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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교육청 교장단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 교장단 회장이신 강화여중 최 교장님의 연수 보고서 내용을 그대로 옮깁니다.
■ 금강산연수일정
○ 1 일차(7. 18) : 강화 → 서울 → 화진포아산휴게소 → 남측출입관리사무소 → 북측출입관리사무소 → 교예관람 → 패밀리비치호텔(숙박)
○ 2 일차(7. 19) : 숙소 → 온정령굴 → 내금강(표훈사 →보덕암 → 묘길상 → 장안사터 → 온천욕 → 패밀리비치호텔
○ 3 일차(7. 20) : 숙소 → 만물상코스 → 중식 → 북측출입관리사무소 → 남측출입관리사무소 → 서울 → 강화
Ⅱ. 일정별 활동내용
첫째 날 (7. 18)
강화 → 서울 → 화진포아산휴게소 → 남측출입관리사무소 → 북측출입관리사무소 →교예관람
→ 패밀리비치호텔(숙박)
2박 3일의 금강산 연수계획 일정에 따라 오전 06:00시에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신촌행 직행버스를 타고 금강산 연수 길에 나섰다. 합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 3가 역에서 다시 3호선으로 갈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금강산관광 길을 연 산실인 현대 계동사옥 옆에 미리 대기하고 있는 금강산여행 전문 관광버스(대화관광)에 몸을 실었다.
첫째 날은 여정의 준비단계로 목적지인 금강산으로 이동하는 것이 하루 일정이었다. 팔당대교를 건너 서울을 빠져나가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달리는 길은 한 학기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하던 몸을 잠시나마 여유를 갖게 해 주었다. 오후 1시 현대아산이 운영하는 화진포 휴게소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현대아산 측 가이드의 안내로 출입증을 받고, 차내에서 모든 휴대폰을 수거하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북측으로 가는 것을 실감하게 되며 약간의 긴장감이 들었다.
오후 2시가 넘어서자 버스는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동해안 파도를 나란히 하면서 달려간 버스는 남측 출입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외국에 나가는 것처럼 출국심사를 거쳤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금강산을 관광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비교적 간단한 심사절차라고는 하지만 왜 우리가 심사를 받고 북한에, 금강산에 가야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분단된 현실 때문이리라.
심사를 마치고 지금까지 타고 온 관광버스 대신 금강산지구내에서만 운행하는 버스로 갈아타고 드디어 북측 출입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인민복을 차려입은 북한군이 가장 먼저 우리를 환영(?)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북한군과의 대면이 결코 마음조차 편한 것은 아니었다. 왜 그럴까?. 어렸을 때부터 가슴 저 깊은 곳에 심어온 북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금강산 관광지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남한에서 지원했다고 하는 연두색 철제 담장이 쳐져있었다. 도로변에 사는 주민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다며, 일부 마을은 통째로 옮겨진 곳도 있다고 현대아산의 안내원 조장은 설명했다.
도로변 먼발치에는 군데군데 인민복을 차려입은 북한군들이 빨간 깃발을 오른손에 들고 열을 지어 지나가는 관광객 차량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촬영이나 망원경을 이용하는 관광객들을 적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북한의 산야는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 들판에는 북한의 농부들이 단체로 삽질을 하거나 호미로 무언가를 심으면서 일하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는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들과 행군하는 북한 군인들의 모습은 70년대 우리의 생김새와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20여 분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금강산관광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온정각 광장이었다. 곧 이어 4시 30분부터 교예공연이 있다고 하여 부랴부랴 입장권을 끊어 들어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예단의 실내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접시돌리기, 널뛰기, 공중 3회전 돌기 등 고난도의 다양한 공연을 펼쳐보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연을 숨가쁘게 보고난 후 우리 일행은 기립박수를 쳐주면서 위로와 격려를 해 주었다. 숙련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실내공연으로 예술단원들의 피나는 훈련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교예관람을 마치고 온정각 동편 2층에 있는 백세주 음식점에 가서 북한산 소주인 영통주를 반주삼아 금강산에서의 첫 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20 여분간달려 도착한 곳이 금강산패밀리 비치호텔이었다. 북한에서의 첫날밤을 어찌 그냥 잠만 잘 것인가. 여장을 풀자마자 숙소 앞에 노천 카페식으로 차려진 북한 여성들이 종업원으로 봉사하는 북한봉사소에서 북한 술과 북한식통닭구이와 돼지고기 바비큐에 녹두전을 안주삼아 금강산 정보를 섞어가며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우다 1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날 (7. 19)
숙소 → 온정령굴 → 내금강(표훈사 → 보덕암 → 묘길상 → 장안사터) → 온천욕 → 패밀리비치호텔
아침을 호텔식당에서 간단하게 든 후 드디어 본격적인 내금강관광 길에 오르게 되었다. 비가 올 것에 대비하여 우의와 우산들을 챙겨서 버스를 타고 온정각에 모여서 코스별로 출발을 하였다.
내금강은 버스를 타고 만물상쪽으로 올라가 1시간 40여 분을 이동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온정각에서 북한측 안내원이 동승하여 안내를 해 주었다. 북한측 여성안내원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둔 주부였는데 남남북녀라고 부르는 말이 맞을 만큼 아름다운 여성으로 고운 목소리로 상냥하게 안내를 해주고, 또 간간이 노래를 불러주어 관광의 멋을 더하여 주었다.
숲이 우거진 갈지자(之) 모형의 도로를 약 30여분 달려 만물상을 지나 온정렬굴을 지나니 이제부터 비포장도로이다. 금강산관광이 시작된지 10여년이 다 되었지만 내금강은 이번 6월 1일부터 개방된 지역이다. 비포장도로를 구불구불 곡예를 하듯 지나는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간간이 북한 주민들의 모습과 마을들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우리의 60, 70년대 초의 모습이어서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아슬아슬하게 차 한대 지나칠 정도의 꼬불꼬불한 길을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니 북측 안내원이 왼쪽의 잡초로 우거진 곳이 장안사터라고 하였다. 신라 법흥왕 때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하였다는 그 유명한 장안사가 이제는 6.25의 전화로 소실되고 그 터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 버스를 내리니 여기가 표훈사였다.
내금강 관광은 이곳 표훈사를 기점으로 금강문-만폭동-내팔담-보덕암-마하연터-묘길상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표훈사로 내려와 임시로 천막을 친 곳에서 이동식 뷔페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백화암터 부도밭-삼불암-울소-장안사터까지 둘러 본 후 버스를 타고 다시 외금강 온정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비가 계속 내려서 우리 일행은 우산이나 우의를 입고 표훈사 경내로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였다. 표훈사는 한국전쟁의 전화를 피해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절이라고 하였다. 표훈사에 있는 북쪽의 승려는 남쪽의 승려와 달랐다. 먼저 머리를 탁발하지 않고 일반인과 같이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왜 탁발하지 않는 겁니까?”라고 물으니 주저없이 “불심은 머리를 깎는다고 나오는게 아닙네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계곡을 따라 올라 갈수록 빗줄기가 굵거져 내금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겨를도 없이 숨가쁘게 발길을 재촉하였다. 중간쯤 올라가니 계곡 건너편 절벽에 쇠기둥 하나를 받침삼아 공중에 떠 있는 보덕암이 보인다. 사진으로만 보고도 감탄을 자아내던 바로 그 암자가 비록 비는 내리지만 내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20m가 넘는 아슬아슬한 절벽에 7.3m의 구리기둥 하나로 받쳐짓고 쇠줄로 바위에 붙잡아 매었다. 최초의 건물은 고려시대에 세워졌으나 지금의 것은 1675년에 재건된 것이라 한다.
다시 계곡을 따라 오르니 중간에 북한 처녀들이 좌판을 만들어 놓고 막걸리와 음료수를 팔고 있었는데 달러뿐만 아니라 우리 돈도 다 받는단다. 금강산관광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모습이 아닌가 싶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묘길상까지 쉬지 않고 숨을 헐떡이며 올라갔다. 고려 말기에 묘길상암을 중창한 나옹이 직접 새겼다는 좌불상으로 문수보살의 다른 이름이라한다. 높이 40m의 벼랑에 새겨졌으며, 마애불 옆 바위에는 윤사국이 쓴 ‘묘길상’이라는 음각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 때문에 이 불상을 묘길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행들과 빗속에서 사진을 찍고 발길을 재촉하여 다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올라갈 때 지나쳤던 마하연터를 보고 내려왔다. 구름다리를 건너 가파른 계단을 올라 보덕암에 들러서 북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부지런히 표훈사로 내려와 점심식사를 하는 천막으로 가니 북한산 곰취나물을 비롯하여 빗속이지만 입맛을 돋우는 북한 음식들이 반겨준다.
비록 허름한 천막 식당이지만 북한산 가시오가피술을 반주 삼아 산행 후의 식사는 꿀맛이었다. 잠시 휴식을 한 뒤 백화암터 부도밭-삼불암-울소-장안사터까지 둘러 본 후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비에 젖은 옷을 갈아 입고 강행군에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기위해 금강산 온천을 들렀다.
이곳 금강산 온천장의 온천물은 약한 방사능을 함유한 40℃의 중탄산나트륨으로 수질이 매우 부드러우며 노화방지, 갱년기장애, 피부 질환, 관절염, 류머티스, 고혈압에 좋다는 설명이 있었다. 실내보다 야외 노천탕에서 목욕을 하며 둘러보는 금강산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따스한 온천탕에 몸을 담그며 멀리 보이는 금강산 비로봉 정상을 바라보면서 “통일이 된다면 남과 북의 주민들이 금강산을 구경하며 온천도 즐기면서 서로 부담 없이 이곳을 오고 갈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며 어서 통일이 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온천을 마친 후 우리 일행은 아침에 미리 예약해 놓은 금강산호텔 옆에 있는 북한 음식전문점인 금강원으로 가서 북한술인 백두산들쭉술을 반주삼아 짧은 여정이었지만 마지막 저녁 만찬을 성대히 즐기었다.
셋째 날 (7. 20)
숙소 → 만물상코스 → 중식 → 북측출입관리사무소 → 남측출입관리사무소 → 서울 → 강화
금강산 관광 마지막 날의 허전함을 달래면서 정들었던 2박 3일의 숙식을 했던 패밀리 비치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방을 모두 챙겨서 체크 아웃을 하고 셔틀버스에 몸을 실어 온정각 휴게소에서 마지막 북측의 이모저모를 둘러 본 후 휴게소를 출발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만물상으로 향했다. 마지막 코스로 만물상을 둘러보고 북한 냉면전문점인 옥류관에서 점심식사 후 남측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만물상 등산이 시작되는 초입까지 굽이굽이 수십 고개를 돌아서 만물상 등산코스 입구에 도착한 일행은 만물상 등산에 앞서 안내원으로부터 간단한 등산코스 소개를 받고 등산을 시작하였다. 코스가 약간 힘들다는 주변 이야기도 들었지만 어렵게 온 금강산이라 아무리 힘들어도 가볍게 오르리라 굳게 마음먹고 등산에 임하다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산에 오르기 시작한지 10여분 뒤 삼선암을 지나 천선대를 향하여 한발 한발 옮기는데 가파른 철제 계단들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철제계단을 오르니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천선대에 오르게 되었다. 천선대에서 바라보는 만물상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내려오는 길에 망장천이란 샘물을 마시니 그동안의 산행으로 지친 몸이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차는 듯했다. 높은 벼랑 바위틈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로 한번 마시면 힘이 솟아 지팡이마저 잊어버리고 간다는 샘물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북한아가씨들이 파라솔을 펼쳐 놓고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두부와 곁들여 막걸리 한잔씩 하니 그동안의 갈증과 피로가 확 풀리는 듯 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옥류관으로 내려와 그 유명한 평양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온정각 휴게소에 있는 면세점에 들러 지인들에게 줄 간단한 선물을 산 뒤, 일행은 북측에서의 2박3일을 뜻있게 마무리 하고 남측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북측출입관리사무소에 도착하여 통행검사를 받았다. 통행검사는 일상적인 요식행위로 그다지 까다롭지 않게 순조롭게 진행되어 북측 출입관리사무소를 출발 남측을 행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북측 초병의 경직된 모습에서 남북이 대치상황 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였다. 버스는 15분 가량을 달려 남측 출입관리사무소에 도착하여 통행검사를 받은 후 모든 공식일정을 마감하고 처음 우리가 타고 갔던 관광버스로 갈아타고 서울로 향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며, 통일문제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접근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체제가 다른 독일이 통일되면서 외형적으로는 완벽한 통일을 이루었지만 내용적으로는 경제적 격차에 의한 동서간의 갈등과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질적인 체제정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조국 또한 전반적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무리 없는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 참고- 우리 연수단을 이끌었던 강화여중 교장선생님의 글입니다.
유독 애주가이신 교장님들이 많으셔서 술이야기가 많습니다.
목사인 저로서는 그분들의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교장님들이 저의 이러한 입장을 잘 이해해 주셔서 잘 지내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