내려졌다.
서궐영건도감의궤 (西闕營建都監儀軌)
화재로 절반가량 소실된 경희궁 (慶熙宮)을 중건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서궐(西闕)은 경희궁의 별칭이다. 용복전도,화상전도등 건물도형이 수록되어 있어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경희궁의 모습을 확인할수 있다. 화상전은 정면 7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지붕에 용마루를 두지않은 건물이었고 집경당은 정면 5칸으로 높은 계단을 갖추었다.
이삼초상화 (李森肖像畵)
정장 관모와 관복을 입은 이삼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반신 초상화 이다.
보사복훈도감의궤 (保社復勳都監儀軌)
1699년 남인이 집권하면서 삭재되었던 보사공신을 1604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다시회복시킨 과정에 대한 의궤다, 6월29일 복훈을 명하였고 10월 12일에는 인정전에서 보사공신을 회복시키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공신의 명단은 조정되기도 했다.
은잔 (銀盃)
1734년 9월 18일 영조가 부무공신을 불러 영화당에서 잔치를 베풀고 어필시 (御筆詩)와 함께 하사한 은잔이다. 잔 바닫과 밑면에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소현세자예장도감의궤 (昭顯世子禮莊都監儀軌)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장례에 관한 의궤다. 의궤의 구성은 도청의궤,이방의궤,삼방의궤,순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12면인 반차도는 현존하는 세자의 장례 관련 반차도 중 가장 이른시기의 것이다. 백택기,현학기,표골타,금동등 의장물이 행렬좌우로 늘어섰는데 왕의 발인 행렬에 비해 그 종류와 규모가 적다.
인조장열왕후존숭도감의궤 (仁祖莊烈王后尊崇都監儀軌)
인조의 계비 장열왕후에게 존호를 올릴때의 의식 절차를 기록한 의궤다. 원 표지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람본 의궤 표지의 재료와 장정방법을 알수있다. 초록색 구름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칠을 대고 5개의 박을못으로 고정시켰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고리를 달았다.
현빈예장도감의궤 (賢嬪禮莊都監儀軌)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 조씨의 장례절차에 관한 의궤이다. 현빈은 1727년 가례를 올렸으나 이듬해 효장세자가 요절하여 홀로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재궁을 실은 대여의 뒤로는 배왕대,종사관2명,예장도감 일방 김조관 2명에 이어 곡 (哭)을 담당하는 궁인 14명이 너울을 쓰고 말을타고 따라가는데 곡궁인의 주위에는 흰배로 만든 장막으로 둘러 막았다.
순강원상시봉도감의궤 (順康園上諡封都監儀軌)
원종(元宗)인조의 부친의 생모인 인빈에게 경해(敬惠)라는 시호를 올리고 그 묘소를 순강원으로 봉하고 사당과 묘소를 정비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그 중 묘우조성소의궤는 신주를 모시는 장인 신장을 비롯해 신탑,신의의 제작방법,재료 등이 기록되어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정비인 정성왕후가 사별한 영조가 3년 상을 마친 1759년에 15세된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시을 기록한 의궤이다. 육례의 각 절차에서 비치해야할 각종 기물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50면에 달하는 친영반차도가 실려 있는데 379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문효세자묘명등록 (文嚆世子廟名登錄)
문효세자의 사당인 문효묘를 세우고 신주를 모신과정을 기록한 등록이다. 등록은 비변사등록과 같이 각 관청별로 논의된 주요사항을 날마다 기록한 일지를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효묘명긴철등록을 제목은 등록이지만 색체나 내용은 의궤와 동일하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孝明世子冊禮都監儀軌)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첫째아들 효명세자 (翼宗)를 왕세자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교명은 임명하는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것을 훈유하는 글이다 왕세자에게는 죽책과 옥인을 내려 임명하였다.
정해진찬 (丁亥進饌)
1887년 (고종24)에 열린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팔순잔치중 경복궁 만경전에서 내진찬 장면의 일부를 축소하여 제작한것이다. 전시중인 (丁亥進饌圖) 내진찬을 참고 하였다. 당시에 고종임금,왕비,왕세자,왕세자빈,좌명부의 대표가 차례로 술잔을 올리고 음악과 무용을 공연 하였다.
왕실의장례
왕과 왕비의 장례는 나라전체의 애도속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왕이승하하면 당일로 장례절차를 담당할 임시 관서인 빈전도감,산릉도감,국장도감등이 설치되어 일을 주관하였다.
국왕의 승하가 선언되면 5일간 그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린후 입관하였다.예법에따라 입관후 5개월동안 빈전에 시신을 모신 재궁을 안치하였는데 빈전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산릉도감에서는 무덤인 산릉의 조성을 담당하였다.
빈전에 모신 재궁을 장지인 산릉까지 모시는 의식은 왕이 임종한지 5개월이 되는달에서 길일을 골라 치렀다
국장도감이 주관하는 국장행렬은 재궁을 대여에 옮겨 실은후 노제를 거쳐 장지로 향하였다.
왕릉조성이 끝나면 우제를 지내 혼을 위로하고 신주를 모시고 궁궐에 돌아와 혼전에 모셨다.
復:내시가 궁궐지붕에 올라가 왕의 옷을 흔들며 상위복(上位服)이라고 세차례 외친다. 이는 죽은왕의 혼을 부르는것이다
殮襲:습은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히는것 염은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는 것이다
成殯:염습이 끝난 시신은 장례때까지 빈전에 모셔졌다. 왕의관은 재궁이라 하였으며 이를 다시 찬궁이라는 큰 상자에 넣어 빈전에 모셨다.
成服:승하 6일째 되는날 사주가 상보으로 갈아입는다.
嗣位: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것을 말한다.
上諡冊寶儀:죽은왕에게 시책과 시보를 올리는 의식이다.
빈전도감에서 거행하는의식
국왕이 승하하면 국장을 치르기 위해
각종도감들이 설치되는데
국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빈소를 차리는것은 빈전도감의 일이었다.
장례후 신주를 혼전에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기위해
혼전도감이 따로 설치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빈전도감에서 함께 주관하였다.
국정도감에서 거행하는의식
發靭:왕의 상여가 궁을 떠나 능으로 감
路祭:장지로가는 중간에 길에서 지내는 제사
下玄宮:임금의 관(재궁)을 구덩이(현궁)에 묻음
題主:장사후 첫 제사(虞祭)에 쓰이는 신주인 우주에 글자를 씀
返虞:우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옴
효종빈전혼전도감의궤 (孝宗嬪殿魂殿都監儀軌)
효종의 시신 염습과 안치를 담당한 빈전도감과 장례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담당한 혼전도감의 일을 기록한 의궤다. 책머리에 소선,명정,영좌,찬궁,영침,등 빈전도감에서 담당한 12종 기물의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의궤는 빈전도감의궤와 혼전도감의궤가 1책으로 합쳐져 있다.
인선왕후빈전도감의궤 (仁宣王后嬪殿都監儀軌)
효종비 인선왕후의 빈전 설치와 운영에 관한 의궤다. 승하 5일째인 2월 28일 대렴을 마친 시신을 재궁과 찬궁에 넣어 융복전에 마련된 빈전에 모셨다가 5월 28일 발인하여 장례를 치렀다. 인선왕후혼전도감의궤와 짝을 이루는 의궤다.
헌종빈전혼전도감의궤 (憲宗嬪殿魂殿都監儀軌)
헌종의 빈전과 혼전을 설치하고 의례를 거행한 과정에 관한의궤다. 국왕의 빈전혼전도감의궤는 후계 왕이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인 사우가 포함되어 있다. 이 의궤는 양도감이 빈전혼전도감 으로 일원화된 한편 목차가 생기고 항목이 세분화되고 3책으로 분랸이 늘어나는등 영조대 후반이후 변화가 생긴 19세기 의궤의 체제를 보여준다,
헌종효현헌왕후가례도감의궤 (憲宗孝顯王后嘉禮都監儀軌)
헌종이 효현왕후를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동뢰연도에는 왕과 대궐로 들어온 왕비가 서로 절하는 자리와 술과 음식을 나누는 동뢰연의 기물 배치도가 그려져 있다.
정순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 (貞純王后加上尊號都監儀軌)
영조의 계비인 왕대비 장순왕후에게 존호을 가상하는 의식 절차를 기록한 의궤로 옥보를 채어에 싣고 옮기는 빈차도가 그려졌다. 이때 올린 존호는 명선 (明宣)으로 여섯번째 존호에 해당한다.
사도세자휘지 (思悼世子徽旨)
조선시대 왕에게 대리청정 (代理聽政)을 위임받은 왕세자가 명령을 내릴때 사용한 증표이다. 1749년 (영조25)영조가 사도세자 (思悼世子)에게 정치를 가르치기 위해 대리청정을 시키자 세자는 이 휘지로 서무를 처결했다. 휘지에는 영조의 서명이 음각되어 있다.
영우원천봉도감의궤 (永祐園遷奉都監儀軌)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을 수원부 화산으로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7책의 의궤중 일방과 이방의궤가 수록된 제4책이다. 개 무덤인 현릉원을 향해가는 발인반차도를 보면 관을 모신 대여를 중심으로 좌우에 삼선,진탁,호군 오색촉룸,화첩촉룸을 든사람들이 나누어섰다.
현륭원원소도감의궤 (顯隆園園所都監儀軌)
수원부 화산에 사도세자의 새 묘소인 현릉을 조성한 내용을 정리한 의궤이다. 원래 상,하 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본 의궤는 상책만 남아있다. 책머리에는 원상각을 비롯한 건물,녹로.각종 석물등 29개의 도설과 청룡,백호,주작,현무를 그린 사수도가 수록되어 있다.
현빈묘소도감의궤 (賢嬪廟所都監儀軌)
영조의 첫째아들 효장세자의 빈인 조씨의 묘소조성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정조 즉위와 함께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이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면서 영릉으로 격상되었다. 하급관청에서 상급관청으로 묘소를 조성하는 것에 관해 문의한 내용을 모은 품목집이다.
헌종국장도감의궤 (憲宗國葬都監儀軌)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752년에 있었던 의소세손의 예장에 관한 제반사항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에 난 첫째아들로 정조의 형이다. 1751년 5월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3월4일 3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영조는 무슨일로 국운이 침체의 운수를 당하여 내손자를 죽게 하였더란 말인가?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세살짜리가 무엇을 알겠는가?"
백자청화사도세자묘지명 (白磁靑華思悼世子墓誌銘)
영조가 죽은 아들인 사도세자를 위해 직접지은 묘지로 늙은 아비로하여금 만고에 없이 자식을 죽이는 일을하게 했다.는 영조의 깊은 탄식과 변명이 적혀있다. 이 묘지는 사도세자의 첫무덤인 영우원터 에서 휘지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수원 현릉원으로 이장할때 옮기지 않고 폐기된것으로 추정된다.
문효세자를 효창묘에 장사지냈다
이날새벽에 발인을 하였는데
임금이 홍화문 밖에 나와서 곡하고 전별하였다.
장사가 끝나자 임금이 친히 신주를 쓰고 초우제를 지내고
그대로 하룻밤을 지냈다.
문효세자예장도감의궤 (文孝世子禮葬都監儀軌)
문효세자의 예장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정조 의 후궁 의빈 성씨 사이에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세가되던해 1786년 창경궁 별당에서 짧은생을 마감하였다.
문효세자효창원부장품 (文孝世子孝昌園副莊品)
문효세자는 정조가 의빈성씨에게 얻은 아들로 1782년 왕세자에 채봉되엇으나 1786년 어린나이에 죽었다. 효창원에 안장된 문효세자의 명기류는 도기,청동호,석재벼루와 함,그리고 백자로 만들어진 연적,함,소호 등으로 구성되었다. 청화안료로 장식된 만수만복의 글귀가 눈에 띈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肅宗仁顯王后嘉禮都監儀軌)
숙종이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1680년 타계하자 다음해인 1681년 국장을 끝낸후 바로 계비간택에 들어가 삼간택에서 서인의 핵심인 여흥 민씨 민유중의 딸이 간택되었다.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 (肅宗仁敬王后嘉禮都監儀軌)
숙종이 왕세자때 세자빈(仁敬王后)을 맞이한 혼례식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왕세자에 책봉된 숙종은 그의나이 11세때 가례를 올려 세자빈을 맞이하였다. 세자빈은 삼간택 끝에 노론에 속하는 광산 김씨 김만기의 딸로 결정되었다.
숙종국장도감의궤 (肅宗國葬都監儀軌)
조선 19대왕 숙종의 국장에 관한 의궤이다. 숙종은 재위 46년 60세를 일기로 경덕궁 용복전에서 승하했다. 이후 발인에 이르는 전체과정을 국장도감에서 총괄하였다.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을 설치하고 염습과 복식준비하는 빈전도감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 장례를치른후 가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도감의 네도감의 일을 나누어 집행하였다. 빈전도감의 담당자가 혼전도감의 일을 겸하였다.
숙종금보 (肅宗金寶)
숙종의 승하후 숙종의 묘호와 장문헌무 경명원효 (章文憲武 敬明元孝)의 시호를 올리며 제작한 금보다. 존호를 올릴때 왕과 왕비가 살아있을때는 옥보와 옥책을 올리고 승하후에는 금보와 옥책을 올렸다.
숙종빈전도감의궤 (肅宗嬪殿都監儀軌)
숙종이 사망한 후 설치된 빈전에서의 의식절차를 정리한 의궤이다. 빈전도감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을 설치하고 염습과 복식을 준비하였는데 빈전도감과 혼전도감이 분리되어 의궤가 편찬되기 시작한것은 1674년 (현종15)의 효종비 인선왕후의 국장 때부터이다.
숙종산릉도감의궤 (肅宗山陵都監儀軌)
숙종의 능인 명릉을 조성하는 의식절차를 기록한 의궤이다. 명릉은 1701년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능소를 마련하면서 미리조성되었고 숙종이 승하한후 이 곳에 나란히 묻혔다.
명성왕후부묘도감의궤 (明聖王后부廟都監儀軌)
현종의비 명성왕후의 삼년상이 끝난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에 대한 의궤다 부묘 행렬의 주요구성을 살펴보면 전반부에는 백택기를 비롯한 의장물들이 종반부에는 생전에 받았던 각종 교명과 책보와 시책을 실은 가마가 차례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신주를 모시는 신여와 신언이 배치되었다.
태조신의왕후태종원경왕후시호도감의궤
(太祖神懿王后太宗元敬王后詩號都監儀軌)
어용도사도감의궤 (御容圖寫都監儀軌)
숙종의 초상화를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완성 어진의 정본 1건은 강화부의 창녕전에 소본 1건은 신원각에 보관했다. 5월 22일 숙종이 비망기를 내려 주관화사 진재해는 품계를 올려주고 동참화사 김진어 장태흥,장득만과 수종화사 진재기 허숙에게는 상현궁 1장을 상으로 주었다.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 (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
순조의 생모인 수빈의 신주를 모실 별묘인 경우궁을 건축하고 신주를 모신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현사궁은 장례기간동안 수빈박씨의 신주를 모신 혼궁 이었다. 책머리에 장당을 비롯한 경우궁 전체의 배치도와 신주를 모시는 감실 혼령이 앉는 신탑의 채색 도설과 설명이 실려 있다.
김수항초상 (金壽恒肖像)
김수항은 병자호란때 청과의 화해를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인 김상헌의 손자로서 헌종,숙종,대의 논쟁에서 서인의 정치적 학문적 견해를 이끌었던 학자이자 관료이다. 남인이 실각한 1680년 이후 8년동안 영의정으로 있다가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은후 송시열과 함께 사사되었다.
陵寢을 옮겨 모실때에는
대저 나라의 백년 가까이 된 능침을 옮겨 모실때에는
깆춤새가 매우 중대하니 최대한 정성을 다하는 도리가 있어야 한다.
여러 거행하는 일들도 미리 신중하게 준비하도록 도감에 분부하라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
헌종효현헌왕후가례도감의궤 (憲宗孝顯王后嘉禮都監儀軌)
헌종이 효현왕후를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동뢰연도에는 왕과 대궐로 들어온 왕비가 서로 절하는 자리와 술과 음식을 나누는 동뢰연의 기물 배치도가 그려져 있다.
정순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 (貞純王后加上尊號都監儀軌)
영조의 계비인 왕대비 장순왕후에게 존호을 가상하는 의식 절차를 기록한 의궤로 옥보를 채어에 싣고 옮기는 빈차도가 그려졌다. 이때 올린 존호는 명선 (明宣)으로 여섯번째 존호에 해당한다.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가장먼저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헌목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상,하로 이루어진 이 의궤의 상권은 1993년 9월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이 지접전달하였고 하권은 2011년에 외규장각 의궤 296권과 함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국의왕실의궤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의궤에 대한 박병선 박사의 서지학적 연구서로 199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프랑스어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외규자악 의궤 297책에 대한 개요및 페이지별 정보가 실린 본문과 프랑스어로 채색도판으로 구성되었다.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한국의규장각,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동일의궤의 서지사함을 함께 수록하였다.
화보
병인양요당시 프랑스군의 침략과정을 묘사한 주간지이다. 1834년에 창간된 프랑스 최초의 주간지이다.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 쥐베르가 기고한 1867년 1월 19일 기사인 Expedition de Coree 에는 당시 프랑스군의 침략과정과 전투사항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외규장각으로 추정되는 건물앞을 행군하는 프랑스군의 모습이 담긴 스케치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해군 쥐베르의 조선원정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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