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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복권
“자! 복권이 당첨되었다! 이거, 정말이야” 하고 친구가 손을 높이 들고 외쳤을 때 듣고 있던 우리들은 “정말? 정말이라 말이지?” 하면서 못 믿겠다는 듯 들떠서 물어댔다. 그것도 사십 억이라 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들은 도무지 사십 억이란 액수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약간 모인 돈으로 무얼 할까 하고 총무가 바뀔 때마다 의논하자고 했지만 모두들 자기 것이 아니라고 무관심하자 새로 된 총무가 저지른 일이다. 정말 잘 한 일이라고 이구동성 소리 질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혼자의 돈으로 산 게 아니라 일곱 명의 친구가 이십칠 년간 모은 곗돈 중에서 일부를 떼어 샀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살 걸하고 후회했지만 누가 알았으랴. 장난으로 산 게 정말로 당첨이 될 줄을…. 그런데 이 큰돈을 어떻게 하지? 머리를 맞댔다.
돈 앞에서 이성을 잃으면 이십칠 년의 우정도 잃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시시비비를 가린 적이 없었던 친구들이란 걸 상기하고 품위를 지켜 가며 조심조심 의견을 냈다.
‘저금 해 두고 이자를 나누자’는 한 친구의 말에 요즘은 실명제인데 누구 이름으로? 하고 당장 반박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건 안 될 일이다.
‘일곱 가족이 아이들을 다 데리고 유럽을 한 번 돌자’ 누군가 말하니 누구는 벌써 유럽을 갔다 왔단다. 그럼 중국으로 하자. 그러니 중국은 더 많은 집이 다녀왔단다. 하기야 가족의 형편은 모르는 일이니 가족이 없는 자리에서 가족 여행을 섣불리 정할 일도 아니었다. 이쯤 되면 여행으로 돈을 쓴다는 건 안 되는 일이다. 또 그 큰돈을 어떻게 여행길에다 다 버릴 수야 있겠는가.
그보다 그 제안은 애초부터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언젠가 부곡온천에 같이 가기로 대 짜듯 해 놓고 출발하는 날 아침, 모두 부풀어 있는데 누구네 집에 수도관이 터졌다는 사실이 전화선을 타고 몇 집을 돌더니 한 집을 빠뜨리고 갈 수 없다는 이유로 여행을 취소한 이력이 있는 답답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어디 갈 때면 ‘또 누구네 집에 수도가 터지면 어쩌지?’ 하는 말이 꼭 나왔다. 외국을 가려면 그것도 가족이 다 가려면 수도만 터지겠는가.
한참 만에 ‘빌딩을 사서 공동 명의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빌딩? 그 돈이면 어느 정도의 빌딩을 점찍을 수 있을까. 제법 좋은 안이라고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시내에 늘어선 건물 중 이것저것 잘 생긴 빌딩을 점찍고 있는데 그럼 관리는 누가 하냐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가며 하면 되지. 그러면 복잡해져 안 되지. 누가 그렇게 주인이 많은 복잡한 집에 세를 들까? 그래? 그러면 다른 걸로! 그래서 공동 명의로 빌딩을 사는 것도 안 되는 일이 되었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럼 어째. 나누자. 똑같이!” 총무가 소리쳤다. 그때까지 나눈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이 들었다. 얼른 좋다고 했다. 모두들 내심 바라고 있던 말이었는지 아무도 반대가 없었다.
“얼마씩 돌아가지? 한 집에 5억은 되네! 나머지는 공동 경비다.”
나누고 보니 40억에서 5억이 되었고 그래도 공동 경비가 5억이나 남는다. 그렇게 되니 좀 친근한 액수가 되는 것 같았다. 나누어서 내 몫이 정해진 이상 공동 경비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우리들의 속성이다. 5억 정도면 무엇인가 장만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모두들 눈을 천정에 걸고 뱅글뱅글 심각하게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멍하긴 마찬가지다. 갑자기 복권을 산 총무 친구가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재빨리 떼고 앞으로 몸을 내밀며
“너는 뭐 할 건데? 말해 봐. 일찍 결정하는 집부터 준다.”
하고 나를 보고 물었다. 복권을 자기가 샀다고 오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판이다. 갑자기 지적이 되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에라. 나는 없는 셈치고 보석이나 샀다가 며느리 보면 줄란다.” 하고 대답해 버렸다. 갑자기 5억 원이 생기는데 입가에, 코끝에 웃음을 주렁주렁 달고도 딱히 할 것을 찾지 못하는 친구들이 답답해서 한 말이다. 다른 친구들은 내 말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처럼 큰돈이니 근사한 걸 장만하고 싶은가 보다. 말이 그렇지. 난들 그 큰돈을 보석 하나 사고 끝낼까. 어림없다. 머리가 새로 복잡해졌다. 공동으로 사십억을 계산할 때는 여유가 있었는데 막상 개별로 나누어 오니 전적으로 혼자 해야 하는 결정이라 빨리 결정할 수도 없고 마땅한 것도 없어서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기까지 한다.
그때, 또 그 친구가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안되겠다. 내 몫은 통장으로 넣는다.”
기다리기나 한 듯 마주 앉아 있던 친구가 맞받았다.
“나도! 참 근데 내 이름으로! 우리 신랑한테는 말하지 마.”
그 말에 나도, 나도. 합창 소리가 났다. 그제야 모두들 속이 보인다. 체통을 차리느라고 감추었던 속마음이 터지면서 웃음보가 봇물처럼 터졌다. 속마음을 들켜서 민망했는지 모두들 마주 보고 목젖이 보이게 웃어젖혔다. 일단 떼어내서 내 앞에 두고 천천히 생각하자는 거다. 지금껏 마땅한 용처를 찾지 못한 건 눈앞에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손에 쥐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모두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도장 밖에 없는데 어째서 니 통장이 되냐? 실명제 아니냐.”
총무가 몸을 바로 하고 한마디 하자 박수를 쳐대며 까르르 모두들 벌러덩 자빠지며 웃어댔다. 마주 보이는 창으로 서쪽을 찾아가던 늦여름의 강렬한 해가 방안을 들여다보고 같이 웃고 있었다. 그런데 햇님의 각도가 심상치 않다. 귀가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매운탕 냄비에서는 먹다 남은 찌꺼기가 자작자작 졸아 들고 있었다.
매운탕 색깔처럼 모두 빨갛게 된 얼굴로 행복한 웃음을 흘리며 주섬주섬 자기 핸드백을 찾아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날이 토요일이건 일요일이건 다섯 시만 되면 자동으로 일어서는 이 아줌마들이 당첨된 돈을 쓰지도 못한 채 일어섰다.
“벌써 다섯 시다. 모두 쓸 데 못 찾았으면 이 당첨금, 도로 반납한다! 후회 없지?”
총무는 당첨금을 마치 정말로 반납하러 가는 것처럼 빈손을 들어 보이다가 가방에 넣는 척했다. 모두들 머리 아프더니만 반납한다니 시원하기만 하단다.
“이봐요. 아줌마들! 로또 복권 한 번도 못 사 봤지? 그래서 내가 말로 복권 사고 말로 당첨됐다고 해 본 거야. 기분은 남잖아.”
총무가 모임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말로 산 것인 줄 알면서도 말로 써 보지 못한 우리들이 우습다. 우리는 내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남의 것을 넘보거나 횡재를 바란 적은 없다. 말로만 산 총무 덕에 유쾌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저녁밥을 지으러 급히 돌아갈 뿐이다.
실 수
어제 한 실수 때문에 아직까지 정신이 혼미하다. 큰일에 반드시 5프로의 실수를 하는 내가 또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여고를 졸업 후 37년이나 궁금해 하고 한 번쯤 꼭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으면서도 막상 눈앞에서 몰라보다니. 그것도 내가 뵙고 싶어서 내가 추천하여 동창회에 모시고는 하루 종일 기다리다 드디어 내 앞으로 다가오시는 선생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도 “얘, 넌 누구니?” 라고 했으니.
그 민망함 때문에 어제는 자정이 넘어 2시가 되도록 잠이 들지를 못했다. 같이 걸어오시는 남자 선생님은 한 눈에 알아보고 인사를 드렸는데, 또 대구에서부터 선생님을 차로 모시고 오던 그 친구도 단 번에 알아보고 “영희구나! 그대로네.” 했는데 왜 영어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이 나지 않아 친구들 중에서 이름을 찾으려고 했는지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가만 있기나 할 걸. 그러나 그건 아니다. 이름을 몰라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하고 있으면 그건 또 얼마나 어색한 만남이 되겠나.
“선생님이시잖아.”
우산 하나를 다정하게 같이 받고 오던 영희가 말을 했을 때 당황했던 가슴을 어디에다 비할까? 얼마나 당황했으면 걸음을 뚝 멈추었을까? 나뿐만이 아니었다. 명색이 동창회에 초청한 제자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닌데 얼굴을 들여다보고 “얘, 넌 누구니?” 하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선생님인들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그런 와중에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 무안함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선생님 어깨를 끌어안고 “선생님은 왜 여태까지 이렇게 고우신 거예요?” 라고 한 말은 참 다행이었는지 염치였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그 긴 세월을 지나고도 같이 걸어오는 제자와 연배가 비슷해 보였으니 못 알아 본 내 잘못이 아니라 못 알아보게 여태껏 고우신 선생님의 잘못이라고 떠넘긴 셈이 된다.
우리들 기억 속에 있는 선생님은 특별했다. 까맣고 굵은 머릿결을 항상 단정하게 안으로 말아 넣은 헤어스타일은 통통한 얼굴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고 온몸에서 흐르는 귀여운 자태는 너무도 예쁘셨다. 그 시절 어렵고도 어려운 영어를 가르치셨으니 미모와 실력이 어우러진 그 분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무스름한 얼굴이어서 하얀 이는 더욱 예뻤고 좀체 열릴 것 같지 않은 도톰한 입술을 열어 한 문장, 한 문장 읽으시던 그 낭랑한 목소리는 선생님의 자태와 어울려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각인된 선생님의 모습 때문에 어제의 실수가 일어난 것이다. 옛날의 그 가무스름한 얼굴에 몇 줄의 주름살을 얹어 품이 넓어진 어깨를 상상했는데 나타나신 선생님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분명 가무스름했던 피부는 어떻게 된 일인지 세월이 흐른 지금 하얗게 반짝이셨고 전신의 통통한 귀여움은 가늘고 여리게 바뀌어서 전혀 옛 모습이 없으셨다. 반팔아래 드러난 팔이 아직도 보드라운 애기피부를 보이고 있었다. 어쩜 내딛는 걸음의 나비까지 같이 오는 제자와 보조가 맞는가?
선생님의 노여움은 없으셨지만 쏟아 버린 말 한마디로 갈팡질팡한 채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바빴고 우왕좌왕 하면서 동창회를 치른 후 모두들 깊은 산 속 산장에 모여서 37년의 세월을 걷어 내며 웃고 떠들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서 잠을 청하듯 누워 나는 속으로 또 다시 실수의 민망함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비가 와서 날이 너무 흐렸던 거야.’
‘선생님 도착 시간이 늦어져서 내가 너무 당황했지.’ ‘우산 밑으로 보아서 잘 보이지 않았나 봐.’ 그래도 저래도 용서 되지 않는 실수에 몸을 뒤척이며 ‘세월이 얼만데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해해 주시겠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편치 않은 마음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영희는 옆에 앉는 친구마다 옆구리를 찔러 가며 내가 한 실수를 친구들에게 전해 친구들을 뒤로 넘어지게 웃게 하였다. 몰라보게 달라지시고 아직도 젊어 보이시는 선생님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영희는 졸업 후 우리들이 그렇게 궁금해 했던 선생님의 근황에 대해 세세하게 말해 주었다. 짐작대로 유복하게 사시고 베풀면서 노후를 보내신다는 말을 듣고 아직도 제자와 같아 보이는 젊음을 가진 이유를 알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너무 젊게 보였다는 증거니까 속으로 좋으실 거야.”
영희의 위로를 듣고 억지로 걱정에서 헤어나려 해 보았다. 모처럼 한 방에서 밤을 지새운 친구들과 안동 하회 마을을 관광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바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정중한 사과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잘 가셨습니까? 진작 전화를 드려야 했는데 친구들하고 지내다가 이제 헤어지고… 뵙고 싶은 마음에 모시기만 하고 예를 갖추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과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수화기에서 그 시절처럼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이번에 행사 치르느라 수고했다. 나,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지. 초임지잖아. 불러 줘서 고맙고. 정말 좋았다네… 내가 너무 늙어서 보톡스를 맞으려 하다가 건강이 제일이지 하면서 안 맞았는데 이번에 초대를 받고 보니 너네들이 내 젊은 모습만 기억하다가 이렇게 늙은 나를 보고 실망하는 것 같아서 맞고 갈 걸 하고 후회했다네.”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 전에 나도 높은 목소리를 흘려 보내드렸다.
“아이구, 선생님. 그냥 오셔도 헷갈렸는데 보톡스까지 맞고 오시면 어쩌게요.”
하얀 쟁반에 작은 구슬이 구르는 듯한 고우신 선생님의 웃음소리가 돌돌돌 굴러 나왔다. 선생님께서는 ‘그러잖아도 친구인 줄 알았는데 보톡스 맞으시면 후밴 줄 알게요!’하는 나의 끝말을 웃으시느라고 들으셨는지 모르겠다.
능력 있는 며느리
저녁을 먹다가 어머님께서 느닷없이 목욕을 가겠냐고 물으셨다.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이틀 전에 목욕을 다녀오셨으니 같이 가자는 말씀도 아닐텐데 종잡을 수가 없어서 왜 그러시냐고 여쭈어 보았다.
저녁 때 어머님께서는 사돈의 병문안을 다녀오셨는데 입원 중인 사돈어른이 목욕표가 있으면 연말이 가기 전에 얼른 돈으로 바꾸어 두던지 내년에 쓸 수 있도록 ‘대체표’를 받아 두라고 정보를 주신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목욕을 간다면 가는 길에 그렇게 좀 바꾸어 달라는 말씀이다. 어머님께서는 지난 두 달간 서울 막내딸네 집에 머물다 오셔서 목욕표가 넉 장이나 남아 있었다.
“박씨 댁을 주려니 부산 아들 한데 가고 없네.”
나름대로 어머니는 이 일을 혼자 해결하시려고 애를 쓰시다가 잘 안되자 연말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음을 알고 내게 부탁하시는 말씀이다.
목욕표의 의미를 생각하면 나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다. 한참 궁리하다가 그만 목욕하신 걸로 생각하고 포기하시라고 권해 보았다.
“일주일동안 이걸 어째 다 목욕하노. 기운이 없어서도 못한다.”귀까지 어두우시니 대답 또한 동문서답이시다. 이 문제를 이해시키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던 밥을 계속 먹으면서 부지런히 궁리해 보았다. 이 상태로는 오늘 저녁에 어머님은 주무셔도 숙면을 못하실 것이 뻔하다. 평소에 금전에 대한 욕심이 없으신 분이니 목욕표 만큼의 돈을 주머니에 넣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만큼의 가치가 온데간데없이 그냥 사라지는 데에 대한 아까움이 있을 뿐이란 걸 잘 안다.
“사돈은 목욕탕에 가서 내년에 하는 표로 바꿨단다.”
꼭 가라는 말씀은 안 하셔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렇게 내 비추신다. 올해 사용하지 못한 표를 내년에 사용하게 바꾸어 주는 일은 있을 리 없을 텐데, 듣지 않은 말을 하실 어머니도 아니고 사돈께서도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실 어른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문제가 쉽지는 않았다. 어느 영업장에서 노인이니까 편리를 봐 준 것 같은데 노인이 아닌 내가 이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을까. 일단 가서 말은 해 봐야 할 것 같아 목욕표를 받았다.
빳빳한 목욕표의 앞면에는 ‘어르신 목욕권. 경노’ 라고 굵직하게 씌어 있었고 뒷면에는 본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고 씌어 있었다. 어머님이 주신 목욕권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머님의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이 보였다. 한때는 경노의 무임승차를 거부하고 ‘까짓 거. 그 돈은 있다’ 하시며 내지 않아도 될 차비를 돈통에 찔러 넣고 버스를 타시던 젊은 시절이 있었고, 돈도 안 받는데 어찌 차를 타냐 하시며 용감하게 걸어오시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새 세월에 밀려서 목욕권 넉 장에 이렇게 연연해 하실까 생각하니 애처로운 생각도 들었다.
목욕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 길에는 겨울 저녁의 어둠이 막 깔리고 있었다.
이십 년을 다니던 목욕탕이니 말하기도 수월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했지만 올해표를 내년으로 넘기는 일은 애초에 없으며 더구나 올해말까지가 아니라 28일까지 다 써야한다는 말을 더 들었다. 28일까지라면 오늘을 빼고 나면 나흘뿐이다. 예상한 일이니 사정할 일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어떻게 이 일을 마무리해야 할 지가 걱정이었다. 그냥 표를 들고 집으로 가면 정말 아까워하실 텐데…. 당장은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실망하실 어머님을 걱정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에서 나와 밤하늘을 쳐다보니 온통 별들이 난리였다. 검푸른 하늘에는 구름을 서편으로 밀어낸 별들이 반짝반짝, 깜빡깜빡,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은 빌딩이 가렸고 높은 기둥에 매달린 가로등이 반짝이는 별과 어울려 환하게 달처럼 놀고 있었다. 교회 지붕을 따라 줄 지어 선 꼬마전구들도 캐롤 가락소리를 따라 반짝이고 있었다. 밤하늘의 표현에도 ‘쾌청’이 있는가. 겨울 하늘은 쾌청했다. 한 줄기 겨울바람을 쐬고 쾌청한 밤하늘을 쳐다보던 내 머리도 쾌청 상태로 되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묘수가 생각났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칠천 원이 나왔다. 일을 해결하자면 삼천 원 정도는 더 있어야 될 것 같아 아래 위 주머니를 몇 번씩 뒤졌으나 허사였다. 종종걸음으로 집에 가서 대문을 소리 없이 열고 살금살금 현관에 들어서니 남편이 정신없이 축구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다. 어머님이 듣지 못하시게 손바닥을 내밀고 작은 소리로 허스키처럼 ‘돈 삼천 원! 삼천 원!’을 외쳤다. 못 알아들은 남편은 큰 소리로 말하라고 하고 나는 어머니가 들으실까 봐 계속 허스키 목소리로 손바닥을 흔들면서 ‘삼천 원! 삼천 원!’ 했다. 돈을 찾느라 기다리던 골인 장면을 놓친 남편이 혀를 차더니 찡그린 얼굴로 삼천 원을 휙 내밀었다. 얼른 받아서 주머니 돈과 합쳤다. 그리고는 이제 막 온 것처럼 현관문을 새로 쾅 열었다 닫으며 신발 소리를 내고 어머님 방문을 활짝 열었다.
주무시려고 옷을 갈아입으시던 손길을 멈추고 돌아보셨다.
“주무 실려고요? 표 팔았어요. 목욕탕 주인이 안 된다고 해서 목욕하러 오는 아줌마 한데 좀 싸게 팔았어요. 넉 장에 만 원 받고요, 괜찮지요?”
“어이, 그래? 거 참 잘 했다. 거 참. 하하.”
기대하지 않으셨는지 깜짝 놀라시더니 금방 안도의 웃음을 띤 얼굴 위에 나를 참 신통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신다. 어머님께서는 말씀만 그리 하실 뿐 내 손에 있는 돈은 보시지도 않았다. ‘네가 해 낸 일이니 네가 쓰라’는 표정이시다. 손바닥을 펴서 돈을 꼭 쥐어 드리고 손을 오므려 드렸다. 얼떨결에 돈 만 원을 손에 쥔 어머님은 돈을 내려다보시며 희한한 일이라는 듯 연신 웃으셨다.
오늘 저녁 나는 표를 돈으로 바꿔오는 능력 있는 며느리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머니에는 ‘어르신 목욕권’이 넉 장이나 그대로 있다. 버리기는 아까워서 28일이 되기 전에 이웃집 노인께라도 드려야 하는데, 자초지종을 알게 될까봐 어머님이 모르시는 노인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서 그것도 쉽지는 않다. 도대체 나는 몇 겹의 거짓말을 해야 되는 건가. 하필 오늘은 크리스마스 전날인데.
초보 운전 시절
“차, 잘 됩니까?”
“하아. 어제 봤어요. 시내서 어리버리 하데요.”
초보 운전 딱지를 떼기 전에 동료들이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70년대 초, 낡은 라디오에서 80년대가 되면 마이카시대가 도래한다는 꿈같은 말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80년대 후반에 들어 자가용이 늘어나더니 승용차는 우리들 대화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기름 없는 나라에서 집집마다 자가용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 온 동네가 다 사도 우리는 안 사겠다 다짐했다. 그러나 남늦게 우리 집에도 조그만 차를 하나 사게 되었고 그 후 세상은 가구당 차 두 대의 세월이 되어 버렸다. 모두들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면서 기름 사정이나 도로 사정을 생각해서 나만이라도 참아야지 했지만 근무처가 이동되면서 나만은 꼭 사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또다시 남늦게 우리도 차 두 대의 가구가 되었다. 꿈같이 들리던 라디오 방송의 ‘마이카 시대’가 실현된 것이다. 토요일 오후 친구들 몇이 모여 모임을 가졌다. 서툰 운전이 화제였다.
“누구는 차를 몰고 나왔는데 정지를 못해서 글쎄, 서울서 인천까지 갔다네.”
“어제 인숙이가 트렁크도 안 닫고 엉덩이를 하늘로 든 것처럼 해 가지고 시내를 막 가데.”
“그건 어때. 나는 와이퍼를 잘못 건드려서 해가 쨍쨍한 날 계속 이러고 갔단다.” 하면서 두 손바닥을 쫙 펴고 어깨까지 흔들면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해 보인다. 모두들 점심상 앞에서 꼬꾸라질 듯이 웃어댔다. 다들 그러고 배웠구나.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나에게도 초보 운전 시절이 있었던 만큼 슬그머니 고백할 용기가 났다.
형편상 갑자기 차를 사기는 샀지만 나는 심한 기계 공포증이 있어서 ‘부르릉’ 시동 걸리는 소리에도 가슴을 쓸어 내리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운전 학원 등록 원서 쓸 때부터 떨었을까? 너무 떨려서 본적지가 생각이 나지 않아 멍하니 서 있을 때, 이미 나의 운전 행보가 예견되었다.
나는 차주가 되면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약속을 했다. 어디서건 시속 60킬로를 넘지 않는다. 절대 아이들이나 남을 태우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는 가지 않는다. 영업용 택시에게는 항상 양보한다. 밤 운전은 절대 하지 않겠다. 대충 이런 것이었다.
차를 사니 판매원이 약속대로 보름간 주행 연습을 시켜 주며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지만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들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두 개를 알고 세 가지를 가르쳐 달라고 조른다는데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아는 것도 힘에 겨웠고 두 가지를 가르쳐 준다는데도 한사코 사양을 했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주유나 앞뒤 유리창을 닦는 것은 남편이 해 주었고 당분간 나는 겨우겨우 운전만 하며 출퇴근을 했다.
어느 날 판매원이 오른쪽 왼쪽 깜빡이를 가르치고는 라이트 켜기를 해 보라고 시범을 보이는데 헷갈릴 것 같아 한 가지만, 그러니까 깜빡이만 우선 배우고 라이트 켜기는 다음으로 미루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둡기 전에 집으로 갔는데 어느 날 모임을 마치고 나와 보니 밖이 어둑어둑 해 있었다.
어리버리 조심조심 집에 다 와서 보니 불도 켜지 않은 채 주행해 온 것이다. 어쩐지 오는 길이 어두웠고 앞을 자세히 보려고 가슴을 핸들에 닿이고 눈에 힘을 주고 와야 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앞에서 달려오던 차가 가까이만 오면 빵! 하고 경적을 울리고 지나갔는데 불 좀 켜란 소리였나 보다. 순전히 남의 차 불빛 덕에 집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가족에게는 하지 않았다. 운전은 미숙해도 자존심은 하늘같으니 못 미더워서 하는 이런 저런 잔소리는 듣기 싫기 때문이다.
어느 날, 혼자 어리버리 차를 몰고 가는데 기름이 달랑거렸다. 가까스로 주유소에 들어가 주유 메타기 옆에 섰다. 청년 하나가 뛰어 나오며 외친다.
“어서 옵쇼오. 문 좀 열어 주세요.”
기름을 넣는데 문은 왜 열라지? 못마땅했지만 나는 차 문을 스르르 반쯤 내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문요! 아줌마.”
“열었잖아요!”
“아줌마, 기름통 열어 줘요!”
기름통이라면 밖에 있는 사람이 열지 안에 있는 나보고 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라 대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아줌마. 초보래요?” 하더니 청년이 열린 창문으로 머리를 쑥 집어넣고 두리번거리더니 조금 후에는 어깨까지 들여놓고 무엇인가 찾고는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열라는 것이다. 기름통 문은 내 왼발 옆에 캐러멜 크기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위 표면에 주유 박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며칠 후 학교에서 야영을 했다. 담당은 아니지만 동료가 아이들과 밤을 새우는데 먼저 갈 수가 없어서 9시까지만 같이 있어 주기로 했다. 밤 운전이 서투니까 밤에는 가족이 데리러 오기로 했다. 시간이 될 때까지 별로 할 일이 없어 차에 올라앉아서 이것저것 만져 보았다.
어둠이 깔린 운동장에서 백미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각도를 맞춰 보고, 시동도 걸어 보고, 의자도 살살 뒤로 앞으로 밀어보고, 등받이도 여러 각도로 제치고 바로 하고 하면서 몇 가지를 손에 익혔다.
‘참, 이럴 게 아니라 라이트를 켜는 법을 알아보자. 그때 판매원이 여기를 만졌는데…’ 밀었는지 당겼는지 돌렸는지 눌렸는지 알 수가 있나. 보라고 할 때 봐 둘 걸 후회하면서 주물럭거리는데 탁! 하는 소리가 나고 순간 불이 왔다. 부채꼴 환한 빛이 퍼지면서 앞 범퍼 앞에 줄지어 선 개나리 울타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떨어지지 않고 아직 남아 있는 개나리꽃 몇 개가 노란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차안에서 혼잣말로 ‘야! 됐네. 이렇게 하는 거구나!’하고 소리 지르고는 시동을 끄고 내려왔다. 그리고 어두운 운동장을 가로질러 종종걸음으로 교무실로 들어갔다. 정신없이 바쁘게 행사 준비를 하는 이 선생이 교무실에 있었다.
“이 선생. 이 선생, 나 차에 불 켰데이. 앞에 불! 근데 뒤에 불은 내일 배울 거야.”
기쁨에 차서 흔들리는 내 말을 듣고 어린 이 선생은 팔짝팔짝 뛰다가 뱅뱅 돌다가 허리를 잡고 숙였다 제켰다 하면서 눈물을 찍어내며 웃는 것이다. 갑자기 터지는 웃음소리를 듣고 모여드는 선생님들에게 이 선생은 방금 했던 내 말을 되풀이 했다. 교무실은 오랫동안 온통 웃느라고 난리가 났다. 앞에 불을 켜면 동시에 뒤쪽도 불이 들어온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초보 운전 시절은 지나가고 어리버리 내 차도 경력이 붙으면서 이제는 주유도 잘하고 80킬로의 속도도 내면서 가끔은 승객도 생기고 타향 땅에 가기도 한다. 그리고 나도 이제 “언니, 내 차는 왜 이리 더운가 하면서 삼복더위에 에어콘도 켤 줄 모르고 땀을 찔찔 흘리고 다녔잖아. 내 차는 고물이래서 그런 줄 알았지 뭐. 하하하하…” 하는 시누이의 초보 시절 이야기를 듣고 그 날 저녁 이 선생처럼 나도 박장대소를 하며 웃는 때가 왔다.
아직도 자라는 아이
동창회에 그녀가 올 것이라는 말을 했더니 친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소재를 어떻게 알아냈느냐며 나를 참 대단하다고 말하고는 속사포처럼 그녀의 근황을 물었다. 그러나 소재는 내가 알아낸 게 아니라 그녀가 자기를 찾아 달라고 자기의 소재를 밝혔던 것이며 그녀의 근황을 내 입으로는 말하기 싫었다.
시내에서 가게를 하는 후배가 있는데 가게의 출입문 옆에 세워 둔 동창회 사무실 간판을 보고 들어와 자기 연락처를 맡겨 둔 것이니 나는 전화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니 그녀가 사는 곳은 놀랍게도 인접한 이웃 군이었다.
동창회에서 그녀는 면바지와 마자켓을 걸치고, 햇볕에 탄 붉은 얼굴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도 단연 화제의 가운데 섰다. 고교를 졸업한 이후 이삼 년간의 근황만을 남긴 채 소문 없이 사라져서 누구도 모르는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모두들 그녀의 지난날을 궁금해 하며 몰려들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접했을 당시는 마침 동창회를 며칠 앞둔 시기여서 참석도 권할 겸 안부 전화를 했더니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지고 젖어 있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장황히 늘어놓아 인생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터지는 물음에 일일이 대답하고 있는 처지를 안타깝게 보아야 했다. 시골에 살고 있으니 당연히 동창회만 마치고 돌아갈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뜻밖에도 일박할 준비를 해 왔다고 했다. 모두들 잘 했다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동창회를 마치고 우리는 깊은 산 속 산장에서 오리 구이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주인공이 된 그녀는 친구들을 쳐다보며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면서 묻지도 않는 말까지 하여 측은한 마음이 들게 했다. 내보이고 싶지 않을 아픈 이야기를 묻지 않아도 술술 내놓아 가련한 인생을 살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학창시절 그녀는 몇 명 안 되는 무용부원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다리로 까만 타이즈 위에 접시 같은 치마를 입고 발레를 하기도 했고 장구에 맞춰 허리를 활처럼 뒤로 젖히는 묘기를 부려 탄성을 자아내게 하던 꿈 많은 소녀였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면 그녀는 여자중학교 무용 선생님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남보다 빠른 결혼과 이혼을 거치며 아이까지 두고 나와 사는 동안 피폐한 삶을 살아온 힘없는 여자일 뿐이다.
“너, 아직 춤 출 수 있지?”
노래를 한 곡 뽑던 친구가 그녀의 우울을 달래려고 물었다. 춤을 놓은 세월이 얼마인데 그게 가능할까. 그녀는 사양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옛 솜씨를 알고 있는 친구들은 이구동성 한 번 해보라며 권했다. 산골의 노래방 기기는 고장이 나서 소리도 나지 않고 우리는 재촉의 손뼉을 쳤다.
웬일인가. 그녀는 가방을 열더니 동창회에서 기념으로 받은 하얀 세수수건을 꺼내 탁! 하고 한 번 풀었다. 그러더니 일어섰다. 수건 한 끝을 손가락에 감아 걸고 팔을 곱게 들어 수건 끝을 내리면서 왼손은 살짝 뒤로 빼고 오른쪽 발을 들어 왼쪽 발 앞에 비스듬히 갖다 놓고 뒤꿈치를 살짝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음악을 기다리는 눈치다.
‘아리라 앙 아리라 앙 아 라 아 리이요 오오….’
누가 곡을 제의한 것도 아닌데 합창으로 아리랑이 새어 나왔다. 노랫소리가 나오자 그녀의 손끝에 걸려 있는 수건이 한삼이 되어 너울거리고 출렁거리며 원을 그렸다가 곡선을 그리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꼬리치며 내려오기도 했다. 그녀의 눈길은 그윽하게 수건을 따라가기도 하고 천정에 박히기도 하다가 살포시 밑으로 내려 깔기도 하면서 뱅그르르 돌기도 했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뺀 채 어깨를 일렁거려 흥을 보이는 그녀는 아직도 춤사위를 잊지 않고 있었다.
목이 메어 왔다. 졸업 후 한 번도 춤을 춰 보지 않았을 텐데 질곡의 삶을 살면서도 어떻게 춤사위가 그대로 일까. 서툰 육성리듬에도 터져 나오는 저 많은 끼를 숨기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돌아가면 밭에서 고추 따고 풀 뽑고 해야 한다는데 아직도 남은 저 많은 끼를 어쩌나.
춤추는 그녀를 보며 노래를 하는 대신 나는 그녀의 갈라진 맨발에 외씨 같은 하얀 버선을 신겨 보았다. 사뿐사뿐 그녀의 발끝은 하늘을 향한 채 잘도 돌았다. 수건 대신 비단실로 수놓은 한삼으로 바꾸고 남색 끝동을 댄 하늘거리는 폭 넓은 한복을 입히고 머리를 쪽지고 비녀를 꽂아 보았다. 아마 다들 내가 한 일을 속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서 그녀는 여고 시절 발표회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뱅글뱅글 돌아갔다. 우리는 노래를 반복했다.
춤이 끝나자 그녀는 다 잊어버려서 잘 안 된다고 겸손을 부렸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아직도 변하지 않은 그녀의 춤사위가 놀랍고 걱정이 된 것이다. 그날 저녁 그녀는 잠들기 전에 ‘너희들을 보니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고 여러 번 말했다. 잠을 자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 친구를 잊고 산 세월을 그녀는 잊지 않고 우리를 그리면서 살아온 것 같다.
며칠 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년 동창회에도 꼭 불러 달라는 부탁을 했고 초등학교 일학년 교과서를 구해 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웃에 엄마 없는 아이가 있는데 학교에 갈 나이인데도 학교에 가지 않고 있어서 가르쳐 보겠다는 것이다. 농사일이 그렇게 많고 바쁜데, 더구나 건강이 좋지 않아 피곤하면 안 되는데 걱정이 되어 그럴 시간이 있느냐. 그 시간에 잠이나 자 두라고 했지만 내 말을 듣지 않고 빨리 책이나 구해 보내 달라고 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두고 온 아들이 아직도 엄마 없이 혼자 도는 외로운 아이로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일학년 교과서를 모두 준비하고 농삿일로 지친 그녀가 시원하게 잠 들 수 있도록 인견 바지 하나를 같이 포장해서 택배로 보냈다. 그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가슴속에서 아직도 자라고 있는 그녀의 아이를 키우는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
몇 년 전, 출근인사를 하려고 어머님을 찾으니 어머님은 방이 아니라 꽃밭에 계셨다. 나는 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렇게 꽃밭에 앉아 계시면 큰일이다. 그렇다고 어른을 얼른 나오시라고 소리 칠 수도 없고 그냥 출근하자니 가슴이 다 탔다.
좀 높은 언덕배기집에서 파란 잔디를 깎으며 꽃나무가 자라는 정원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미래에 대한 내 소박한 꿈이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잔디가 자라는 정원이 있는 집을 장만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결혼 후 삼사 년간은 토끼장처럼 삼층으로 된 작은 집에 마당이 한 뼘도 없는 곳에서 살았고 그 후 열심히 저축하여 약간의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지만 잔디는커녕 보도블록도 깔 형편이 못되어 마당을 비로 쓸 때마다 흙이 한 삽씩이나 쓸려나와 마당 바닥이 반질반질해지는 조그만 집에서 사오 년을 더 살았다.
결혼 후 세 번째 이사를 했다.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 집은 약간의 마당이 있어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대궐이었다. 이 집을 사기 위해서 살던 집을 팔고 그동안 저축해 둔 것을 찾아도 좀 부족하여 빌리기까지 하였다. 평소 돈 빌리는 것을 겁내는 내가 무리해서라도 이 집을 산 이유는 언젠가는 마당에 잔디를 깔고 정원을 꾸며서 그 옛날 그려본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당 있는 집에 이사를 했지만 잔디를 심는 일은 아득했다. 빌린 돈을 갚는데 몇 년이 걸렸고 돈을 갚은 후에도 크고 작은 가정사로 식목하는 시기를 여러 번 놓쳤다. 잔디를 심는다는 일은 정원을 만드는 일인데 막상 정원을 꾸미려고 하니 소요액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형편상 정원을 꾸미는 일을 포기하고 정원 비슷하게 꾸미기로 욕심을 반으로 접었다.
꽃밭에 잔디나 깔고 봄을 가져오는 영산홍을 몇 그루 심고 기왕에 있던 주목이나 골담초, 석류나무, 무화과나무를 옮겨심기로 결정하고 견적을 받아보니 오십만 원이 나왔다.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 값도 되지 않는 액수이지만 당시의 우리 형편에는 거금이었고 여러 번 망설이다 용기를 내서 작업을 했다.
내가 잔디 있는 집에 살기를 소원한지 몇 년 만에 이루어 낸 잔디심긴 정원인가? 아침마다 잔디가 잘 붙었는지 문안인사를 하고 퇴근 해오면 잔디심긴 꽃밭 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착근하는 잔디의 귀여운 몸짓을 한참 보고서야 현관으로 들어오곤 했다. 잔디는 착근을 잘하여 대여섯 평 남짓한 꽃밭을 파랗게 만들었고 그 위에 봄이면 영산홍이 색색으로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이면 골담초가 가지 따라 쪼르르 노란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석류가 익어가서 제법 보기가 괜찮았다. 그러다가 마당의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잔돌을 깔아서 잔디꽃밭과 마당이 그런 대로 잘 어울리게 되었다. 나는 이쯤서 나의 욕심을 중지시키며 만족하려 했다.
그런데 이듬해부터 잔디밭에 변화가 왔다. 퇴근 해 보면 한 주먹의 파란 풀이 쓰레기통 옆에서 햇볕에 새들새들 곯아가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헤쳐 보니 잔디였다. 당황스럽고 애잔한 이런 일이 며칠째 계속되었고 참다못해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여쭈어 보았다. 그러나 어머님은 잔디를 뽑은 게 아니라 풀만 뽑았다고 하셨다.
“그게 어데 잔디냐 풀이지. 꽃밭에 풀이 수북해서 꽃이 크나?”
계속해서 잔디는 야금야금 뽑혀 나갔다. 어머님의 기준은 다른 잔디보다 키가 큰 잔디는 풀이다. 항상 남보다 약간 더 웃자라는 잔디는 있기 마련이고 뽑아낼 풀은 항상 있는 것이다, 잔디는 날마다 조금씩 뽑혀 나갔다. 드디어 맨 땅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맨 땅은 조금씩 넓어지더니 어느 날 어머님께서는 상추씨를 사오셨다. 그리고 며칠 후 잔디가 자라던 땅에 상추 싹이 올라왔다. 상추는 난들난들 잎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석류나무와 주목그늘 아래서 상추가 잘 자랄 리가 없었다. 상추는 잎이 엄지 만하게 자라다가 녹아버렸다. 잔디가 없어져서 내 마음도 녹아나고 그 자리에 들어선 상추도 녹는 것이다. 어머님은 이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하시며 다른 곳에 또 열심히 잡초를 뽑아낸다. 이번엔 잔디가 없어진 자리에 배추씨를 뿌리셨다. 배춧잎도 엄지만큼 크다가 벌레 먹은 잎이 보이더니 녹아 없어졌다. 어머님께서는 상추나 배추가 안 되는 이유가 잔디 때문이라 하셨다. 그리고 잔디는 더 빨리 없어졌다.
퇴근 후 만나면 우리부부는 이 일이 대화의 시작이 된다.
“오늘은 우리 어메가 또 얼마나 뽑았는고?”
“천 원어치는 뽑았어요. 이제 곧 원상복귀 되겠네요.”
“그래도 우리 어메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게.”
그리고는 어머니가 한나절 운동하신 것으로 셈하자고 했다.
이듬해는 상추 대신에 취나물을 삽목하고 약간 넓어 보이는 자리에는 고추를 심으셨다. 열심히 물주고 가꾸시더니 풋고추 몇 개 따먹고는 빨갛게 익어가야 할 무렵에 고추가 빠지는 것이다. 또 잔디 탓이다. 잔디에 벌레가 많이 와서 고추까지 먹는다는 것이다. 몇년을 계속하면서 이제 어머님 눈에는 풀도 풀이고 잔디도 풀이다. 취나물과 고추가 아닌 것은 모두 풀이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잔디를 마침내 끝장을 보실 요량으로 그날은 아침부터 출근시간도 안 되어 밭에 계셨던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잔디를 뽑으시는 어머님 등을 보고 출근하는 마음은 참으로 답답했었다. 왜 어머님 눈에는 잔디가 잡초로 보이실까? 정말로 잔디와 잡초 구별이 안 되시는 걸까? 오십만 원이나 들여서 공사를 할 때 현장에 계셨는데 말이다.
그날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우리 마당에 잔디는 없었다. 단 십 원어치도 없었다. 줄을 튕기듯이 심겨져서 한 해만에 꽃밭을 융단처럼 만들어 지나가는 실바람도 보이게 해 주던 부드러운 잔디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간절히 바라면서 꾸던 꿈도 10년을 세 번이나 넘겨 겨우 실현되나 했건만 그나마 삼사 년만에 거품이 되었다.
어머님은 잔디밭을 고추 밭으로 할까 토란 밭으로 할까 꿈에 젖어 계셨다. 나는 고추 밭이 되건 토란 밭이 되건 마음을 비웠으며 상추씨를 뿌리건 배추씨를 뿌리건 상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올해는 오월 어느 일요일 남편과 함께 야생화 전시회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종묘시장에 들러 방울토마토 모종을 다섯 포기 사 왔다. 우리는 잔디가 없어진 맨 땅에 모종을 심으면서 서로 마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남편은 헛헛한 내 마음이 웃음으로 나오는 의미를 잘 안다는 표정이다. 잔디가 없어진 맨 땅에 토마토를 심는 것, 그것이 내가 터득한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토란 껍질을 벗기며
어머님께서 토란 밭에 물을 주고 나오시다 넘어져서 허리를 다치고 입원한 후 소화 기능까지 나빠져 가족들이 석 달간 한바탕 홍역을 치르면서 나도 모르게 마당을 드나들 때마다 흘깃흘깃 토란 밭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그 전에는 토란 씨가 묻히고 싹이 나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무심코 담장 밑에 토란 잎이 가득 피어나서 푸르게 넌들거리는 모습을 무심히 보았을 뿐, 토란의 생육 과정을 눈여겨 본 일이 없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무거운 토란 잎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막내 시누이를 따라 서울로 가시면서 ‘토란, 말릴래?’ 하신 가느다란 어머님 음성이 자꾸 들려와 토란을 어떻게든 손질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왔다.
아침준비를 하다가 창문 너머로 마당에 있는 남편을 향해 토란을 베 달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전날 친정어머니께 전화로 여쭌 대로 방패같이 생긴 저 큰 잎은 쓸모가 없으니 버리고 줄기는 그늘에 눕혀 놓아 달라는 말도 했다. 토란은 이틀 정도 골려야 껍질을 벗기기가 좋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 뒤 안으로 돌아가는 좁다란 통로에 둥치로 모여 누워 있는 토란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어머님께서 입원하시면서 당신이 하시던 집안일을 그대로 물려받고 간병까지 하자니 토란에 물주는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물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없는데 저리 푸르게 자라느라고 정말로 수고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작년에 어머님께서 벤 토란에 비하면 확실히 줄기가 가늘고 볼품이 없는 건 모르는 눈에 봐도 확연하다. 물이 적어 생육이 부실했던 모양이다.
가을볕을 등지고 앉아 난생 처음 토란의 껍질을 벗겨 본다. 단순한 일이지만 놀기보단 힘든 일이다. 손에 검푸른 물이 들고 아린 맛에 눈물이 나며 손목 살갗이 따끔거린다. 연신 눈물을 훔쳐내면서 ‘왜 어머님은 토란에 그렇게 집착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귀한 것도 아니며 비싸지도 않고 맛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더구나 우리가 일 년동안 먹는 토란이라 봐야 세 번의 제사 때와 두어 번 개장국을 끓일 때뿐인데 무엇 때문에 마당 귀퉁이에서 초여름부터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죽지도 않은 작약 나무를 죽었다고 우기고 뽑아 낸 후 그 자리에 토란 밭을 만들어 물을 주느라고 고생하시다 결국 병까지 얻으시는가.
그런데 꽃이 살던 자리에 따고 들어 온 이놈의 토란은 그러지 않아도 내 심사가 틀리는 판에 심어 놓거든 야생화처럼 돌보지 않아도 쑥쑥 잘 클 일이지 밤낮으로 비싼 물을 붓게 해 달라니 내가 반가워 할 수 있었겠는가. 웬 물을 그리 먹는지 봄만 지나면 수돗세를 네 곱절로 만들지 않는가.
토란은 한자로 土卵이라고 쓰니 ‘땅에서 나는 알’이라는 뜻인데 다른 알만큼 영양분이 많다는 뜻인지 뿌리가 알처럼 생겼다는 뜻인지 알 수 없지만 모양만은 꽃이 없을 뿐 연못 속에서 자라는 연 같다. 그래서 토란은 ‘土蓮’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는가 보다.
물에 잠겨 사는 蓮이 땅에서 살자니 왜 물이 필요하지 않을까? 숱한 것을 두고 하필 그런 식물에 집착하시는 어머님이 잘못인지도 모른다.
가을볕도 오래 앉아 있으니 봄볕만큼이나 등이 따갑다. 토란의 밑둥 끝을 약간 꺾어서 좁은 쪽으로 쭈욱 올려 벗겨 내면 허물을 벗듯이 연초록 등살이 모습을 내 보이는 것도 재미있고 벗긴 다음 한 뼘의 길이로 잘라서 다시 세로로 썰면 하얀 속살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는 재미도 괜찮다.
다듬은 토란이 광주리에 수북하다. 토란을 말리는 데는 통풍과 일조량이 중요하단다. 마당의 자갈 위에 통풍이 잘되게 벽돌 두 장을 마주 보게 세우고 그 위에 발을 걸쳐놓고 토란을 부어 균형을 맞춰 골고루 펴 널었다. 파란 하늘이 벗겨진 토란을 내려다보고 잠자리가 맴을 돌며 가을볕을 돌린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오실 어머님께서 토란을 다 다듬은 것을 아시면 시원해 하실까. 당신이 직접 못 만져 서운해 하실까 생각하며 뒷정리를 끝내고 턱을 괴고 토란을 본다. 비온 뒤에는 넘어진 토란을 세우느라 바쁘고 바람이 불면 넘어질세라 묶느라고 바빠서 하루 종일 토란 밭을 맴도시더니 막상 벨 때가 되어서는 아픈 몸으로 먼 곳에서 애만 쓰실 어머님이 생각난다.
벗겨진 몸으로 하얀 속살을 내놓은 토란이 가을볕을 온몸으로 당기고 있다. 마른다는 것을 계산해도 토란이 무척 많다고 생각되었다. 토란을 눈짐작하여 다섯 몫으로 나누어 본다.
둘째와 막내 시누이는 제사가 많으니 좀 더 많이, 형님은 어른이지만 제사가 없으니 적어도 되겠다. 이렇게 눈으로만 나누어 보는 중에 어머니가 그토록 토란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었다.
봄에 토란 씨를 묻을 때부터 싹이 나고 물을 주어 잎이 무성하여 걷어 들일 때까지 어머님은 가슴속에서 딸들의 식탁을 그려 왔는지 모른다. 당신 손으로 깨끗하게 장만했다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보따리에 찔러주는 그 순간의 기쁨을 보려고 하찮은 토란에 그리 많은 시간을 집착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젊어서도 늙어서도 늘 어머님 손은 빈손이었다. 빈손에 빈 마음이면 좋으련만 무언가 주고 싶은 마음만은 가득 차 있으니 그게 탈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마음을 담아 주시는 건 겨우 무말랭이 김치와 토란이었다. 항상 ‘올해가 마지막’이라며 며칠 저녁 연달아 썰어 가을볕에 말린 무말랭이를 김치로 담아 집집마다 나누어 주는 일이 삼십여 년째이며 거기에 토란이 육 년째 덧붙여졌다. 언제 올지 모르는 딸들에게 언제와도 상관없이 줄 수 있는 게 무말랭이 김치이며 말린 토란이다. 그것은 변질이 없으며, 자식들의 도움 없이 어머니 스스로 해 낼 수 있는 것이며 또 오전 한나절 ‘어머니의 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그때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고 싶은 마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토란 가꾸기는 어머님으로선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입원실 병상에서 “내년에는 토란을 심지 말고 고추나 심어라.”고 하신 말씀이나 서울로 가시면서 “까짓 거. 내년에는 암 것도 심지 마라.” 하신 말씀은 토란 때문에 얻은 병으로 우리를 고생시켜서 미안한 마음에 하신 거짓말이겠다.
육체가 병들어 기력과 용기는 줄었지만 정신과 마음만은 한결 이시니 내년에도 살아 계신다면 말씀대로 아무것도 심겨지지 않은 손바닥만한 빈 밭을 보고 얼마나 아까워하실는지 짐작되고, 토란을 거두어들이는 이맘때가 되면 ‘죽더라도 봄에 심을 걸’하고 후회하실 얼굴이 물기로 반짝이는 토란 위에 어른거린다. 그 얼굴을 보는 나도 후회할 것만 같다.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졌다고 정말로 내년에는 꽃나무로 빈자리를 메우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 가을, 토란 껍질을 난생 처음 벗겨 보듯이 내년 봄에는 또 난생처음 토란 심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의 흰머리
모처럼 친정에 간 날 어머니는 부흥회에 초청하신 목사님을 대접하려고 김밥을 말고 계셨다. 옆에서 이것저것 말로만 거들던 내 눈에 귀 뒤로 넘어간 어머니의 흰머리가 들어왔다. 어머니의 늙는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내 나이 서른 살 때였다.
내 기억에 쉬고 있는 어머니 모습은 없었다. 아침에 따던 이불은 저녁이면 풀기 빳빳한 이불이 되어 이불장에 들어가고, 새벽에 갈라진 한 접의 통배추는 그 날을 넘기지 않고 늦은 저녁 덜렁거리던 전열구 아래서 마늘 향 그윽하게 김장독을 채웠다. 펌프를 자아올리는 소리가 나면 우리 집 넓은 마루는 반들거렸고 마당은 훤해졌으며 마루 밑에 넣어 둔 온갖 집기들까지 잘 정리되었다.
505장미 털실이 한창 유행하던 때, 내 친구 재연이가 꽈배기 무늬를 넣어 짠 세타를 입고 나를 찾아왔다. 나보다 먼저 엄마가 재연이를 붙잡고 이리저리 앞뒤로 아이를 돌려가며 옷을 살폈다. 며칠 후에는 나도 505장미털실로 짠 꽈배기 무늬가 있는 따뜻한 세타를 입었던 것을 비롯하여 자라면서 어머니의 빼어난 솜씨는 수없이 보아왔다. 한자리에서 빚어낸 쌀 다섯 되의 송편이 하나 같이 고르고, 양장점에서 갓 찾아 온 원피스를 쪼르르 타서 고쳐 입으시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우리 기억에 남은 어머니는 만능이셨다.
아버지께서 먼저 가실 것을 어머니는 예견이라도 하며 사신 걸까? 아버지가 계실 때도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 두꺼비집을 열고 휴즈를 잇는 일, 벽에 못질을 하는 일, 김장독 묻을 구덩이를 파는 일, 집을 팔고 사는 일, 심지어 도배까지도 아버지 힘을 빌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선비로 생각하고 모든 일은 자기 몫으로 생각하며 살아 온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며칠간의 병환을 이기지 못해 운명의 시점에서 집으로 오셨다. 말씀도 잃으신 채였다. 큰 병원으로 가신다고 대구에 가신지 사흘 만에 집으로 오셨으니.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나도 느꼈고 엄마도 느꼈고 아마 아버지께서도 아시는 듯했다. 차마 어린 우리를 떨칠 수 없어 가시지 못하고 무언가 말씀하시려고 허공에 손을 저으며 너무도 괴로워 하셨다. 우리들에게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을까? 그러나 애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마디 말씀도 못하신 채 시선을 한 곳에서 멈추셨다. 못하신 말씀이 있어선 지, 남아 있는 우리들이 못미더우신 지 눈을 감지 못하셨다.
“다 걱정 말아요. 내가 다 해 낼 테니 안심하고 좋은데 가요. 가실 때 아이들한데 있는 액운이나 다 가져가고… 고생은 내만 하게 하소.”
떠나시는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아버지의 눈을 쓸어 내리면서 하는 어머니의 말씀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떨고 있는 작은 가슴들을 안심시켰다. 이제 믿을 것은 엄마뿐이라는 생각, 엄마는 얼마든지 믿어도 될 능력이 있다는 생각, 그래도 아직 우리는 든든한 엄마가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의 말대로 우리는 아버지만 잃었을 뿐, 든든한 엄마가 있어 앞으로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철없는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를 한없이 의지했다. 우리에게 어머니는 기대어도기대어도 넘어지지 않는 커다란 기둥이었으며 한없이 부대껴도 부대껴도 닳지 않는 바위였다.
“내 기도 주제는 우리 아이들한테 있을 고난을 다 내게 달라고 하는 거다. 너희들은 나 같은 고생은 없을 거다. 안심하고 살면 된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 마음을 쓰는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실제 어려운 일이 잘 해결될 거라 믿었으며 내 앞에 든든하게 쳐지는 방파제를 보았고 한없이 따뜻하고 푸근함을 느꼈다. 그래서 어머니는 영원히 약해지지 않을 것이며, 늙지 않을 것이며, 궁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철없는 이십대를 보냈는데 어느 날 발견한 어머니의 흰머리는 너무도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목사님 몫을 한 쪽으로 챙겨두고 맛보라고 입에 넣어 준 김밥 덩어리를 입에 물고 나도 몰래 고개를 돌려버렸던 그 날, 나는 아픔도 진하기가 있고 무게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가늘게 말아낸 김밥을 세 개 모아서 다시 한 겹 더 말아 가장자리를 한 번 꼭꼭 눌러서 물이든 꽃잎처럼 빚어낸 예쁜 김밥이건만 목에 걸린 아픔 때문에 맛을 알 수 없었다. 우리 엄마도 별 수 없다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 우리 엄마도 아플 수 있다는 불안한 미래가 나를 견딜 수 없도록 아프게 했다. 어찌 흰머리가 보이는 것뿐이랴. 어머니의 흰머리는 우리에게 한없는 믿음을 주던 어머니의 젊음이 가고 있다는 것과 병약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 검은머리에 흰머리가 저리 나도록 나는 왜 어머니의 세월에 관심을 갖지 못했나하는 자책이 들었다.
어머니의 세월이 저리 되도록 나는 맏딸로서 무엇을 했나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밤을 하얗게 새도록 뒤척이며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 나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것은 무거운 짐과 고생을 당신에게만 달라던 간곡한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련만 제 잘난 덕인 줄 알던 철없는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는 것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날 말주변머리가 없었던 나는 어머니에게 흰머리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오며 ‘말이 앞서면 뭘 하나. 대신 앞으로는 어머니에게 기대지만 말고 무언가 잘 해드려야지' 하면서 어정쩡한 나를 달랬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수많은 세월이 지나갔다. 어머니는 내가 아픔으로 쳐다보던 그 흰머리에 염색을 하는 세월을 보내고 몇 년 전에는 틀니까지 하셨건만,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그 이후로도 여전히 어머니의 세월을 어루만져 드리지를 못했다. 아무래도 미련하고 변변치 못한 이 못난 딸은 훗날 또 오늘과 같은 후회로 잠 못 드는 밤을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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