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鄒魯地響과 文不如 長城의 마을 阿谷理 아치실!
▣ 아치실 마을 안내 ▣
■ 마을의 유래
이곳 아곡리 아치실 마을은 전남 장성읍에서 4km여 남짓 떨어져 있는 마을로 행정구역상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이다. 원래 장성군 서이면 지역으로 정조 13년인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보면 北門(북문)ㆍ小谷(아치실)ㆍ河南(하남) 마을명이 나오는데 모두 아곡리 아치실 마을이다. 현재 아곡리 아치실 마을은 세부적으로는 북문, 아치실, 하남, 상잘(상치동)로 구성되어 있으며, 1914년 아곡리 2구 마을로 편입된 사호(沙湖) 마을은 대판이(석교리), 거르매(거산리), 싸오랭이, 한새골(한사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불러지게 된 마을 명칭 연유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아곡(阿谷)은 낮은 산이 여러 개 있는 작은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북문은 조선조 명종이 박수량 선생에게 하사한 청백당 북문쪽에 위치하고 있던 곳이라 하여 불러졌으며, 아치실(小谷)은 수답에 청둥오리가 많이 날아온다 하여, 하남(河南)은 약 300년전 가씨 형제가 과거에 동시 급제하는 연벽진사(延劈進士)를 하였는데 중국 송·명시대 하남성(河南城)에서 도학을 확립시킨 정호[程顥. 호 명도(明度)], 정이[程頤. 호 이천(伊川)] 형제와 비교하여 중국 하남성 명을 따서 하남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상잘은 상치동(上峙洞 ) 또는 변음된 것으로 추정된다.
■ 지형·지세
아곡리 아치실 지형·지세에 대해 살펴보면, 크게는 노령산맥의 주령인 취영산의 남쪽 지맥인 향로봉이 매봉산으로 이어져 축암 고랑을 이루고, 옥녀봉의 능선이 통안 고랑을 이루는데 이와 같은 큰 두 고랑이 만나는 지역으로, 작게는 마을 가까이 오른쪽으로 보룡산이, 왼쪽으로는 노적봉산이, 뒤로는 홍길동 생가터산이 마을을 감싸 않고 있으며, 홍길동 생가터산에서 내려오는 실개천물이 마을을 가로 질러 흐르고 있다. 마을 입구인 남쪽 방향만 트여 있는 형세로써,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양팔로 감싸 않고 있는 형세를 하고 있어 풍수지리학상 포근하고 아늑한 지형으로 뛰어난 학자 및 의인이 많이 배출될 지역이라고 한다.
■ 면 적
■ 마을형성 과정 및 발전
어떤 성씨가 어떻게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잘 알 수는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마을형성 초기 배씨, 홍씨 등이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고, 다만 주변 마을인 맥동, 매실, 관동, 필암 등의 마을 형성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초기 왕자의 난등 정변을 피해 입향한 울산김씨, 태인박씨와 기묘사화 등 사화와 관련되어 입향한 행주기씨, 경주이씨 등이 기록에 전하고 있는바, 이곳도 이와 같은 시기에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할 따름이다.
기록에 나타난 자료에 의하면 이곳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1430년 전후 회헌공 이견의 선생의 인제이씨 집안이 강원도 인제에서 이곳에 입성한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455년경 단종 절신 돈재 박연생 선생이 세조의 왕위 탈취 사건 때 고향 태인에서 아치실로 피난하면서 입성한 밀성(또는 태인)박씨가, 1550년경에는 금강 기효간 선생이 사화를 피하여 장성으로 입성하여 밀성박씨 박수공 참봉공(박수량 선생 동생) 집안에 장가를 들면서 행주기씨가, 이후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들인 울산김씨가 입성 하면서 거대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고, 창녕조씨, 광산김씨, 나주임씨, 영월엄씨, 청송심씨, 장흥유씨, 제주양씨 등이 계속하여 입성하면서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아치실 마을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북문은 인제이씨가 아치실에서 터를 옮겨 살게 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2호가 살고 있으며, 하남은 밀성박씨가 처음 터를 잡은 후 15호까지 살았는데 현재는 9호가 살고 있고, 이후 행주기씨가 10여 호가 살았는데 현재는 하남에 1호 아치실에 4호가 살고 있으며, 아치실은 울산김씨가 입성하여 12여호가 살았는데 현재는 북문에 1호, 아치실에 5호, 하남에 1호, 상잘에 1호가 살고 있으며, 기타 성씨들이 살고 있다.
특히 상잘(상치동) 뒷산에는 울산김씨 중파 시조 사정공 김달원의 묘가 설치되어 있는바, 후손으로는 고손(高孫) 되는 문정공((文正公) 하서 김인후 선생,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선생, 조선후기 성리학자 좌승지 각제 김기하 선생,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 2대 부대통령·고려대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 삼양사 창업자 수당 김연수, 국무총리 남재 김상협,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김상하, 6공화국 경제수석을 지낸 전 서강대 교수 김종인 등이 있는바, 호남(湖南) 제일의 명문가로 잘 알려진 울산김씨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들에게는 옆 마을 맥호리 맥동 마을과 함께 이곳이 본향이 되며 뿌리가 된다할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 6대 성리학자 중 한분인 노사 기정진 선생도 이곳이 고향이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사 기정진 선생이 1798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사리(현재명 : 복흥면 동산리 구수동 마을)에서 출생은 하지만, 이는 당시 아버지 기재우(奇在祐) 공이 하남에 거주하면서 후손들의 발복을 위한 명당을 찾아 순창 복흥 동산리에 임시 거처하여 선생이 태어나셨고, 어린 시절부터 이곳 하남에 왕래가 잦았으며 선대 및 친족들 대부분이 하남에 거주하고 있었고, 1815년 18세에 양친을 여의자 아버지 유언에 따라 전북 순창에서 이곳 아치실 하남 마을로 이사하여 일생을 마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치실 터는 당대의 명문가 집안 들인 울산김씨, 행주기씨, 밀성(태인)박씨 등이 서로간의 혼인 등의 연을 맺으면서 마을의 세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왔으며【하서 김인후 선생 외종조 박종원 공(박수량 선생 부), 하서 김인후 선생 큰 손부(孫婦)로 정유재란 정려(旌閭) 태인박씨와 작은 손부인 정유재란 정려(旌閭) 행주기씨(고봉 기대승 선생 딸), 금강 기효간 선생 부인 밀성박씨, 노사 기정진 선생 부인 울산김씨 등, 하서 김인후 선생 아곡 박수량 선생 백비 옆에 설치되어 있는 묘비명 씀】, 마을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아치실 마을’ 이라는 호칭 하나로 인근 고을에 대해 떵떵 거리며 잘 살았던 명촌 이었던 관계로 인근 고을 명문가 집안 치고 아치실 일대와 인연을 맺지 않은 집안이 없었을 정도이다(담양의 양산보 집안-김인후 집안, 임곡 고봉 기대승 집안-김인후 집안, 창평 고경명 집안-김인후 집안, 해남 유성춘 집안-박수량 집안, 해남 미암 유희춘 집안-김인후 집안, 태인 일재 이항집안-김인후 집안 등).
☞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가 살던 곳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사표로 삼는 일
여자들도 이곳 아치실 명문가 집안의 규수라는 자긍심과 명예를 지니고 환경이 다른 시집 생활에 적응을 잘 하였으며,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명망가 집안으로 시집간 규수들의 경우 근검 절약으로 시댁을 부흥시켜 '아치실에서 시집온 규수는 무조건 시댁을 부흥 시킨다'는 설을 났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이유 등으로 타향 시댁에서도 양반 대우를 받으며 살았었다.
■ 추로지향(鄒魯地響)과 문불여 장성(文不如 長城)의 마을
예로부터 대학자나 훌룡한 인물이 태어난 고장으로 예의 바르고 학식이 높은 고장을 일러 추로지향(鄒魯地響)이라고 한다. 이는 맹자가 태어난 추(鄒)나라와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의 이름을 합하여 부른데서 연유하는데, 유교를 숭상(崇尙)하는 나라에서는 최고의 명예이며 찬사이다. 이러한 뜻에서 이곳 아치실 일대는 성현명인(聖賢名人)이 줄지어 태어나시고 학문이 왕성하고 도리(道理)를 아는 반듯한 고장인 관계로 우리고장 호남(湖南)의 추로지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며, 문불여 장성의 자랑스런 터 자리이다.
이와 같이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 청백리의 대명사인 조선 명종조 정혜공 박수량 선생이 태어나신 곳으로, 선생의 청백함이 지극함을 알고 명종이 99칸 집을 지어 ‘청백당’ 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려주신 곳이며, 마을에서 500m 더 가면 윗마을 금호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선생의 백비(白碑)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유한 인물로 하늘이 도와 우리나라에 내려 주신 분으로 평생을 학문과 의리와 덕행만을 행 하시며 세상을 깨끗이 살다 가신 동방의 대학자로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신 하서 김인후 선생이 마을 오른쪽 산너머 맥호리 맥동 마을에서 태어나셨으며, 하서 김인후 선생의 수제자로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쓰며 부모에 대한 효행을 몸소 실천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남문창의맹주 오천 김경수 선생과 함께 의병 활동을 주도한 호남의 은덕군자 금강 기효간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고, 조선 후기 6대 성리학자 이자 ‘장안만목이 불여장성일목야(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也)’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노사 기정진 선생의 학덕이 서린 곳이며,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500여명의 의병을 모아 마을 뒷산 수련산에 모여 의사(義士) 김익중 선생과 함께 하늘에 제를 지내고 의병활동을 시작한 호남 유림 의병의 뿌리인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대장 기삼연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선비사상과 충효사상은 근대로 들어와서는 후학 양성으로 이어지는바, 1910년경 박내성 선생이 하남 청백당 터에 서당을 세워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1930년경에는 국가유공자 만성 김극수선생이 자신의 토지 1,000여평을 학교 건립에 따른 부지로 무상 기부하여 학교가 세워지게 되는데 이 학교가 사립아곡보통학교이다. 이후 이 학교는 1934년경 월평공립보통학교 부설아곡간이학교로 통합 되어 운영되다가 공립아곡보통학교로 승격되어 1949년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하지만, 6·25동란 때 불에 타 소실되고 역사는 황룡북국민학교(현. 황룡초등학교)로 이어져 갔으며, 현재는 홍길동생가터 공원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곳 아치실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역사적으로 학자, 절의, 청백리, 충의, 교육자 등을 많이 배출하였는바, 대표적인 인물로는 단종 절신 돈재공 박연생 선생, 청백리의 표상 아곡 박수량 선생, 하서 김인후 선생 문인으로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쓰고 효행을 몸소 실천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남문창의맹주 오천 김경수 선생과 함께 의병 활동을 주도한 호남의 은덕군자 금강 기효간 선생, 선조와 광해군 때에 국풍(國風)으로 활약하며 천문에도 밝아 임진왜란을 예언한 '박주부(朴主簿)'로 더 잘 알려진 백우당 박상의 선생, 송시열 선생의 문인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성리학과 경전에 정통한 송암 기정익 선생, 고종에게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로 불리우며 한말 호남대의소장(湖南大義所將)으로 의병활동을 한 송사 기우만 선생, 한말 호남 의병의 뿌리가 되는 호남 유림 의병의 연합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를 창설하여 항전한 성재 기삼연 선생,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에 힘쓰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중 한 명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 처단을 시도 하였던 기산도 선생, 국가유공자로 아곡간이학교를 건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쓴 만성 김극수 선생 등이 있다.
■ 마을의 현재와 미래
해방 이후 마을 전체적으로는 약 120여호 300여명이 살았으나, 1947년경부터 1950년을 전후하여 좌익들에 의한 폭동과 지서, 관공서등의 방화 및 우익 인사들에 대한 테러 등을 통해 남한을 적화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공포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으며,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과 빨치산 패잔병들이 장성 갈재(노령산맥)를 배경으로 집결하여 마지막 저항함에 따라 국군 및 경찰에 의한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장성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인명 피해가 컸는바, 장성군 인명 피해는 약 25,000여명에 이르며, 이런 와중에 이곳 아치실도 지방 토착 좌익 및 좌익세력에 가담한 마을 주민 25여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사살되고 일부는 북으로 도망쳤다. 학교도 좌익들의 은신처로 변해 버리고, 마을 가옥도 좌익들이 소실시키며 저항하는 과정에서 학교 및 2호를 제외한 전 가옥이 소실되기도 하지만, 마을 주민 및 후손들은 시대의 아픔이자 민족사의 비극을 서로 감싸 않으며 마을을 유지하여 현재는 40여 세대 7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대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의적 홍길동이 실제 태어난 곳이라 하여 1998년부터 관광 목적의 홍길동 생가터 개발이 시작되면서, 장성군에서 해당 토지를 수용함에 따라 마을 주민 및 후손들이 부득이 누대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떠나 점차 폐촌화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훌룡한 조상들의 얼과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의 전통 및 역사가 파헤쳐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 후손 및 마을 주민들은 이러한 행위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도 가져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회에 마을이 다시 정비되고 옛 조상들의 정신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어 아치실의 옛 명성을 되찾아 새롭게 태어나는 '아치실 마을'로 탈바꿈 하기를 기대해 본다.
훌륭한 학자와 청백리, 호국 의인, 교육자 등을 유독 많이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 아치실!
우리 마을 주민 및 후손들은 이러한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비록 주어진 환경 때문에 부득이 고향을 떠나 생활할 수밖에 없더라도, 이곳 아치실이 우리들의 뿌리이고 근본이며, 본향임을 항상 잃지 않고 살아 갈 것이며, 고향 발전에 기여하고 조상들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사상과 정신을 받들고 기리어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 마을을 빛낸 인물
이견의 (1400(?)- ? 보문각 직제학. 전라관찰사)
박연생 (1405-1470 단종 절신, 충무시위사 대호군, 수산사 배향)
박문아 (1420-1480 어모장군 호분위 대호군)
박현손 (1445-1505 선략장군)
박종원 (1470-1527 동지의금부사)
박수량 (1491-1554 청백리, 의정부 좌참찬, 모암서원.수산사 배향)
박 전 (1514-1558 호조정랑)
박사순 (1515-1583 어모장군)
박사우 (1520-1579 하서 김인후 문인, 진안현감)
기효간 (1530-1593 하서 김인후 문인, 남문창의, 추산서원 배향)
박상의 (1538-1621 사재감 주부, 절충장군, 수산사 배향)
박상지 (1543-1587 하서 김인후 및 미암 유희춘 문인, 예빈시 별검)
박상근 (1543-1621 하서 김인후 문인, 거창현감)
기계헌 (155?-161? 용양위 부사과)
기정익 (1627-1670 우암 송시열 문인, 추산서원 배향)
이정필 (1672-1735 좌승지, 부사용)
기정진 (1798-1879 성리학 6대가, 고산서원 배향)
기양연 (1827-1896 노사 기정진 문인, 홍문관 부교리)
기우만 (1846-1916 호남대의소장, 건국훈장 독립장, 고산서원 배향)
기삼연 (1851-1908 노사 기정진 문인,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건국훈장 독립장)
이기창 (1873-1907 호남창의회맹소 의병)
기산도 (1878-1926 항일의사, 건국훈장 독립장)
박학구 (1896-1971 효자)
김극수 (1903-1948 아곡간이학교 건립, 황룡면 초대면장, 국가유공자)
김요한 (1917-1996 한국은행)
김경수 (1920-1994 대법원 사무국장)
김상형 (1941-2007 전남대 교수)
☞ 선정기준 : 행정기관 5급 사무관 이상에 상당하는 관직(읍·면장, 판·검사, 소령, 총경, 소방정, 교장, 장학사, 박사, 조교수, 좌랑, 현감 등)을 역임하시거나 학문과 인품, 덕망을 갖추어 후학들의 사표(師表) 또는 추존(追尊)할 정도의 삶을 사시다가 타계하신 조상님
■ 유물·유적
- 인제이씨 중시조 회헌공 이견의지묘
- 울산김씨 중파시조 사정공 김달원지묘
- 명종이 박수량 선생에게 하사한 청백당 터(99칸) 및 부조묘(不廟墓)
- 박수량 선생 유허비(遺墟비) 및 하마석(下馬石)
- 밀양박씨 제실
- 행주기씨 제실
- 아곡간이학교 터
- 주조장 터
- 길동샘
- 홍길동 생가터
- 홍길동 복원 생가 등이 있다.
☞ 유허비(遺墟비) :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선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하마석(下馬石) :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 발돋움하기 위하여 대문 앞에 놓은 큰 돌
■ 기 타
- 마을 회관 1동
- 마을 공동창고 1동
- 실 개천물이 마을을 가로 질러 흐르고 있음
- 물이 청정하여 상잘(상치동)에는 주조장이 운영되기도 하였음.(황룡 주조장 전신)
■ 음식점 안내
- 산골짜기 : 꿩 요리 전문 식당 (061)393-0955
■ 찾아오시는 길
※ 안내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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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장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 감사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