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군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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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사(安陽祠)
이 안양사는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832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간재전우(艮齊田愚) 선생과 노백 최명희(老栢 崔命喜)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배향(配享)되어 있다.
전우(1841~1922) 선생은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자는 자명(子明)이고 호는 간재이며 본관(本貫)은 담양(潭陽)이었다.
전우선생은 당시의 거유(巨儒)였던 신응조(申應朝)의 권유를 받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특히 임헌희(任憲晦)
문하에서 20여년간 학문을 배워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廷淳)과 더불어 그의 뛰어난 제자(高弟)가 되었다.
또한 전우선생은 노론(老論) 학자들의 학통(學統)을 이어 이이(李珥)와 송시 열(宋時烈)의 사상을 신봉(信奉)하면서도, 특히 이이의 학설을
존중했으나, 그러면서도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양설(兩說)을 모두 배척하고 결국은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었다.
전우 선생은 조선조(朝鮮朝)의 고종(高宗)19년(1882)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으며, 그 후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使) 중추원 찬의(中樞院責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양했다.
그리고 고종 33년(1896)에는 최명희의 주선으로 근흥면 수룡리(당시는 수창동)에 와서 5년간 후진 교육에 몰두(沒頭)하여 마침내 서태안
지역의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振作)시켰다.
그 후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통탄(痛歎)함을 금치못한 전우선생은 즉시 상소(上疏)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인
이완용(李完用)·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박제순(朴齊純) 등을 참수(斬首) 하라고 했다.
전우선생은 모든 관직을 다 사양하고 낙향(落鄕)하여, 오로지 후진 양성에 최선을 다하니 그의 제자가 무려 2,0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같이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주로 전라도(全羅道) 지역인 광주·나주·함평 등이 제일 많고 충청도(忠淸道)의 서태안(瑞泰安) 지역엔 노백
최명희 선생을 비롯하여 40여명에 불과하였다.
수제자(首弟子)인 노백(老栢)은 생전에 스승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향현사(鄕賢祠)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승보다
오히려 먼저 타계(他界)하니, 노백의 동문들이 그 뜻을 이어 받아 서기 1929년에 사우(祠宇)를 짓고 토담을 축조하여 제향일(祭享日)을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로 정하고 제향하고 있다.
그 후 40년이 지난 1969년 9월 9일에 사림(士林)들의 동의에 따라 고제(高弟)인 노백의 영정과 위패를 그의 스승인 전우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는 안양사에 함께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우리 고장 출신이 아닌 전북 전주(全北全州) 출생인 간재 전우 선생의 영정을 본군 근흥면에 자리한 안양사에 안치하고 제향을 올리는 것은,
전우 선생이 대성리학자로서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고, 또한 생전에 본군에 와서 5년간 후진 육성에 공헌한 그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첫댓글 잘모르고 있던 사당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