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삼대 종교의 각축장 예루살렘
임 태 수 박사
(호서대명예교수/제2종교개혁연구소 소장)
1. 사막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1995년 7월 27일 아침 11시 15분에 시나이산 밑에 있는 Morgen Land 산장을 출발해서 이집트와 이스라엘 국경도시 타바(Taba)로 향했다. 시나이산에서 북동쪽으로 한 참 내려가다가 시나이 일주도로를 만나 오른 쪽에 아카바 만의 푸른 물을 끼고 북상한다. 아카바의 물빛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띠고 있다. 마치 푸른 잉크를 풀어놓은 것 같다. 전혀 오염되지 않고 깨끗해서 그렇단다.
드디어 이스라엘의 첫 도시 엘랏(Eilat)에 도착했다. 엘랏은 4개국의 접경지역이다.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고 조금 떨어져서 사우디 아라비아가 만나는 지점이다. 고고학자 Glueck은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Tell el Kheleifeh가 엘랏이며 동시에 에시온게벨이라고 주장한다. 에시온게벨이 여호사밧 때 엘랏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명기 2:8; 열왕기상 9:26에서는 엘랏과 에시온게벨이 함께 나온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두 장소는 서로 가까이 이웃한 장소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지금 에시온게벨이란 도시는 없고 엘랏이란 이름만 남아 아름다운 큰 도시로 건설되어 있다. 엘랏은 현재 항구요 공항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경선 하나 넘으니 천지 개벽이나 된 것처럼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웃하고 있는 이집트와 모든 자연 조건이 같은 데도, 이곳 엘랏은 잘 개발되어 거리에는 잔디와 가로수가 푸르르고 차들도 깨끗하고 거리도 잘 정비되어 있다. 엘랏의 에도밋(Edomit)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멜론, 바나나, 파인애플, 오렌지, 사과, 수박 등 갖가지 과일과 우유와 꿀 등이 식당 한 가운데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 이러한 풍성한 식사는 예루살렘과 티베리아스 등 다른 호텔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님들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내 놓은 것이다. 이 음식들을 보자마자 내 머리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이 연상되었다. 사막 한 가운데서 맛보는 풍성한 음식이었기에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유대 광야나 네게브 지역은 사막, 혹은 반사막지역이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과는 거리가 먼 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오늘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당시에는 황무지였던 이 사막지역에 오늘날 젖과 꿀이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사막지역에 젖과 꿀이 흘러넘치는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 물과 지하수를 끌어들여 개발해서 바나나, 대추야자, 올리브 등 갖가지 과일과 농산물을 가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척박한 사막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천지개벽을 시킨 것이다. 물론 샤론 평야, 이스르엘 평야, 갈릴리 평야 등은 성경시대부터 기름진 평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보고 감탄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바로 이들 기름진 평원들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는 상관없는 사막 지역에까지 그 약속을 확대하여 성취된 오늘의 모습이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런 변화된 현실을 보면서 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은 이미 자연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뿐만 아니라 황무지까지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라는 의무까지를 포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2. 복음의 횃불의 진원지 마가의 다락방
우리는 엘랏을 출발하여 아브라함이 살았던 브엘세바 유적지를 살펴보고 사해에 들어가 잠깐 몸이 물에 뜨는 실험을 해본 후, 주후 70년 유대전쟁 때 유대인들이 로마 군인들과 마지막 접전을 벌였던 마사다를 구경하고 쿰란 사본으로 유명한 쿰란 공동체 유적지를 살펴본 후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해저 400m의 사해에서 해발 800m의 높이에 있는 예루살렘을 올려다보고 가는 길이다. 수많은 영욕의 세월을 보낸 예루살렘! 예수를 못 박은 예루살렘!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마음에 새기며 환희의 마음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우리는 구 예루살렘 서쪽 언덕(Western Hill)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향했다. 이 장소가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만찬장소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으나 전통적으로는 이 곳을 최후만찬이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인정해 오고 있다. 또 사람들은 이 장소를 예수승천 후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성령을 받은 장소와도 일치시키고 있다. 374-377년까지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에 의하면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가 주후 135년에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 다락방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현재 건물은 12세기에 십자군들이 최후만찬장소로 전해져 내려온 곳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로서 후에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14세기에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다시 지은 것이다. 우리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건물 중앙에 상당히 큰 돌기둥 셋이 있고 바닥은 돌로 되어 있는 고틱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홀이었다. 방의 크기는 약 70-80평 정도 되어 보였다.
건물 밖이나 안, 그 어디에도 최후만찬장소라는 표시는 보이지 않았다. 홀은 비어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제단도 없었다. 그러나 이 자리가 바로 예수의 피로 인류 구원의 새 계약이 맺어진 역사적인 장소요, 예수 처형 후 낙심하여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용기를 얻어 예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기 시작한, 기독교 복음의 횃불이 최초로 타오른 진원지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빈방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홀이 텅 비어 있으나 여기서 맺어진 새 계약은 지난 200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새로이 갱신되고 있으며, 여기서 타오르기 시작한 복음의 불길은 지금도 전 세계 18억의 기독교인들 가슴에서 불타고 있다. 그때 12제자, 120명의 소수의 무리에게 일어난 그 작은 불씨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커다란 불길로 번질 줄이야 그 당시 그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도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는 단독자로 그 위대한 일을 해냈던 것이다. 방은 비록 비어 있지만 그 빈방에서 우리는 18억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환희의 함성과 성령의 불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 현장에서 바라본 예수는 내가 생각해 왔던 예수보다는 훨씬 더 용기 있고 위대한 분이었다.
3.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 성묘교회
우리는 욥바문을 지나 구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다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바위로 이루어진 골고다가 아니라 하나의 낡은 교회건물이었다. 이 교회가 성묘교회(Holy Sepulchre)다. 성경에 의하면 골고다는 본래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다(히 13:11) . 그러나 헤롯 아그립바 I세(주후 41-44)가 골고다를 성 안으로 끌어들여 북쪽 성벽을 건축하였고, 이 성벽이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옷토만 터키의 술레이만 대제(Suleiman I)가 1537-41년에 그 성벽 터 위에 다시 성벽을 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골고다의 바위를 깎아 그 위에 지은 성묘교회가 예루살렘 성벽 안에 들어 와 있다.
우리는 성묘교회 안으로 들어가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에 도달했다. 커다란 십자가상이 걸려 있고 그 밑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현재 성묘교회 외부는 교회 건물이 세워져 있으나 이 교회가 골고다 바위산을 깎아 지었기 때문에 거대한 바위가 건물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기 위하여 그 바위를 만져 보았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살과 피를 주신 주님께 나는 지금까지 과연 무엇을 드렸는가 하는 자책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당장이라도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때 마침 옆을 보니 제단을 지키고 있는 수녀가 초를 팔고 있어서 초 한 자루를 사서 주님 십자가상 앞에 있는 제단에 불을 밝혔다.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앞으로 좀 더 철저히 주님을 위해 헌신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제단을 물러 나왔다.
4. 장사꾼의 거리가 된 비아 돌로로사
우리는 성묘교회를 나와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로 들어섰다. 비아 돌로로사란 라틴어로 고통의 길이란 뜻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걸어가신 길이다. 비아 돌로로사는 14처가 있는데 우리는 예수의 옷을 벗긴 곳(제 10처), 십자가에 못박은 곳(제11처), 십자가를 세운 곳(제12처), 십자가에서 내려놓은 곳(제13처), 무덤에 묻힌 곳(제14처)이 있는 성묘교회에서 나와 예수님이 오신 길을 역순으로 따라 걸어갔다. 나머지 9처는 예수님이 재판 받으시던 빌라도의 법정(제1처), 십자가를 진 곳(제2처), 처음으로 쓰러진 곳(제3처),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제4처),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진 곳(제5처), 여인 베로니카가 예수께 손수건을 건네준 곳(제6처), 두 번째 쓰러진 곳(제7처), 여인들에게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신 곳(제8처), 세 번째 쓰러지신 곳(제9처) 등이다. 우리는 나머지 아홉 지점을 모두 다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하고 급히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이 길은 예수 당시에는 성문 밖이요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었으니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랍 상인들이 좁은 골목을 빼곡이 메우고 있는 번잡한 장사꾼들의 거리가 되어 있다. 기독교 순례객들이 그들의 주고객임이 분명하다. 예수는 이 거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했는데, 그 고난의 열매는 이슬람교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여튼 그들은 예수 덕분에 먹고사는 것이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지만 예수 덕택에 먹고산다는 것은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는 참으로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모든 인류의 구세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유야 어떻든 그들은 수천 년을 살아온 그들의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긴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에서 우리를 줄곧 싣고 다닌 버스의 운전사는 아딥(Adiip)이라는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 조상 대대로 그 땅에 살아오고 있단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도자인 아라파트도 지지하지 않는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점령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완전히 철수하고 그 자리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것이란다. 완전 독립이 아닌 자치형태의 정부를 지향하는 아라파트의 정책이 못마땅하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자기 땅을 남에게 빼앗기고 마치 남의 땅에 불법으로 침입해 들어 온 사람 취급을 받는 그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떠나온 지 반년만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과 평의회 의원들을 뽑는 선거가 1996년 1월 20일에 실시되었는데, 아딥은 과연 누구를 찍었는지 궁금하다.
내가 돌아 본 이스라엘 땅은 인구밀도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보다 훨씬 낮은 것 같았다. 빈땅이 많았다. 물론 사막지대/황야가 많기는 했지만!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이 추진하고 있는 개발을 계속한다면 그런 땅들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민족이 살 수 있는 땅은 충분할 것 같았다. 적당한 선에서 서로 양보하고 평화롭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돌아와 매일 그 두 민족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다. 이제 두 민족은 평화의 길로 이미 들어서서 걸어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싸우지 말고 그 땅에서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5. 예수가 거닐었던 고고학 정원
우리는 통곡의 벽을 물러 나와 고고학 정원(Archaological Garden)으로 들어섰다. 고고학 정원은 황금의 돔이 있는 성전산 남쪽 성벽 밑에 있다. 지금 한창 발굴중이다. 우리는 돌로 막아버린 훌다(Huldah) 성문 앞 계단에 앉았다. 계단의 돌들은 새 것도 있고 오래된 것도 있었다. 오래된 돌들은 예수 당시의 돌들이란다. 계단의 폭은 20여m에 층계 수는 대략 15개정도 되어 보였다. 예수가 감람산에서 넘어와 이 계단을 밟고 성전으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이다. 나는 낡아서 마모된 돌계단에 일부러 앉아 보았다. 2000년 전에 예수가 밟았을 지도 모르는 바로 그 계단에 앉아보니 정말로 감회가 깊었다.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몰았다. 장사꾼들은 성전 구내에서 뿐만 아니라 이 계단 근방에서도 장사를 했을 것이다. 성전 경내를 재구성한 그림에 보면 지금 통곡의 벽이 있는 쪽으로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다. 이 집들이 제사용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의 집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앉은 계단 밑으로 정결의식을 위한 목욕통들(미크베)이 많이 발굴되어 있었다. 제사드리러 온 사람들은 여기에서 몸을 씻었다. 이 근방은 당시에 제사드릴 짐승들의 울음소리, 비둘기 소리, 그리고 짐승들의 피비린내와 제물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제사를 드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종교행위 하나하나를 진행할 때마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이 기회를 제사장이나 권력자들이 십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한 것이다. 이것을 본 예수가 분노하여 그들을 채찍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예수의 외로운 싸움이 200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내 가슴에까지 전달되어 왔다. 2000년 전 예수 당시의 성전청결 상황을 상상하며 나오는데 정원에서 일하는 이슬람교인이 멕카를 향하여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그 광경을 보자 나의 생각은 20세기 후반의 오늘의 예루살렘의 현실로 되돌아 왔다. 예수가 태어나고 활동한 나라, 그러나 유대교인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나라, 그리고 그 안에서 나라를 잃고 유대인들에게서 품팔이를 하고 있는 이슬람교인들, 이것이 오늘 이스라엘의 현주소인 것이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삼대종교의 각축장이 되어 있다. 예루살렘의 안식일도 각각 가르다. 금요일은 이슬람교의 안식일, 토요일은 유대교의 안식일, 그리고 일요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다. 종교간에, 민족간에 갈등이 첨예화 된 예루살렘, 예루살렘에 참 안식이 오기를 기원하며 다음 순례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