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영역과 민본주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9간들이 다스리던 지역은 1만호에 7만 5천여명의 백성이 살고 있었다고 하며, 국토의 경계는 동은 황산강(낙동강)이요, 서남은 창해라 했으니, 큰 바다에 접해 있었으며,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가야산을 경계로 삼고, 남은 나라의 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토기양식이나 묘제 등을 통하여 가야의 영역을 비정하고 있다. 특히 낙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토기를 가야 토기로 보아 고령, 합천, 함안, 진주, 웅천, 고성 등지를 가야 토기 문화권으로 하여 가야의 영역으로 보고, 안동, 의성, 칠곡, 대구, 경산, 현풍, 창녕 등지도 가야 토기 문화권으로 하여 역시 가야 영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학 교수는 고고학 자료와 문헌 사료를 종합하여 의성, 경산, 울주 등은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가야 문화권에 속하나 정치적으로 일찍 신라에 병합된 듯 하므로, 가야에서 제외시켜 가야의 동쪽 경계를 조령에서 낙동강 입구까지인 문경, 상주, 선산, 금릉, 대구, 밀양, 양산, 동래까지로 보고 서쪽 경계는 소백산맥과 섬진강을 경계로 하는 거창, 함양, 산청, 진주, 하동까지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 김태식 교수는 이와 같은 견해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들이 의도적으로 가야의 영역을 지나치게 넓게 보려는 기존의 잘못된 연구 경향에 의한 것이라며 가야의 경계를 가락국이 맹주였던 김해, 함안, 밀양, 동래 등 낙동강 하류 지역과 대가야가 중심이 된 고령, 개령(김천) 등 낙동강 중상류 지역 그리고 고성, 산청, 진주 등 서부 경남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 등이 모두 이주민들의 정복에 의해 나라가 세워진 것과는 달리 가락국과 신라는 이미 먼저 거주하고 있던 토착세력(가락국은 9간과 신라의 6촌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는 민주 방식으로 국가가 성립됐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특히, 김수로왕은 왕위에 오른 후 고대사회에서는 드물게 백성들을 위한 민본정치를 표방하여 창업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수로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흙담과 이엉을 사용하여 임시로 대궐을 짓고 질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정사(政事)를 폈다고 가락국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하들이 대왕께 큰 대궐을 지어 왕으로서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간하자 대왕께서는 “백성들의 생활이 아직 넉넉하지 못한데 내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대궐부터 지어서야 되겠느냐? 대궐은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진 연후에지어도 늦지 않다”면서 3년 동안이나 토담과 이엉으로 된 가궁(假宮)에서 정사를 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은 관청 무기고, 창고 등을 지을 때나 성곽을 쌓을 때도 반드시 농번기를 피하여 농한기를 이용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으며, 농한기에 시작한 공사라 할지라도 농번기가 되면 중단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바탕한 선정으로 가락국은 개국이래 평온한 가운데 찬란한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전 : 1995년 김시우저 가락국 천오백년 잠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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