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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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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블룸 지음/최용훈 옮김
책읽기에 대한 통찰력은 무엇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지침뿐만 아니라 독서의 미학적인 즐거움, 개인의 확대 및 자아에 대한 인식, 그리고 흥미롭고도 복잡한 등장 인물과의 교류 등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교양인의 책읽기
헤럴드 블룸 지음/최용훈 옮김
해바라기/2004년 10월/432쪽/23,000원
▣ 저 자 헤럴드 블룸
미국 문학 비평계의 거목으로 지난 40여 년간 문단을 주도해 온 헤럴드 블룸은 1930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코넬과 예일대학에서 수학한 뒤 1955년부터 예일, 1988년부터는 뉴욕대학에서 문학이론과 비평을 가르쳐 왔다. 24편의 문학 및 종교 비평서를 포함해 끊임없는 논문 발표로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블룸은 당시 문화적 정통주의가 팽배한 학문 풍토를 거부하며 자신만의 지적이고 독창적인 주장을 대담하게 펼쳤다. 특히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1950년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비평은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문학 전반을 아우른다. 그가 말하는 ‘문학의 위대성’이란 영혼의 숭고함과 미학적인 강렬함에서 발생하며 이는 도덕과 정치적 주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헤럴드 블룸은 예일대 인문대학 스털링 기금 교수와 뉴욕대 대학원 영문학 버그 기금 교수로 재직 중이며, 1999년 미국 예술원에서 수여하는 비평 분야 금관훈장을 비롯해 맥아더 재단이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셰익스피어 : 인간의 발명』『새 천년의 전조들』『서구의 정전』『J의 서』『카발라와 비평』등이 있다.
▣ 역 자 최용훈
영문학 박사이며 현재 관동대학교 문과대 교수 및 국제교육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연극 평론가를 비롯하여 KBS 국제방송국 영문작가 등 학교와 사회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다수의 영어 학습 도서를 집필했고, 옮긴 책으로 『악령』『X-항체』『페미니즘 희곡선』『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익사체』『벽화로 보는 이집트 신화』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모든 논쟁을 떠나 헤럴드 블룸은 외로운 독자들에게 다가가 가장 순수한 목적, 즉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삶을 보다 더 확대하기 위해 책을 읽으라고 한다. 그는 시대와 장소를 초원한 문학적 연관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독자들이 다양한 문학 양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몰두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블룸은 이 책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 어니스트 헤밍웨이, 제인 오스틴, 월트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 찰스 디킨스, 윌리엄 포크너 등 인기 작가의 작품들을 심도 있게 논의하면서 단편, 시, 희곡, 장편 등 각각의 장르를 통한 다양한 지적 즐거움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지침뿐만 아니라 독서의 미학적인 즐거움, 개인의 확대 및 자아에 대한 인식, 그리고 흥미롭고도 복잡한 등장 인물과의 교류 등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독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블룸의 문체와 통찰력은 오래된 고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되살리는 한편,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는 기쁨을 줄 것이다.
▣ 차 례
저자 서문
프롤로그 :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1. 단편소설 Short Stories
2. 시 Poems
3. 장편소설 Novels
4. 희곡 Plays
에필로그 :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책읽기
옮긴이의 말: 문학이 그려내는 진리의 빛
부록 Appendix
그 외의 작가들 : 찾아보기
세계문학 100선
교양인의 책읽기
헤럴드 블룸 지음/최용훈 옮김
해바라기/2004년 10월/432쪽/23,000원
저자 서문
책을 잘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왜 읽어야 하는가?’에는 특별한 이유가 한 가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참다운 지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운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교사를 만나 도움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이 책에서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며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단편 및 길고 짧은 시들, 장편소설, 희곡 등의 작품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 선별된 작품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도서목록은 아니다. 단지 왜 읽어야 하는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견본일 뿐이다. 잘 읽는 것은 내적인 훈련을 통해 수행된다. 한마디로 스스로 잘 읽는 법을 훈련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독서의 동기나 용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 책의 주제인 ‘어떻게’와 ‘왜’를 굳이 분리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 책에서 논쟁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읽기를 가르치고자 할 뿐이다.
프롤로그 :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자신만의 판단과 견해를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끊임없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에게만 달려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왜’ 읽어야 하는가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관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고찰하고 숙고하기 위해 독서하라.”라고 충고했다. 랄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도 “최고의 책은 ‘하나의 본성이 글을 쓰며 바로 그 본성이 읽는다’는 확신을 우리가 느끼게 해 준다.”라고 말했다. 베이컨,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에머슨의 생각을 종합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하나의 공식으로 만든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찰하며 숙고하는 데 사용되는 것,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당신 자신이 작가의 본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다가서는 바로 그것을 찾도록 하라!
실용주의적인 측면으로 말하면, 먼저 셰익스피어를 찾고 이후 셰익스피어가 당신을 찾도록 하라는 의미다. 만일 리어 왕이 당신을 찾는다면 그것이 당신과 공유하는 본성, 즉 당신에 대한 그 작품의 밀접한 관계를 고찰하고 숙고하라. 베이컨, 존슨, 에머슨 모두가 동의하듯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독서를 한다. 즉, 자아의 진정한 관심사를 알기 위해 읽는다.
독서를 통해 얻게 될 독자들의 숭고함은 ‘사랑에 빠지는’ 행위처럼 불안정한 감정을 제외하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세속적 초월이다. 나는 독자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래서 비교하고 숙고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깊이 읽도록 하라. 믿지 말고, 받아들이지 말고, 논박하지 말고, 읽고 쓰는 하나의 본성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라.
1. 단편소설 Short Stories
프랭크 오코너는 「외로운 목소리」에서 단편소설이야말로 고립된 개인,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가장 잘 그려 낼 수 있다고 예찬한 바 있다. 그리고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러시아)의 「사냥꾼의 수기」를 다른 어떤 단편소설보다 높게 평가했다. 농노 해방의 필요성과 같은 당대 사회 문제는 이후 러시아 역사의 대재난에 묻혀 버렸지만, 쓰여진 지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작품은 여전히 신선하다. 투르게네프의 단편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전체를 놓고 볼 때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 가장 훌륭한 답을 제시한다.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사랑했던 투르게네프는 모든 인류를 ‘햄릿형’과 ‘돈 키호테형’으로 나누었다. 존 폴스타프(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희극적 인물)나 산초 판자스(『돈 키호테』에 나오는 인물)까지 포함한다면 허구적 인물의 네 가지 유형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사냥꾼의 수기」에 담긴 25편의 작품 중에서 여러 다른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 중에서도 「베진 초원」과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을 특히 좋아한다. 「베진 초원」은 아름다운 7월의 아침, 투르게네프가 거위 사냥에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냥꾼은 길을 잃고 헤매다 밤이 되어 한 목초지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다섯 명의 소작농 사내아이들이 두 개의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 그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어느 새 투르게네프는 우리를 그들의 세계로 안내한다. 일곱 살에서 열네 살에 이르는 아이들은 모두 ‘귀신’과 ‘꼬마 요정들’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다고 믿는다. 투르게네프는 교묘한 방법으로 아이들의 대화를 유도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무엇보다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건 다섯 아이들 중 가장 호감이 가고 영리하고 용감한 ‘파블루샤’라는 아이다. 그 파블루샤가 그 해의 끝자락에 말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우리는 왜 「베진 초원」을 읽는가? 우리의 현실과 운명의 취약성을 잘 이해하고, 투르게네프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초연함 등을 미학적으로 음미하기 위해서 읽는다. 그의 글에 아이러니가 있다면 그것은 풍경이나 아이들, 사냥꾼 자신만큼이나 순수한 운명에 대해서일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도덕적 판단을 삼간다는 점에서 가장 셰익스피어적인 작가들 중 하나다. 반면,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러시아)나 헤밍웨이의 작품은 투르게네프의 작품들과는 약간 다르다. 이 세 작가는 겉으로 초연해 보이지만 실제로 공유하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연 풍경과 인간의 친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체호프의 초기 단편들에는 외형적인 정교함과 진지한 성찰이 있다. 실제로 겪어 보지 않은 삶을 묘사하는 데 있어 그는 탁월한 작가였으며, 이후 모든 작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체호프는 작가란 독자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이 등장 인물의 행위, 대화, 상념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훌륭한 단편으로 33세데 쓴 세 페이지짜리 짧은 소설 「학생」을 꼽았다. 「학생」은 지극히 단순한 구성이지만 아름다운 소설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젊은 신학도가 성(聖) 금요일에 모녀 간인 두 과부와 우연히 만나 여인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에 몸을 녹이게 된다. 그리고 모녀에게 사도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정하고 마침내 회개하여 통곡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때 어머니가 흐느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의 내면에서 기쁨이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진실과 아름다움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끈에 의해 지속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이야기의 전부다. 셰익스피어 이래 가장 절묘하고 극적인 심리학자였던 체호프는 왜 「학생」을 자신의 가장 뛰어난 단편이라고 꼽았을까? 주인공의 마음을 제외하고는 작품에 나오는 모든 분위기가 무섭도록 음산하다. 냉정과 불행 속에서 몰개성적인 즐거움과 개인적 희망이 불합리하게 등장하는, 바로 그것이 체호프 본인을 가장 감동시켰던 것 같다. 고리키는 체호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체호프는 평범의 바다에서 비극적 유머를 드러냈다.” 체호프의 위대한 힘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 일상적 불행과 비극적 환희가 끊임없이 혼재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을 느끼게 해 준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적 환희라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그의 익살맞은 패러디와 소극에서조차 체호프의 평범함을 찾아 볼 수 없다.
현대 단편소설은 체호프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한 인상주의적이다. 이는 헤밍웨이, 플래너리 오코너뿐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환상과 더불어 이와는 크게 다른 무언가가 현대 소설 기법에 등장했다. 카프카는 체호프를 대신해 20세기 후반, 단편소설 장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등장을 예고했다. 오늘날의 단편소설은 체호프적이거나 보르헤스적인 것으로 대별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가지 성향을 모두 담아내는 작품은 현재 거의 없다. 보르헤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그에 앞섰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 된다. 그는 문학의 살아있는 미로다. 체호프와 그의 제자들에 매료된 독자는 이야기에 대한 개인적 관계를 누리지만, 보르헤스는 독자를 매혹시켜 비개성적인 영역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셰익스피어의 추억은 거대한 심연이고 독자들이 이야기에 빠지면 남아 있던 자아의 전부를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틀뢴, 우크바르, 제3의 지구」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이 단편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왜 우리는 최고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작품들 중에서 「틀뢴, 우크바르, 제3의 지구」가 가장 터무니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보르헤스가 실제 인물과 실제 장소를 작품에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맑시즘과 아르헨티나의 파시즘 모두를 거부했던 보르헤스는 틀뢴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아닌 ‘현실’을 고발한다. 그 환상은 창의적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의 일부다. 이야기는 실제로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르헨티나 소설가 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가 보르헤스의 시골집에서 늦은 저녁 식탁 앞에 앉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울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비오이는 우크바르 지방의 사교 교주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해 낸다. 이튿날 비오이는 전화를 걸어 네 페이지에 걸친 우르바르에 관한 설명이 있는 자신의 백과 사전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크바르의 지리와 역사는 모호했고, 그곳에 문학은 모두 공상적인 것으로 틀뢴과 같은 상상 속의 영역을 다루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영국인 기술자 허버트 애쉬에게로 넘어간다. 애쉬가 죽은 후, 보르헤스는 그가 호텔 바에 남겨둔 한 권의 책을 본다. ‘틀뢴 백과사전 초본 제11권’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출간 연도와 장소 등이 나오지 않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책에 몰입한 보르헤스는 틀뢴이라는 우주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 우주 속에는 원인과 결과가 없고 절대적 환상의 심리학과 형이상학만이 존재할 뿐이다. 작품 속에서 보르헤스는 위의 내용은 「틀뢴, 우크바르, 제3의 지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1947년에 쓴 후기를 아울러 소개했는데, 여기에서 환상의 영역이 더욱 확장된다. 회의주의적 몽상가인 보르헤스의 매력은 우리가 그의 경고를 받아들일 때 빛을 발한다: 현실은 너무도 쉽게 굴복하고 만다. 우리의 개인적 환상은 틀뢴만큼 정교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보편적 경향에 대해 묘사하면서 우리가 왜 읽는가에 관한 근본적 열정을 충족시켜 주었다.
현대 단편소설은 두 가지 대립하는 전통, 즉 체호프적인 것과 보르헤스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체호프적 소설들은 갑자기 시작해서 생략으로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호프는 독자들이 그의 사실주의, 즉 우리의 일상적 존재에 대한 자신의 충실성을 믿어 주기를 바란다. 카프카와 그의 뒤를 잇는 보르헤스는 환상 속에 몰두하고 있다. 체호프-헤밍웨이적 양식과 보르헤스적 양식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없다. 독자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전자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후자는 현실을 넘어서 보이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갈증을 느끼는가를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양식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헨리 제임스는 단편을 “시가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는 미묘한 지점”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단편은 암묵적인 게 좋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작가가 회피하느니 설명까지도 찾아내기를 바란다. 독자들은 의도적으로라도 서두르지 말고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관심을 통해 독자는 인물들의 얘기를 엿보거나 들을 수 있다.
2. 시 Poems
나의 관심은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며 왜 읽는가에 대한 것이므로 시와 관련해서는 보다 큰 상상의 창조물에 대한 추구로 초점을 맞추었다. 시는 예언적 양식의 하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상상력에 의한 문학 최고봉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 먼 나라에서 내 마음속으로
죽음의 바람이 부네:
기억에 박힌 저 푸른 언덕들은 무엇인가.
저 첨탑과 농장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잃어버린 만족의 땅.
내게는 빛나는 광야.
내가 갔었던 그 행복의 길을
이제 다시는 가지 못하리니.
이 작품은 하우스먼의 『슈롭셔의 아이』 중 마흔 번째로 나오는 서정시다. ‘어떻게 시를 읽을 것인가?’는 하우스먼(Alfred Edward Housman, 1859~1936)의 시를 살펴보면 가장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압축적인 양식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준다. 정교한 간결성은 위대한 시를 규정하는 깊이와 반향을 담고 있다. 하우스먼의 직접적인 표현은 어떻게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첫 번째 원리를 보여 준다. 면밀하게 읽어라. 왜냐하면 좋은 시의 진정한 평가 기준은 면밀히 읽혀질 만한가 하는 점에 달려 있다.
우리가 타인과 교류를 하는 데 있어 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기묘한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상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 혹은 우리 안의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읽는다. 그럼으로써 보다 충분히, 그리고 미묘하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 1809~1892.영국)과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 영국)의 극적 독백은 시의 중요한 양식 중 하나다. 다시 말해 시란, 내성적이며 모든 것에 대해 절망적이지만 강인한 자아와 인내, 저항력에 대해서는 예외라는 점을 보여 준다. 테니슨, 브라우닝과 동시대를 살았던 미국 시인은 월트 휘트먼과 에밀리 디킨슨이다. 내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독서하는 이유가 자아를 강화시키는 데 있다면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과 디킨슨이야말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인들이다. 그러나 에머슨이 창시한 ‘자립’과 관련된 미국적 종교는 휘트먼과 디킨슨의 시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는 에머슨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한편 에밀리 디킨슨의 서정시들은 ‘자립’의 철학을 셰익스피어 이후 그 어떤 시보다도 높은 의식의 차원으로 고양시켰다. 셰익스피어에게는 뛰어난 의식이 ‘자기 엿듣기’라는 행위에서 현격하게 드러나지만 휘트먼의 경우는 이따금 그 이상을 넘어서려고 시도했다. 자신을 엿듣는 일은 자신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타자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민주주의 시인이라고 선언했지만 휘트먼은 가장 뛰어나고 개성 있는 시인으로 동시에 난해하고 신비로우며 엘리트주의적인 면이 있다. 휘트먼의 자기 묘사는 흔히 ‘외적 인격’, 즉 가면을 쓴 인격이다. 진정한 휘트먼의 모습은 없다. 그의 작품은 쉬워 보이지만 미묘하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밤이고 낮이고 날 찾아와서는 또다시 내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정한 나는 아니다.
휘트먼은 동성애적이기보다는 나체주의 수도자의 모습으로 외부의 자아와 영혼 사이의 포옹으로 「나의 노래」를 시작한다. 이 포옹은 시인에게도 하나의 수수께끼겠지만, 그것은 인격이나 거친 ‘남성적’ 자아와 대조되는 성격 혹은 에토스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재하는 나, 즉 ‘진정한 나’는 휘트먼적인 영혼과는 부정적인 관계만을 가지게 된다.
나는 그대, 나의 영혼을 믿는다. 그리고 타자인 나는 그대에게 나 스스로를 비하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대도 타인인 나에게 비하되어서는 안 된다.
위의 시구에서 ‘나’는 「나의 노래」에 등장하는 ‘나 자신’이거나 혹은 휘트먼의 시적 인격이다. 또한 ‘타자인 나’는 ‘진정한 나’, 즉 시인의 진정한 내적 자이다. 휘트먼은 시적 자아와 실재하는 자아 사이의 상호 비하를 두려워한다. 이 둘은 주종 관계로 보이며 서로에 대해 가학-피학적이고 파괴적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나의 노래」를 깊이 읽으면 우리는 “그 무언가는 알 수 없는 것이다.”라는 진실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시인을 자극해서 그는 다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멋진 비유적 표현을 쓰게 된다. 우리는 휘트먼이 보여주는 새로운 관점의 충격을 얻기 위해서 그의 시를 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여전히 미국인의 의식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예언하기 때문에 읽기도 한다. 또한 점점 미국적으로 변해 가는 세계에서 휘트먼의 시를 읽을 필요가 느껴진다. 미국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미국적으로 되어 간다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나는 '어떻게 왜 읽는가?'에 대한 이 책의 취지에 맞게 영문학사에서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위대한 시인 밀턴(John Milton, 1608~1674. 영국)에 관해 한마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락원』의 주인공인 사탄은 지극히 셰익스피어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손상된 공적에 대한 그의 의식은 신이 자신을 무시하고 예수를 택한 부분에서 오델로가 카시오를 총애해 무시되었던 이아고의 심리적 상처를 뚜렷이 반영하고 있다. 밀턴은 실제로 대단히 이단적인 신교도였다. 그는 운명론자였으며 영혼과 육체가 모두 함께 죽었다가 부활한다고 믿었다. 또한 창조가 무에서 이루어졌다는 정통적인 설명을 부정했다. 『실락원』은 에너지와 활력을 동일시한다. 밀턴도 사탄을 자신의 대역이자 패러디로 만들려고 했던, 에너지와 활력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밀턴은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독자들에게 근본적인 명상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셰익스피어적인 색채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처럼 인식 가능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디킨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기괴함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이곳에는 가장 인상적인 모습의 사탄이 있다. 밀턴은 사탄이야말로 모든 천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다. 오늘날 미국은 우리의 문화, 감각, 심지어 종교까지 많은 면에서 탈신교적(Post-Protestant)인데, 이것들은 명료한 신교 정신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 신교 정신이 『실락원』에서 극치를 이룬다. 의욕적인 독자라면 어렵더라도 진지하게 이 위대한 시를 읽어보기 바란다.
독자들이 이해해야 할 부분은 시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세속과 영적 초월의 한 양식이 된다는 점이다. 또한 시를 암송하는 일은 매우 즐겁고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기억 속에 붙잡아 둠으로써 시가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가 시를 더욱 가까이하여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또 우리에게 주는 보상이기도 하다. 휘트먼의 전성기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는 그 최상의 상태에서 우리에게 소설에서는 시도되거나 성취될 수 없는 일종의 폭력을 가한다. 낭만주의 시인들의 경우는 이것을 시의 적절한 작용으로 이해했다. 즉 놀라게 함으로써 우리를 죽음과 같은 잠에서 깨워 삶에 대한 더 큰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시를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이유로 이보다 더 큰 게 있을까.
3. 장편소설 Novels
소설을 읽는 일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서정시를 읽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라는 세계 안에서 동시대 혹은 역사적으로 익히 눈치챌 수 있을 만한 사회 현실과 만나기를 바란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수많은 등장 인물들과 스토리, 작가들의 목소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난 18~19세기에 그랬듯이 눈앞에 펼쳐질 제3의 천년에는 미학적 즐거움과 영적 통찰을 위해서 우리 모두 소설을 읽어야 한다. 훌륭한 소설의 등장 인물은 페이지를 차지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초상화다.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 스페인)의 『돈 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걸핏하면 다투지만 늘 화해한다. 사랑과 충성심, 돈 키호테의 무지, 경탄할 만한 산초의 지혜들 속에서 둘은 관계를 유지한다. 산초와 돈 키호테는 금방이라도 파탄날 정도로 싸워 대다가 곧 예의바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상대가 하는 말에서 뭔가 배우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다 새롭고 풍요로운 자아를 발전시켜 나간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돈 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적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 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 영국)가 창조한 인물 중에서 『위대한 유산』의 핍은 가장 내성적으로 이 책의 목적에 부합된다. 핍을 이해하는 일은 『위대한 유산』을 잘 읽는 방법이며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좋은 출발점이기도 한다.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스』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 디킨스는 셰익스피어적인 소설가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적 소설가들의 공통점은 변화하는 등장 인물을 중시했는데, 디킨스의 핍에게는 그런 발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위대한 유산』에서 디킨스는 햄릿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패러디하고 이어 햄릿의 복수를 핍의 보편적 용서로 변화시켰다. ‘가난한 고아 소년은 익명의 부호에게서 거대한 돈을 받은 이후, 예전의 근면함을 찾을 수 없는 속물로 변해 간다. 그러다가 후원해 준 사람이 어린 시절 자신이 먹을 것을 보태 주었던 탈옥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탈옥수인 자신을 믿고 도와준 단 한 사람, 고아 소년을 위해 모든 재산을 내준 마음을 알게 된 주인공은 욕망의 허망함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위대한 유산』은 사실주의 소설이 아니라 로망스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핍이 정체 모를 죄의식에 연루된 것을 하나의 “주어진” 사실로 봐야 할 듯하다. 이는 이 책의 시작과 진행 과정에서 요구하는 조건들 중 하나다. 『위대한 유산』은 우리가 고통과 죄의식으로 가득 찬 기원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이 소설의 호소력은 아이 같은 사랑과 자아 회복에의 욕구로 가득 차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왜 읽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제 자명해졌다. 집으로 돌아가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독일)의 『마의 산』은 현재 위험에 처한 수준 높은 문화를 대표하는 동시에, 상당한 교육과 성찰이 필요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젊은 독일 엔지니어 한스 카스토르프는 사촌을 만나기 위해서 스위스 알프스 산의 결핵 요양소에 들른다. 한때 카스토르프도 결핵 진단을 받고 ’마의 산‘에서 7년 동안 지내며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는 교양과 자기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인물로 나온다. 학구적이고 심오한 대화와 연구에 몰두하는 카스토르프는 마의 산에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듣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다. 선생 중에서도 특히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자면서 시인이요, 자유사상가인 카르두치의 제자 ’세템브리니‘가 있는데, 그는 첫 등장에서부터 우선 순위에 대한 주장들을 늘어놓는다. 소설 중반부터는 유대 예수교인이면서 허무적 맑시스트로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중세의 종교 통합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며, 유럽이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개탄한 ’나프타‘라는 급진적인 반동주의자가 나온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옹호하는 세템브리니와 반 종교개혁 사도 나프타의 논쟁은 늘 치열했다. 『마의 산』은 우리에게 아이러니나 패러디가 아닌, 사라진 현실과 영원히 사라진 수준 높은 유럽 문화, 즉 괴테와 프로이트의 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비전을 제공해 주는 작품이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마의 산』을 잃어버린 휴머니즘의 기념비적인 한 편의 역사 소설로 느낄 것이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전혀 없을 수도 있으리라. 독자들은 『마의 산』을 다시 읽으면서 만의 위대한 아이러니는 그가 카스토르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자들은 카스토르프가 매력적인 젊은이긴 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은 카스토르프가 중요한 건 그의 “사랑에 대한 꿈”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도 카스토르프는 중요한 인물이다. 독자들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꿈과 성적 환상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꿈이나 환상이 자기 발전과 확장의 가능성에 영향을 미칠지 묻게 될 것이다.
조만간 그 형태마저 사라질지도 모르는 소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이러한 교훈은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주요 등장 인물들은 변화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을 변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미국)의 『백경』은 미국적 숭고성을 심오한 성취로 일궈낸 소설의 전형으로, 비록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 독창적인 작품이다. 즉 ‘미국인의 요나서이자 욥기서’인 것이다. 멜빌이 성서의 「요나서」와 「욥기」를 인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멜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는 고대 그노시스적 이교 전통에 치우쳐 있었는데, 이 이단적 교파는 창조주 하나님은 실수 투성이 사기꾼이며 진정한 신은 ‘이방인’ 혹은 ‘낯선 신’으로 우주의 변방에 밀려나 있다고 믿었다. 멜빌은 그 거대한 바다 동물에게 ‘흰 고래’라는 뜻으로 ‘모비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모비딕에게 신체 일부를 빼앗긴 에이허브는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복수의 의지를 드러낸다. 에이허브는 “만일 나를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부셔 버리고 말겠다!”라고 외치며 이후의 어떤 작가도 필적할 수 없는 프로메테우스적 저항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는 멜빌의 편집증에 움찔하면서도 에이허브 선장에게 매료된다. 비록 복수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는 속속들이 미국인 같으면서도 자유로워 보인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진정한 내적인 자유를 느끼는 것 같다.
감히 말하건대, 살아 있는 미국의 어떤 소설가도 매카시(Cormac McCarthy, 1933~2004 현재. 미국)의 『피의 오후』만큼 강력하고 기념비적인 소설을 남기지 못했다. 이 작품은 뛰어난 언어, 풍경, 인간과 개념들을 폭력을 넘어 멜빌이나 포크너의 예술에 견줄 만한 잔인한 공포의 미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글랜턴 팀의 원정을 연대기화 했다는 점에서 『피의 오후』는 역사 소설로 볼 수도 있다. 글랜턴 원정대는 멕시코와 텍사스 당국이 가능한 한 많은 인디언들을 죽여서 그들의 머리가죽을 벗겨 오도록 파견한 준(準) 군사 팀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역사적인 분위기를 지니지 않았다. 소설에 묘사된 내용들은 21세기가 된 지금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메카시의 언어는 멜빌이나 포크너처럼 의도적인 고어(古語)여서 제목의 ‘오후(Meridian)'라는 표현은 태양이 머리 꼭대기, 그러니까 한낮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피의 오후』의 부제는 ‘서쪽의 붉은 저녁 노을’이다. 이는 글랜턴 팀의 마지막 생존자인 홀든에 관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홀든은 결코 잠을 자지 않고 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프로메테우스가 일어나 그와 대적하게 될 지 모를 일이다.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 웨스트(Nathanael West, 1903~1940), 핀천(Thomas Pynchon, 1937~2004 현재), 매카시, 엘리슨(Ralph Waldo Ellison, 1914~1994), 모리슨(Toni Morrison, 1931~2004 현재)의 미국 소설들에 대해서 나는 ‘멜빌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냐하면 『백경』이 그 작품들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D. H. 로렌스는 『백경』을 미국의 계시록이라고 말했다. 즉, 미국의 파멸적 미래와 운명의 기록인 것이다.
우리의 기운을 북돋우고 섣불리 위안하는 일이 독서의 기능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시대의 종말에 대한 이 모든 미국적 비전들이 부정성보다도 많은 더 많은 부분에서 긍정성을 제공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은 반복해서 다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정신을 강화시켜 주었던 무언가를 다시금 기억할 수 있게 되리라.
4. 희곡 Plays
희곡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있어서는 먼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였다. 단테와 밀턴, 블레이크는 작품을 통해 숭고한 정신을 그려내려는 야심을 가진 위대한 작가들이었던 반면 셰익스피어는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재현하고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야훼와 예수, 알라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니나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햄릿에게는 많은 수수께끼가 있다. 신학자와 신비주의자들이 신의 신비를 계속해서 해설하듯 햄릿이 지닌 수수께끼들도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햄릿에 대한 명상은 신에 대한 명상보다는 언제나 덜 긴급한 일이지만, 그노시스교도들이 예수에 관해 확언했던 “먼저 부활하고 이후 죽었다.”라는 말을 나는 햄릿에게도 적용하고 싶다. 5막에서 햄릿은 죽은 자아로부터 부활한다. 그러나 부활한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라는 표현 대신 “될 대로 되라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햄릿 이후의 로망스들에 표현된 부활은 덜 미묘하다. 나는 햄릿의 변화와 뚜렷한 신격화보다 더 절묘한 것을 그 어떤 문학 작품에서도 본적이 없다.
존슨 박사는 “시의 본질은 발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실용적으로 인간을 개조하고 재발견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초연함은 『소네트』와 『햄릿』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원형적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많은 발명들 가운데 ‘초연함’은 초서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아이러니 측면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초서를 훨씬 능가한다. 햄릿이 가진 거칠지만 초연한 모습은 그의 자유에 대한 또 다른 추구다. 엘지노어나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추구다.
관객은 우리와 햄릿, 두 부류다. 따라서 우리는 엿듣고 그를 흉내낸다. 햄릿이든 누구든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의도와 어긋나게 그의 말을 엿듣는다.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 가운에 가장 독창적인 작품에 드러나는 기법이다. 햄릿은 하나의 재현물로 남성성을 초월하는 인물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엿듣는 자’로서 성(gendrg)의 속성을 넘어선다. 일반적으로 작가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셰익스피어는 또한 가장 생략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햄릿』은 대작(大作)이지만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햄릿』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4막과 5막 사이의 전환에서 하나의 정점을 건드리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햄릿은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다. 그는 서구 의식의 고귀성과 파멸을 동시에 내포한 존재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통해서 ‘자기 엿듣기’가 독백의 주요한 기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햄릿은 우리에게 일곱 개의 독백으로 창조적인 문학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통해 시란, 오락 이상의 사회적인 기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에게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며 햄릿을 스스로를 치유한다. 그럼, 왜 『햄릿』을 읽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독자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아이러니를 구사한 작가로, 미묘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도로 지성적인 햄릿만이 존재하는 극을 남겼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 희곡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햄릿이 되고, 그래서 간혹 당혹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확대시켜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햄릿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보다 포괄적이며 다양하다. 하지만 단일한 인물로서 셰익스피어 안에 있는 허무주의적 시심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햄릿이다.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 그러면 이제 햄릿의 가장 유명한 독백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3막 1장에서 햄릿이 중심 인물이 되는 극이 소유하는 모든 극적 환상 속으로 빠져든다. 200여 년 이상이나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은 끊임없이 인용되어 왔고, 때문에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일곱 개 중 세 번째인 ‘사느냐 죽느냐’ 독백은 지식과 행위 사이의 부정적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거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의
고통을 겪는 게 더 고귀한 일일까.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항거해 무기를 들고
그것들에 반대해 끝장을 내 버릴까.
이 독백에서 햄릿은 아이러니를 구사한다. 군인의 무력으로도 결코 끝낼 수 없는 바다와의 싸움에 대한 은유가 바로 그것이다. 바다는 햄릿이 암시하듯 우리와 우리의 고통을 모두 끝장낼 것이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가 인식하듯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이다. 햄릿의 영혼은 의지에 차 있으며 육신도 약하지 않다. 그는 자기의 음악에 맞춰 특이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냥 내버려 둬.” 세속적인 문학에서도 이것만큼 독자를 사로잡지는 못할 것이다. 왜? 햄릿이 마지막으로 “이젠 침묵이야.”라고 한 말은 정신적으로 매우 모호하지만 나는 그 말은 부활이 아닌 몰락을 예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왜 『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풍요로운 예술세계를 지녔던 셰익스피어는 무언가를 생략하는 데 대가였다. 따라서 독자는 셰익스피어의 극을 볼 때 무엇이 생략되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극장에 가서 보는 관객보다 희곡 작품으로 읽는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작품을 읽고 공연을 본 뒤 다시 한 번 작품을 읽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말이다. 아무리 이해력이 뛰어난 독자라 해도 결코 고갈되지 않을 ‘무한의 시’라 할 『햄릿』이라는 희곡의 극장성을 전부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이것이 바로 『햄릿』의 보여주는 위대성이며 문학적 경험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이유다.
옮긴이의 말 : 문학이 그려내는 진리의 빛
헤럴드 블룸은 “창조적 문학은 타자이며 외로움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문학을 통해 우리를 생생한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괴테가 말한 대로 ‘문학은 커다란 고백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고백에 귀기울여야 한다. 문학은 결국 삶의 반영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다. 그리하여 보다 풍요롭고 확장된 자아의 부피를 느낄 수 있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과학은 육체의 확장을, 책은 마음의 확장을 추구한다. 우리의 마음이 아름답고 의미있는 시로 채워지고, 단편소설이 주는 결말의 충격으로 새로워지며, 장편소설이 묘사하는 삶의 경험들을 감싸안고, 희곡의 열정으로 다시금 불타오를 때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진리의 빛’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